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Ⅱ 부 제 12 강
언약의 피
말씀 : 마가복음 14:1-26
요절 : 마가복음 14:24
Ⅰ. 향유 부음을 받으신 예수님 (1-11)
1. 어떤 날이 가까워 오고 있었습니까(1a)? 이 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히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때 종교 지도자들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까(1b,2)?
2.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고 계실 때 한 여자가 얼마나 귀한 것을 가지고 예수님께 왔습니까(3a)?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습니까(3b)? 이를 통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했으며, 또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마음이 어떠함을 알 수 있습니까?
3. 이를 본 어떤 사람들은 여자가 향유를 왜 허비한다고 생각했습니까(4,5)? 예수님께 대한 이들의 자세는 여인과 어떻게 다릅니까?
4. 예수님은 이 여인을 어떻게 보호하셨으며, 여인의 행동을 어떻게 여기셨습니까(6)? 이 일은 어떤 점에서 예수님께 아름다운 일이 됩니까(7,8)? 예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때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보시오.
5. 예수님은 이 여자의 행한 일을 복음 역사와 어떻게 관련시키셨습니까(9)? 이 여인의 행동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은 어떤 점에서 유사합니까? 향유 부음을 받으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6. 가룟 유다는 왜 대제사장들에게로 갔습니까(10)? 그리고 그들과 무슨 약속을 했습니까(11)? 이를 볼 때 그가 예수님을 배반한 근본 동기가 무엇임을 알 수 있습니까? (딤전6:10)
Ⅱ. 예수님의 최후만찬 (12-26)
1. 무교절 첫 날은 어떤 날입니까(12a)? 이 날에 제자들은 무엇을 염려했습니까(12b)? 제자들에게 유월절 식사를 할 객실을 어떻게 예비하도록 하셨습니까(13-16)? 왜 그들에게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지 않으셨을까요?
2.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무슨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까 (17,18)? 이때 그들은 무엇을 근심했습니까(19)?
3. 예수님은 얼마나 가까운 자가 자기를 배반할 것이라고 하셨습니까(20)? 이를 왜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자신의 죽으심이 근본적으로 무엇에 근거한 것임을 말씀하셨습니까(21a)? 그러나 예수님을 배반한 자는 어떻게 됩니까(21b)?
4. 식사할 때 예수님은 떡을 무엇과 연관시키셨습니까(22)? 제자들은 이 떡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리고 이 떡을 먹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고전11:24)
5. 예수님은 또 포도주 잔은 무엇과 관련시키셨습니까(23,24)? 예수님의 피로 세우신 언약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렘31:33,34, 롬3:25, 히9:13-15) 우리가 어떻게 이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까?
6.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슨 희망을 심어 주셨습니까(25)? 그리고 무엇을 하고 감람산으로 갔습니까(26)?
마가복음 Ⅱ 부 제 12 강
언약의 피
말씀 : 마가복음 14:1-26
요절 : 마가복음 14:24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우리는 이때까지 선생이요, 선지자요, 주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 보았습니다. 14장부터는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사건은 인류 역사상 가장 놀랍고 기이한 사건입니다. 이는 영원한 파멸로 치닫고 있는 인류를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해 내는 구원의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는 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 만찬을 하시면서 성만찬을 제정하신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은 모두 예수님의 죽으심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성만찬은 십자가에서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시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새롭게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향유 부음을 받으신 예수님 (1-11)
때는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력으로 1월 14일에 지켰고 무교절은 1월 15-21일까지 7일간 지켰습니다. 두 절기를 합하여 연속해서 8일간 지켰기 때문에 유월절과 무교절이라고 하였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다가 하나님의 크신 권능으로 출애굽하게 된 것을 기념하는 뜻 깊은 날이었습니다. 로마 식민통치에 억눌려 지내던 백성들은 그 옛날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베푸신 그 크신 권능과 구속의 사랑을 생각하며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로마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제 2의 유월절을 갈망했을 것입니다. 이 때 종교 지도자들은 마땅히 이런 백성들에게 믿음과 희망을 심는 유월절 메시지 준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반대로 예수님을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심령에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와 사랑 대신 시기심과 미움과 살의로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의 탈을 쓴 마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르기 때문에 민요가 날까 두려워 명절에는 말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인간의 도모는 헛되고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있는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아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 때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식사하시다가 갑자기 향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아름다운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향유는 보통 귀한 손님들이 집에 오면 머리에 한 두 방울 뿌려 주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려 온통 부었습니다. 