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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1-16(복 있는 사람)

by Mark Yang   08/16/2019  

Question


마태복음 제 6 강

복 있는 사람

말씀: 마태복음 5:1-16
요절: 마태복음 5:3

Ⅰ. 가장 행복한 사람들(1-12)
1. 예수님은 누구를 중심으로 이 “산상보훈”의 말씀을 가르치십니까(1,2)? 1-12절까지에는 특별히 무엇에 대해서 가르치십니까? 우리가 왜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가를 알아 야 합니까?
2. 예수님은 제일 먼저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까(3)?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어떤 상태임을 말합니까?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은 무엇을 약속하십니까? 예수님은 왜 제일 먼저 심령이 가난한 것에 대해 말씀하셨을까요?
3. 애통하는 자는 사람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왜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십니까(4)? 그들은 무엇을 애통해 합니까? 그들이 받는 위로는 어떤 위 로입니까?(고후1:3,4)
4. 온유한 자에게는 어떤 축복이 약속되었습니까(5)?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 땅을 얻는다 고 생각합니까? 그런데 왜 온유한 자가 땅을 얻을까요?(창26:24-28)
5.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서 ‘의’는 무엇을 말합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얼 마나 의를 갈망합니까? 그런 사람에게 어떤 복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얼마나 만족 주지 못할 것을 찾아 헤맵니까?
6.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합니까(7)? 그리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복을 받습니까?
7.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8)? 청결한 마음이란 어떤 마음입니까?
8.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성이 무엇입니까(9)? 화평케 하는 데에 따르는 어려움이 무엇이며 그 일에 어떤 내면성이 요구됩니까? 우리가 어떻게 화평케 하는 자(peace maker)가 될 수 있습니까?(고후 5:18,19)
9.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무엇을 얻게 됩니까(10)? 우리가 핍박을 받을 때 왜 도 리어 기뻐해야 합니까(11,12)?

Ⅱ. 세상의 소금과 빛(13-16)
1. 예수님은 세상에서의 제자들의 위치와 역할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13a)? 만일 그 들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13b)? 제자들이 짠맛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 예수님은 세상을 어떻게 보십니까(14)? 어두운 세상에서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 니까(14-16)? 제자들이 비춰야 할 빛은 무엇입니까? 제자들의 착한 행실을 통해 누가 영광을 받게 됩니까(16)?


Message


마태복음 제 6 강

복 있는 사람

말씀: 마태복음 5:1-16
요절: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태복음 5-7장은 유명한 산상보훈입니다. 이 말씀은 불신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믿는 자들, 특히 제자들에게 주신 천국 시민의 헌장입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의 백미로서 장엄한 시와도 같고 웅장한 교향곡과도 같습니다. 산상보훈은 우리가 천국 시민으로서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오늘 말씀은 어떤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자인가를 말해 줍니다.

Ⅰ. 가장 행복한 사람들(1-12)

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자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염두에 두시고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결단한 소수의 선택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실 때 그들에게 목자가 없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법도를 가르치심으로 그들이 무리들의 선한 목자가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3-12절 말씀은 유명한 팔복입니다. 팔복은 하나 하나가 진주와 같은 보배로운 말씀인 동시에 전체적으로 완전한 조화를 이룬 진주 목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팔복은 사닥다리와 같아서 단계가 있습니다. 팔복은 처음에 “복이 있도다”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복은 헬라어로 마카리오스(μακ?ριο )인데 이는 즐거움이란 뜻입니다. 즐거움에서도 거룩하고 신성한 즐거움, 죽음을 초월한 영원한 즐거움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최고의 행복한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은 “행복하여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소유나 행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태(being)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행복은 소유보다는 존재, 외적인 것보다는 내면적인 것, 물질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가진 자가 행복하다거나 무엇을 행하는 자가 행복하다고 하지 않으시고, 어떤 마음의 상태를 가진 사람의 행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자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까?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3). 예수님은 물질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지 않으시고 영적으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가난이란 부족한 상태, 가진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마음이 빈 상태로서 영적으로 부족함을 절실히 깨닫고 이를 채우고자 애를 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영적으로 겸손한 것으로서 인간적으로 겸손한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이 영적으로 한없이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영적인 소원을 가지고 끊임없이 겸손하게 배웁니다. 말씀의 깊은 세계를 알고자 밤낮으로 말씀을 연구합니다. 또 항상 허리를 굽히고 깊은 믿음의 세계, 은혜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노력합니다. 이런 자는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그러나 심령이 부요한 자는 영적으로 궁핍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를 알고자 애쓰지 않습니다. 이런 자는 영적으로 교만하여 성장하지 못합니다. 대개 3학년 때까지는 겸손하게 배우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4학년이 되고 신앙생활의 해가 거듭할수록 점점 영적 소원을 상실하고 구신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해가 거듭할수록 영적 소원이 더욱 불탑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자에게 천국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할 때 시제가 현재입니다.(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이 주어질 것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순종적이어서 왕되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기꺼이 받습니다.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자연히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랑과 평화로 다스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심령이 부요한 자는 왕되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기를 거부하고 마음으로부터 반발하고 불순종합니다. 이런 자의 마음이 행복할 리가 없습니다.

