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 Display


마가복음 Ⅱ 부:마가복음 9:30-50(첫째가 되는 길)

by Mark Yang   08/15/2019  

Question


마가복음 Ⅱ 부 제 3 강


첫째가 되는 길


말씀 : 마가복음 9:30-50
요절 : 마가복음 9:35

Ⅰ. 뭇 사람의 끝이 되리라 (30-37)
1.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운데로 지나가실 때 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셨습니까(30,31)? 반복해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할까요?
2.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32)? 그들이 왜 깨닫지도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했을까요?
3. 가버나움에 계실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물었습니까(33)? 그러나 제자들은 왜 잠잠했습니까(34)? 제자들 사이에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요?
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첫째가 되고자 하면 어떤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35)? 왜 첫째가 되려면 끝이 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까요?
5.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안으시고 제자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36,37)? 어린 아이 하나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이 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일까요?

Ⅱ. 금하지 말라 (38-41)
1. 요한은 예수님께 자기가 어떤 자를 금했다고 자랑했습니까(38)? 그가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금했을까요?
2. 예수님께서는 왜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39,40)?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떤 지도자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까?
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자를 어떻게 갚아 주십니까(41)? 예수님의 포용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오.

Ⅲ. 실족케 하지 말라 (42-50)
1. 예수님은 그를 믿는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라고 말씀하십니까(42)?
2. 손과 발과 눈이 범죄케 하면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43a,44a,45a)?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43b,44b, 45b)? 우리가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느 정도로 투쟁해야 합니까?
3.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 곳입니까(48,49)?
4.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어떻게 됩니까(50a)? 제자들이 무엇을 두고 화목해야 합니까(50b)? 소금을 두고 화목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Message


마가복음 Ⅱ 부 제 3 강


첫째가 되는 길


말씀 : 마가복음 9:30-50
요절 : 마가복음 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위대한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아무도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사람들은 위대한 사람이 되고자 권력 투쟁을 하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얻고자 피나는 투쟁을 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모임이나 조직에서 제 1인자가 되고자 각고의 노력을 합니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얻고 어떤 모임에서 제 1인자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을 진정으로 위대한 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위대한 자가 어떤 자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오늘 말씀을 통해 진정한 위대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고 내면성있는 하나님의 종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뭇 사람의 끝이 되리라 (30-37)

3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벙어리 귀신 들린 어린 아이를 고쳐 주신 후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목적지로 하여 비장한 모습으로 이곳을 지나가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31a).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앞에 두시고 무엇보다도 제자양성에 중점을 두셨습니다. 그 가르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31b). 예수님은 반복하여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요 구원과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중요한 십자가의 진리를 받아 들이지 않는 제자들을 생각할 때 답답하고 안타까웠지만 소망 가운데 계속 복음을 심으셨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이번 만큼은 조금 깨닫게 되었습니까? 3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 하더라.” 제자들은 이번에도 역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마태복음17:23절에 보면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였다고 했습니다. 이를 볼 때 제자들 마음 속에는 자기 생각, 자기 계획이 따로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 때문에 진리의 말씀을 들어도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꿈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장차 다가올 고난을 두려워하였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쌔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잠잠했습니다. 이는 노중에서 “누가 크냐?”하는 문제로 쟁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왜 이렇게 노중에서까지 쟁론하는 것입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시자마자 당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눅19:11). 그들은 내각편성 때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신경이 날카로와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만 데리고 변화산상에 올라가신 사건이 그들 간의 경쟁심을 더욱 유발시켰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세 제자와 아홉 제자로 나누어 다투었고, 또 세 제자들 간에도 치열한 헤게모니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에 대해서 불안을 느낀 나머지 연합전선을 펴서 자리 교섭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막10:35). 제자들은 모두 다 자기가 가장 높은 자, 위대한 자가 되기를 열망했습니다. 순진한 바돌로매조차도 큰 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아무도 둘째가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적이지 못하고 인간적이고 세속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자기 중심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 구속역사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누가 더 크냐 하며 다투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도 없었고 십자가의 복음 진리를 깨달을 수도 없었습니다.

