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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20-요한복음 11:1-44(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by Mark Yang   08/14/2019  

Message


요한복음 제 20 강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11:1-44
요절: 요한복음 11:25, 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T.S 엘리옷은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4월은 부활의 달이요 생명의 달입니다. 예수님은 만물이 소생하는 4월에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부활하셨다!”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놀라운 소식이요,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고, 인생들의 주요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현재 우리에게 부활이요 생명이 되십니다. 이 시간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우리 내면 깊이 역사하고 있는 모든 어두움과 슬픔, 운명과 무기력에서 벗어나 생명력이 넘치는 힘찬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저자 요한이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증거하기 위해 기록한 일곱 가지 표적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일곱 가지 표적 중에서 최후의 표적이요, 최대의 표적입니다.

Ⅰ.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1-6)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지극한 사랑과 감사의 표시로 자신이 가장 아끼던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였습니다. 마리아는 조용하고 사색적이면서도 정열적이고 로맨틱한 여인이요, 마르다는 활동적이고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하는 실제적인 여인이었습니다. 나사로는 몸이 약하여 몸살을 자주 앓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는 아주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나사로는 가정의 기둥이었습니다. 그들은 부모님이 안계셨지만 나사로를 중심으로 서로 의지하며 험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들 세 남매는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였고, 예수님께서도 그들을 지극히 사랑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주 그 집을 방문하여 말씀을 나누기도 하시고 음식을 잡수시기도 하셨습니다(눅10:38-42). 예수님은 부모 없는 그들의 부모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나사로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으로 오던 중 봄비를 맞고 난 후 병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늘 잘 앓는 감기 몸살 정도로 생각했으나 갈수록 증세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그 병은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누이들은 급히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도움을 청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그들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사실만 알렸습니다. 이렇게만 해도 예수님께서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 오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나사로’라고 하지 않고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의 사랑은 변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변함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또 예수님의 치료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또 사실만 알리면 예수님께서 가장 좋은 조치를 취하실 것을 믿고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의 관계성이 맺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도 병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늘 건강하고 평온하고 사업도 잘 되고 공부도 잘하고 만사형통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병에 걸리거나 여러가지 어려움을 당하면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벌이라 생각하고 죄의식에 시달립니다. 물론 질병이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벌인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연단인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앙생활을 잘하는데도 독감에 걸릴 수도 있고 치명적인 암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Tembo목자나 N.Y.의 Lydia Koh 선교사님 같이 중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습니다. 또 사업이 파산되어 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의 경우는 환난을 당하면 절망하고 엎드러지고 못쓰게 되지만, 믿는 자의 경우는 환난을 통해 믿음이 더욱 연단되고 성숙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많은 영적인 것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주님께서 쓰실 만한 영적인 사람으로 빚어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고난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라고 고백했습니다.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마르다와 마리아가 볼 떄 나사로의 병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상황은 어둡고 절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셨기 때문에 그 생각은 밝고 긍정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문제 자체에 얽매여 어둡고 운명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믿음의 눈으로 문제를 볼 때, 문제 가운데 숨어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발견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통해서 산 믿음을 배우고 깊은 믿음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의 곤경은 하나님께는 그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우리는 켐퍼스의 상황이나 어두운 사회 현실을 바라볼 때 어두운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저는 신문을 볼 때마다 어두운 그림자가 나도 모르게 심령에 드리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두운 현실을 바라보는 나의 생각은 점점 부정적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우리가 하고 있는 복음 역사가 거대한 어두움의 세력 앞에 너무나 미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 이 말씀을 공부하면서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눈으로 켐퍼스와 이 사회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제 마음에 밝은 빛이 비취었습니다. 이 빛은 부활의 빛이요. 생명의 빛이었습니다. 이 빛은 제 마음에 있는 모든 어둡고 부정적인 생각을 몰아내고 밝고 희망찬 생각을 심어 주셨습니다. 이때 저는 하나님께서 이 켐퍼스를 제사장 캠퍼스요, 이 나라를 제사장 나라로 삼으사 세계 만방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더욱 귀히 쓰시기 위해 이런 진통을 주시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5, 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본래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면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당장에 달려가 고쳐주어야 합니다. 아니면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 주신 것과 같이, 말씀으로 당장에 고쳐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소식을 들으시고 오히려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셨습니다. 결국 나사로는 죽고 나중에는 시체가 썩어 냄새가 나기까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은 그들에게 큰 고통과 절망과 슬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또 그들로부터 오해와 불신과 원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 왜 이틀이나 지체하셨을까요? 이는 그들에게 가장 좋은 선물인 부활신앙을 심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를 위해서 항상 가장 완전하고 좋은 것을 예비해 놓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를 주시는 것은 언제나 내가 원하는 떄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당장에 기도를 응답지 아니하시고 고통과 슬픔을 주시면서까지 지체하십니다. 하루 이틀 뿐만 아니라 때로는 1년, 2년, 10년, 20년 지체하실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기분을 좋게 해 주는 저차원적인 사랑이 아니라, 일시적인 아픔이 있지만 우리에게 믿음을 심는 고차원적인 사랑입니다.

