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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4:12-25(천국복음의 일꾼들을 부르신 예수님)

by Mark Yang   08/16/2019  

Question


마태복음 제 5 강

천국복음의 일꾼들을 부르신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4:12-25
요절: 마태복음 4:19

Ⅰ. 복음 역사를 시작하신 예수님(12-17)
1.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복음역사를 시작하고자 하실 때 시대 형편이 어떠했습 니까(12)? 이때 예수님은 어디로 거처를 옮기셨습니까(13)? 이렇게 하신 데에는 어떤 뜻이 있습니까(14)?
2. 예수님께서 복음역사를 시작하실 때 갈릴리 백성들의 영적 형편이 어떠했습니까(15,16)?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어떤 분이 되셨습니까?
3. 이때부터 예수님께서 비로소 전파하신 메시지가 무엇입니까(17)?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 을 믿어야 할 절대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Ⅱ. 첫번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18-25)
1. 예수님께서 첫 메시지를 전파하신 후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베드로와 안드레는 갈릴리 바다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18)? 그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초청과 약속의 말 씀이 무엇입니까(19)? 이 가운데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희망이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2.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어떻게 순종했습니까(20)? 예수님은 또 어떤 자들을 그의 제자로 부르셨습니까(21,22)?
3. 예수님은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무엇을 하셨습니까(23a)? 복음을 왜 천국복음이라고 했을까요? 또 아울러 백성들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도우셨습니까(23b)? 이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좇았으며 어느 정도 많은 사람이 좇았습니까(24,25)?






Message


마태복음 제 5 강

천국 복음의 일꾼을 부르신 예수님

말씀:마태복음 4:12-25
요절:마태복음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 게 하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인류 구속역사를 시작하시기 전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시기 위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힘든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그후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인류 구속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 오셔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곧 이어 천국 복음을 전파할 일꾼들을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예수님의 복음 역사는 흑암과 사망의 땅에 앉은 자들에게 빛을 비추이는 생명의 역사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무의미한 고기 낚는 생활인의 삶을 청산하고 사람을 취하는 위대한 사명인의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12-17)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복음 역사를 시작하실 때의 시대 형편이 얼마나 어둡고 절망적이었는가를 잘 말해 줍니다. 당시 의인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힌 것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헤롯은 정치 지도자로서 그 시대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음란하여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나라의 도덕성이 무너지고 불의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음란한 죄를 지어 백성들에게 악영향을 끼쳐도 아무도 말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 시대의 양심이 되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은 위선과 독선으로 가득차 있어 죄를 책망할 내적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스피릿이 충만한 세례 요한은 헤롯이 왕일지라도 그의 죄악을 분명하게 책망했습니다.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은 옳지 않소.” 그러자 화가 난 헤롯은 요한의 입을 막기 위해 그를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마14:3,4). 세례 요한은 그 시대의 양심이요 어두운 시대를 비추이는 등불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옥에 갇힘으로 시대의 양심은 짓밟히고 희망의 등불은 꺼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어두운 시대에 무엇을 하셨습니까? 시대는 불의와 싸우기를 요구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분노하는 군중을 동원하여 불의의 세력에 항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오히려 갈릴리로 물러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시대문제를 외면하신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치적인 싸움보다도 크신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섬기고자 하셨습니다. 지엽적인 문제보다 좀 더 근원적인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시대문제에 말려들지 않으시고 복음 역사를 섬기셨습니다. 요한이 옥에 갇힌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불행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속역사 측면에서 볼 때 이는 요한의 시대가 거하고 예수님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말해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로 물러가셔서 이때까지 자라나신 고향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복음 역사의 캠프를 차리셨습니다(13). 그 후부터 가버나움은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곳은 팔레스틴의 북방 변경지역으로서 이방문화와 접촉이 잦고 또 이민족의 침략을 많이 받아 수난을 많이 겪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자연히 이방인과 피가 섞여 순수 혈통을 자랑하는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멸시를 받았습니다. 인재 등용, 도로 사정 등 모든 면에서 차별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恨)과 슬픔이 많았습니다. 이곳은 이방의 갈릴리라 불리울 정도로 척박하여 역사를 이루기에는 적합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수도나 대 도시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멸시받는 갈릴리에서 복음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14). 일찌기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가 이곳에서 복음 역사를 이루심으로 그 땅 백성들이 특별한 은총을 입게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사9:1,2). 예수님은 시대상황이나 환경이나 인간적인 야심에 따라 행동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의 갈릴리에서 복음 역사를 시작하신 데에는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 역사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위한 것임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 만민을 위해서 이방의 갈릴리에서 복음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갈릴리 지방에 사는 백성들의 영적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15,16절을 보십시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길과 이방의 길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백성들은 흑암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는 사형선고를 받은 암 환자가 절망 상태에 빠져 힘없이 앉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삶의 희망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삶의 희망이 없이 살아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삶의 희망이 없기 때문에 인생을 되는 대로 저주스럽게 살아갑니다. 쾌락의 노예가 되어 짐승과 같이 살아갑니다. 흑암에 있는 자들은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이 왜 살아야 되는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한채 태어났으니까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살아갑니다. 이렇게 영적 무지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흑암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운명주의와 패배주의, 허무와 무기력과 같은 사망권세에 시달리며 살아갔습니다. 사람들의 입에서는 힘들다, 죽겠다는 부정적인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고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들에게는 빛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큰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면 ‘큰 빛’이 갖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인생의 근본 문제인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촛불이나 전등불은 부분적으로 어두움을 밝힐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태양과 같은 큰 빛은 근본적으로 어두움을 몰아냅니다. 예수님은 태양과 같이 큰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죽음과 어두움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돋는 해와 같이 임하여 그 내면에 역사하는 모든 어두움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눅1:78,79). 사람들에게 많은 문제가 있는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죄 문제요, 죽음 문제입니다. 때로 사람들은 이에 반항해 보지만 어쩔 수 없이 굴복하고 운명의 굴레에 갇혀 한계적인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큰 빛으로 오셔서 우리를 죄와 죽음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빛과 생명의 세계 속에서 살게 하십니다.