인간들이 사는 곳에는 어디나 “누가 크냐?” 하는 쟁론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항상 권력다툼이 있습니다. 앨빈 토플러는 그의 저서 『권력이동』에서 “권력은 모든 사회제도와 모든 인간관계에 고유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특히 이 문제는 명예를 중시하는 남자의 세계에서 더욱 심각합니다. 서로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합니다. 거지 사회에서도 거지 대장이 되고자 치열한 암투가 벌어집니다. 누가 크냐 하는 문제 때문에 항상 싸움이 일어나고 분열이 일어나고 서로 원수가 됩니다. 이는 심각한 인간문제입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왜 위대한 자가 되고자 그렇게도 투쟁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형상에 이르고자 하는 숭고한 열망을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권한을 인간들에게 주셨습니다. 이것 때문에 인간들은 끊임없이 높아지고자 하고 다스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크냐 하며 다투는 제자들에게 진정으로 위대한 자가 어떤 자인가 가르쳐 주셨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첫째가 되고자 하면”이라고 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첫째가 되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원하시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아무든지(anyone)”라고 하신 것은 누구든지 첫째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첫째가 되는 길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세상과는 정반대로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어떤 자입니까?
첫째,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겸손한 자입니다. 뭇 사람의 끝에 있는 사람은 가장 자기를 낮추는 자요, 가장 겸손한 자입니다. 끝이기 때문에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습니다. 앞에 있는 사람은 자기 밖에 볼 수가 없지만 끝에 있는 사람은 앞에 있는 모든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뭇 사람의 끝이라는 말은 내가 가장 작은 자요, 형편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겸손했기 때문에 진정으로 위대한 자가 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그는 훌륭한 인간조건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고 했으며,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 하였습니다 (고전15:7-9). 또한 디모데전서 1:15절에서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 초대왕 사울 왕의 이름을 본따 사울이라 칭하고 스스로 큰 자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를 깨닫고 이름을 작은 자라는 뜻인 바울이라고 바꾸었습니다. 이때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자가 되었습니다. 모세의 위대성은 궁중교육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의 겸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는 40년간 광야에서 겸손훈련을 받고 낮아져서 200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섬겼습니다. 민수기 12:3절은 말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 주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분으로 겸손의 표본이 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예수님의 겸손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6-8).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모양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시되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자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인생들을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사람이 거할 곳이 못되는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냄새나는 죄인들을 겸손하게 섬겨 주셨습니다. 부담스러운 비천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셨고, 고뇌하는 지성인 니고데모에게 밤이 맞도록 거듭남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기적인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고 동거동락하시며 그의 깊은 내면의 상처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겸손한 분이시기 때문에 가장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둘째,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뭇 사람을 섬기는 자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영광받고 섬김 받기를 좋아합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섬기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직위가 높아질수록 섬기는 것은 적어지고 모든 것을 섬김 받게 됩니다. 왕이 되면 신하들이 세수물을 떠다 주고 수건을 들고 옆에서 기다립니다. 옷도 입혀 주고 신도 신겨 줍니다. 군대에서는 계급이 높아질수록 철저히 섬김만 받습니다. 그러면 섬김을 받으면 내면이 행복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내면에 의존심과 교만의 병이 생기게 됩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참 기쁨이 없습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뭇 사람을 섬기는 자입니다. 섬기는 자가 위대한 자입니다. 왜냐하면 위대성이란 그의 직책이나 소유에 있지 않고 내면성에 있기 때문입니다. 뭇 사람을 섬기려면 뭇 사람을 품을 수 있는 큰 내면성이 있어야 합니다.
요셉은 어딜 가든지 섬기는 자였습니다.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노예로 있을 때나, 감옥의 죄수로 있을 때나, 애굽의 총리가 되어 모든 국정을 다스릴 때에도 넓은 내면성으로 뭇 사람을 섬겼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된 자아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를 축복하사 그를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생명과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는 역사에 귀하게 쓰셨습니다.

