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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1-2:25 (이스라엘을 권념하신 하나님)

by Mark Yang   08/14/2019  

Question


1994년초 출애굽기 제 1 강


이스라엘을 권념하신 하나님


말씀: 출애굽기 1:1-2:25 요절: 출애굽기 2:24,25

Ⅰ. 노예가 된 이스라엘(1장)
1. 애굽에 이민 온 야곱의 혈속은 모두 몇 명이었으며, 후에 이들은 어느 정도 번성하게 되었습니까(1-7)?
2. 이스라엘 자손이 어떻게 해서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습니까(8-11)? 그러나 그들은 학대를 받을수록 어떻게 되었습니까(12)? 이에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얼마나 괴롭게 하였습니까(13,14)? 이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3. 애굽 왕은 히브리 산파들에게 무슨 명령을 내렸습니까(15,16)? 그러나 산파들은 감히 어떻게 그 명을 어길 수 있었습니까(17)? 하나님께서 이런 그들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18-21)?
4. 바로는 이스라엘의 씨를 말리기 위해 결국 어떤 조치를 취하게 되었습니까(22)?

Ⅱ. 모세를 준비시키신 하나님(2장)
1. 모세는 어떤 운명 가운데 태어났습니까(1,2)? 부모는 왜 그를 석달 동안 숨겼습니까?(행 7:20)
2. 모세는 어떻게 바로 공주의 아들이 되었습니까(3-10)? 하나님께서 모세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 어떻게 역사하셨습니까? 또한 왜 생모를 유모가 되게 하셨을까요?
3.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무엇입니까? 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된 데에는 어떤 뜻이 있을까요?(행 7:22)
4. 모세가 장성한 후에 어떤 자각을 하게 되었습니까(11)?(행 7:23) 그리고 어떻게 동족을 돕고자 했습니까(12)? 그가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했을까요?(히 11:24,25)
5. 그러나 그는 왜 미디안으로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까(13-15)? 이 때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6. 모세가 어떻게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까(16-22)? 그는 광야에서 어떤 생활을 했습니까? 그에게 왜 광야 훈련이 필요했습니까?
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23-25)? 어려운 시대에 모세 한 사람을 택하시고 키우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Message


출애굽기 제 1 강


이스라엘을 권념하신 하나님

말씀: 출애굽기 1, 2장
요절: 출애굽기 2:24, 25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창세기는 하나님의 천지 창조와 인간의 타락,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시작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연단하사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돌보시고 야곱을 키우심으로 구속 역사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이를 기초로 큰 민족을 형성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연단하사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 그들을 통해 온 세상 만민을 구원코자 하십니다. 창세기가 ‘선택’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면, 출애굽기는 ‘구속’을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유월절 어린 양, 중보자, 율법, 언약관계, 성막 등 구속에 관한 영적 메시지가 풍부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출애굽기에는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 두신 희망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촌부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하신 말씀이, 노예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너희는 제사장 나라가 될지니라”는 말씀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두신 희망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출애굽기 말씀 공부를 통해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두신 원대한 희망을 영접하고 이 시대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제 1강에서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이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또한 하나님께서 학대 받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돌보셨는가를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Ⅰ. 노예가 된 이스라엘(1장)

첫째, 애굽에서 번성하는 이스라엘(1-7). 야곱의 권속들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있을 때 기근을 피하여 애굽으로 이민 오게 되었습니다. 세월은 화살과 같이 빨리 지나갔습니다. 6절은 말합니다.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 사람은 다 죽었고” 때가 되자 요셉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씩 하나씩 다 죽어 한 줌의 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화가 영원할 것 같은 애굽의 왕들도 차례로 죽어 피라밋에 묻혔습니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처음에 그들이 애굽에 올 때는 70인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온 땅에 가득하게 될 만큼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게 되었습니다. 중다하다는 말은 마치 포도 한 가지에 수많은 포도송이가 달린 것처럼 많은 열매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번식이란 단어는 새끼를 잘 낳는 짐승이나 알을 잘 까는 바퀴벌레와 같이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은 왕성하게 불어나서 창성하고 심히 강대해졌습니다. 애굽 여인들은 다이어트를 하며 자식들에게 얽매이지 않고 인생을 즐기고자 자식을 낳지 않거나 낳더라도 한두 명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여인들은 건강하여 보통 한 타스를 낳았습니다. 또 옛날에는 유아 사망률이 높아서 어릴 때 병에 걸려 죽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아이들은 아무 것이나 잘 먹고 건강하게 잘 자라나 이스라엘은 그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습니다. 학자들은 출애굽 당시 장정만 60만 명 가량 되었다는 것을 기초로(출12:37) 200만 명은 되었을 것이라고 추산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야곱이 70명의 권속을 이끌고 애굽으로 오기까지 170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이 70명이 430년 후에 200만 명이 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기이한 증가였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크신 손길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12:2, 22:17). 하나님은 이 약속대로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하사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로서 쓰임 받기 위해서는 소수의 인원으로는 안 되고 큰 민족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크신 뜻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번성케 하셨습니다.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번성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번성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번성하고 강대해져야 합니다.

