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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8-마가복음 7:24-37(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by Mark Yang   08/15/2019  

Question


마가복음 제 18 강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말씀 : 마가복음 7:24-37
요절 : 마가복음 7:29

I. 이 말을 하였으니 (24-29)

1.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셨습니까(24)? 예수님은 왜 자신을 숨기려고 하셨을까요? 그러나 왜 숨길 수 없었습니까?
2. 어떤 여자가 예수님께로 왔습니까(25,26)? 딸에 대한 그녀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 여자는 얼마나 절실하게 예수님께 기도했습니까?
3. 그러나 예수님은 왜 냉정하게 거절하셨습니까(27)? 여기서 ‘자녀’, ‘개’는 각각 누구를 가리킵니까?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왜 이런 차별이 생기게 되었습니까? 유대인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롬1:16a)
4. 예수님께로부터 모욕적인 말을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나타내기 쉬웠을까요? 그러나 수로보니게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졌습니까(28)? 그리고 예수님께 무엇을 간구했습니까(28b)?
5. 예수님은 무엇을 기초로 이 여인을 축복하셨습니까(29,30)? 예수님은 여자의 어떤 점에 감동을 받으셨습니까? 우리가 무엇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까?

II. 열리라 (31-37)

1. 예수님께서 어느 지역을 다니셨습니까(31)? 이 시점에 예수님께서 왜 이방 지역을 다니셨을까요? 거기서 사람들이 어떤 답답한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까(32)? 그들은 어떤 믿음이 있었습니까?
2. 예수님은 그 사람을 왜 따로 데리고 갔을까요(33a)? 그리고 무슨 특이한 행동을 하셨습니까(33b)? 왜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탄식하셨을까요(34a)? 귀 먹은 자가 특히 어떤 점에서 예수님의 슬픔이 될까요?
3. 예수님이 그에게 무엇이라고 명령하셨습니까(34b)? 이에 그의 귀와 혀가 어떻게 되었습니까(35)? 이 사건이 예수님에 대해 말해 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눅7:22, 사32:1,4)
4. 이 세대에서 영적으로 귀 먹고 어눌한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그들의 귀가 어떻게 열릴 수 있습니까?
5. 예수님께서는 왜 그 사건이 퍼져 나가는 것을 막고자 하셨을까요(36)? 사람들은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어떻게 여겼습니까(37)?


Message


마가복음 제 18 강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말씀 : 마가복음 7:24-37
요절 : 마가복음 7:2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지난 강의에서 우리는 외식하는 바리새인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은 겉은 깨끗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경건한 자 같았으나, 속은 위선과 여러 가지 죄악으로 가득찬 더러운 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와 대조적인 수로보니게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유대인들이 더럽게 여기는 이방 여인이요, 또한 귀신들린 딸을 가진 초라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딸에 대한 불타는 사랑이 있는 심정의 여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감동시킬 만큼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수로보니게 여인의 위대한 믿음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주여 옳소이다 (24-28)

