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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3:17-15:21(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by Mark Yang   08/14/2019  

Question


1994년초 출애굽기 제 5 강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말씀: 출애굽기 13:17-15:21 요절: 출애굽기 14:21, 22

Ⅰ.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13:17-14:31)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까운 길보다 왜 홍해의 광야 길로 인도하셨습니까(17,18)? 모세가 왜 요셉의 해골을 취했습니까(19)?
2. 이스라엘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홍해에 이르는 여정을 지도에 표시해 보시오(20, 14:1,2) 하나님께서 그들의 길을 어떻게 인도하고 계셨습니까(21,22)? 인도자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시오.
3.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피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까(1-9)? 왜 바로의 마음이 변했습니까? 이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4. 애굽 군대들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이 어떠했습니까(10)? 그들은 모세를 어떻게 원망했습니까(11,12)? 그들의 생명에 대한 애착과 불신에 대해 말해 보시오.
5. 모세는 백성들을 어떻게 안정시켰습니까(13, 14)? 여기에 나타난 모세의 믿음이 어떠합니까?
6. 곤경에 처한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길을 내셨습니까(15-21)? 이렇게 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17, 18)?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7. 이스라엘은 어떻게 홍해를 건넜습니까(22)? 그러나 애굽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23-29)?(히11: 29) 당신 앞에 놓여 있는 홍해가 무엇입니까? 이 홍해를 어떻게 건널 수 있습니까?
8. 홍해를 건넌 후 이스라엘은 무엇을 보게 되었습니까(30)(대조14:10)? 결국 이스라엘은 이 사건을 통해 어떤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까(31)?

Ⅱ. 모세의 찬송시(15:1-21)
1. 모세는 이 사건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체험하게 되었습니까(1,2)?
2. 모세는 애굽 사람들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6,7,9)? 그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모세가 배운 바가 무엇입니까(3-12)?
3. 홍해 사건을 통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어떤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까(13-18)?
4. 미리암과 이스라엘 여인들의 기쁨이 어떠했습니까(19-21)?


Message


출애굽기 제 5 강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말씀: 출애굽기 13:17-15:21
요절: 출애굽기 14: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 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
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사랑으로 장엄한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바로의 세력권 내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끈질기게 추격하는 바로를 완전히 진멸하고자 하셨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쓰실 만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연단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그들을 홍해의 광야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인도자 하나님과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합니다.

Ⅰ. 인도자 하나님(13:17-22)

13:17,18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한 후 하나님은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시고 홍해의 광야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블레셋 지방으로 가면 약 4-5일이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름길보다 멀고 험한 홍해의 광야 길로 완전히 돌려서 인도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연약함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염려하셨습니다. 그들은 노예 백성으로서 전혀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내면이 연약했습니다. 또 그들은 막노동만 했기 때문에 전쟁에 익숙치 않았습니다. 반면 블레셋 사람은 호전적이어서 용감하고 강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싸워보기도 전에 겁을 집어먹고 애굽으로 돌아가기 쉬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이 전쟁을 보지 않도록 안전한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연약함을 잘 아시고 단계적으로 키우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섬세한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연약함을 잘 이해하십니다(시103:13,14).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십니다(고전 10:13).