둘째, 학대 받는 이스라엘(8-14). 이때까지 이스라엘 자손은 요셉의 후광으로 애굽에서 잘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이 새 왕은 동방에서 침입한 셈파인 힉족속을 축출하고 새 왕조를 세운 제 18왕조의 아멘호텝 1세(1546 -1525 BC)나 투트모스 1세(1525-1508 BC)로 봅니다. 그는 팽창하는 이스라엘을 보고 마음에 큰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이 거주하고 있는 고센 지방은 지리적으로 지중해와 연해 있고 이웃 나라와 접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일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이스라엘이 그들의 대적인 힉족속(같은 셈파)과 합하여 싸우고 그들을 떠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애굽 왕은 지혜를 짜내어 이들의 인구 팽창을 억제함과 동시에 막대한 노동력을 착취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들의 건강과 정신력을 파괴시킴으로써 수명을 단축시키고 인구를 줄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12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학대를 받으면 받을수록 줄어들기는 커녕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여 갔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면 반드시 이를 방해하는 사단의 역사가 있게 마련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이 늘어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갖가지 모양으로 방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결코 망하지 아니합니다.

애굽 사람은 이스라엘을 인하여 근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더욱 역사를 엄하게 하여 숨통을 죄었습니다.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 등 힘들고 비천한 일만 시켰습니다. 그들은 감독을 두어 무자비하게 채찍질을 하게 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주권 없는 노예 백성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고생스럽지만 죽어 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의미 있고 값진 투쟁이라면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요, 바로를 위해 봉사해야 하는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투쟁을 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으며 정신적인 생활을 할 수있는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고기 가마 곁에서 맛있는 고기를 먹으며 육신의 생활은 영위할 수 있었지만 의미 있고 가치있는 사명인의 삶을 살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삶의 희망이 없었습니다. 사람에게는 고생스럽더라도 삶의 희망이 있을 때 어떤 역경도 헤쳐 나갈 수있는 용기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날이 갈수록 절망적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는 역사 창조도 있을 수없고 또 지도자적인 인물이 생겨날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겉으로 볼 때 무의미하게 보이는 생활조차도 하나님 안에서는 다 뜻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 나라로 쓰임 받으려면 낮아져서 섬기는 겸손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또한 애굽에 안주하지 않고 출애굽 하여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 새 역사를 창조하고자 하는 영적 소원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애굽은 오늘날 미국과 같이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는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들은 선진 애굽의 환경에 동화되어 문화생활을 즐기고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타락하여 선민의 자세를 잃기 쉬웠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의 쇠풀무에 넣어 연단하신 것입니다(신 4:20, 사48:10). 그들은 고난을 통해서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강인한 잡초와 같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애굽에 안주하지 않고 출애굽 하고자 하는 강한 영적 소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는 핍박이 없고 안정과 평화를 누릴 때 타락하였고, 오히려 박해시대에 가장 순수하고 힘있게 성장하였습니다. 교회는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성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순교자의 피는 교회 성장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당하는 고난은 다 뜻이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경외한 산파들(15-22). 이스라엘에 대한 학대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강제노동으로 인한 인구 억제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자 바로는 씨를 말리고자 하는 잔인한 방법을 썼습니다. 자식은 장래의 소망입니다. 바로는 소망의 싹을 짓밟고자 했습니다. 바로는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에게 히브리 여인을 위해 조산할 때 여자여든 살게 두고 남자면 죽이라는 살인지령을 내렸습니다. 유아학살은 가장 비인간적이고 잔인하고 야만적인 사단적인 행위입니다. 당시 절대 군주 시대의 왕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산파들은 무시무시한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아이를 살렸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감히 왕의 명령을 어기고 아이를 살릴 수 있었을까요?

