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 11 강
말씀과 하나님의 나라(Ⅱ)
말씀 : 마가복음 4:21-34
요절 : 마가복음 4:26
Ⅰ. 등경 위의 등불 (21-25)
1.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21)? 여기서 등불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시119:105, 요8:12) 숨기고 감추는 근본 의도가 무엇입니까(22)? 어떤 사람이 이 비유의 뜻을 알아 들을 수 있습니까(23)?
2. 말씀을 들을 때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입니까(24a)? 말씀을 듣는 자세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어떻게 달라집니까(24b,25)?
Ⅱ. 자라나는 씨의 비유 (26-29)
1.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으로부터 시작됩니까(26)? 우리가 왜 부지런히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까? 사람이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는 어떻게 됩니까(27)? 씨의 성장의 신비에 대해 생각해 보시오. 누가 이를 자라게 합니까? (고전3:6)
2. 씨가 땅에 뿌려져서 추수할 때까지의 과정을 말해 보시오(28). 이 과정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해 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3. 열매가 익으면 무엇을 하게 됩니까(29)? 추수 때는 어느 때를 가리킵니까?
Ⅲ. 겨자씨 비유 (30-34)
1. 하나님의 나라는 또 무엇에 비유됩니까(30,31)? 겨자씨는 얼마나 작습니까(31)? 그러나 어느 정도 커지며 그 영향력이 어떠합니까(32)? 공중의 새들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2. 예수님께서 왜 비유로만 말씀하셨습니까(33,34)? (시78:2)
마가복음 제 11 강
말씀과 하나님의 나라(Ⅱ)
말씀 : 마가복음 4:21-34
요절 : 마가복음 4:26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지난 강의에서 우리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배웠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을 통해 이루어지며, 열매를 맺고 못 맺는 것은 말씀을 듣는 자의 마음 밭에 달려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여러 가지 비유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너무나 깊고 오묘한 것이어서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깨달아 알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의 영적 눈을 밝히사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Ⅰ. 등경 위의 등불 (21-25)
21-25절은 비유와 비유 사이에 있는 삽입적인 말씀으로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가르치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며(21-23), 또 말씀을 들을 때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24,25).
첫째, 말씀은 어두움을 밝힙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함이 아니냐?” ‘말’은 곡물을 되는 그릇이요, ‘평상’은 침상을 말합니다. 등불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고 (시119:105), 더 나아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요8:12). 요사이는 전깃불이나 형광등을 쓰지만 전깃불이 없는 옛날에는 호롱불을 사용하였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가져오는 목적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 두어 숨기고자 함이 아니라 등경 위에 두어 널리 비추고자 함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을 가르치시는 목적은 숨기고자 함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빛을 비추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은 한마디로 어둡습니다. 어두움에 있는 자들은 인생의 의미와 목적과 방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인생의 참된 희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또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력이 없습니다. 어두움에 있는 자들은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죄를 짓고 있는지 조차도 잘 깨닫지 못합니다. 이는 어두움이 그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에 있는 자들에게는 빛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들에게 빛이 됩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119:105)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움을 밝히고 인생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이며,생의 목적과 참된 희망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의미있고 가치있고 보람되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어둡고 답답하던 심령이 밝고 환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빛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8:12). 어두움은 사단이 지배하고 있는 세력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힘으로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빛되신 예수님을 심령에 영접할 때 어두움의 세력은 순식간에 물러나게 됩니다. 빛되신 예수님을 영접할 때 늘 추한 생각으로 죄의 소욕에 시달리던 자가 고상한 생각을 하게 되고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또한 매사에 부정적이고 운명적이고 패배적인 생각에 시달리던 자가 믿음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찬 인생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에 생명의 빛을 비추이기 위해 오셨습니다.
22절 말씀은 등불을 적극적으로 비추어야 할 이유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이는 숨기는 것은 드러내고자 함이요 감추는 것은 나타내려 함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가르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진리를 은폐하기 위함이 아니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복음은 보배와 같이 너무 귀하여서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때가 차자 복음은 드러나고 전파되었습니다 (롬16:25, 26a).
복음의 비밀은 밝히 드러났지만 아무나 이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들을 귀 있는 자만이 들을 수 있습니다. 들을 귀있는 자는 영적인 소원을 가지고 감추인 보배를 찾는 자 같이 간절히 찾는 자요 (잠2:4), 또한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하게 찾는 자입니다 (마11:25,26).