둘째로, 광야에서 그들을 훈련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홍해의 광야 길로 인도하신 데에는 좀 더 크신 뜻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실 때 너희가 호렙산에서 나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3:12). 이를 볼 때 처음부터 이들을 광야로 인도하사 훈련코자 하시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것은 그들이 젖과 꿀을 먹으며 잘 먹고 잘 살도록 함이 아니라 제사장 나라로서 만민 구속역사에 귀히 쓰임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연단이 필요함을 아시고 그들을 광야 훈련소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셋째로, 바로의 군대를 홍해 바다에 수장함으로서 영광을 얻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가 다시 마음을 강퍅케 하여 뒤쫓아 올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홍해에 수장함으로서 이를 통해 그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인도하신 데에는 큰 뜻이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당시 그들이 생각할 때는 이해하기 힘들고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빨리 가서 안정된 생활을 하며 젖과 꿀을 마음껏 먹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빨리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쓰실 만한 자로 내면이 빚어지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감당할 내면성, 제사장 나라로서 사명을 감당할 내면성, 이 내면성을 갖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축복을 주시도록 기도하지만 축복을 감당할 내면성을 주시도록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내면성입니다. 내면성이 없으면 오히려 축복이 저주가 되어버립니다.
현재 이스라엘이 보기에는 블레셋 지방으로 가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고, 홍해의 광야 길로 돌아가는 것은 고생스럽고 좋지 않은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입니다. 잠언 14:12절에 보면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때로 우리의 보기에 좋지 않은 것같이 보이지만 가장 안전하고 좋은 길입니다. 우리는 전체를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나의 인생 전체를 보시기 때문에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이데빗 목자님은 본래 미국 선교사로 나가고자 이곳에서 전문의 과정을 밟지 않고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프리카 선교사로 부르시자 미국 비자를 찢어버리고 아프리카 말라위로 선교사로 나가셨습니다. 당시 아프리카는 사람들이 기도는 하지만 막상 가기는 꺼려하고 두려워하는 곳이었습니다. 이런 곳에 다섯명의 가족을 이끌고 선교사로 나아간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데빗 목자님은 말라위에 가셔서 말라리아에 걸리기도 하시고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오직 믿음으로 개척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움불라 목자를 풀 타임 목자로 세우고 5년만에 본국에 돌아와 20대의 젊은이들과 함께 40살의 나이에 전문의 과정을 밟아야 했습니다. 그 길은 멀고 험하게만 보였습니다. 그러나 1992년도에 졸업한지 만 20년만에 톱으로 합격하여 방사선 전문의가 되셨습니다. 이 기간 동안 데빗 목자님은 내면이 넓어지고 깊어져서 많은 사람을 품고 섬길 수 있는 열국의 아비가 되셨습니다. 데빗 목자님은 “하나님은 나를 가장 잘 아시고 이렇게 돌려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셨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지금 미국 메릴랜드 선교 후보들은 비자를 신청한지 무려 7년이 됩니다. 이렇게 돌려 인도하신 데에는 하나님의 크신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계획과 다릅니다. 우리의 계획은 작고 멀리 내다보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계획은 언제나 크고 원대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 땅에서 항오를 지어 나올 때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습니다. 요셉의 유언은 허망하게 생각되었지만 그 비젼은 약 400년 만에 성취되었습니다. 그들은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쳤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길을 어떻게 인도하셨습니까? 21, 2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은 출애굽한 후 그들을 고아와 같이 광야에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그들과 친히 동행하셨습니다. 갈 길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인도자가 되사 친히 그들 앞서 행하셨습니다. 중동의 광야는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심하여 낮에는 작열하는 태양으로 인해 견디기 힘들고 밤에는 추위에 떨게 됩니다. 광야에서는 구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들의 형편을 잘 아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셨습니다. 구름 기둥은 뜨거운 태양열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었고, 밤의 불 기둥은 그들을 추위로부터 지켜 주고 어두운 밤을 환하게 밝혀 주었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그들이 주야로 진행할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해 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나침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들은 길 잃을 염려도 없고 광야에서 해 받을 것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품에 품고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의 인도하심을 한걸음 한걸음씩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했던 전 기간 동안 한번도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거두지 아니하시고 신실하게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이 수없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구속자 모세를 일으키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어린 양의 희생으로 그들을 바로의 권세에서 구원하신 분은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구속하신 그들을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보배 피로 구속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고아와 같이 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보혜사 성령은 항상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고 위로자가 되시고 인도자가 되십니다. 성령께서 평생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기까지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염려하고 불안해 하고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남과 비교하여 조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한 걸음 한 걸음씩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남보다 빨리 가려고 뛰어갈 필요도 없고 두 걸음씩 갈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내 갈길 멀고 밤은 깊은데 빛되신 주, 저 본향 집을 향해 가는 길 비추소서. 내 가는 길 다 알지 못하나 한 걸음씩 늘 인도하소서”(찬429장). 한 걸음 한 걸음씩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내 인생을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잘 아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내 개인의 인생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임이나 이 나라의 장래도 한 걸음 한 걸음씩 친히 인도하십니다. 요사이 우리 나라는 마치 6. 25 전야와 같은 위기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북한은 줄기차게 전쟁 준비만 하고 있습니다. 작년부터는 준 전시 하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한은 전혀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조그만 일에 얽매어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합니다. 이러다가 이 나라가 순식간에 전쟁의 불바다에 휩싸일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듭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행하시며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안심이 됩니다. 미국이 이 나라를 보호할 수 없습니다. 이 나라를 보호하고 지키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십니다.