첫째로, 그들은 바로 왕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17).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바로 왕의 존재는 크게 보입니다. 그의 명령을 어기면 당장에 목숨을 잃게 되고 삼족이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왕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육체는 죽이지만 그 이상 못하는 바로가 아니라 죽은 후에 능히 지옥에 던져 넣으실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눅12:4,5).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이때 불의에 굴복 당하지 않고 의를 좇을 수있는 참된 용기가 생깁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입니다(롬13;1). 그러나 하나님께 범죄하도록 강요하는 불신앙적 명령에 대해서는 목숨을 내놓고 경건한 불복종을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핍박하는 불신 부모나 직장의 상관들이 바로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는 우리를 위협하며 두려움을 심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현실과 타협하게 되고 믿음의 지조를 잃게 됩니다. 믿음의 지조를 잃게 되면 쓸모없게 됩니다. 우리는 타협하지 않고 “죽일테면 죽여라. 죽으면 천국 간다.” 하는 분명한 자세로 신앙의 지조를 지켜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승리를 주십니다.
둘째로, 산파들은 기본적으로 생명을 귀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산파의 사명은 어린아이의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바로 왕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히포크라테스 선서대로 불의를 행하는데 의술을 악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산파의 일을 하는 가운데서 한 생명이 태어나는데 해산의 고통이 얼마나 크며, 이를 통해 한 생명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어린 생명을 살렸습니다.
오늘날 캠퍼스의 지성인들은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들은 힘도 없고 권세도 없고 부도 없습니다. 다만 어린아이와 같이 무한히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을 뿐입니다. 이들의 영적 생명이 태어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산파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들의 영적 생명을 살리는 산파들입니다.

바로는 자신의 명령이 실천되지 않은 것을 알자 산파들을 불러 추궁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남자를 살렸느냐?” 그들은 추상 같은 바로 왕의 추궁에 벌벌 떨 수밖에 없지만 아주 태연스럽게 대답했습니다.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위기를 모면할 수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시고,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셨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바로는 이제 모든 신하에게 남자가 나거든 하수에 던지도록 명하였습니다. 이때까지는 은밀하게 살인하고자 했으나 이제는 공공연하게 유아살인을 법으로 선포하였습니다. 모든 남자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물에 빠져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요사이는 아들을 낳으면 온 가족과 친족들이 기뻐하지만 당시에는 큰 슬픔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남자 아이는 가정이나 나라에서 희망의 상징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모든 희망을 상실하고 절망 가운데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친히 그의 선한 역사를 이루고 계셨습니다.

Ⅱ. 모세를 준비시키신 하나님(2장)

