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 15 강
열두 제자를 내보내신 예수님
말씀 : 마가복음 6:1-29
요절 : 마가복음 6:7
Ⅰ. 고향에서 배척받으신 예수님 (1-6)
1.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어디를 떠나 어디로 가셨습니까(1)? 오랜만에 고향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2.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까(2a)?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무슨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까(2)? 이를 통해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심을 믿어야 했습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을 배척했습니까(3)?
3. 예수님은 그들의 배척을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4)? 그리고 거기서 무슨 일만 하셨습니까(5)? 예수님은 그들의 어떤 점을 이상히 여기셨습니까(6)? 여기서 볼 때 예수님께서 무엇을 근거로 권능을 행하십니까?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이 무엇을 배웠을까요?
Ⅱ. 제자들의 전도 훈련 (7-29)
1. 고향에서 배척받으신 예수님은 낙심하시기보다도 도리어 무엇을 하셨습니까(6b)? 그리고 어떻게 더 적극적으로 역사를 이루고자 하셨습니까(7)?
2. 예수님은 제자들을 왜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을까요? 예수님은 그들을 보내시면서 무슨 권세를 주셨습니까(7)?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서 싸워야 할 근본 원수가 무엇입니까? (엡6:12)
3. 여행을 위해 무엇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까(8,9)? 왜 이런 것들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마6:32,33, 딤후2:6)
4. 그들은 왜 한 집에서만 머물러야 합니까(10)?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11)?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5. 제자들이 나가서 무엇을 전파했으며, 어떤 권능을 행했습니까(12,13)? 그 결과 누구의 이름이 드러났으며, 세상이 얼마나 떠들썩했습니까(14,15)?
6. 헤롯은 세례요한이 의인인 줄 알면서 왜 그를 죽이지 않으면 안되었습니까(17-29)? 이 사건을 통해서 볼 때 그 시대 형편이 어떠했음을 알 수 있습니까?
마가복음 제 15 강
열두 제자를 내보내신 예수님
말씀 : 마가복음 6:1-29
요절 : 마가복음 6: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
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본문에는 불신과 믿음의 역사가 대조되어 나옵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이 인간적인 생각을 하고 불신하였을 때 아무 능력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믿는 제자들을 통하여서 큰 능력의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그 시대는 한 마디로 불신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시대에 제자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키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부르사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 주시고, 사건 사건을 통하여서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들을 세상에 내보내사 자립적으로 복음 역사를 섬길 수 있도록 훈련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쓰실 만한 사람이 되려면 인간적인 생각에 기초한 불신을 회개하고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
Ⅰ. 고향에서 배척받으신 예수님 (1-6)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복음 역사를 감당해 오시다가 오랜만에 고향 나사렛으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고향을 떠나실 때는 혼자 떠났지만 이제는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금의환향하셨습니다. 고향은 언제나 그립고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그래서 명절이 되면 고향으로 내려가는 사람들로 붐빕니다. 고향에 가면 마음이 풀어져서 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인간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향에 가셔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2a) 이를 볼 때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신 목적은 부모 친척들과 친지들을 만나 회포를 풀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고향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심으로 믿음을 심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메시야로서의 능력과 지혜를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지혜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성현들의 가르침은 아무리 위대하다 할지라도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죄사함의 은혜를 줍니다. 또한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분명한 영적 가치관을 세워 주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새 사람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의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요7:16,17). 예수님의 말씀의 지혜와 그의 행하신 권능의 역사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약속된 메시야이심을 증거해 줍니다 (요5:36,7:16,17).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 가르치심을 듣고 그 지혜에 놀랐습니다. 또한 그 행하시는 권능의 역사를 보고 놀랐습니다. 그들은 이를 통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된 메시야이심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고향에서 메시야가 난 것을 크게 기뻐하고 마을 축제를 열어 대대적인 환영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 한지라”(2b,3).
