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 8 강
열두 사도를 세우신 예수님
말씀 : 마가복음 3:1-19
요절 : 마가복음 3:14
Ⅰ.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예수님 (1-12)
1.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까(1)? 한편 손이 마름으로써 외적, 내적으로 겪는 어려움이 무엇이었을까요?
2. 한편으로 회당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으며(6), 그들은 무엇을 엿보고 있었습니까(2)? 이들이 왜 예 수님을 송사하려 하고 있습니까?
3.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무엇이라 명령하셨습니까(3)? 왜 그를 한가운데 일어서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엇을 깨우쳐 주고자 하셨습니까(4)?
4.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잠잠한 것이 그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이들을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5a)?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근심하시고 노하셨을까요?
5.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하셨습니까(5b)? 그가 이 말씀에 순종하기 힘든 점이 무엇입니까? 그가 순종했을 때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6. 바리새인들은 무슨 음모를 꾸몄습니까(6)? 왜 헤롯당과 함께 의논했을까요? 이들의 악함에 대해 말해 보시오.
7. 예수님께서 바다로 물러가셨을 때 어디로부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까(7,8)? 이들이 왜 예수님께로 몰려왔습니까(8-12)? 당시 무리들의 형편이 어떠했습니까?
Ⅱ. 열두 사도를 세우신 예수님 (13-19)
1. 예수님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그리고 거기서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13)? 앞의 사건들이 이 일을 하는데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2. ‘자기의 원하는 자들’이란 어떤 자들을 말합니까? 여기서 예수님의 주권적 선택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3. 예수님은 몇 명을 세우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들을 택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14,15)?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심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한 바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교육 방법이 오늘날 교육 방법과 특별히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4. 예수님은 제자들을 어떤 자로 키우고자 하십니까? (전도자, 영적 권세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왜 이런 자들로 키우고자 하셨습니까?
5. 열두 사도의 이름을 말해 보시오(16-19). 예수님께서 특별히 누구에게 무슨 별명을 붙여 주셨습니까(16,17)? 왜 별명을 붙여 주셨을까요? 열두 사도를 세우시고 이들을 키우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비전과 소망에 대해 생각해 보시오.
마가복음 제 8 강
열두 사도를 세우신 예수님
말씀 : 마가복음 3:1-19
요절 : 마가복음 3: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제자 양성 역사는 예수님의 사역 중 가장 중요하고도 위대한 역사 중의 하나입니다. 제자 양성을 통해 복음 역사는 계승, 발전될 수 있었습니다. 제자 양성은 복음 역사를 가장 효과적이고 확실하게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택하시고 본격적으로 제자 양성을 하시게 된 직접적인 동기와 열두 사도를 세우신 목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두신 소원을 깨닫고 이 시대를 섬길 만한 사도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Ⅰ.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예수님 (1-12)
1-12절에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시자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오른손이 말랐다고 하였습니다 (눅6:6). 그는 마른 손을 호주머니 깊숙이 넣고 회당 한쪽 구석에 앉아 말씀의 은혜를 받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효과적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두 손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무엇 때문에 한 손이 마르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오른손이 말라 쓸모 없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가 겪는 불편함이란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악수를 할 때 상대방이 손을 내밀기 전에 얼른 왼손을 내밀어야 했습니다. 또 싸울 때도 남이 두 대 때리면 한 대 밖에 때릴 수 없어 항상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의 내면은 어둡고 운명적이 되고 깊은 자의식과 열등감의 골이 패어졌을 것입니다. 한 손이 마른 것으로 인해 그의 생각도 마르고 감정도 마르고 그의 인생 전체가 마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누가 보나 도움이 필요한 자였습니다.