둘째로, 큰 빛은 우리의 내면 깊이 드리워져 있는 어두움의 요소를 물리쳐 줍니다. 사람들은 밝고 환한 인생을 살고 싶어 하지만 내면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죄의 소욕과 자의식으로 인해 원치 않게 어두운 인생을 살아갑니다. 또 사람들은 힘차고 박력있는 인생을 살기 원하지만 원치않게 무기력하게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성격문제로 생각하고 소심한 성격을 고쳐 보고자 여러가지로 노력해 봅니다. 노력하면 어느 정도 좋아지는듯 하다가 조금 지나면 용수철과 같이 되돌아오게 됩니다. 어두움의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고 위로부터 큰 빛이 임해야 됩니다. 위로부터 큰 빛이 임할 때 내면이 어둡던 자가 환해지고 무기력하던 자가 생명력이 충만한 자로 변화되게 됩니다. 큰 빛은 우리에게 참된 기쁨을 주고 삶에 희망을 줍니다. 큰 빛은 우리에게 넘치는 생명력을 공급해 줌으로써 박력있는 인생을 살게 합니다. Robert Woods 목자는 처음에 한국에 와서 메시지를 전하는데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읽었습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큰 빛이 그에게 임하였을 때 그는 박력있고 생명력이 넘치는 메신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을 비추이셨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전파하심으로 인생들에게 복음의 빛을 비추이기 시작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이 메시지는 3:2절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와 동일합니다. 그러나 요한의 경우는 천국의 왕이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뜻이라면, 예수님의 경우는 천국의 왕이신 예수님이 오셨으니 마음 문을 열고 영접하라는 뜻입니다. 회개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빛으로 나아오기를 꺼려하는 것은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입니다(요3:19). 빛으로 나아온다는 것은 생명의 세계, 은혜의 세계, 빛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빛으로 나아갈 때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담당해 주시고 놀라운 사죄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 허랑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이때 그는 자유를 상실하고 내면의 행복과 기쁨을 잃고 어두움의 자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믿음으로 빛의 세계로 나아왔을 때 자유와 기쁨과 행복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이 말씀은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희망과 생명을 주는 천국의 메시지입니다.

