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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1-20(네 이름이 무엇이냐)

by Mark Yang   08/15/2019  

Question


마가복음 제 13 강


네 이름이 무엇이냐


말씀 : 마가복음 5:1-20
요절 : 마가복음 5:9a

Ⅰ. 더러운 귀신들린 거라사인 (1-5)

1. 예수님께서 어디에 이르셨습니까(1)? 이 곳은 어떤 곳입니까?
2. 예수님이 배에서 나오실 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맞이했습니까(2)? 그는 얼마나 많은 귀신이 들려 있었습니까(9b)? 그가 왜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었을까요(3a)?
3. 사람들은 그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자 했습니까(3b,4)? 오늘날 고랑과 쇠사슬은 무엇일까요? 그러나 왜 이런 것들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까?
4. 귀신들린 사람은 왜 늘 소리를 질렀을까요(5a)? 또 자신을 어떻게 학대했습니까(5b)?

Ⅱ. 귀신을 쫓아내 주신 예수님 (6-20)

1. 그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아보았으며, 또 어떤 심한 괴로움을 겪게 되었습니까(6-8)? 예수님의 말씀의 위력이 어떠함을 알 수 있습니까?
2. 예수님은 그에게 무엇이라 질문했습니까(9)? 그에게 특별히 이름을 물으신 데는 무슨 뜻이 있을까요? 그의 정체가 어떻게 드러났습니까?
3. 귀신들은 왜 그 지방에서 떠나지 않고자 했을까요(10)? 또 어떤 희생을 요구했습니까(11,12)? 귀신은 왜 예수님의 허락을 필요로 했습니까?
4. 예수님이 허락하시자 돼지 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13)?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2천 마리의 돼지 떼를 희생시키신 예수님에 대해 생각해 보시오.
5. 동네 사람들은 그 사람이 어떻게 변화된 것을 보게 되었습니까(14,15)? 이 놀라운 일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15b-17)? 그들은 왜 예수님이 떠나기를 간구했을까요?
6. 귀신 들렸던 사람은 왜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간구했습니까(18)?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무슨 사명을 주셨습니까(19)? 예수님께서 그를 통해 데가볼리 지방에 알리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19,20)?