세상에는 겉은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한 손 마른 사람과 같이 인생 문제를 안고 자학하며 그늘진 인생을 사는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어떤 분은 대머리로 인해 또 어떤 분은 귀가 잘 안 들리는 것으로 인해 어둡고 운명적인 인생을 살아갑니다. 또 어떤 분은 말을 잘못하거나 말을 더듬는 것으로 인해 기가 죽고 움츠러들고 자신을 학대하며 슬픈 인생을 살아갑니다. 뿐만 아니라 겉은 멀쩡하지만 그 내면이 한 손 마른 자와 같이 메마른 인생을 사는 자들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와 사랑에 메말라 있습니다. 인격적인 대화에 메말라 있습니다. 인정에 메말라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이해해 주고 받아 주고 인정해 주면 이제 좀 살 것 같다고 말합니다. 세상에는 한 손 마른 사람과 같이 도움이 필요한 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자를 보시자마자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도와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마음에 독을 품고 예수님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눈빛은 동정과 사람이 가득찬 눈빛이었으나 바리새인들의 눈빛은 독기가 찬 눈빛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송사할 구실을 찾기 위해 예수님이 안식일에 한 손 마른 자를 고치시는가 엿보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 지도자들로서 안식일에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도움이 필요한 양무리들을 돌봐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에 의해 자신들의 권위가 크게 도전을 받자 시기심 때문에 악한 일을 도모하고 있었습니다. 회당 분위기는 이들로 인해 긴장감이 감도는 살벌한 분위기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 주고 싶어도 고치기 힘듭니다. 한 손 마른 사람 때문에 그들과 충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같이 보입니다. 또 그의 병은 당장에 고쳐 주지 않으면 안 될 시급한 병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음 날 고쳐 줄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그들의 올무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 일어서도록 하심으로 문제를 표면화시키시고 그들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3,4) 이 말씀은 안식일에 무엇을 하는 것이 더 법적으로 합당한가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근본 정신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의 규례에 얽매여 참 뜻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율법적이 되고 독선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가치관은 비뚤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선악의 분별력을 상실하고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지도자는 선악의 분별력과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상실할 때 사람들에게 끼치는 악영향은 지대합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문제도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유익과 권세를 유지하는데 급급하여 선악의 분별력과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상실한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잠자는 영혼을 깨우기 위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저희가 잠잠하거늘”(4b) 이는 자신들이 분명히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전혀 회개치 않는 완악한 상태를 말해 줍니다. 이를 보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습니까? 5a절을 보십시오.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예수님은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셔서 잘 노하시고 분노하셨습니다. 마음의 완악함이란 잘못을 알면서도 회개치 않는 마음입니다. 이는 자존심 때문에 고의적으로 회개치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2:5절에서 유대인들의 문제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근심하시고 분노하신 것은 그들의 잘못을 범한 것보다 잘못한 것을 알면서도 전혀 회개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범했을 때 이를 솔직히 시인하고 회개하는 자는 믿음의 용기가 있고 소망이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회개치 않는 자는 소망이 없는 자입니다.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시고 분노하신 예수님은 불의에 대하여 분노하시는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분노하셨을 때 살기 등등하던 그들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신 후 손 마른 사람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 그가 이 말씀에 순종하기 힘든 점이 무엇일까요? 그가 손을 내밀기 위해서는 자의식과 수치심을 깨고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야 했습니다. 또 손을 내밀었다가 바리새인들의 미움을 사서 출교 당할지도 모르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출교는 회당에서 쫓겨나는 것으로서 이는 모든 것을 회당 중심으로 생활하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또 손을 내밀었다가 고침도 받지 못하고 창피만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다만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만을 믿고 말씀에 의지하여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손, 순종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가 손을 내밀었을 때 놀랍게도 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그의 마른 손에는 생기가 돌고 힘이 생겼습니다. 그의 심령에도 생명력이 감돌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마른 손과 마른 심령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고 그의 망가진 인생을 온전히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가 인생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추한 죄와 허물과 실수를 주님 말씀 앞에 내 놓아야 합니다. 믿음의 손, 순종의 손, 기도의 손을 주님께 내밀어야 합니다. 손을 내밀지 않으면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손을 내밀 때 주님께서는 능력으로 나의 인생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한 손 마른 자가 고침 받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은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는 커녕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예수님을 죽이고자 의논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평소에는 헤롯당을 철천지원수와 같이 미워했으나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하여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의 탈을 쓴 악마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자를 고쳐 주신 후 제자들과 함께 시원한 바람을 쐬기 위해 바다로 물러가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좇으며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과 심지어는 이방 땅 두로와 시돈에서도 허다한 무리들이 몰려 왔습니다. 이들은 다국적 무리들이었습니다. 어찌나 많은 무리가 몰려와서 예수님을 에워싸며 미는지 작은 배를 준비시켜야 했습니다. 이들은 병마에 시달리고 더러운 귀신들려 울부짖는 자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사랑에 굶주려 울부짖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 몰려 든 것입니까? 8b절을 보십시오. “허다한 무리가 그의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온지라” 그들은 예수님이 추한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시며 깨끗케 하시고 각색 병든 자들을 일일이 영접하시고 고쳐 주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또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 주시고 그 증거로 그를 일어나 걷게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한 몹쓸 생명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바리새인들에게 도전하신 예수님의 용기와 참된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소식들은 아름다운 향기가 되어 사람들의 입을 통해 사방에 퍼졌습니다. 