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 Display


요한복음 Ⅱ부:요한복음 17:1-26(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

by Mark Yang   08/14/2019  

Question


요한복음 Ⅱ부 제 5 강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


말씀: 요한복음 17:1-26
요절: 요한복음 17:1

Ⅰ.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1-5)
1. 이 모든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1a)?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무엇 을 기도하셨으며,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1b)?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으 셨습니까? 이런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화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시는 예수님으로부 터 무엇을 배웁니까?
2. 하나님께서 왜 아들을 영화롭게 하셔야만 합니까(2)? 영생이란 무엇입니까(3)?
3. 예수님은 어떻게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습니까(4)?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다 이루는 것이 어떻게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됩니까?
4. 이제 아버지께서 아들을 위해 하실 일이 무엇입니까(5)? 예수님이 아버지께로부터 바라 는 영광은 어떤 영광입니까?

Ⅱ.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6-19)
1.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까(6-8)? 이를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까?
2. 예수님은 이제 누구를 위해 기도하십니까(9)? 예수님은 제자들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셨 습니까(10)? 예수님의 사역에서 제자들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3. 예수님은 이제 후로 누가 제자들을 보호할 수 있다고 믿으셨습니까(11)? 지금까지는 누 가 제자들을 보호했습니까(12)? 제자들에게 왜 보호가 필요합니까?
4. 제자들은 왜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까(13)? 세상이 왜 제자들을 미워합니까(14)?
5.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어떤 다른 생활을 하기를 바라십니까(15-17)? 무엇이 제자 들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까? 제자들은 왜 세상에서 거룩하게 되어야 합니까? (마태 5:13,14) 예수님은 어떤 점에서 제자들의 본이 되셨습니까(18,19)?

Ⅲ. 저희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20-26)
1. 예수님은 제자들의 사역에 대해 어떤 믿음을 가지셨습니까(20)? 그들을 위한 기도 제목 이 무엇입니까(21,22)? 그들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23)?
2. 예수님은 그들이 무엇을 보기를 원하십니까(24)? 누가 하나님 아버지를 압니까(25)? 예 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26)?


Message


요한복음 Ⅱ 부 제 5 강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


말씀: 요한복음 17:1-26
요절: 요한복음 17:1b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3-16장은 ‘다락방 강화’로서 여기에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깊은 소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과 소망을 심어 주시고,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는 비결과 성령의 역사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17장에서 다락방 강화의 결론으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그 내용이 매우 깊고 넓어서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일컫습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생활의 총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어떤 삶을 사셨으며 또 어떻게 제자양성을 하셨는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루터는 이 기도를 가리켜 “그 울리는 소리는 단순하나 그 깊이와 넓이의 풍성한 것은 이루 측량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를 배워서 좁고 자기 중심적인 기도를 청산하고 대제사장적인 기도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1-5)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이때까지 제자들에게 마음을 두셨으나 이제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셨습니다. 기도는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때가 이르렀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세상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가 이르렀음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에는 ‘때’ 사상이 잘 나타나 있는데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해 있습니다. 이 때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 직후부터 시작하신 인류 대 구속사업이 완성되는 때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때를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슬프고 가장 절망적인 때입니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두려움과 절망과 슬픔에 빠져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이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만일 내가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박혀 처참하게 죽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제발 한번만 살려 주십시오.” 라고 울부짖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기도하셨습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여기서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드러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으심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간절히 소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드러내기를 원하셨습니다. 당시 십자가는 고통과 저주와 수치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잘 아셨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인가도 잘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민 구속 역사를 위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자 결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자 하셨을 때 슬퍼하시거나 운명적인 생각에 빠져 신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저주의 십자가로 생각하였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영광의 십자가로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심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깊은 영적 소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남이야 어떻게 되든 자신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어떻게 되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삶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죽으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인생의 근본 목적입니다. 기독교 소요리 문답 제 1문에 보면 사람의 제 1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대신 자기 영광을 위해 살 때 비참하게 됩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 살 때 행복할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영혼이 번민과 고뇌로 끊임없이 고통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면 순수해지고 겸손하게 되고 심령에 참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불멸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고귀한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0:31절에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왜 영화롭게 되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영화롭게 되어야 하셨습니다. 영생을 주려면 죽음까지도 이길 수 있는 권세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권세로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영원히 사는 것입니까? 그러나 아무런 의미없이 고통스럽게 영원히 산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영생이란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입니다. 영생은 행복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영생이란 죽음이나 질병이나 죄로 인한 고통이 없는 영원한 행복을 의미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아는 것은 이성적 이해가 아니라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이해를 기초로 한 연합을 의미합니다. 죽음이란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인생은 꽃병의 꽃과 같이 살았으나 죽은 인생입니다. 영생이란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인 바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하라고 주신 일에 충성하셨습니다. 그 일은 인류 구속 사업과 복음 역사를 계승할 제자를 양성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제자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으시고 마침내는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온전히 이루심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까? 종일 찬송을 불러야 합니까? 자선사업을 해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면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에 충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가는 것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실 때는 각자에게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고귀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됩니다. 인생 결산의 날에는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는가? 사회적인 업적을 많이 남겼는가에 따라 결산하지 않고 얼마나 하나님의 일을 했는가에 따라 결산합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 일에 너무 바빠서 하나님의 일을 할 시간이 없어서 못했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마6:33)