나드는 동 인도에서 나는 감송향 뿌리에서 짜서 만든 귀한 향유입니다. 순전한 나드라고 한 것을 보면 불순물이 전혀 없는 진짜 향유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향유가 귀한 만큼 이를 담는 그릇인 옥합도 매우 귀한 것이었습니다. 이 향유를 돈으로 환산하면 300데나리온 곧 당시 노동자 1년 임금분에 해당되는 거액이었습니다. 향유는 여인의 결혼 지참금으로서 여기에는 물질 이상의 여인의 모든 진심과 애정과 꿈 등 여인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귀한 향유를 예수님께 복음 역사를 섬기는데 필요할 때 쓰시도록 그냥 드리지 않고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온통 머리에 부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지나치고 어리석은 행동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께 대한 여인의 철저한 헌신과 희생을 말해 줍니다. 여인은 조금도 계산하는 마음이나 인색한 마음이 없이 아낌없이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이를 어떻게 생각할까 눈치를 보거나 조금의 자의식도 없이 예수님만 바라보고 정열적으로 향유를 부었습니다. 여인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자신의 생명의 구주요, 왕이요, 경배의 대상이요, 참 남편으로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바 구원의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사랑과 감사를 표현할 길이 없어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드린 것입니다.
여인의 행동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분을 내며 여자를 심하게 책망했습니다.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300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마태는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이라고 하였고, 요한은 가룟 유다라고 하였습니다. 가룟 유다가 주동이 되고 다른 몇몇 제자들이 동조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합리적이고 실용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인이 향유를 완전히 허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용적인 면에서 볼 때 여인의 행동은 어리석고 향유를 허비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을 한 동기와 여인의 마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여인을 판단하고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여인의 진심을 보지 못했습니다. 여인의 순수하고 희생적인 사랑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다만 예수님의 어깨 위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향유를 돈으로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실상 그들의 관심은 돈에 있었습니다. 요한복음12:6절에서는 이러한 가룟 유다를 가리켜 도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세상 일을 추구하는데 모든 것을 투자하면 결코 비난하지 않습니다. 또 구제 사업에 투자하면 선한 일을 한다고 칭찬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리스도께 시간과 물질과 애정과 정열과 모든 진심을 드리면 제 정신이 아니다, 광신자다, 헛짓한다, 쓸 만한 젊은이 하나 버렸다는 등 여러 가지로 비난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얼마나 고귀한 분이신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모든 진심을 돈으로 계산하고 허비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눈물을 H2O로 분석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드리는 진심을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동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여인을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좋은 일이란 아름다운 일입니다. 물질주의자들과 인본주의 자들은 여인의 진심을 묵살하고 괴롭혔지만 예수님은 여인의 행동을 아름다운 일로 보시고 그 진심을 다 받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진심을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시고 다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때로 1년 내내 진심을 바쳐 fishing을 하고 1대1을 했지만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을 때 내가 괜히 헛짓을 한 것 같아서 허탈한 심정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나의 진심을 알아 주지 않고 주위에서는 너 도대체 무엇하고 있느냐고 야단만 칠 때 더욱 슬픈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리의 진심을 알아주지 못할지라도 예수님은 우리의 진심을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시고 다 받아 주십니다.
그러면 여인의 행동이 어떤 점에서 예수님께 아름다운 일이 됩니까?
첫째로, 여인은 예수님을 섬길 수 있는 때를 잘 붙잡았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에서 볼 때 우리가 예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회를 붙잡아야 함을 배웁니다. 어떤 사람은 젊어서는 내 할 일을 하고 늙어서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귀중한 세월을 세상 일에 다 허송해 버리고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다 놓치고 맙니다. 우리는 나에게 젊음이 있고 정열이 있을 때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적극적으로 붙잡아야 합니다.