사람들은 이 아름다운 소식을 들었을 때마다 감격하고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이 구름떼 같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시달리다가 예수님의 사랑의 품에 안기고자 나아 온 것입니다. 시대의 요구란 말이 있습니다. 또 시대의 물결이란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물밀듯이 나아 오는 무리들이야말로 시대의 요구요, 시대의 물결이었습니다. 그들의 절실한 요구가 무엇입니까? 이는 양들을 사랑하고 양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선한 목자 예수님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 백성들은 참된 지도자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물가를 안정시키고 폭력을 다스리고 부정 부패를 척결시킬 수 있는 능력 있는 지도자, 수도물을 안심하고 마시게 할 수 있는 깨끗한 지도자, 권모술수를 쓰지 않고 정직하게 행하는 도덕성 있는 지도자, 아무 사심이 없이 마음으로부터 백성을 사랑하고 민의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겸손한 지도자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갈망하는 것은 양들을 사랑하고 양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선한 목자입니다. 사람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정말 원하는 것은 선한 목자 예수님입니다.
1990년도 소련 여론 조사 센타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서기 2000년 소련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60%가 예수님이라고 응답하였습니다. 그 다음이 페레스트로이카의 정신적 선구자이자 소련 양심의 대변자였던 안드레이 사하로프(48%)박사였고 고르바초프는 26%에 불과했습니다. 이를 볼 때 소련 사람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훌륭한 정치가나 경제학자가 아닙니다. 또 혁명가도 아닙니다.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바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입니다. 소련 사람들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중국 사람들이나 아프리카 사람들이나 세계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선한 목자 예수님의 품에 안길 때만이 참된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Ⅱ. 열 두 사도를 택하신 예수님 (13-19)
예수님이 살던 시대는 한 마디로 절망적이었습니다. 헤롯과 같은 정치 지도자는 음란하고 불의하였고,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 지도자는 마음이 완악하여 소망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참 목자를 찾아 우리 방황하였습니다. 그 시대는 양들을 책임성 있게 돌봐 줄 목자가 절실히 필요하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젊은이들은 분노하여 거리로 뛰쳐나가 헤롯 정권 타도를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한숨만 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때 예수님은 시대 문제를 안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누가복음 6:12절을 보면 예수님이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시대 문제를 안고 상한 심정으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속 역사를 섬기는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찾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속 역사를 섬기는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찾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신 후 열두 제자를 택하여 부르시고 그들을 사도로 임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음 역사 시작부터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 양성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열두 제자를 부르신 것은 하나의 팀을 형성하여 본격적으로 제자 양성을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으며 그들을 택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또 열두 사도를 세우시고 이들을 키우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비전과 소망이 무엇입니까?
(i)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심 (13)
13절을 보십시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여기서 ‘자기의 원하는 자들’이란 감정적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공동 번역에 보면 ‘마음에 두셨던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평소에 눈여겨보시고 키우기로 마음먹은 자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부르심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이 부르심은 주권적인 부르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다는 것은 주권적으로 부르셨음을 말해 줍니다. 이는 부르심이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았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르심은 어느 누구도 변개할 수 없는 절대적인 부르심입니다. 또 예수님의 부르심은 온전히 은혜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어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대부분 갈릴리 어부 출신으로 신분이 낮고 학문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또 재산이 많거나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자들도 아니었습니다. 이를 볼 때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된 것입니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입구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는 팻말을 써 붙여 놓았다고 합니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플라톤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었습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려면 뛰어난 성적뿐만 아니라 재정적인 뒷받침과 가문이 좋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학교에는 이러한 조건이 전혀 필요 없습니다. 여기에는 은혜로 택함을 받은 자, 즉 믿음 있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에 중간에 실수하여 잘리지 않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둘째로, 이 부르심은 예수님에게로의 부르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예수님 자신에게로 부르신 것입니다 (Jesus called to him). 이는 그들이 세상에 속한 데서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 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소속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 세상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은 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께 속했기 때문입니다 (요15:18,19). 또한 예수님의 부르심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와 교제하도록 하기 위한 부르심이었습니다. 세상의 부르심은 우리가 무엇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존재가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르심은 세상의 부르심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나아온지라” 이 말씀은 그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인격적으로 응답했음을 말해 줍니다. 부르심에 응답해야 주님께서 이를 꼬투리로 키울 수 있습니다.