Ⅱ.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14:1-31)

14: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을 명하여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에 장막을 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지형상 장막치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군사 전문가가 본다면 영점입니다. 왜냐하면 앞에는 바다가 놓여 있어 뒤에서 공격을 해 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도록 하신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가 마음을 강퍅케 하여 그 뒤를 따를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와 그 온 군대를 유인하여 그들을 홍해에 빠뜨림으로 영광을 얻고자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애굽 사람으로 하나님이 여호와인줄 알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심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애굽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계획을 세우시고,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심판과 구원의 양면성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18절을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를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죄와 사망권세로부터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지만 이를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멸망하는 심판이 됩니다.

과연 예상대로 바로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바로가 장자 재앙의 충격에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스라엘은 이미 출애굽한 뒤였습니다. 이제 아무도 그들을 섬기는 사람도 없었고 큰 소리칠 대상도 없었습니다. 바로는 막대한 노동력과 섬김 받는 즐거움을 상실했습니다. 바로는 생각하면 할수록 이스라엘을 내어 보낸 것이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장에 전군에 특별 긴급 동원령을 내려서 애굽의 모든 전차 부대와 기병대를 출동하여 장관들로 거느리게 하고 이스라엘을 맹렬히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단은 우리가 예수님의 보배 피로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었다 할지라도 끈질기게 우리를 추격하여 다시 노예로 삼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단보다 더 끈질긴 분이십니다.