이틀이 지나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그들은 권세잡은 유대인들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의 뿌리는 죽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돌에 맞아 죽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꿈도 돌이 날라오는 꿈을 꾸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들의 사고와 행동을 마비시켜 그들을 소심하고 비겁한 인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권세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9,10).” 예수님은 사람이 실족하는 원인은 외적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그 내면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빛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유대로 가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 되십니다(요8:12).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깨우러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잠은 피곤을 풀어주고 새 힘을 줍니다. 잠은 안식을 줍니다. 사람들은 잠자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잠을 사모하여 틈만 나면 자고자 합니다. 이는 깨어날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깨어날 소망이 없기 떄문에 두려워 합니다. 사람들은 영원히 잠자기는 원치 않습니다. 성경은 신자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마9:24, 행7:60, 고전15:6,18, 살전4:14). 요한계시록 14:13절은 말합니다.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육신의 잠은 피로를 풀지만 자고 나면 여전히 고통과 번민과 슬픔과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의 죽음은 참 안식이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평안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깨어나면 맑고 신선한 천국 공기를 마시며 아름다운 천사들의 노래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머리에는 따뜻하고 포근한 하나님의 손이 얹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죽음을 모든 것의 끝으로 보느냐, 새로운 세계의 시작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인생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죽음은 폭군이요, 모든 것의 끝이다.” 라는 사상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은 치명적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지 않고자 몸부림치게 됩니다. 그러나 죽음은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시작이라고 생각할 때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삶의 여유가 생기고 주와 복음을 위하여 기쁨으로 희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죽음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지만, 예수님 밖에서의 죽음은 우리에게 절망을 줍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여 “주님,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할 수만 있으면 유대에 가지 않고자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죽었느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위해 자신이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에게로 가자고 재촉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갈 수도 없고 안갈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도마가 비장한 각오로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도마는 의심의 사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의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영웅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의 충성은 부활신앙이 없는 자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충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기쁨이 없었고 소망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제자들의 믿음은 한계적이었습니다. 그들이 앞으로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죽음의 한계를 뛰어 넘는 부활신앙이 필요했습니다.

Ⅱ. 이것을 네가 믿느냐?(17-27)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한 때는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 되었습니다. 아열대 지방의 높은 기온 때문에 빨리 단백질 분해가 시작되어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절망일 때 예수님께는 그 때부터 시작입니다. 유대인의 장례는 죽으면 당일에 치루어집니다. 그리고 3일 간은 엄격히 상을 입고 4일간은 가볍게 상을 입습니다. 이 7일 동안 조문객들이 오게 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급히 나가 맞았습니다. 그리고 만나자나자 말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리아의 첫 말도 마찬가지였습니다(32). 이를 볼 때 그들이 얼마나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평소 식사하실 때는 시간에 맞춰 오시더니 막상 와야할 때 급히 오시지 않고 이렇게 지체한 것이 못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들은 오라비의 죽음으로 인해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실제로는 나사로를 더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사로가 죽자 의지할 대상을 잃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그들에게 큰 슬픔과 허무를 안겨주고 삶의 의욕과 희망을 앗아갔습니다. 나사로는 죽었지만 마르다와 마리아는 죽음의 권세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죽음은 죽은 자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를 지배합니다.