둘째,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을 들을 때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24a) 이 말씀은 무엇을 듣는가 그 내용을 깊이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면 생각하는 것만큼 받게 되고 더 받게 됩니다(24b). 그러나 생각지 않는 자는 있는 것마저도 빼앗기고 말게 됩니다(25). 이는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쳐 줍니다. 동일한 말씀을 공부하는데 어떤 분은 말씀을 깊이 생각함으로 영적 깨달음을 얻고 날로 날로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몇 년이 가도 별 성장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처음 가졌던 순순하고 진실된 믿음에서 퇴보한 것을 보게 됩니다. 이는 말씀을 깊이 생각지 않고 형식적으로 공부하였기 때문입니다. 영적 성장이냐? 퇴보냐? 하는 것은 신앙 연수에 달려 있지 않고 전적으로 말씀을 얼마나 깊이 생각하느냐? 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을 가르치시는 이유 중의 하나는 제자들로 하여금 그 뜻을 생각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교육 방법은 주입식이 아니라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신 후 먼저 그 뜻을 설명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문제의식을 갖고 묻기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물을 때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생각하는 힘을 길러 주셨습니다. 주입식 교육은 지식과 정보는 빠른 시간 내에 많이 축적할 수 있지만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응용력과 창의력은 전혀 키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창의력입니다. 창의력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피나는 훈련을 통해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데서 생겨납니다. 유대인의 교육 방법은 고기를 잡아 주는 것보다 고기를 잡는 비결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생각하도록 해야 되기 때문에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가장 확실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초 공부 문제를 풀 때 또 소감을 쓸 때 생각하도록 요구받습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안타깝게도 기초 문제를 풀 때 깊이 생각지 않고 단답식으로 풉니다. 아니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또 소감을 쓸 때도 라면식으로 떼우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할 때 자립적인 성경 선생으로 성장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데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탐구심이 필요합니다. 문제의식이 필요합니다. 겸손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생각하기 싫어하는 영적 안일을 부인해야 합니다. 또한 다 안다고 생각하는 교만을 부인해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말씀에 기초하여 생각하는 훈련을 쌓아 나갈 때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빼어난 자립적인 성경 선생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깊은 바다와 같아서 그 속에는 무궁무진한 보화가 숨겨져 있습니다. 바다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같이 보이지만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진기한 보화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늘나라의 각종 진기한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 보화는 생각하는 자만이 캐낼 수 있습니다.
Ⅱ. 자라나는 씨의 비유 (26-29)
예수님은 이제 비유를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으로 시작됩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말씀의 씨를 뿌리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일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것도 말씀의 씨를 뿌리는 성경 선생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성경 선생이 말씀의 씨를 뿌리지 않으면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좀 고생스럽지만 열심히 말씀의 씨를 뿌릴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때로 한 팀의 1대1일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1년 내내 열심히 1대1을 해도 연말에 결산해 보면 잘해야 한 두 명이 남는 것을 보면 공연히 힘을 다해 수고하였다는 피해 의식에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자감만 골라서 효과적으로 양을 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하게 되면 나중에는 한 명도 남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1대1로 말씀의 씨를 뿌리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또 우리 세대에 열매를 맺지 못할지라도 언젠가는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에 참예하였느니라.” (요4:37,38)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열매를 거두는 것은 누군가가 과거에 씨를 뿌린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매에 집착하지 않고 열심히 말씀의 씨를 뿌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계실 때 쉬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또 사도들도 핍박을 받거나 힘든 일이 생길수록 예수님을 본받아 말씀 가르치는 일에 더욱 전념하였습니다 (행2:42, 5:20,42, 6:4). 사도 바울도 가는 곳마다 쉬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제자 디모데에게 엄히 명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떼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딤후4:1)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롬10:17).
둘째, 뿌려진 씨는 스스로 성장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씨는 그 자체에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서 씨를 뿌리면 반드시 자라납니다. 이것은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씨를 뿌리면 자라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는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라 창조주의 능력의 역사로 말미암은 신비스러운 일입니다. 저는 이와나미 요오조오 씨가 지은 『광합성의 세계』라는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이 책은 식물이 광합성 작용을 하는 신비의 세계를 파헤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식물의 잎을 볼 때 대수롭지 않게 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녹색의 잎에는 광합성을 하는 엽록체라는 화학 공장이 있어서 인류의 식량의 근원이 되는 당, 녹말 등의 생산물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은 오늘날 고도로 발달한 과학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신비한 화학 작용입니다. 어떤 유전 공학 박사가 호박씨와 성분이 꼭 같은 씨를 만들어 호박씨와 함께 심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호박씨는 싹이 나고 성장을 하였지만 만든 호박씨는 썩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과학은 생명은 생명에서 나온다는 법칙만을 밝힐 뿐 결코 생명을 창조하지는 못합니다. 씨를 뿌리면 성장한다는 것은 신비에 속한 일입니다.