애굽 군대가 맹렬하게 그들 뒤를 추격하고 있음을 본 이스라엘 자손들은 멀리서 애굽 군대의 말발굽 소리를 듣자 심히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다급하게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믿음의 기도가 아니라 불신에 찬 원망의 목소리였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11,12). 그들은 바로 조금 전에 출애굽 역사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때 원망하기보다 마땅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간절히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계 상황에 부딪히게 되자 두려움에 사로잡혀 불신과 원망에 찬 불평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죽기 싫었습니다. 세상을 거꾸로 매달려 살아도 살고 싶었습니다. 생명에 대한 애착 때문에 그들은 비굴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출애굽의 기본 은혜마저도 잊고 애굽을 동경하며 자기들을 인도해 준 목자를 원망하였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살다가 힘든 문제에 부딪히면 자기를 인도해 준 목자를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왜 잔디 밭에 조용히 누워 있는 나를 피싱하여 이 고생시키는가 하며 목자를 원망합니다. 목자는 선한 일을 해 놓고도 감사하다는 말보다 원망을 들을 때가 더 많습니다. 원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광야에서 죽더라도 출애굽하여 자유롭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며 자립적이고 개척적인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까? 아무리 애굽에서 잘 먹고 잘 살지라도 바로를 섬기며 죄의 종으로 살 때 그 인생은 인생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호랑이가 동물원에서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더라도 호랑이 다운 삶을 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호랑이는 굶어 죽더라도 산야에서 포효하며 살 때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두려움에 빠진 가장 큰 원인은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기 보다 현실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열왕기 하 6:8-19절을 보면 아람 군대가 엘리사가 거하는 도단 성을 에워싼 것을 보고 사환이 두려워했습니다. 이때 엘리사가 사환의 눈을 열어 보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눈을 여셨을 때 배후에 불말과 불병거가 가득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힐 때 현실을 바라보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모세는 자기를 원망하는 백성들을 참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과 싸우기 보다 그들이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도왔습니다. 13,14절을 다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모세는 그들에게 두려워 말고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의 심정은 고요해지며 절망적인 상황을 이길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와 능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잠잠히 있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특히 일이 잘 안될 때는 이리 저리 뛰어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잠잠히 하나님을 바랄 때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다윗은 이 비밀을 깨닫고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62:1,2).
모세는 백성들이 요동할 때 “낸들 어떻게 하랴?”하며 함께 두려워 하고 절망하기 쉬웠습니다. 그는 너무 힘들어 홍해 바다에 투신 자살을 하거나 아니면 바로와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바로 이때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요동치 아니했습니다. 그는 믿음 위에 굳게 섰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는 이 믿음으로 두려워 떠는 백성들을 안돈 시켰습니다. 여기서 볼 때 믿음이 없어 두려워 떠는 200만의 무리보다 믿음이 있어 요동치 않는 한 사람의 지도자가 더 중요함을 배웁니다. 하나님은 믿음 있는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 믿음을 통해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한 사람의 지도자의 믿음은 역경을 은총으로 바꾸어 놓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백성을 안돈시켰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 명령은 참으로 믿음이 없이는 순종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현재 그들 앞에는 시퍼런 홍해가 놓여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명하여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은 빠져 죽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뒤로 물러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전진을 기뻐하시고 후퇴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히브리서 10:38,39절은 말합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믿음은 전진입니다. 뒤로 물러가면 비참한 노예가 되고, 믿음으로 전진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길을 열어 주십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을 바짝 추격하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시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 그 뒤로 행하였습니다. 그러자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저 편은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 편은 밤이 광명하므로 밤새도록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을 가까이 하지 못했습니다. 이때 모세는 무엇을 했습니까? 21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믿음으로 바다 위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여 물이 갈라져 마른 땅이 되게 하셨습니다. 태초에 바다와 땅이 뒤범벅되어 있을 때 교만한 물이 더 넘치지 못하도록 하신 하나님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길이 없는 중에 길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 갇힌 바 되었습니다. 앞에는 시퍼런 바다요, 뒤에는 장갑차를 가진 바로 군대가 있었습니다. 진퇴양난, 앞으로 갈 수도 없고 뒤로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홍해를 건널 배도 없었고 그렇다고 날라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 붙잡혀 다시 노예 생활을 하거나 홍해 바다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 스스로는 길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믿음으로 손을 내밀었을 때 홍해를 가르심으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길을 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당신의 이름을 위해 반드시 피할 길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세계 선교의 길도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위하여 친히 길을 내십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 선교 역사는 다 믿음의 손을 내밀었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길을 내신 것입니다. 미국 개척 역사는 초기에는 의사, 간호원들을 통해서 길을 내시고, 후에는 봉제공들과 닭 잡는 기술자(chicken killer)들을 통해 길을 여셨습니다. 독일 개척 역사는 가난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 독일에 간호원으로 간 자매님들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캐나다 개척역사는 1981년에 봉제공을 통해 친히 길을 여셨습니다. 재봉틀 한 번 만지지 않은 약 30명의 자매님들이 약 1달동안 연습하여 불가능한 가운데서 합격하여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저희가 불가능한 가운데서 1985년부터 공산권 선교를 위해 줄기차게 기도하였을 때 1991년에 70년 동안 굳게 닫쳐 있던 철의 장막을 순식간에 허무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이 CIS에 약 1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사 놀라운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우리가 세계 선교를 하고자 하는데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선교 명령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손을 내밀기만 하면 하나님은 친히 그 이름을 위하여 어떤 모양으로든지 길을 내십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친히 길이 되십니다. 홍해를 가름으로 길을 내신 하나님은 친히 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친히 인도하시고 후에는 친히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사 길 잃고 방황하는 인생들의 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14:6). 우리가 길되신 예수님을 붙들 때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당당하게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러나 애굽 사람들은 불신 가운데서 이를 시험하다가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습니다. 같은 상황이지만 믿음으로 하느냐? 불신에 기초한 자기 노력(경쟁, 인간적인 야심, 자기 열심)으로 하느냐? 하는 차이는 구원이냐? 파멸이냐? 하는 중대한 결과를 낳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백성들에게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위기의 때야 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고, 또 산 믿음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능력의 역사를 본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오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움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1,2a).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3). “여호와여 신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이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이니이까?”(11) 모세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고 나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 초월성, 유일성을 노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능력의 손길로 보호하사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할 주의 성결한 처소로 안전하게 인도하실 것을 확신했습니다(13-18). 미리암은 모든 여인들과 함께 여호와를 찬양했습니다(19-21).

우리는 때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한계 상황에 부딪혀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내 힘과 성실과 의지와 지혜로는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현실을 바라보고 두려워하고 불신에 빠져 하나님을 원망하고 목자를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가 산 믿음을 배우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때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홍해가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학문이 홍해처럼 느껴집니다. 어떤 분에게는 제자양성이 홍해처럼 생각됩니다. 또 어떤 분은 좋지 않은 습관을 고치는 것이 홍해와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어의 홍해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홍해 앞에 두려워 떨고 불신과 원망에 찬 소리를 할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친히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고 길을 여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