마르다는 만나자마자 예수님을 원망한 것이 미안했는지 예수님께 대한 막연한 믿음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는 희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아나이다.” 하며 부활을 장래에 일어날 일로 생각했습니다. 마르다는 미래의 부활은 믿었으나 현재의 부활은 믿지 못했습니다.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이라고 말함으로써 과거에 얽매였습니다. 또 이제는 “마지막 날 부활”이라고 함으로써 미래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마르다에게는 과거와 미래는 있었으나 현재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현재는 여전히 슬퍼하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말씀은 모두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예수님은 현재 부활이요 생명의 주가 되십니다. 믿음이란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항상 현재입니다. 과거에 능력있는 인생을 살았고 미래에도 그렇게 살 것이지만 현재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는 마르다와 같은 자입니다. 우리는 현재 예수님을 믿고 능력있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스펄젼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금괴를 현재 통화되는 주화로 바꿀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예수님께서 왜 생명보다 부활을 먼저 언급했을까요? 이는 우리 인생들에게 부활이 먼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첫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성이 단절되어 죽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죽음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죽게 되었습니다. 영적 죽음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성 단절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상태”로 세상에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아니한 자연인에게는 영적 생명이 없습니다. 자연인은 죄와 허물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어 있습니다. 그에게는 생명의 불꽃이 없습니다. 죽은 자에게 무슨 처방이 필요하겠습니까? 죽은 자는 우선 살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우리를 살려 주십니다. 그 후에 그 생명을 영원히 유지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는 더 이상 죽음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육신이 죽는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다시 살게 됩니다. 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살아서 믿는 사람은 육신조차도 죽지 않고 휴거 되어 영원히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는 둘째 사망 즉 영적 죽음이 없습니다.(계20:6)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에스겔서 37장에 보면 성령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한 골짜기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골짜기에는 마른 뼈가 심히 많았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로 하여금 마른 뼈에게 명하도록 하셨습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그러자 마른 뼈들이 그 음성을 듣고 뼈가 서로 연락하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입혀지고 가죽이 덮혀 살아 일어나서 큰 군대를 형성하였습니다(겔37:4-10). 오늘날 이 시대 사람들은 영적인 눈으로 볼 때 마른 뼈와 같습니다. 마른 뼈들이 바쁘게 돌아다닙니다. 현대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생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생기를 불어넣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생기를 받을 떄 생명력이 충만한 박력있고 힘찬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기를 받을 때 어둡고 운명적인 요소가 사라지고 밝고 환한 섭리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생기를 받을 수 있습니까?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고 하셨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믿음의 능력을 말해 줍니다. 믿음이란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을 때 놀라운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망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옮겨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2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는 과거 사망 권세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았습니다. 사망 권세는 우리를 두렵게 하고 허무하게 하고 슬프게 하고 운명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사망권세는 인생들로부터 생명을 앗아가고, 희망을 앗아가고, 기쁨을 앗아가고,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앗아갑니다. 그러나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 때는 더 이상 사망 권세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고 생명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생명의 세계는 빛의 세계요, 기쁨의 세계요, 희망의 세계입니다. 생명의 세계에서 사는 자는 더 이상 허무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더 이상 운명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더 이상 한맺힌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생명의 세계에서 사는 자는 밝고 환하게 웃을 수 있습니다. 운명을 개척할 수 있습니다. 한계를 극복하고 능력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삶에 추진력이 생겨 창의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 Koln에 가 계시는 Paulina Suh 선교사님은 과거 율법적인 아버지로 인하여 인생 살 맛을 잃고 허무의 종이 되어 살았습니다. 공부를 잘하여 상장을 타도 조금도 기쁘지 않아 상장에다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만 20세에 자살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만 20세가 되기 전 대학교 1학년 때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허무에서 벗어나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서독 선교사로 나아가 서독 지성인들을 품고 섬기는 믿음의 어미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하니까 좀 위안이 되느냐?”고 하시지 않고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구체적인 부활신앙을 원하십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러자 마르다는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나이다.”

Ⅲ. 나사로야 나오라(28-44)

마르다는 신앙고백을 한 후 마리아에게 가서 예수님이 너를 부르신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 마을 어귀에 계신 예수님께 나아가 그 발 아래 엎드려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함께 온 유대인들도 울었습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은 심령에 통분히 여기셨습니다. 통분히 여기셨다는 것은 깊은 슬픔의 감정이나 분노의 감정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삯인 죽음이 인생들에게 주는 고통과 횡포에 대해서 거룩한 분노와 슬픔을 느끼셨고 사망권세에 대한 의로운 증오심으로 가득하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Jesus wept.)” 이는 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마리아와 유대인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자기 연민에 젖어 우는 감상적인 눈물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값싼 눈물이 아니라 고귀한 눈물입니다.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 경우는 세 번 있습니다. 한 번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눈 앞에 보고 우셨고(눅19:41), 또 한번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통곡하며 우셨습니다(히5:17). 본문에서 예수님이 흘리신 눈물은 죽음의 권세에 굴복당하여 우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신데서 나온 사랑과 동정의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깊이 동정하셨습니다. 그 분은 인생의 질고를 아시고 인간의 고난에 동참하셨습니다. 이를 본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얼마나 그를 사랑하셨는가 하며 또 어떤 이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면서도 왜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셨습니다. 이 때는 예수님께서 그들이 불신을 통분히 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으로 가서 무덤을 막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방금 신앙고백을 한 마르다가 말했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제 마르다의 불신을 책망하셨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마르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면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순종하여 믿음으로 돌을 옮겨 놓아야 했습니다. 우리도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마음 속에 있는 불신의 돌, 의심의 돌을 믿음으로 옮겨 놓아야 합니다. 무덤의 돌을 옮겨 놓자 예수님은 둘러선 무리들이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믿을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무덤을 향하여 큰 소리로 나사로를 부르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러자 죽은 나사로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자 공포의 왕은 즉시 그가 사로잡았던 자를 내어 놓았고, 탐욕의 무덤은 먹이를 포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권세가 있습니다. 생명을 창조하신 분은 생명을 주실 수도 있고 취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님 자신의 부활의 예표가 됩니다. 나사로는 부활했으나 또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영원히 죽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영원히, 완전히 파하셨습니다(딤후1:10). 그래서 사도 바울은 외쳤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마치 초상난 나사로의 집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슬퍼하고 절망하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또한 의심하고 불신하고 서로 원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한계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시체가 썩어 냄새가 나듯이 온갖 악취를 풍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상에 오셔서 부활이요,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생명이 살아납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면서 명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허무와 절망의 세계에서 나오라고 명하십니다. 운명과 무기력의 세계에서 나오라고 명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죽음의 세계에서 나
와 생명력이 넘치는 힘찬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