2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을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셨습니다. 두로는 가버나움 서북 65Km지점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로써 과거 지중해의 상권을 쥐고 있던 베니게(페니키아)의 수도였습니다. 페니키아 사람들은 알파벳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한 집에 들어가 조용히 쉬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을 정점으로 2년 6개월간의 갈릴리 사역을 마무리 지으시고 이곳 한적한 북방 지역으로 오셔서 제자들과 보다 많은 시간을 갖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소문이 이곳까지 퍼져서 도저히 자신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어디서나 문제 많은 양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귀신들린 딸을 둔 여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우리 모임에는 어린 딸을 둔 사모님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공통된 의견은 아들을 키우는 것보다 딸을 키우는 것이 더 재미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아들은 개구장이라도 좋으니 씩씩하게 자라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딸들은 곱게, 예쁘게 자라 주기를 바랍니다. 이 여인은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딸에게 비싼 파스퇴르 우유만 사 먹여 키웠습니다. 값비싼 좋은 옷을 사서 입히고, 머리도 예쁘게 빗어 주고 꽃핀도 꽂아 주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미술 학원, 피아노 학원에 다니게 하였습니다. 어린이 피아노 콩쿨 대회에서 입상을 했을 때에는 비디오 촬영도 하고 사진을 벽에 걸어 놓고 찾아오는 사람들마다 이를 보이며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딸 아이의 눈동자가 이상해지더니 귀신들린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맨발을 벗고 뛰어 다니더니 흙발로 남의 집 안방에도 들어갔습니다. 또 동네 개에게 물리기도 하고 장마 때에는 쎄느강에 뛰어 들어가 몇 번이나 빠져 죽을 뻔 하였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아프기만 해도 염려스럽고 심령이 편치 않습니다. 그런데 금이야 옥이야 하며 키워 온 사랑하는 딸이 더러운 귀신 들려 거라사 소녀가 되어 뛰어 다니며 밤마다 발작하고 울부짖을 때 그 심령이 어떠했겠습니까? 딸을 고쳐 보고자 유명한 정신과 의사에게 데려가기도 하고 온갖 노력을 다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 때 여인은 찢어지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한없이 눈물만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인은 큰 슬픔과 근심으로 인해 인생 살 맛을 잃었습니다. 이 정도 되면 아무리 사랑하는 딸이라 해도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딸에 대한 모정이 어떠했습니까?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자마자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내 주시도록 간절히 구했습니다.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헬라인은 헬라 문명을 꽃피운 사람들로서 철학과 지혜를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을 야만인 취급하는 등 문화적으로 우월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수로보니게란 ‘수리아’(지금의 시리아)와 ‘베니게’(지금의 레바논, 역사적으로는 페니키아) 지역을 합병한데서 나온 이름입니다. 특히 베니게인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문화적, 민족적 배경을 가진 여인이 유대인이신 예수님 앞에 나와 엎드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인은 어찌하든지 어린 딸을 구하여야겠다는 한가지 이유 때문에 민족적, 문화적 배경을 다 극복하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꿇어 엎드렸습니다. “내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세요. 제발 저의 딸을 구해 주세요.” 여인의 기도는 참으로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이 여인의 모정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 말씀은 여인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자녀’란 선민 이스라엘을 가리키며, ‘개’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 취급하며 무시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때까지 도움을 청한 자들을 한번도 외면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자기에게 믿음으로 나아 오기만 하면 기쁜 마음으로 영접하시고 도와 주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여인들의 괴로움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운 부도덕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 좀 달라”하는 아쉬운 소리를 하시며 영생수를 주셨습니다. 외아들을 잃고 슬피 우는 나인성의 과부를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위로하시며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도와주시기는 커녕 이 여인을 개 취급하시며 모욕적인 말로 물리치셨습니다. 한 마디로 너는 선민이 아니기 때문에 은혜를 베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만민의 구주가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정말 이 말씀은 예수님 답지 않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일을 너무 많이 하셔서 과로하여 헛소리 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데 아무리 이방인이라고 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직접 대놓고 개 취급을 하다니 이는 참으로 참기 힘든 일입니다. 사람이 가장 참기 힘든 것은 사람들 앞에서 무시를 받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어떤 목자님의 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 자식들을 모아 놓고 ‘자존심이 꺾이는 날에는 자살을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우리는 목자 생활을 하면서 새까만 후배들로부터 무시 받고 자존심이 상할 때가 많습니다. 수양회 때 양들을 초청하느라고 멀리 지방까지 몇 시간씩 차를 타고 심방을 갔는데 문 앞에서 얼굴 한번 쳐다보더니 말 한마디 없이 대문을 닫아 버릴 때 정말 참기 힘듭니다. 그러나 이럴 때도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무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을지라도 예수님은 나의 진심을 받아 주시고 인정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를 박대하시면 나는 갈곳이 없습니다. 찬송가에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박대하시면 정말 갈 곳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는 여인에게 축복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가 테스트 해 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실족시키기 위해 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테스트 하신 것은 그의 믿음을 견고케 하여 그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과연 은혜를 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가를 보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여자는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재치있게 받아 넘겼습니다. 그녀는 무엇보다 예수님의 말씀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시인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조금도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보통여자 같았더라면 크게 반발하였을 것입니다. 여자가 자존심이 상하고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릿발이 선다고 하였습니다. “뭐 나더러 개라고, 그래 나는 개다. 개 맛 좀 봐라”하고 ‘왕왕!’ 짖으며 이판사판으로 예수님께 달려들어 개처럼 물어뜯으며 개판을 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이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힘든 말씀이라 할지라도 ‘Yes Lord'하며 아멘으로 응답했습니다. 이 여인은 Always yes woman이었습니다. 그녀에게는 ‘No’가 없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이 개 같이 비천하고 은혜 받을 수 없는 자격 없는 존재임을 자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아이들의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말함으로 주께서 다만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여인은 주님께 은혜 받기 위해 자신의 자존심을 온전히 꺾었습니다. 여인에게는 자기가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쥐꼬리만한 자존심을 꺾지 못해 진리의 세계, 은혜의 세계에 들어오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그 문턱에서 넘어집니다. 우리가 자존심을 꺾고 조금만 믿음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우리 앞에는 무한한 은혜의 세계, 축복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열왕기하 5장을 보면 나아만 장군이 나옵니다. 그는 아람 왕의 군대 장관으로 크고 존귀한 자였으나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그가 문둥병을 고침 받기 위해 선지자 엘리사에게 왔을 때 엘리사는 문 앞에 나와 보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문 밖으로 번쩍이는 대머리를 쑥 내밀고는 사환을 통해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몸을 씻으라는 말만 전달해 주었습니다. 당시의 요단강 물은 깨끗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에 나아만 장군은 심히 자존심이 상해 화를 내고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종의 말을 듣고 나서 다시 생각한 후 자존심을 꺾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 때 그는 문둥병이 깨끗이 낫는 은혜를 덧입을 수 있었습니다. 여인도 헬라인으로서 지성이 있고 자존심이 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의 모욕적인 말씀을 재치 있게 받아 넘겼습니다. 이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감정을 이기고 자신을 이겼습니다. 이 여인은 실로 지성과 유모와 재치가 넘치는 위대한 여성입니다. 정말 이런 훌륭한 여인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여인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첫째, 딸에 대한 애타는 목자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딸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딸이지만 흉악한 귀신들린 딸을 사랑한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정박아 수용소에 가 보면 부모들이 감당할 수 없어 버린 아이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정말 귀신들린 딸을 사랑한다는 것은 위대한 사랑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사랑은 본능적인 사랑과 감정적인 사랑을 넘어선 희생적인 참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죄로 인해 울부짖고 악령에 들려 고통하는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인은 딸에 대한 불타는 사랑 때문에 어떤 수치나 모욕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양을 구원하고자 하는 불타는 사랑이 있을 때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주님께 간절히 매달릴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모욕적인 말에도 요동하지 않고 겸손하게 은혜를 간구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 대한 깊은 신뢰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만일 여인이 조금이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인격을 불신했더라면 사정없이 절망의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졌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어떤 경우에나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그의 사랑을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에도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그의 사랑을 의심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많은 환난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승리의 찬가를 부를 수 있었던 비결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가 어떤 어려운 형편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그의 사랑을 의심치 아니할 때 믿음의 여유를 갖게 되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인정하였습니다. 여인은 “내가 이스라엘 사람보다도 못한 것이 뭐가 있길래 그쪽은 자녀고 나는 개냐”하며 따지거나 불평 불만을 갖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무시를 받는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주여”(Lord) 하고 불렀습니다. 여인은 주되신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자세가 삐뚤어져 있으면 하나님께 불만을 품고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뭔가 자기 마음에 안 들게 되면 섭섭한 마음을 품게 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주권 신앙이 있으면 어떤 경우에든 불평하기보다 감사하게 됩니다. 또한 선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가장 잘 아시고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해 놓고 계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Ⅱ. 이 말을 하였으니 (29-30)