(ii) 열둘을 세우신 목적
예수님은 열둘을 택하여 세우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열둘을 택하여 세우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14,15절을 보십시오. “이에 열둘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첫째로, 예수님을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와 함께 있도록 하신 것은 인격적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알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심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과 깊은 관계성을 맺고 그들의 병든 내면이 치료받도록 하심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아 예수님의 사람이 되게 하는데 있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교육 방법은 전인 교육으로서 지식과 기술만을 전달하는 교육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식과 기술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엄청나게 많이 습득하고 있지만 인격 형성을 위한 인간 교육을 받지 못합니다. 이로 인해 E.T와 같이 머리는 크고 가슴과 다리는 새가슴과 새다리와 같이 기형적인 인간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는 잘하지만 인격이 되먹지 못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는 참으로 우려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육 방법은 인격과 인격이 맞부딪히는 산 교육입니다. 이를 통해 가치관이 변화되고 인격이 변화되고 존재가 변화됩니다.
둘째로, 전도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첫째 목적이 예수님과의 공동생활을 통해서 예수님을 배우는데 있다면, 둘째 목적은 세상에 나가서 배운 바를 증거하고 양들을 감당하고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는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립적인 성경 선생으로 키우고자 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의 역사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말씀의 샘을 파서 전하기만 하면 반드시 복음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말씀의 샘을 파서 증거할 수 있는 자립적인 성경 선생으로 성장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제자 생활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겸손하게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자립적인 성경 선생이 되고자 하는 영적 소원을 가지고 끊임없이 투쟁해야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영적 권세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사람을 근본적으로 괴롭히는 것은 시대 문제나 물질 문제나 인간 문제가 아니라 사단입니다. 아담 이후로 끊임없이 인간을 유혹하여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뜨렸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원수는 사람이나 제도가 아니라 사단입니다. 사단은 교묘하게 역사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파괴시키고자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과 의심을 심어서 넘어뜨리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내적, 외적으로 역사하는 사단의 역사를 분별하고 사단과 싸울 수 있는 영적인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사단의 역사를 분별하고 내적 외적 원수들을 물리칠 수 있는 믿음의 용사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위로부터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악령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영적 권세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iii) 제자들에게 두신 예수님의 소망 (16-19)
예수님께서 부르신 열두 제자들은 모두 개성이 뚜렷하고 특징이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나서기를 좋아하고 큰 소리를 잘 치며 강한 것 같으면서 약했습니다. 반면 요한은 조용하지만 불같으며
약한 것 같으면서 강했습니다. 야고보는 인간적인 야심이 강하여 한번 물면 절대로 놓치지 않는 불개미 정신이 있습니다. 안드레는 멍하면서도 긍정적이었고, 빌립은 복잡하면서도 부정적이었습니다. 마태는 세리 출신답게 이기적이었고, 도마는 무슨 일을 만나든 일단 의심해 놓고 보는 의심에 있어서 PH.D를 가진 자였습니다. 또 바돌로매는 사색적이었고 열혈당 시몬은 행동적이었습니다. 그는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열을 올렸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는 순진한 자요, 가룟 유다는 음흉한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개성을 무시하고 일률적으로 키우지 아니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개성을 인정하시고 그 개성대로 키우셨습니다. 이는 각 족속의 목자로 삼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실 때 처음부터 그들을 사도로 임명하시고 키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현재는 부족하지만 장차 사도행전의 역사를 창조할 일꾼들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현재 모습을 보지 않으시고 장차 변화된 모습을 보시고 그들을 소망 가운데 키우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부족한 나 자신을 바라보고 절망할 때가 많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 나 하나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 시대를 감당할 수 있는 영적인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하는 불의에 빠져 자학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에게 큰 소망을 두시고 이 소망 가운데서 나를 양육하시고 계십니다. 나에게 두신 예수님의 소망을 생각할 때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부족한 우리를 그의 제자로 부르시고 소망 가운데서 양육하시는 예수님을 찬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