가난한 심령은 모든 복의 기초가 됩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고 애통할 수 없으며, 심령이 가난하지 않고 온유할 수 없습니다.

둘째, 애통하는 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4). 애통은 깊은 슬픔을 뜻합니다. 세상에는 슬픔이 많습니다. 의미없이 중노동을 해야 하고 병들고 죽고 늙는 것은 인생을 슬프게 합니다. 이 때문에 세상에는 자기 연민에 빠져 인생을 슬퍼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생각하고 남몰래 슬픈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이런 슬픔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영적으로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먼저 자신의 지은 죄로 인해 슬퍼합니다. 과거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였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무감각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공부하고 심령이 가난하게 되면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를 깨닫고 자신의 죄로 인해 애통하게 됩니다.

다윗 왕은 순간적으로 정욕에 빠져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 애통하며 침상이 젖도록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그는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시51:1,2).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하나님께서 이렇게 애통하는 그에게 사죄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다윗은 이 행복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
또한 애통이란 자신의 죄만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 캠퍼스의 죄, 민족의 죄로 인해 슬퍼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다른 사람의 죄를 나의 죄로 생각하고 슬퍼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백성들의 죄로 인해 눈물이 시내처럼 흐를 만큼 애통해 했습니다(애3:48).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영접치 않은 동족으로 인해 마음에 끊임없는 고통을 겪었습니다(롬9:1,2). 예수님은 복음을 영접지 않는 예루살렘 성
을 향하여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며 우셨습니다(눅19:41). 우리도 양들의 죄를 인하여 심령이 상하여 눈물을 흘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양들과 이 시대의 죄로 인해 애통해 할 때 하나님의 위로가 있게 됩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상한 마음을 위로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십니다(시34:18). 뿐만 아니라 장차 천국에 들어가면 주님께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계21:4)

셋째, 온유한 자. 5절을 보십시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이요.” 이 말씀은 역설적입니다. 땅을 얻으려면 투쟁심이 강하고 호전적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날은 부동산 투기를 하는 자들이 땅을 얻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온유한 자는 어떤 자를 말합니까? 온유란 말 그대로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뜻입니다. 온유한 자는 어린 아기를 품은 인자로운 어머니의 품과 같이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온유한 자는 사람을 잘 품고 섬깁니다. 포용력이 강합니다. 마음이 넓고 이해심이 깊습니다. 상대방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나쁜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과 싸우기 보다는 양보하고 져 줍니다. 온유한 자는 짜증나는 일이 생겼을 때 신경질을 내거나 혈기를 부리지 않고 어려움을 잘 참고 견딥니다. 쉽사리 노하지 않고 복수심을 품고 보복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반발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자기의 뜻을 꺽고 겸손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이러한 자는 험한 세상에서 패배하고 낙오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성격이 모질고 악착같아서 남을 짓밟고 올라서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진정으로 승리하는 자는 마음이 온유한 자입니다.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무력을 쓴 나라는 결국에는 망하였지만 온유의 법칙을 쓴 나라는 승리했다’고 증거했습니다. 유럽을 정복한 나폴레옹은 센트헤레나 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무력으로 온 유럽을 정복하였으나 결국 실패했다. 그러나 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온 인류를 정복하였다. 지금도 그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내 놓고 충성하고 있다.” 이처럼 온유는 정복의 원리입니다. 온유한 자는 사람을 얻습니다. 양을 잘 치는 자들을 보면 마음이 온유한 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온유한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온유한 성품은 체질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온유함이란 결코 체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는 성격이 온순한 자였습니다. 또 저는 비교적 인내심이 강하여 잘 참았습니다. 그래서 나야말로 온유한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목자생활을 하면서 훈련을 받을 때 나의 죄악된 본성이 다 드러나고 내가 얼마나 온유하지 못한 자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반발심이 많고 불순종을 잘 하는가, 또 마음이 넓고 섬세하지 못하고 거칠고 좁은 자인가, 얼마나 신경질을 잘내고 감정에 쉽게 요동하는가? 그러나 많은 연단을 통해 제 안에 조금씩 온유의 열매가 맺어져 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를 통해 온유란 결코 체질적인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성령의 열매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갈5:23). 그러므로 아무리 성격이 괘퍅하고 혈기가 많은 자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연단받기만 하면 온유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동족을 구원하기 위해 애굽사람을 쳐 죽이는 혈기가 많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40년 동안 광야훈련을 받고 완전히 자기가 죽었을 때 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할 만큼 온유한 자가 되었습니다(민12:3). John Newton은 아프리카 흑인을 잡아다가 노예로 파는 잔인한 노예선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변화되었을 때 이제는 소자 하나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기만 하면 온유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마음이 온유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마11:2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우리가 온유하신 예수님을 배울 때 온유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넷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사람이 배고플 때는 먹을 것만 찾게 되고, 목마르면 마실 것만 찾게 됩니다. 주리고 목마른 상태는 소원이 절실함을 말해 줍니다. 세상에는 육신의 쾌락이나 물질을 얻는데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많습니다. 이런 자들은 돈을 벌고 쾌락을 추구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사랑을 얻기에 주리고 목마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물질과 권세와 사랑을 얻으면 만족을 얻을 것 같지만 이는 밑빠진 독에 물붓기와 같아서 만족이 없습니다. 목마를 때 바닷물을 마시면 갈증이 더 심하게 되는 것과 같이 이런 것들을 얻으면 얻을수록 더 주리고 목말라서 또 다른 것을 찾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어거스틴은 세상 지식과 쾌락에 주리고 목마른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이런 것들을 얻어도 그 영혼은 결코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영혼의 진정한 만족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 영혼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서 진정한 안식을 얻지 못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만족을 얻으려면 먼저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어야 합니다.‘의’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다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진실되고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간절한 영적 소원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고자 노력할 때 심령에 참 만족과 기쁨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만족의 원천이 되십니다.