Message


마가복음 제 13 강


네 이름이 무엇이냐


말씀 : 마가복음 5:1-20
요절 : 마가복음 5:9a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자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 중 가장 귀한 선물 중의 하나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부족함이 없는 환경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자유가 없을 때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인간은 자유를 사랑하고 갈구합니다. 그리고 자유가 유린당할 때 이를 얻고자 피흘리기까지 투쟁합니다. 그만큼 자유는 인간에게 있어서 소중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자유를 갈구하다 더러운 귀신 들려 울부짖는 한 젊은 청년이 나옵니다. 그 청년은 군대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청년을 불쌍히 여기시고 귀신들을 쫓아내 주심으로 진정한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인간을 괴롭히고 못쓰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 무엇이며, 어떻게 고침을 받을 수 있는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Ⅰ. 더러운 귀신들린 거라사인 (1-5)
예수님 일행은 광풍을 헤치고 마침내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너비가 약 12km에 불과하므로 그날 저물 때 출발하여 광풍을 만났어도 한밤중이나 이른 새벽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거라사 지방은 갈릴리 바다 동남편에 위치하고 있는 한 도시입니다. 데가볼리(Deca-Polis)란 10도시란 뜻입니다. 이곳은 본래 유대 지방이었으나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점령한 후 희랍식 도시로 건설하여 헬라의 이주민들이 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헬라 신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B.C 63년에는 로마 황제 폼페이우스에게 정복당하여 로마의 행정구역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곳에는 로마 제 14군단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자마자 예수님을 맞이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무덤 사이에서 거처하고 있는 더러운 귀신들린 자였습니다. 눅8:27절에서는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서 거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왜 옷을 벗고 있었을까요? 너무 더워서 벗었을까요? 몸에 열이 나서 답답하여 견딜 수 없어 벗었을까요? 아니면 옷은 문화를 상징하기 때문에 히피와 같이 문화에 대한 반발로 벗었을까요? 어쨌든 그의 내면은 반발심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는 기존 문화에 반발하고 기성세대에 반발하고 모든 것에 반발했습니다.
또 그는 무덤 사이에서 거처하고 있었습니다. 무덤은 송장 썩는 냄새가 나며 죽음의 요소로 가득차 있는 음산한 곳으로서 낮이라도 그곳에 가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그는 가정과 사회를 떠나 무덤을 거처 삼아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무덤 사이에서 사는 것을 볼 때 그의 내면이 무덤과 같이 어둡고 부정적이고 죽음의 요소로 가득차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가 왜 가정과 사회를 떠나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요? 가정과 사회가 그를 속박하는 감옥처럼 느껴져서 자유를 찾아 이곳으로 왔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단절하고 어두운 방안이나 만화방, 오락실, 영화관, 술집, 디스코텍, 도서관 등을 무덤 삼아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놓고 그 영혼이 허무와 절망의 심연에서 곤두박질 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자 했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사람들은 그가 미쳐 날뛰며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그를 고랑과 쇠사슬로 묶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그는 어디서 힘이 났는지 초자연적인 힘으로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무도 그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랑을 깨뜨리고 쇠사슬을 끊기 위해 몸부림을 치며 발광을 했기 때문에 온 몸은 멍들고 상처투성이였습니다. 또한 제대로 먹지 못해 흉한 짐승의 몰골과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문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왜 이렇게 미쳐 날뛰는가 하는 그의 내면 문제에 관심을 갖기보다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지 못하도록 외적 행동만 규제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더욱 반항하며 발광했습니다. 고랑과 쇠사슬은 사람의 외적 행동은 규제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면 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도 법이나 제도, 최루탄이나 쇠파이프와 같은 쇠사슬과 고랑으로 성난 젊은이들을 묶어 두고자 합니다. 그러나 쇠사슬과 고랑은 사람을 더욱 반항적이 되게 하고 파괴적이 되게 할뿐입니다.
그러면 그가 왜 이렇게 몹쓸 인간이 되었을까요? 인간은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고귀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고귀한 인간이 왜 이렇게 추하고 더러운 인간이 된 것입니까? 이는 그가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렇게 된 데에는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로마 군인들이 헬멧을 쓰고 창칼을 번득이며 사람을 마구 죽이는 것을 보고 의분을 참지 못해 이에 반항하다가 미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그가 가정과 사회를 떠나 무덤 사이에서 거처하는 것을 볼 때 가정과 사회가 그를 미치게 했는지 모릅니다. 가정과 사회의 환경이 한 인간의 인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합니다. 대개 문제의 아이 이면에는 문제의 부모가 있다고 합니다. 부모들은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그릇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자식들에게도 그렇게 살도록 강요합니다. 그러면 자식은 부모님의 기대를 감당치 못해 반발하다가 서서히 미치게 됩니다. 오늘날은 정욕으로 인해 파괴된 가정이 날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파괴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애정 결핍과 부모에 대한 증오심으로 내면에 깊은 상처를 안고 가정의 안식처를 잃고 괴로워하다가 미치게 됩니다.