Ⅱ. 천국 복음의 일꾼들을 부르신 예수님(18-25)

18절을 보십시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서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후 가장 먼저 무엇을 하셨습니까? 큰 군중 집회를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장 먼저 천국 복음을 전파할 일꾼을 찾으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먼저 갈릴리 해변을 다니시면서 사람을 취하셨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호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기 때문에 사람들은 갈릴리 바다라 불렀습니다. 이곳은 요단강에서 물이 흘러들어와 사해로 흘러나가기 때문에 물이 맑고 맛있는 물고기가 잡히기로 유명했습니다. 이 부근 사람들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을 다니시면서 장차 복음 역사의 주인공이 될 일꾼을 찾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다에 그물을 던지며 열심히 일하고 있는 건장한 두 청년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유의깊게 보셨습니다. 그들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젊은이들이었으나 허무의 바다에서 무의미하게 고기를 낚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초청하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이들을 부르신 목적과 그들에게 두신 소망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들은 현재 고기 낚는 어부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기 낚는 어부와 사람 낚는 어부는 어떻게 다릅니까? 고기 낚는 어부는 그 대상이 고기입니다. 고기 낚는 어부는 크고 맛있는 고기를 잡기 위해 온 마음을 씁니다. 고기 낚는 생활은 얼핏 보기에 참으로 낭만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을 일생동안 한다고 생각할 때 이는 결코 낭만적이 아닙니다. 이는 피곤과 권태의 연속입니다. 고기 낚는 생활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다니는 직장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장이 회사일 수도 있고 병원일 수도 있고 정부 청사일 수도 있고 teaching 아르바이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든지 삶을 영위하기 위해 같은 생활을 반복한다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삶의 분명한 목적와 희망이 없이 그저 먹고 살기 위해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철학자 하이덱거는 현대인들의 가장 큰 병폐는 다람쥐 채바퀴 도는 듯한 일상성에서 오는 권태임을 지적했습니다. 사람들은 일상성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하여 탈선하게 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대학교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한달 동안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열심히 일하여 첫 월급을 받았습니다. 그는 돈 몇푼 벌기 위해 대학 4년동안 공부하고 뼈빠지게 일했다고 생각하니 너무 허무해서 월급봉투를 팽개쳐버렸습니다. 그러나 먹고 살자니 어쩔 수 없어서 그 봉투를 다시 주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이 반드시 따분하고 권태로운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고기를 많이 잡아 동료들과 함께 인생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또 증권을 투자하여 부를 축적하는 재미를 누릴 수도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여가를 잘 선용하여 스포츠를 즐기고 취미생활도 즐길 수도 있습니다. 해외 여행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기 낚는 어부의 생활은 근본적으로 열매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삶은 그때 그때 재미있는 것 같지만 지내놓고 보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열매를 맺어야 할 절대적인 사명이 있습니다(창1;28). 이는 우리가 인생을 결산 하는 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 각각 행한 대로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고후5:10). 우리가 자기를 중심한 소시민적인 인생을 살아서는 안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고기 낚는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삶의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반면 사람 낚는 어부는 어떠합니까? 이는 사람을 죄와 죽음의 바다에서 건져내어 빛과 생명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요 또한 사람을 취하여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사람으로 키우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여러가지 할 일이 많지만 죄와 사망의 바다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고 사람을 키우는 것처럼 가치있고 보람된 일은 없습니다. 이는 열매 맺는 사명인의 삶을 삶으로써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12:3절에 보면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사람을 살리고 키우는 목자생활을 할 것입니다. 목자생활은 힘들기는 하지만 가장 보람되고 가장 가치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를 위해 청춘을 불사릅니다. 목자생활의 맛을 본 사람은 이를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합니다. Pable star Oh 선교사님은 외교관으로서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외무부에 근무하면서도 생활인의 삶이 너무나 권태롭고 허무하여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몇번이나 그만 두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차 사고를 만난 후 안요셉 선교사님과 말씀 공부를 통해 사명인의 삶을 심령 깊이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온 정열을 바쳐 사람을 낚는 사명인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본국에 계실 때에 스피릿이 충만하여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증거하고 퇴근 후면 캠퍼스에 가서 열심히 피싱을 하여 많은 열매를 남겼습니다. 