둘째로, 여인은 힘을 다하여 주님을 섬겼습니다. 예수님은 8절에서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장사를 미리 준비하기 위해 향유를 부은 것은 아닙니다. 여인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했지만 예수님은 이를 자신의 장사와 관련시켜 귀하게 쓰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경쟁심과 인간적인 야심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을 전혀 몰랐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 쓴 뿌리를 품고 사랑하는 스승을 배반하고자 하는 사단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께 모든 진심을 바쳤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통해 큰 힘과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부족하지만 힘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분들이 여인과 같이 힘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는 것을 보고 큰 은혜를 받습니다. 평신도 목자님들은 하루 종일 직장에서 시달리다가 퇴근하게 되면 심신이 지쳐서 복음역사를 섬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저녁에 fishing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생각됩니다. 그러나 Pablo Oh목자님은 외무부의 과중한 업무를 마치고 나면 9시에나 퇴근합니다. 그 때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캠퍼스에 가서 1시간 동안 피싱을 하고 그 후 집에 가서 저녁 식사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시간과 정열을 허비하는 어리석은 일같이 보이지만 주님께서 보실 때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칭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예수님은 이 여자의 행한 일을 복음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역사화 시키셨습니다. 기념이란 그 정신을 배우고 본받는 것입니다. 저를 기념하라는 것은 여인의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희생 정신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을 섬기는 우리의 자세가 이 여인과 같아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옥합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옥합을 누구를 위해 쓰느냐가 문제입니다. 어떤 분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옥합을 깨뜨립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옥합을 받을 만한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많은 여인들이 옥합을 잘못 깨뜨려 마음에 상처만 입고 괴로와 합니다. 어떤 분은 세상 명예와 권세를 위해서, 학문이나 예술이나 이념을 위해서 옥합을 깨뜨립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리의 옥합을 받을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옥합을 깨뜨리고 난 후에는 깊은 허무만 남게 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옥합을 깨뜨려 드리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이는 예수님은 천지만물과 우리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시요, 세상을 그 뜻대로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시요, 우리의 죄를 위해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어놓으신 대제사장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이런 행동과 대조적으로 가룟 유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을 팔고자 적의 소굴에 들어가 흥정을 했습니다. 이를 볼 때 그의 문제는 돈을 사랑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탐욕이 그의 눈을 멀게 하고 양심을 마비시키고 믿음에서 떠나 그를 저주의 자식, 멸망의 자식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친히 택하신 사도요 메시야 사역에 동참한 역사의 목격자요 예수님께로부터 많은 사랑과 훈련을 받은 자로서 누구보다도 많은 은혜와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은혜를 감당치 못하고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였을 때 완전히 믿음에서 떠나 저주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그의 시작은 아름다웠으나 그의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가룟 유다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와 같이 되지 않도록 자신을 세속으로부터 지키고 조심해야 됩니다.
Ⅱ. 예수님의 최후 만찬 (12-26)
이틀이 지나 무교절 첫날이 되었습니다. 이 날은 유월절 양 잡는 날로서 흠 없고 점 없는 1년 된 어린 양을 잡아 희생제물로 드리고 유월절 식사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예수님께 어디서 유월절 만찬을 하실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으실 만큼 가난하여 명절에 유월절 식사를 할 방조차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둘을 보내시며 성내로 가서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면 예비된 큰 다락방으로 안내해 줄터이니 거기서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정확한 위치를 가르쳐 주시지 않은 이유는 가룟 유다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 만큼은 아무에게도 방해를 받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눅22:15). 이는 그들에게 유월절 식사를 통하여 자신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를 가르쳐 주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물자 예수님은 열 둘을 데리시고 예비된 다락방으로 가셨습니다. 그들이 다 앉아 음식을 먹을 때에 예수님은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식탁의 교제를 할 수 있는 자는 가장 친밀하고 신뢰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신뢰하는 자로부터 배반당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 누가 그런 몹쓸 짓을 한단 말인가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내니이까?”하며 물었습니다. 이는 “나는 아니지요?”(Surely not I)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자신은 결백하다는 확답을 받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는 누구나 예수님을 배반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에 예수님은 열 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시저나 스탈린이나 박정희는 자기를 암살할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가장 측근인 심복의 손에 의해 암살 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배반할 자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아셨습니다. 그러면 당장에 제거시켜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아시면서도 제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유월절 식사에까지 초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배반당하실 것을 공개적으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가룟 유다의 마음을 돌이키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예수님은 그를 배반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영혼이 영원한 파멸에 이르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를 끝까지 돕고자 하셨습니다. 유다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막연히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라고 말씀하신 것도 유다만 알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자기를 배반하는 가룟 유다조차도 품으시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은 측량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입니다. 저는 복음 역사를 섬기면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배은망덕한 일이었습니다. 이 때 저는 그 사람을 품지 못해 마음 고생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룟 유다조차 품으시고 사랑하셨습니다.