또한 거라사인이 살고 있는 사회는 하나님이 없는 이방 사회로서 물질 위주의 사회였습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물질에 기초하여 가치를 평가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돈을 많이 벌면 존경을 받고 아무리 인격이 고상하고 가치있는 일을 한다 할지라도 돈을 벌지 못하면 무시를 당합니다. 이러한 사회의 가치 풍조 때문에 사람들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돈을 벌고자 몸부림칩니다. 결국 돈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그는 도시 사람이었습니다. 도시는 조직 사회입니다. 문명이 발달하여 조직화되고 세분화될수록 인간성이 상실되고 인간은 점점 기계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의 제도나 조직이 쇠사슬과 같이 느껴져서 이에 대한 반항심 때문에 미치는 젊은이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모름지기 가치관이 전도되어 인격이 짓밟히고 인간이 물질이나 제도의 노예가 될 때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미치게 하는 가장 주된 요인은 외적인 요인보다 인간의 내면에 끊임없이 역사하는 죄의 소욕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한 이후 그 내면에 죄의 소욕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죄의 소욕에 시달리게 되면 이성을 잃고 자제력을 상실하게 되어 죄를 범하게 됩니다. 죄를 범하게 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의식으로 인해 고통하게 됩니다. 사람이 미치게 되는 대부분의 경우가 죄의식 때문이라고 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정욕 문제가 미치게 하는 주원인이 됩니다. 거라사인이 살고 있는 곳은 군인들이 주둔하는 곳이었습니다. 군인들이 살고 있는 곳에는 음란과 강포가 난무하기 마련입니다. 이 청년은 음란한 분위기 가운데 살면서 죄의 소욕에 시달리다가 호기심에 이끌려 죄를 범한 후 심한 죄의식으로 인해 미치게 되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죄를 즐기려다가 사단에게 붙잡혀 악령에 시달리는 것을 봅니다.
거라사인은 쇠사슬과 고랑을 끊고 가정과 사회를 떠나 무덤에 왔습니다. 자신을 얽매이게 하는 것같이 생각되는 옷도 다 벗어 버렸습니다. 그는 이제 참 자유인이 된 것같이 보입니다. 그는 가정과 사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으로부터는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그는 해결되지 않는 내면 문제를 안고 무덤과 산을 뛰어다니며 짐승과 같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채워지지 않는 욕구 불만으로 인해 술을 마시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부릅니다. 또한 기존 모든 사회 질서를 부정하고 반항적이고 파괴적이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해서 욕구불만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돌로 자기 몸을 짓찧는 자학 행위를 하게 됩니다. 자학 행위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남과 비교하여 자신을 열등한 인간으로 비하시키고 나는 쓸모 없는 존재라고 자학합니다. 어떤 사람은 방안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TV를 보며 잠을 잡니다. 또 어떤 사람은 컴퓨터 오락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쾌락에 몸을 내 맡기고 인생을 되는 대로 살아갑니다. 심하면 분신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인간을 파괴시키고자 하는 사단의 시도입니다. 이렇게 자학하는 자들은 생각이 부정적이고 운명적이고 냉소적입니다. 이런 자는 사회를 부정하고 다른 사람을 부정하고 자기를 부정합니다. 그리고 어디론가 도피하고자 부단히 노력하지만 그를 강하게 사로잡고 있는 귀신의 세력 때문에 결코 도피할 수 없습니다. 거라사인은 도피자의 심리에서 오는 불안, 초조, 두려움, 증오심, 허무와 절망을 안고 무덤 사이에서 곤두박질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점점 멸망의 구렁텅이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구원이 절실히 필요한 자였습니다.
Ⅱ. 귀신을 쫓아내 주신 예수님 (6-17)
예수님께서 풍랑을 헤치고 거라사 지방에 이르렀을 때 한 젊은이가 벗은 몸으로 꽥꽥 소리를 지르면서 무덤 사이에서 곤두박질하고 있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시자마자 불쌍히 여기시고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넙죽 엎드려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그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 본 것은 귀신 들렸기 때문입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의 신적 기원과 초월적인 권능을 알고 두려워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절을 하였지만 경배하거나 신앙고백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멸망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괴롭게 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귀신들린 자의 특징은 말씀에 대해 반발하고 관계성 맺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 공부를 더 이상 못하겠다는 자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주 심방을 가게 되면 제발 나를 괴롭게 말아 달라고 간청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말씀이 그 심령에 역사하자 귀신들이 뛰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양들을 인격적으로 대한다고 내버려두거나 또 양을 괘씸하게 생각하고 분노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사단의 궤술에 속아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예수님의 인간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를 만나자마자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그가 육체 뿐 아니라 영혼을 가진 존재로 보셨습니다. 