지금은 브라질에 가서 박엘리야 선교사님과 동역하여 열심히 캠퍼스에 가서 피싱을 하며 사람 낚는 사명인의 생활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요사이 김요셉 목자님과 이양구 목자님이 목자생활의 맛을 알고 외무부에서나 어디서나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하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 낚는 어부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람을 품고 섬길 수 있는 내면성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미묘한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는 목자생활하면서 사람을 돕는 데는 기술이나 지식으로 안되고 내면성이 있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격이 변화되어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어떤 사람도 다 품고 섬길 수 있는 성숙한 내면성의 소유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이는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배우고 본받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으로부터 단순한 지식이나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사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사제지도가 땅에 떨어지고 교육이 인격도야보다는 기술과 지식전수에만 역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제자가 스승의 인격과 사상을 본받는다는 개념이 잘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자란 본래 스승의 인격과 사상을 본받는 자입니다. 스승을 본받으려고 애를 쓰다 보면 심지어 스승의 목소리, 손짓, 걸음걸이까지도 본받게 됩니다. 옛날에는 도제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처음부터 기술을 가르치지 않고 한동안 심부름, 청소와 같은 잡일을 시켜서 겸손하게 한 다음 어느 정도 내면성이 생기면 그때 비로소 기술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 지식이나 기술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는 실생활 가운데서 인격과 인격이 맞부딪히면서 예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겸손과 온유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까지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낚는 위대한 사명인이 되려면 학벌도 좋고 사람을 설득시킬 수 있는 웅변술 등 특별한 은사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훌륭한 제자 양성가가 되는 것은 이런 외적 조건과는 무관하고 단지 예수님의 학교에 입학하여 예수님을 잘 배우기만 하면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바리새인으로서 딱딱한 율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적인 사람은 결코 사람을 키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깊이 배웠을 때 수많은 사람을 품고 키우는 위대한 제자 양성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습니다(고전9:19). 우리는 예수님의 학교에 입학하여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되어서 겸손하게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할 때 누구든지 사람을 낚는 위대한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기만 하면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의지요, 그들에게 두신 소망입니다. 그들은 현재 거친 광석과 같고 보잘 것 없는 진흙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광석이 예수님의 손에 들어가기만 하면 빛나는 순금이 되어 나옵니다. 또한 진흙이 예수님의 손에 들어가기만 하면 아름다운 도자기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들이 아무리 거친 내면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뛰어난 도편수가 되시는 예수님의 손에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성숙한 목자로 빚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람 낚는 기술이나 지식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 자체를 그리스도의 사람이요 제자 양성가로 키우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두운 시대에 사람을 취하여 키우심으로 빛을 비추셨습니다. 제자양성은 시대문제와 무관한 것 같고 또 당장에 효과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제자양성이야말로 시대문제를 실제적으로 해결하는 첩경입니다. 오늘날은 사람은 많지만 사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신자는 많지만 신자다운 신자가 없는 것이 문제요, 지도자라 칭하는 자는 많지만 지도자다운 내면성을 가진 자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양성을 하심으로 어두운 그 시대를 이기고 인류구속역사를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위대한 영적 지도자로 키우고자 하시는 희망으로 불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키우심으로 장차 그들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코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에 압도당하여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거기서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그물 깁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도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그들도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면 어떤 유익이 있는가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부르심에 즉시 응답하였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용기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물과 배와 부친까지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다는 것은 예수님께 최고 우선권을 두고 예수님을 배우겠다는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이 믿음의 결단은 위대한 결단이었습니다. 이 결단으로 인해 그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물거품과 같이 사라질 무명의 어부에서 온 인류가 흠모하는 인류의 스승이 될 수 있었습니다.

23-25절은 예수님의 초기 갈릴리 사역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저희 회당에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졌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메시아의 사랑과 능력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큰 빛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앓는 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일일이 영접하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밝은 생명빛을 비춰주시고 삶의 희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개개인의 빛이 되시고 시대의 빛이 되시고 온 인류의 빛이 되셨습니다. 큰 빛으로 오셔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천국 복음의 일꾼들을 부르시고 키우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