첫째, 궁중교육을 시키신 하나님(2:1-15).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었습니다. 이들은 아므람과 요게벳이었습니다(6:20). 모세는 민족 역사상 가장 비참하고 쓰라린 운명 가운데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하수에 던져져서 물고기의 밥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들은 그 준수함을 보고 차마 하수에 던질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들은 누구나 다 자기 아들은 준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들이 느끼는 것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어린아이의 얼굴에서 무엇인가 알 수없는 신비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를 숨겨서 석 달 동안 키웠습니다. 이는 온전히 믿음의 행위였습니다(히11:23). 그러나 아이가 점점 커 감에 따라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쩔 수없이 그를 나일 강가에 버려야 했지만 그냥 버리지 아니했습니다. 갈상자를 만들어 물이 새지 않도록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물에 띄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부모들의 믿음을 받으시고 역사하셨습니다.
마침 바로의 딸이 그때 목욕을 하러 하수로 내려왔습니다. 나일강에서 목욕하는 것은 다산과 무병장수와 관계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로의 딸이 목욕을 하고 있는 동안 시녀들이 하숫가에서 경비를 위해 순찰하다가 갈대 상자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바로의 공주는 아기가 우는 것을 보고 히브리 사람의 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때 이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누이가 달려가 말했습니다.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젖 먹이게 하리이까?” 바로의 공주는 엉겁결에 이를 승낙하게 되어 모세는 바로 공주의 양아들이 되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양육비를 받아가며 모세를 젖떼기까지 양육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는 젖을 3살까지 먹였기 때문에 어릴 때의 신앙교육은 선민으로서의 혼을 갖게 하였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결코 우연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뜻을 두시고 섬세하게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부모의 믿음과 또 누이의 재치와 바로의 공주로 하여금 아이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하심으로서 물에 빠져 죽을 모세의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여인들의 모성애를 귀히 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게 함으로써 지도자로서 궁중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셨습니다. 애굽은 당시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왕자로서 최고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7:22절에 보면 모세가 애굽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철학, 역사, 문학, 사상, 법학, 수학, 과학, 수사학, 천문학, 지리학, 군사학 등 학문에 통달했고 각종 무술과 예절을 배움으로써 왕도를 몸에 익혔습니다. 이는 후에 바로와 담판하며 출애굽 역사를 이루고 또 모세 오경을 쓸 수있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 기초가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 지도자일수록 더욱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주의 종들을 보면 인간적인 기초를 쌓기 위해 부단한 투쟁을 하였습니다.

11a절을 봅시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 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장성한 후에’라는 말씀은 스스로 옳고 그름을 분변하고 사리판단을 할 수있는 나이임을 말해 줍니다. 모세는 이때까지 인생 기초를 쌓느라고 자기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무엇인가 일을 해야 되고 인생의 방향을 잡아야 할 중요한 시기가 되자 자아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았습니다. 이때 그의 마음 가운데는 동족애가 생기고 자신이 애굽 사람이 아닌 히브리 사람이라는 자아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모세의 내면에 일어난 변화의 역사를 잘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가 히브리인으로서 분명한 자세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히브리인으로서 자아발견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민족애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앙적인 자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24, 25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11:24,25)
모세는 장성하여 장래의 진로를 결정하고자 할 때 많은 갈등과 번민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현재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세상의 명예와 부와 권세와 사랑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애굽의 왕자로서 그에게 주어진 특권은 엄청났습니다. 잘만하면 애굽을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도 될 수 있습니다. 반면 그가 이스라엘 편에 설 때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수치와 멸시와 고난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또한 자기를 키워 준 바로 공주의 호의도 거절해야 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있으면서 얼마든지 자기 백성을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이를 포기한다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중대한 갈림길에서 마침내 믿음으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였습니다. 이 믿음의 결단은 많은 아픔과 희생이 따랐지만 모세를 모세되게 한 위대한 결단이었습니다.
모세는 애굽 사람이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보자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았습니다. 그는 태권도로 단숨에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에 감추어 버렸습니다. 그 이튿날이었습니다. 이제는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같은 동포끼리 싸우지 못하도록 말렸습니다. 그는 형제들이 자기를 그들의 구원자로 삼으셨음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그들은 모세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그제야 모세는 모든 일이 탄로나서 바로가 자기의 목숨을 찾고 있는 줄을 알고 미디안으로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루 아침에 왕자로서의 모든 특권을 상실하고 도망자의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백성들마저도 자기를 몰라주고 배척한 사실이 그에게는 가장 견디기 힘든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인생은 완전히 끝장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절망적인 때 하나님 안에서는 새로운 희망의 시작입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영적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광야의 연단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그를 광야로 몰아내셨습니다.