그의 육체는 상할 대로 상하여 마치 산에서 울부짖는 짐승과 같이 보였습니다. 이런 겉모습을 보면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겉모습을 보지 않으시고 그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영혼을 지닌 고귀한 존재로 보셨습니다. 인간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에 따라서 치료 방법도 달라집니다. 칼 막스는 유물론적 차원에서 인간을 단지 물질로 구성된 존재로 보았습니다. 공산 국가에서는 이를 기초로 종교를 말살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종교를 말살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소련이 개방되어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모스크바 대학생들은 얼마나 갈급했는지 어학도 제대로 못하는 우리 선교사님들의 전도를 받고 여름 수양회에 현재 120명이 등록되었습니다. 인간을 물질과 정신의 차원에서만 보는 인간관 때문에 귀신들린 자는 날마다 늘어나게 되고 치료도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은 육체와 함께 영혼을 가진 존재로 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그 사람과 귀신을 분리하여 보셨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귀신 들린 자를 볼 때 그 사람 자체가 못쓰게 된 것으로 생각하고 소망을 끊어 버립니다. 그리고 쇠사슬과 고랑으로 묶어 두고 식물 인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는 귀신의 존재를 인정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사람 자체가 못쓰게 된 것이 아니라 귀신이 그 영혼을 사로잡아 파멸시키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 사람을 괴롭히고 못쓰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 귀신이므로 귀신만 쫓아내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본래의 자아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의사가 병든 자를 볼 때 병이 그 사람을 괴롭히고 있으므로 병만 고쳐 주면 그 사람은 건강하게 될 수 있다고 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거라사인을 보셨을 때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 속에 역사하는 귀신과 싸우시고 그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귀신이 그 사람 안에서 날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마음에 분열 현상이 일어나서 더 심한 괴로움에 시달렸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괴로워한다고 물러나지 않으시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도전하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라고 이상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군대란 레기온 즉, 로마 군인 6,000명으로 구성된 군단을 말합니다. 이를 볼 때 그에게는 6000마리의 떼 귀신이 역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욕 귀신, 교만 귀신, 증오심 귀신, 탐욕 귀신, 시기심 귀신, 안일 귀신, 물질 귀신, 음란 귀신, 열등감 귀신 등 갖가지 귀신들이 그의 마음에 자리잡고 그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이름을 물어 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귀신의 정체를 폭로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귀신은 속이는 것이 속성입니다. 귀신은 거짓의 아비로서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입니다 (요8:44). 얼마나 교묘하게 거짓말을 하는지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듣지 않으면 참말처럼 들려서 속게 됩니다. 귀신은 귀신의 존재를 숨기고 다른 원인 때문에 그렇게 된 것처럼 인식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귀신은 그 정체가 폭로될 때 전혀 힘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령하셨으나 귀신은 그에게서 나가지 않기 위해 속이고자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 이름을 물으심으로 귀신의 정체를 폭로시킨 것입니다.
둘째로, 그의 존재 의미를 깨우쳐 주심으로 본래의 자아를 회복토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름이란 그 사람의 인격과 전존재를 나타냅니다. 이때까지 그 사람은 귀신에게 사로잡혀 참된 자아를 상실하고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귀신이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상실하고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배반한 결과 중 가장 비참한 것은 존재 의미를 잃고 자아를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에게 찾아 오셔서 가장 먼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창3:9). 이는 네 존재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세상 명예와 사랑과 물질을 추구하다 자아를 상실하고 한계 상황에 부딪혀 절망하고 있는 야곱에게도 찾아 오셔서 동일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창32:27).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는 예수님의 사랑의 질문이었습니다. 여기에는 한 몹쓸 영혼에 대한 예수님의 놀라운 목자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파멸해 가는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피곤을 무릅쓰시고 어찌하든지 그를 귀신의 세력에서부터 구원해 내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적극적으로 도전하셔서 그와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고자 하셨습니다. 그의 문제는 귀신 때문에 사람들과 관계성이 단절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가정과 사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놓고 거기서 뛰고 있었습니다. 그는 귀신 때문에 어느 누구와도 바른 관계성을 맺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과도 바른 관계성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 단절에서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단절되자 인간 상호간의 관계성도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단절된 것은 생명의 근원에서 끊어진 것으로서 그 자체가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름을 물어 보심으로 그와 바른 관계성을 맺고자 하셨습니다.