그들은 예수님을 믿을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그 권능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외면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 예수님의 입은 옷은 초라하고 아무 가진 것도 없고 Ph.D와 같은 타이틀이나 세상 권세도 없는 초라한 노동자의 아들에 불과했습니다. 그의 제자들도 꾀죄죄하여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선입관과 편견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외모로 판단했습니다. 또한 자신들을 예수님과 동등시하는 교만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이 그들을 교만하게 하고, 교만은 그들의 영적인 눈을 멀게 했습니다. 그들은 가장 가까이서 예수님을 보고 듣고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큰 특권을 받았지만 교만과 불신 때문에 모든 축복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어느 민족보다도 많은 은혜와 특권을 받았지만 인간적인 생각으로 인한 교만과 불신 때문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큰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볼 때 인간적인 생각이 복음의 큰 원수임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건을 볼 때 인간적인 눈으로 볼 수도 있고 영적인 눈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 편에서 볼 수 있고 하나님 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느 편에서 보는가에 따라 그 결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마음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이 세우신 종도 우습게 보고 판단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가 모든 진심을 드려 예수님께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었을 때 인간적인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허비한다고 생각하고 분을 내었습니다 (요12:3,4).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의 모든 진심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하시며 놀랍게 축복하셨습니다 (막14:9). 결국 가룟 유다는 인간적인 생각을 하다가 구원의 은혜마저 배반하고 생명의 구주를 파는 엄청난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의 교만과 불신으로 인해 심히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감상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시고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는 속담을 인용하여 그들의 배척에 응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으로 인해 아무 권능도 행하지 못하시고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의 불신으로 인해 예수님의 능력이 제한 받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능력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제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통해 그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성장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원한다면 인간적인 생각에 기초한 불신과 교만을 회개하고 영적인 생각을 하며 믿음과 겸손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거나 배척을 받으면 낙심하여 일할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또 복음 역사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에 시달리게 되어 소극적이 됩니다. 그러나 6b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더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결코 낙심치 않는 메시야이십니다 (사42:4). 세상에는 복음을 배척하는 자도 있지만 복음을 영접하는 자도 있습니다. 아무런 영적 소원도 없고 세상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진 자도 있지만, 내면이 순수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진리를 사랑하는 소수의 영적인 사람들을 통해서 계승 발전 확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고향에서 배척받으신 예수님을 공부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이 무엇을 배웠을까요? 그들은 인간적인 생각이 얼마나 복음의 큰 원수인가를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 역사를 섬기면서 고향에 가고자 하는 마음이 많이 있었는데 이 사건을 통해서 고향에 가고자 하는 생각이 싹 사라졌을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배척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 동안 그들은 어디를 가나 인기가 많으신 예수님을 보고 자신들도 그렇게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배척받으신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시고 외면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 가룟 유다로부터 배반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인생들로부터 철저히 배척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 가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53:3). 예수님은 사람들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 되셨습니다 (벧전2:3).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영적 지도자가 되려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고 존경받는 목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부인하고 배척받으신 예수님을 겸손하게 배워야 합니다.
Ⅱ. 제자들의 전도 훈련 (7-29)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받으신 후 낙심치 않으시고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순회 전도를 하시면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 방황하는 양무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마9:36). 예수님은 추수할 것은 많지만 추수할 일꾼이 심히 부족함을 보시고 적극적으로 추수할 일꾼을 양성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내보내신 것은 첫째는, 제자들의 마음에 자립신앙을 심어 추수할 일꾼으로 키우고자 하심이요, 둘째는, 어린 제자들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코자 하심이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 둘씩 내보내셨습니다. 하나씩 보내면 많은 곳에 보내어 더 큰 역사를 이룰 수 있을 텐데 왜 둘씩 보내셨을까요? 이는 하나님의 역사는 동역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하게 되면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낙심하여 사단의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어떤 분은 혼자서 fishing을 나갔다가 잘 안되자 벤취에서 하루 종일 잠을 잤다고 합니다. 그러나 둘씩 가면 서로 격려하며 합심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전도서 4:9,10절은 말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의 합심 동역 역사는 위대한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마18:19)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실 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영적 권세를 주셨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능력 있는 복음의 종이 되려면 많은 신학적인 지식과 박사 학위와 같은 타이틀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인간의 능력과 지혜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능력 있게 감당하려면 위로부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영적 권세를 덧입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 사단과의 영적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엡6:12).