둘째로, 제자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죽으셨다고 생각할 때 십자가의 죽으심이나 제자 양성 등 모든 것이 실패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된 것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사랑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끝내 회개치 않고 떡조각을 받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요한13:30). 예수님은 그의 배반으로 심령이 찢겼을 것입니다. 그가 나간 후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계속 하시면서 자신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예수님은 떡을 자신의 몸과 관련시키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고귀한 몸을 찢기시고 고난받으실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포도주 잔을 마시면서 이제는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다같이 23,24절을 읽어봅시다.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28절에서는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피를 흘리시며 돌아가셔야 하셨습니까? 예수님의 피는 어떤 역할을 하며 그 효력이 어떠합니까?
죄는 지독한 것이어서 죄를 범한 자에게 그 대가로 죽음을 요구합니다 (롬6:23a). 죽음은 육체적 죽음 뿐만 아니라 영혼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사망의 권세에 시달리다가 결국에는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하게 됩니다 (계21:8).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인간이 죄 문제를 해결하려면 피를 흘리며 죽어야 합니다. 이는 레위기 17:11절에 보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는 인간 대신 짐승의 피를 흘려 생명을 속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을 읽어보면 짐승의 피를 흘려 단에 뿌리고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는 짐승의 피가 인간의 죄를 속하여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능히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고 그 효과도 일시적이었습니다. 이는 응급조치에 불과하였습니다. 이는 장차 올 참된 것의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한1:29).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신 순결한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피에 대하여 두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피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죄 사함 받고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받게 된 것은 우리의 행위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피의 은혜 때문입니다. 로마서 3:25절은 말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스스로 파기하므로 행위로 구원을 얻는데 실패했습니다. 이는 인간이 연약하여 언약을 지킬 내적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새 언약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구 언약과는 달리 우리에게 행위를 요구하지 않고 믿음을 요구합니다. 또 구 언약은 짐승의 피로 인쳤기 때문에 그 효과가 일시적이고 불완전하였지만, 새 언약은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속하시기 위해 고귀한 살을 찢기시고 보배 피를 흘리신 사실을 마음으로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를 영원한 파멸로부터 구원해 주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피의 능력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같이 죄를 많이 지은 자는 구원받고 새사람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우리는 반복해서 죄를 범할 때 다른 것은 몰라도 나의 이 고질병 만큼은 고침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피의 능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히9:13 14절은 말합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예수님은 자기 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몹쓸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피를 믿기만 하면 그 피가 우리를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키사 새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십자가의 강도를 하나님의 황태자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창녀와 같은 여인을 하늘 나라의 공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고, 탕자 어거스틴을 성어거스틴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성만찬을 제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이를 먹고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의 행위로써 그 목적은 몸을 튼튼하게 하고 생기 있게 하는데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만찬은 우리의 영혼을 강화하고 믿음을 새롭게 하고 생기 있게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합니다. 요한복음 6:54,55절은 말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라.” 예수님은 성만찬을 제정하시면서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눅22:19, 고전11:24). 우리는 성만찬을 행하므로 예수님이 나를 위해 몸을 찢기시고 보배 피를 흘리신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해야 됩니다.
25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후에 부활 승천 하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유월절 잔치를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를 끝내고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이 되사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인생들로부터 찬송과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