성서적으로 볼 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모두 다 사단의 노예가 되어 자아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자아를 상실한 인간은 모두 다 귀신의 세력에 잡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10마리, 100마리, 어떤 사람은 1000마리, 6000마리 등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자신도 모르게 귀신의 조종을 받고 있습니다. 귀신의 세력은 강하여서 우리의 힘과 의지로는 도저히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귀신의 세력을 물리치려면 그보다 더 강한 세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강한 귀신의 세력을 결박하실 수 있는 더 강하신 분이십니다 (막3:27). 예수님만이 귀신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세력을 멸하시고 인간들을 마귀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히2:14).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정체가 폭로된 귀신들은 더 이상 그 사람 속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나가지 않고 돼지 떼에게로 들어갈 수 있도록 간구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허락하셨습니다. 그러자 귀신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갔습니다. 돼지들은 언제나 먹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돼지가 귀신들리자 갑자기 식욕을 잃고 꿀꿀거리며 브레이크 댄스를 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몸에서 열이 나는지 자기들의 옷인 털을 마구 뽑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답답했는지 일제히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로 다이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얼마 동안 허우적거리다가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귀신들렸던 사람이 정신이 온전하여졌습니다. 그는 이제 단정히 옷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한 몹쓸 인간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온전하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실로 기이한 역사였습니다. 그들은 이 기이한 역사를 보고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영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물질적인 희생으로 인해 손해 의식에 사로잡혀 심령이 막혀 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에게 찾아오신 생명의 구주를 스스로 쫓아 보내는 큰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Ⅲ. 사명을 주신 예수님 (18-20)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위해 배에 오르셨습니다. 이때 귀신 들렸던 자가 예수님과 함께 가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기이한 사랑에 감격하여 영원토록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허락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예수님은 그에게 주께서 그를 얼마나 불쌍히 여기시고 그에게 큰 일을 행하셨는가 구원의 은혜를 증거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구속받은 성도들이 힘써 감당해야 할 사명은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불쌍히 여기시고 큰 일을 행하셨는가 하는 내 속에 이루신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입니다 (벧전 2:9). 예수님은 그를 데가볼리 선교 지부장으로 임명하셨습니다. 그는 온 데가볼리를 돌아다니며 주님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큰 일을 전파했습니다. 예수님은 헬라 이방 세계에 한 알의 씨를 남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명도 주셨습니다. 로마서 1:5절은 말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구원의 은혜를 받고 사명을 감당치 아니하면 과거 구원의 은혜를 받기 전보다 더 심한 상태로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는 반드시 사명을 감당해야 됩니다. 사명은 우리를 부담스럽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은 인간을 위대하게 하고 가치있게 하고 값지게 합니다. 구원의 은혜를 기초로 사명인의 인생을 사는 것은 그 자체가 말할 수 없는 큰 은혜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은 자유를 갈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자유로운 것 같지만 참 자유가 없습니다. 이는 죄로 말미암아 사단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강한 사단의 권세를 멸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사단의 권세를 파하시고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도 귀신 들려 자아를 상실하고 울부짖고 있는 인생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생명을 주시기 위해 질문하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