다섯째, 긍휼히 여기는 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의’ 다음에 ‘긍휼’이 왔습니다. 의만 있고 긍휼이 없으면 냉정하고 무자비한 의가 되고, 긍휼에 의가 없으면 무분별하게 죄를 용납하기 쉽게 됩니다. ‘의’와 ‘긍휼’은 반드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긍휼이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는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 영혼이 영원한 파멸에 이를 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죄와 사단의 노예가 되어 소망이 없는 비참한 상태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은 오직 주님의 긍휼하심 때문입니다(디도서3:4,5).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다면 한 사람도 구원을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이는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엄청난 빚을 다 탕감해 주셨습니다(마18:27).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긍휼을 덧입은 자로서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도와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 때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여섯째, 마음이 청결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냇물의 물이 깨끗하면 속이 다 보이지만 물이 더러우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세상의 더러운 것으로 가득차 있으면 결코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한 자는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깨끗하시고 순결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순수치 못한 자들에게는 그 얼굴을 가리우시지만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는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깨끗케 할 수 있습니까? 우리 인간의 마음은 아담의 타락 이후 근본적으로 부패하고 더러워졌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렘17:9).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 등 모든 악한 것들이 부패한 마음에서부터 나옵니다(막7:21-23). 이러한 마음을 정결케 하려면 회개하고 예수님의 보배피로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배피는 부패한 마음을 깨끗케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배 피로 씻음받아 마음이 정결케 될 때 영적 눈이 열려 신령한 영적 세계를 볼 수 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일곱째, 화평케 하는 자. 9절을 보십시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분쟁케 하는 자(trouble maker)요, 다른 하나는 화평케 하는 자(peace maker)입니다. 분쟁케 하는 자는 자기 주장이 강하고 남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건설적이기 보다는 비판적이고 부정적입니다. 또 상대방의 형편을 생각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합니다. 이런 자의 내면은 좁고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나 화평케 하는 자는 자기 유익보다 상대방의 유익을 구합니다. 또 자기를 죽이고 덕을 세우기에 힘씁니다. 또 화평을 사랑합니다. 이런 자는 황태자와 같이 마음이 넓고 이해심이 많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양편을 위해야 하기 때문에 중립적인 위치에 서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한 화평케 하는 자는 서로 사이좋게 지내도록 중재 역활을 하는 타협의 명수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양편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도록 진리에 기초해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화목하시기 위해 타협하지 않으시고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내어 놓으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면 먼저 하나님과 화평해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 하나님의 원수로서 하나님과 불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죄를 소멸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화평을 주심으로 화평의 십자가입니다(엡2:14).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와 화목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고후5:18,19).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은 적극적으로 화평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전쟁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 뿐만 아니라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도 반목, 질시, 시기, 질투가 끊일 날이 없습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할 때만이 인간과 인간, 나라와 나라 사이도 화평케 될 수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참으로 복된 자입니다.