씨가 자라는 것과 같이 말씀의 씨도 그 자체에 생명이 있어 자랍니다 (히4:12). 말씀의 씨를 뿌리면 처음에는 전혀 자라지 않는 것 같지만 때가 되면 싹이 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것은 신비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때로 내가 말씀의 씨를 뿌렸기 때문에 내가 사람을 키우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는 큰 착각입니다. 우리는 씨가 잘 성장하도록 물을 주고 가꾸는 등 환경을 마련할 뿐이지 성장에 있어서는 전혀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자라게 하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고전3:6).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달을 때 겸손히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밤낮 자고 깨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씨가 성장하는 데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씨는 결코 거짓을 모릅니다. 콩 심었는데 팥이 나고 팥을 심었는데 콩이 나는 법이 결코 없습니다. 씨는 언제나 진실 됩니다. 또 씨는 결코 비약하는 법이 없습니다. 씨가 싹이 난 후에 이삭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곡식이 되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씨는 언제나 단계적으로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결코 조급해서는 안 됩니다. 농사를 짓는 데는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복음 농사를 짓는 데도 믿음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대개 사람을 키우는데 실패하는 것을 보면 인내하지 못하고 조급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씨를 뿌린 후 빨리 싹이 나지 않으면 싹이 나는가 안 나는가 파보고 싶습니다. 또 성장이 느린 것을 보면 개구리 올챙이적 시절을 다 잊어버리고 참지 못하고 모가지를 뽑고자 합니다. 목자는 양이 빨리 성장을 하도록 이것 저것 요구를 하고 푸시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양은 목자의 푸시를 견디다 못해 넘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나 한 모임이 성장하는 데에는 과정이 있음을 알고 인내로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조급한 것은 영적 성장의 가장 큰 원수입니다. 조급한 마음은 불신에서 옵니다.
씨가 성장하는 데에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단계 단계에 맞게 양육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싹이 날 때는 연약하기 때문에 섬세히 돌봐 주어야 합니다. 특별히 환경에 민감하기 때문에 잘 성장할 수 있도록 환경을 잘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적당한 온도, 적당한 수분, 적당한 양분을 공급해 줌으로써 뿌리를 잘 내리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돌보듯이 돌본다고 해서 babysitting이라고 말합니다. 어린 양들은 성장을 위해서 babysitting이 꼭 필요합니다.
둘째 단계는 이삭의 단계로서 뿌리를 내리고 어느 정도 성장한 단계입니다. 이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병충해로부터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때는 말씀을 공부하고 1년 정도 자란 때입니다. 목자는 어느 정도 자랐기 때문에 안심하고 전보다 관심을 적게 쓰고 알아서 스스로 자라도록 방목하기 쉽습니다. 오히려 여기 저기서 요구가 많아집니다. 그러다가 시험에 들어 넘어지게 됩니다. 이삭 단계는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잘 자라도록 끊임없이 보호하고 영양분을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이삭 단계를 지나면 곡식이 맺히게 됩니다. 이때는 충실한 곡식이 맺히도록 햇빛을 많이 받도록 해야 됩니다. 이렇게 열매가 익으면 곧 추수를 하게 됩니다. 추수할 때는 때를 잘 맞추어야 합니다. 추수는 한 개인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최후 심판의 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최후 심판의 날이 이르면 예수님께서 심판장이 되셔서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 버리게 됩니다 (눅3:17). 우리가 인생을 함부로 살 수 없고 두렵고 떨림으로 열매 맺는 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Ⅲ. 겨자씨 비유 (30-34)
예수님은 계속해서 겨자씨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겨자씨는 볼펜으로 점을 찍어 놓은 정도로 작은 씨입니다. 그런데 이 씨를 밭에 심으면 4-7m 가 되는 큰 나무로 자라나 피곤하고 지친 공중의 새들이 찾아와 가지에 깃들며 안식을 얻습니다. 성경에서 큰 나무는 큰 왕국을 상징합니다.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것은 수많은 나라와 백성들이 그리스도 왕국 안에 들어와 영적 쉼을 얻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겔17:23, 31:5,6).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에는 작고 미미한 것에서 시작하지만 자라서 후에는 큰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처음부터 크고 장엄하게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구주가 되시지만 말구유에 초라하고 무력한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이는 당시 천하를 호령하던 로마제국과 비교해 볼 때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점점 자라나 마침내는 거대한 로마 제국을 정복하고 온 세계를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양성도 겨자씨 한 알과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소수의 12명의 제자들에게 믿음의 씨를 심으셨습니다. 당시에는 아무도 이 역사를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 양성 역사는 점점 자라나 마침내 온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UBF 복음 역사도 처음에는 겨자씨와 같이 작고 미미하여 짓밟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점점 자라나 이제는 세계에 영향력을 끼치는 큰 모임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올해는 UBF가 시작된 지 만 30년이 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놀라운 역사를 하셔서 48개국에 630명의 선교사를 파송케 하셨습니다. 세계 선교 보고 대회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기도와 선교사님들의 믿음과 헌신을 받으시고 친히 이루신 놀라운 역사를 증거하는 모임입니다. 우리는 이 모임을 통해 겨자씨와 같은 믿음의 역사가 성장하여 전세계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 백성에게 특히 우리 젊은 지성인들에게 두신 크신 소원을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겨자씨와 같이 부족한 저희들을 통해 전세계에 이루신 놀라운 환상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많은 비유를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33). 예수님은 영세로부터 감추어졌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34). (시78:2)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들이 말씀의 씨를 뿌리는 것을 통해 어둡고 불의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