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예수님은 여인의 말에 크게 감동을 받으시고 그 믿음을 축복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28절에서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에 크게 감동을 받으시고 그 믿음을 축복하셨습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이 말’은 모든 불신과 의심을 뛰어넘는 믿음의 말입니다. ‘이 말’은 감정을 이기고 자신을 이긴 도전적이고 긍적적인 말입니다. ‘이 말’은 겸손하게 은혜만을 간구하는 지혜의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웁니다. 우리는 입이 있다고 말을 함부로 하기 쉽습니다. “내 입 가지고 내가 말 하는데 뭐 어때” 하며 생각나는 대로 함부로 불신적인 말을 하기 쉽습니다. 특별히 집이나 장막에서 양들이 없다고 인간적인 말을 함부로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불신적인 말이 미치는 영향은 지대합니다.

민수기 14장을 보면 가나안 땅을 정탐한 10두령의 불신적인 말로 인해서 그들은 온 이스라엘 백성을 범죄케 하고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엎드러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말을 하였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말을 토대로 우리에게 행하십니다. “나는 안돼, 이것은 정말 안돼” 하는 소리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정말 안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믿으면 불가능이 없다.”하는 말을 하면 하나님께서 과연 불가능을 가능케 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입술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믿음의 말은 긍정적입니다. 불신의 말은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믿음의 말은 창조하는 힘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절대로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말을 기뻐하시고 그 믿음대로 역사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에 말 잘하는 연습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개그맨이나 달변가나 웅변가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항상 믿음의 말을 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의 쓴 뿌리를 가지고 믿음의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남들과 비교하면서 믿음의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슬프고 운명적인 생각을 하면서 믿음의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말을 하려면 믿음의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이 말’을 축복하셨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3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긴 여행을 하셨습니다. 이 때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고쳐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귀먹고 어눌한 자는 들을 것을 듣지 못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으므로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무엇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믿음을 가질 수 없어 더욱 답답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롬10:17). 예수님은 이런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대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에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보실 때 탄식하신 것은 영적으로 귀와 입이 막힌 자들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고쳐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에바다!” 이는 열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즉시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도 들을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도 전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막힌 영적 귀와 입을 여는 권능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육신의 귀와 입은 멀쩡하지만 영적 귀와 입이 막힌 자들이 많습니다. 이런 자들은 영적인 말을 해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영적인 말도 못합니다. 이런 자들은 영적으로 참으로 불쌍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가야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에바다!” 하시며 고쳐 주십니다. 그 때 우리는 신령한 영적 세계를 볼 수 있고 또 영적인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이 부족할지라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믿음의 말을 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이 마음으로 주님을 경외하고 마음으로 양들을 사랑하고 믿음의 말을 함으로써 주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가운데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위대한 믿음의 여인들이 많이 나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