8,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들이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행을 위해서는 먹을 것을 준비하고 옷을 준비하고 돈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철저히 금했을까요? 이는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함이었습니다. 우리는 복음 역사를 섬길 때 물질을 의지하거나 사람을 의지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영력을 상실하고 무기력하게 되어 버립니다. 저는 개척 초기에 제 주위에 있는 훌륭한 평신도 목자님들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때 아무리 힘을 쓰려고 해도 힘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말씀 공부를 통해 의존심이 나를 무기력하게 하고 쓸모 없게 만듦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심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기 시작하였을 때 하나님은 제게 개척 역사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세상을 감당할 만한 능력있는 영적 지도자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이 자립 신앙을 갖도록 철저히 훈련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할 때 아무 것도 안 가지고 가면 의식주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1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친히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은 복음의 일꾼들을 영접하고 섬기는 자들을 예비하사 섬기게 하십니다. 이때 그들은 영접하는 자의 집에서 떠나기까지 머물러야 합니다. 반찬이 좋지 않다거나 잠자리가 불편하다고 해서 이 집, 저 집 옮겨 다녀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들을 영접치 않는 자에 대해서는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고 하십니다(11).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때 영접하는 자들이 있고 영접치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배척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때 우리는 기가 죽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또 부정적인 생각에 시달리며 불의에 빠지거나 또 혹시 복음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고 회의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나 시대 상황에 맞게 타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결코 어떤 경우에서나 타협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어떤 시대 상황에서도 분명하게 선포되어야 하는 절대성과 우월성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복음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빛을 싫어하고 어두움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요3:19-21). 그러므로 복음의 종들은 예수님의 전권대사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분명한 자세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또 복음을 영접치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야 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했습니다. 그들은 회개의 복음을 담대히 전파했습니다. NIV 영어 성경에 보면 “People should repent” (모든 사람이 회개해야 된다)고 전파했습니다. 이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계층, 모든 나라,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 앞에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롬3:23). 죄의 결과는 치명적입니다. 인간은 죄 때문에 육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죽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생각하고 육신의 쾌락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 (히9:27). 이 심판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하는 둘째 사망입니다 (계21:8). 이처럼 인간은 죄 때문에 영원히 멸망할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까? 이는 고행을 해도 안 되고 선한 일을 해도 안 되고 울어도 안 됩니다. 이는 오직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진실되게 회개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셔서 우리가 십자가의 강도와 같이 어떤 몹쓸 죄를 지었을지라도 진실되게 회개하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죄사함의 은혜를 주십니다. 요한 I서 1:9절은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반드시 사죄의 은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회개는 구원의 필수 요건입니다.
사람들은 회개해야 죄사함 받고 구원에 이르는 줄 알지만 회개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회개하도록 하면 강한 거부 반응을 나타냅니다. 이는 회개하게 되면 변화되어 더 이상 인생을 즐기지 못하고 아무 재미가 없는 고리타분한 인생을 살 것 같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는 인기가 없고 미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지 아니할 때 결코 생명 구원 역사를 이룰 수 없습니다. 생명 구원 역사는 반드시 회개를 통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메시지는 사랑의 메시지요, 구원의 메시지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전권대사로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듣기 좋은 아름다운 메시지를 전하기보다 좀 부담스럽고 힘들지만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죄와 타협치 않고 내면의 죄 문제와 싸웠습니다. 이로 인해 왕궁에 있는 헤롯이 놀랄 정도로 큰 능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회개의 메시지를 전할뿐만 아니라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를 고쳐 주었습니다.
제자들의 전도 여행을 통해 나타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14a). 그들은 자기 광을 내지 않고 두렵고 떨림으로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했습니다 (벧전2:9). 그 결과 사람들의 반응이 여러 모양으로 나타났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을 엘리야라 하고 어떤 이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헤롯은 자기가 목베인 세례 요한이 살아났다고 생각하고 놀랐습니다. 헤롯은 왕복을 입고 왕궁에 거하며 모든 사람으로부터 섬김을 받았으나 내면의 죄로 인해 행복은 커녕 늘 불안하고 악령에 시달렸습니다. 복음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자 그는 보좌에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17-29절은 의인 세례 요한이 어떻게 목베어 죽임을 당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이 동생의 아내를 취하였을 때 그가 비록 왕이지만 그의 행위가 옳지 않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러자 헤롯은 헤로디아를 위하여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생일날 요사스러운 헤로디아의 간계에 넘어가 요한을 목베어 죽였습니다. 그 시대는 마치 이세벨이 조종하는 아합 시대와 같았습니다. 그 시대는 한마디로 음란하고 불의한 시대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복음 역사를 감당하시던 시대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어려운 시대에 열 두 제자를 내보내시고 자립적인 믿음의 사람으로 키우셨습니다. 열 두 제자를 통한 복음 전파의 역사는 작고 미미한 일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역사야말로 온 나라를 진동시키고 시대의 흐름을 바꾸고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하는 역사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제자들을 험한 세상에 내 보내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불신 세상에 나가서 믿음으로 도전하고 싸우는 가운데 믿음의 용사로 성장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품에 안고 연약하게 키우지 않으셨습니다. 이들을 세계를 감당할 만한 영적 장군으로 키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 양성을 통하여 힘든 그 시대를 이기시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섬기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음란하고 불의한 세대에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 담대한 믿음의 용사들로 성장해야 겠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과 같이 이런 복음의 일꾼들을 키우는 제자 양성가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