사람의 위대성의 척도는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섬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소련의 쿠테타 소식으로 세계가 온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미국과 서방 세계는 비상 대책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우리도 수양회를 위한 비상 기도모임을 개최하였습니다.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자 쿠테타 주동세력은 3일 천하로 끝나고 수양회 바로 전날 모두 체포 되었습니다. 그리고 옐친 대통령은 세계적인 인물로 부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고르비도, 옐친도 아닙니다. 소련에 있는 우리 선교사님들입니다. 이 분들은 본국에서 얼마든지 안정되고 섬김 받으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련 영혼을 섬기고자 혼란한 소련에 들어 갔습니다. 쿠테타가 일어나고 계엄령이 선포되었지만 거리를 활보하며 양들을 심방하며 수양회를 섬겼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교사님들의 섬김을 받으사 소망 없는 소련 지성인들을 살리시고 소련을 제사장 나라로 변화시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섬김을 받고자 하면 할수록 영적인 성장이 없고 아직도 유치한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결국 의존심의 노예가 되어서 무기력한 중풍병자와 같이 쓸모 없게 되어 버립니다. “목자님이 나를 섬겨 주지 않나”, “나는 아직 어려서 섬김을 받아야 돼” 하면서 목자님의 섬김을 바라고 인정과 사랑에 목말라 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제 우리는 섬김을 받는 데서 섬기는 자로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뭇 사람을 섬길 때 온갖 죄인들을 섬기신 예수님의 위대성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구체적으로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 가르쳐 주십니다. 36,3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어린 아이는 순수하고 진실됩니다. 단순하고 부모의 말에 잘 순종합니다. 그러나 부족한 면이 더 많습니다. 어린 아이는 자기 중심적이어서 끝없이 요구합니다. 또 변덕이 심합니다. 아빠 앞에서는 아빠가 제일 예쁘다고 하고는 엄마 앞에서는 엄마가 제일 예쁘다고 말합니다. 또 어린 아이는 약하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하고 세심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또 자라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어린 아이는 아예 무시하고 숫자에도 넣지 않았습니다. 또 약장사들도 “어린애들은 저리 가라, 저리 가”하며 무시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무시하고 짓밟아 버리기는 쉽지만 영접하기는 힘듭니다. 어린 아이를 영접하려면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어야 합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으로는 어렵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가능합니다. 제자들의 문제는 서로 무시하고 영접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어린 아이와 같이 쓸모 없는 자일지라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영접하고 섬기는 자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나이는 성인이지만 영적으로 아직 어려서 자기 중심적이고 믿음이 연약하여 섬세한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이 돌봐 주어야 하고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엉뚱한 소리를 잘 하지만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목자의 말을 잘 들으면 좋으련만 반발하고 약속을 잘 지키지 않습니다. 요즈음은 막내 출신들이 많아서 의존적이고 요구가 많습니다. 이들을 영접하기란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는 영접하기 힘들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영접할 수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자를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주위에 있는 어린 아이와 같은 연약한 자들을 영접하고 도와 주는 위대한 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Ⅱ. 금하지 말라 (38-41)

38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분개하며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요한은 귀신이 나가는 것을 보고 기뻐해야 했지만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즉시 그 활동을 못하도록 중지시켰습니다. 이는 그가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우리 그룹에 속하지 않고 사도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귀신 쫓아내는 일은 자기들의 전유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모임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역사를 인정치 않았습니다. 사람이 단체 중심, 교파 중심이 되면 마음이 편협해지고 독선적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39,40절을 보십시오.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단체를 정죄하는 제자들의 독선을 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반대만 하지 않으면 다 예수님의 편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각종 사람들을 품고 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는 다양한 생각, 다양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같이 동역하며 살 수 있습니다. 좁은 마음은 많은 원수를 만들고 동역의 역사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좁은 마음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 좁은 마음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큰 자가 되려면 좁은 마음을 버리고 예수님과 같이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41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이 말씀 역시 예수님의 포용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그것이 주님을 위하여 하는 것이면 기뻐 받으시고 반드시 상을 주십니다.

Ⅲ. 실족케 하지 말라 (42-50)

42-50절에서 우리는 다음 세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이 어린 자를 실족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42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여기서 소자란 믿음이 있지만 아직 어린 사람을 말합니다. 어린 양은 쉽게 상처를 받고 작은 유혹에도 약합니다. 또 목자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쉽게 영향을 받습니다. 실족케 한다는 것은 “걸려 넘어지게 한다, 죄를 짓게 한다”는 뜻입니다. 목자가 어린 양의 입장에서 섬세히 돕지 아니하면 조그마한 이유로 실족케 됩니다. 어린 양을 실족케 하는 목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들어가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이는 믿음이 강한 자에게 있어서 대수롭지 않은 일이 믿음이 어린 자에게는 영적인 생명에 관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연못에서 돌로 개구리 맞히기 놀이를 하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재미있는 일이지만 개구리는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 양들에게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둘째로, 죄의 심각성을 알아야 합니다. 42-48절은 죄의 심각성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손이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고, 발이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고, 눈이 범죄케 하면 눈을 빼어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과 두 눈으로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무서운 곳입니다. 지옥에 들어 간 사람들은 불로서 소금치듯함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때 신앙생활하다가 손발 다 짤리고 두 눈도 뽑히고 완전히 병신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어떤 분은 눈이 50개라도 하루에 다 뽑히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요점은 죄의 심각성을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가를 알고 죄를 짓게 만들 가능성이 있는 것은 적극적으로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큰 자는 죄의 심각성을 알고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사는 자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제자는 좋은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사회에서 좋은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50).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 주고 또 음식물의 부패를 방지해 줍니다. 세상은 음란하고 물질적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부패가 만연해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제자의 사명은 예수님의 사랑과 겸손과 섬김과 정직으로 세상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마음이 겸손한 자요 뭇 사람을 섬기는 자입니다. 우리의 본성으로는 어려운 일이지만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진정으로 큰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번 가을 학기에 믿음이 어린 소자 한 사람을 영접하고 섬기는 가운데 진정으로 위대한 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