둘째, 광야교육을 시키신 하나님(16-22). 모세는 바로의 낯을 피하여 멀리 미디안 광야까지 도망갔습니다. 거기서 하루는 실의와 좌절 가운데서 우물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때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는데 그들이 우물에 와서 물을 길어 양무리에게 먹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목동들이 자매님들을 업신여기고 심술궂게 그들을 쫓았습니다. 이를 보고 있던 모세는 궁중에서 배운 신사도를 발휘하여 약자를 도와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날은 일찍 집에 들어가게 되자 아비가 이를 이상히 여기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아비는 왜 그 사람을 데려오지 않았느냐고 책망했습니다. 딸들은 아비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르우엘은 모세를 청하여 융숭하게 그를 대접했습니다. 갈 곳 없는 모세는 이곳에 거하게 되고 마침내 십보라와 결혼하여 이드로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십보라가 아들을 낳자 모세는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가 얼마나 외로운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러면 광야에서의 모세의 생활이 어떠했을까요? 그는 처갓집에서 장인의 양무리를 치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처가살이를 한다는 것은 남자로서 가장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1, 2년도 아닌 40년 동안 처가살이를 하며 자기 양도 아닌 장인의 양무리를 쳐야 했으니 그 괴로움이 어떠했겠습니까? 궁중에서 섬김 받던 그가 이제는 섬기는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보다도 최고의 궁중교육을 받은 그가 광야에서 무의미하게 양치는 생활만 해야 했습니다. 그가 40년 동안 말 못하는 양무리와 함께 있은 결과 나중에는 입이 뻣뻣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철저하게 고독을 씹으면서 나그네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이곳에서는 그가 배운 학식이나 재능이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는 완전히 폐인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큰 뜻을 두시고 그를 연단시키고 계셨습니다.

그러면 그가 광야에서 받은 훈련이 무엇이었을까요?
첫째는, 겸손 훈련입니다. 모세는 궁중교육을 통해 지도자로서 실력을 쌓았습니다. 그에게는 강인한 의지가 있었고 또 불타는 정열이 있었습니다. 또한 고난받는 백성들을 위해 살고자 하는 선한 뜻도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백성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적인 성실과 의지, 능력만으로 안 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가 철저히 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쓰실 수있는 기본 요건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자기를 의지할 아무 것도 없도록 그를 낮추시되 철저히 낮추셨습니다. 자기가 실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 자신의 힘과 지혜와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자신의 무력함을 철저히 깨닫게 하셨습니다.

둘째는, 목자의 내면성 훈련입니다. 하나님은 40년 동안 모세로 하여금 양치는 목자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목자의 심정을 배우고 인내심을 갖게 하셨습니다. 양을 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양은 하나에서 열까지 섬세히 잘 돌봐 주어야 합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돌봐 주지 않으면 데모를 합니다. 양은 목자가 보호하고 인도해 주지 않으면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양은 여러 면에서 사람과 비슷합니다. 모세는 40년간 양치는 생활을 통해 노예 백성 이스라엘을 품고 섬길 수있는 목자의 내면성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처음에 그는 양의 허물과 실수를 참지 못하고 막대기로 많이 때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에는 양의 어떠한 허물과 실수도 인내하고 사랑으로 품고 섬길 수있는 성숙한 목자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과 깊이 사귈 수있는 고독 훈련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아무라도 대화할 수없는 고독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광야에는 거짓도 없고 유혹도 없고 인간의 박수 갈채도 없습니다. 광야에서는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고자 투쟁할 필요도 없습니다. 광야에는 고요함과 적막함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가질 수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종들이 복음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반드시 교육을 받아야 할 곳입니다. 선지자 엘리야도 광야에서 하나님의 훈련을 받았고, 세례 요한도 사역을 감당하기 전 광야에서 머물렀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러하였고,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그러하였습니다. 모세는 광야 훈련을 통해 후에 시내산에 올라가 40일 40야 동안 하나님과 교제하며 율법을 전수 받을 수 있었습니다.

결론: 이스라엘을 권념하신 하나님(23-25)

23-25절을 보십시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하나님은 오랫동안 구원역사를 위해 준비하신 후에 때가 되자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습니다. 권념하셨다는 말은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고통 중에 울부짖는 기도 소리를 다 듣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언약의 말씀을 기초로 그들을 구원코자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모세 한 사람에게 소원을 두고 키우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키우시되 80년 동안 키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조급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죄와 사탄의 권세 아래 신음하고 있는 양무리들의 고통과 울부짖음을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캠퍼스 지성인들에게 크신 뜻을 두시고 이 시대에 출애굽의 역사를 이룰 모세와 같은 영적 지도자로 소망을 두고 연단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크신 뜻을 두시고 키우시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