여덟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10.11).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런 자에게 임하는 축복도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는 축복과 같습니다. 여기서 ‘의’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딤후3:12).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의롭고 진실되게 살고자 하면 세상이 우리를 용납하지 못하고 우리를 핍박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도리어 세상에서 예수님의 택함을 입었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15:19). 우리가 핍박을 받을 때 억울하고 분하여 마음에 상처를 입고 슬퍼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때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도 이같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잘못해서 핍박을 받게 되면 회개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신앙생활 한다고 공부를 잘 못하여 핍박을 받게 되면 회개해야 합니다. 핍박을 받게 되면 세상의 거짓된 희망이 털어지고 우리의 마음에 참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심어지기 때문에 천국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상에서 8가지 복은 제자의 삶이 어떠해야 되는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삶은 수준이 높고 거룩하고 신령합니다. 너무 수준이 높기 때문에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율법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신 소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크신 소원을 두시고 단계적으로 키워 주십니다. 팔복은 모두 예수님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복있는 자가 되려면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아야 됩니다. 신앙생활이란 외적 활동이 아니라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양을 치든지, 공부를 하든지, 직장생활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매사에 예수님을 본받고자 애쓸 때 예수님의 형상을 덧입게 되고 우리의 존재 자체가 진정으로 행복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Ⅱ. 세상의 소금과 빛(13-16)

13-16절은 제자들의 세상에서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제자는 세상에서 고고하게 사는 자가 아닙니다. 제자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지만 세상 안에 있고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도피하여 산속에서 살라고 하지 않으시고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사명을 감당토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자가 아니요 세상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자요, 또한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부패한 세상을 정화하는 자로서 세상을 이끌어 나가는 영적 지도자의 위치에 있습니다.

첫째,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13). 여기서 세상은 땅(earth)으로서 좁은 의미에서의 세상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땅에 거하고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세상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방부제의 역할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소금은 그 자체로는 별 가치가 없지만 육신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데는 없어서는 안될 필수불가결한 영양소입니다. 또 소금은 음식에 맛을 냅니다. 싱거워서 맛이 없는 음식이라도 소금이 들어가면 맛이 납니다. 또 소금은 부패를 방지시켜 음식을 신선하게 보존해 줍니다. 소금은 부패한 것을 깨끗하게 변화시키지는 못하지만 부패를 방지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부패한 사람을 깨끗한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부패하게 하는 세력들의 활동을 억제함으로써 선이 실행되고 신선한 상태가 계속 보존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캠퍼스에서나 직장에서 의롭게 살면 나 한 사람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이 함부로 죄를 짓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금이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려면 반드시 보이지 않는 가운데 녹아서 내부 세계에 침투해 들어가야 합니다. 이는 자기를 죽이고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금은 보이지 않지만 그 효과는 지대합니다. 보이지 않지만 효과가 지대한 것을 우리는 영향력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영향력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영향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영향력을 잃은 신자는 맛잃은 소금과 같이 아무 쓸모없는 자가 되어 버립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전인구의 25%의 신도수를 자랑하지만 영향력을 잃은 신자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에게 모욕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을 잘 못하고 좀 부족할지라도 영향력있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다물의 소금은 0.3%지만 바다의 모든 부패를 방지합니다. 이와 같이 참된 크리스찬이 0.3%만 되어도 이 세상의 부패를 방지할 수 있습니다.

둘째,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14-16).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은 “너희는 빛의 자녀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사람들은 빛되신 예수님께로부터 빛을 받아 그 빛을 주위 사람들에게 비추는 자입니다. 빛을 비추인다는 것은 빛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16). 불신자들은 신자들의 말보다도 생활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하기에 앞서 실제 생활에서 행동으로 본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보다도 더 힘이 있는 전도입니다. 우리는 빛된 생활을 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말씀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빛을 비추려면 자기가 타 들어가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이 어둡다고 불평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곳에서 적극적으로 빛을 비추는 생활을 할 때 세상은 밝아질 것입니다. 세상에 빛을 비추는 예수님의 사람들이 있는 한, 세상은 소망이 있습니다.

결론: 우리는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가치관이 팽배한 세상에 살면서 행복이 소유와 인간조건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행복한 자는 존재 자체가 영적인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는 가운데 진정으로 복있는 자요 또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