예수님은 이제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영화롭게 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5). 예수님은 상아와 같이 아름다운 곳에서 존귀와 영화로 옷 입으시고 세세토록 찬송과 경배를 받으셨습니다(계4:10). 그러나 인간의 죄를 그 몸으로 담당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냄새나는 죄인들을 섬기시느라 그 고운 모양이 마른 넝쿨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사명을 완수하신 후에 다시 그 본래의 영광에 들어가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많은 고난을 통해서 영원한 영광을 얻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영광을 바라보시고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Ⅱ. 제자들을 위한 기도(6-19)

첫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셨습니다(6-8). 6-8절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제자양성을 하셨는가 하나님께 보고하는 내용입니다. 6a절을 보십시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고, 마음과 육신이 원하는대로 죄의 소욕을 좇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심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하심과 전능하심과 사랑과 긍휼 등 하나님의 품성을 심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이름을 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하나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백발이 성성한 흰 두루마기를 입은 산신령과 같은 분으로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마음씨 좋은 무골호인 할아버지로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히틀러와 같이 잔인한 분으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제각기 경험에 비추어서 자기 나름대로의 하나님관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공부 해보면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한없이 은혜롭고 자비롭고 인애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죄인들을 위해 내어 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성경 공부를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모든 헛된 우상들을 제거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이름을 심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심고 또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쉬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집에서나 길에서나 들에서나 바닷가에서나 식사하실 때나 틈나는대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사랑의 수고로 그들의 영적 눈이 떠져서 그들은 예수님께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게 되었고 또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제자들을 황태자와 같이 귀히 여기셨습니다(9,10).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얼마나 귀히 여기셨는가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버지의 소유로 생각하고 그들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복음서를 읽어 볼 때 제자들은 사랑스러운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비린내나는 비천한 어부 출신들이었고 악명 높은 세리 출신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약소 민족 이스라엘의 멸시받는 갈릴리 촌사람들로서 학식도 없고 교양도 없는 인간 기초가 부족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천한 자들이라 생각하고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깨달음이 둔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이 멍청한 놈들아!” 라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들로 보시고 황태자와 같이 귀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존경과 사랑으로 대하시고 겸손과 온유로 섬기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있어서 영광이었고 기쁨이요 소망이요 면류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습니다(10).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사도바울도 양들을 참으로 귀히 여겼습니다. 그에게는 양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빌4: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같이 주 안에 서라.”

우리는 양들을 내가 fishing 해서 내가 키우기 때문에 내 양이라 생각하고 함부로 대하기 쉽습니다. 또 자기 말을 잘듣는 자기 사람으로 키우기 쉽습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양을 도둑질 하는 큰 죄를 범하게 됩니다. 양은 내 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보배 피로 값주고 사셔서 나에게 맡겨 주신 하나님의 양입니다. 하나님의 양이므로 귀히 여기고 겸손과 온유로 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워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11). 11절을 보십시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사단의 역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회의와 불신과 두려움을 심어서 분열하게 하고 분쟁하게 하고 불화하게 만듭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소한 일로 서로 미워하고 다툴 때 박수를 치며 기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심습니다. 무엇보다 하나가 되기에 힘쓰고 어떤 손해가 있더라도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에 힘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하여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로 하나 됨으로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넷째, 예수님은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전해 주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12-16). 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그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하여 지키었습니다. ‘지킨다’는 뜻은 부단히 살피고 훈련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의 악 영향에 물들지 않도록 끊임없이 말씀을 주시고 기도하심으로 그들 내면을 훈련하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도 악에 빠지지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인 가룟유다만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시기 때문에 더 이상 제자들을 도우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악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잘 아시기 때문에 전능하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악의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시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도피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내 보내시고 세상의 죄악과 도전하여 싸우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18).

다섯째, 제자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시도록 기도하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세상과 구별된 성별된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생활을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벧전1:4-6). 하나님의 백성들은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유행이나 죄의 소욕을 좇아 살아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도 역시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육의 소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편히 쉬고 싶고 인생을 즐기고 싶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별된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혈서를 쓰고 아무리 굳게 결심해도 안됩니다. 오직 진리의 말씀을 좇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시119:9절은 말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거룩하게 살아야 할 기준이 없기 때문에 죄의 소욕을 좇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할 때 죄와 사단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젊은이는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정욕의 노예가 되어 그 내면이 창기와 같음을 보게 됩니다. 또한 사단이 심어주는 미움의 감정과 불신과 교만에 시달리며 자학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젊은이는 주기적으로 음란 비디오를 보고 자신을 더럽히고 죄의 노예가 되어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세력을 얻지 못하고 죄의 소욕이 그 마음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은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됩니다(골3:5,6).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므로 죄의 세력과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파멸하게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좇아 순결한 생활을 할 때 그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또한 순결한 생활을 할 때 불의와 싸울 수 있는 참된 용기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영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서 더러워진 우리의 영혼을 순결케 합니다. 또한 세상적인 가치관을 변화시키사 우리를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합니다. 성결은 하나님의 백성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하여 거룩한 생활을 하심으로 친히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19).

Ⅲ.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기도(20-26)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의 말씀 증거를 통해 믿게 될 모든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첫째,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믿는 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또한 믿는 자들이 하나 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전파될 수 있습니다(23). 그 때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믿는 자들이 사소한 일로 서로 중상모략하고 싸우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비방거리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심히 슬프시게 하는 것입니다. 분쟁과 분열이 있는 곳에 성령이 역사하실 수 없고 사단이 역사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되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한 분이시요 예수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요 성령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사명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엡4:4-6)

둘째, 예수님은 모든 신자들이 그의 영광에 참예하기를 바라십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순례의 길을 끝난 후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어 그의 영광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때 장차 주님의 영광에도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믿는 자들의 마음에 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26).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깊고 넓은 내면을 배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예수님과 같이 세상만민을 품고 대제사장적 기도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