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제 10 강
지혜로운 사람
말씀: 마태복음 7:1-29
요절: 마태복음 7:24
Ⅰ.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1-12)
1. 남을 비판하는데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입니까(1)? 우리가 왜 남을 비판하게 됩 니까? 남을 비판하게 될 때 자신은 어떻게 됩니까(2)?
2. 남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3,4)? 우리가 형제를 바로 도우려면 먼저 무엇을 해야 합니까(5)?
3. 제자들은 남을 비판해서는 안되지만 무엇을 분별해야 합니까(6)? ‘거룩한 것과 진주’, ‘개와 돼지’는 각각 무엇을 가리킵니까? 왜 이런 분별력이 필요합니까?
4. 우리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7)? 적극적으로 구하는 사람들 에게 어떤 약속이 있습니까(8)?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어떤 분이십니까(9-11)?
5.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12)? 이 말씀은 어떤 점에서 율법과 선지자의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까?
Ⅱ. 말씀을 듣고 행하라(13-29)
1. 예수님은 어떤 문으로 들어가라 하십니까(13a)? 왜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13b,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무엇을 각오해야 합니까?
2.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어떤 자들을 삼가해야 합니까(15a)? 그들의 겉과 속이 어떻게 다릅니까(15b)? 우리가 어떻게 이들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16-20)?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3. 왜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21-23)?
4.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어떤 점에서 지혜로운 사람입니까(24,25)?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는 자는 어떠합니까(26,27)? 인생에 어떤 창수와 바람이 있습니 까? ‘주초를 반석 위에 놓는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5.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무리들이 왜 놀랐습니까(28,29)?
마태복음 제 10 강
지혜로운 사람
말씀: 마태복음 7:1-29
요절: 마태복음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우리는 이때까지 산상보훈을 공부했습니다. 산상보훈은 참으로 주옥과 같은 말씀으로써 우리의 삶을 고상하게 하고 풍성하게 하고 값지게 합니다. 오늘 말씀은 산상보훈의 마지막 말씀으로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1-12)
첫째, 비판하지 말라(1-6). 1절을 보십시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남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법정에서 행하는 공적인 재판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요사이 개혁으로 인해 많은 비리 인사들이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적 재판은 사회에 공의와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또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말고 건설적인 비평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에 기초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내일의 발전을 위해서 건설적인 비평을 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비판은 죄를 정하는 것으로서 자신이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서 상대방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파괴적입니다. 목자가 양의 문제를 이야기 하고 때로는 책망하는 것은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찌하든지 영적으로 살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죄에는 사랑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사랑 없이 상대방의 약점과 허물을 지적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마침내는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남을 비판하기 좋아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사람들이 왜 남을 비판하기를 좋아할까요? 우선 남을 비판하면 속이 시원하고 스트레스가 해소됩니다. 또한 은연 중에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상대적 우월감을 가지고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기 위해 남을 판단합니다. 이렇게 남을 판단하게 되면 인간 상호 간에 신뢰와 사랑의 관계성이 파괴되어 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사단이 역사하는 꼬투리를 마련해 주게 됩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할 때 박수를 치며 가장 기뻐하는 자는 사단입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게 되면 비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뒤에서 남의 흉을 보고 남을 깎아 내리게 되면 다른 사람도 내가 안보는 데서 나를 비난하게 됩니다. 결국 남을 비판하는 것은 누워서 침 뱉는 격으로서 자신의 인격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의 약점은 잘 보고 남의 흉을 보기 좋아하는 좋지못한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남의 약점보다 장점을 보기를 좋아하고, 남의 흉을 보기보다 남을 칭찬하기 좋아하는 습성을 길러야 합니다.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라는 말씀은 우리가 남을 비판하게 될 때 남으로부터 비판을 받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남을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남을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큰 죄입니다. 비판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남을 비판할 자격이 없음을 풍자적으로 말씀하십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들보는 집의 두 기둥 위를 건너지르는 널판을 말하고 티는 톱밥에서 나오는 아주 작은 먼지를 말합니다. 이는 남의 허물은 크게 보이지만 실상은 티에 불과하고, 자기의 허물은 작게 보이지만 실상은 들보와 같음을 말해 줍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과 실수는 잘 보지 못하지만 남의 약점과 실수는 잘 봅니다. 그래서 상한 심정을 가지고 쪽집게를 가지고 다니면서 어찌하든지 남의 눈의 티를 빼고자 애를 씁니다. 사실 눈의 티를 빼는 일처럼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여기에는 섬세성과 침착성과 인내심이 요구됩니다. 무엇보다도 상대방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없이 남의 눈의 티를 빼고자 하다가 눈을 상하게 하여 결국에는 봉사를 만들기 쉽습니다.
우리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고자 하기 전에 먼저 무엇을 해야 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외식하는 자여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우리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형제의 눈 속의 티를 빼주고자 할 때 외식하는 자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내 탓이로다, 내 탓이로다, 내 큰 탓이로다.”하며 문제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고 회개하면 문제가 쉽게 해결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개 문제가 생기면 “네 탓이로다, 네 탓이로다, 네 큰 탓이로다.”하며 남에게 모든 원인을 돌리고 남을 비판하기 때문에 문제가 더 확대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회개할 때 영적인 눈이 밝히 떠져서 남을 올바로 도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기 개혁과 자기 성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볼 때 남을 판단할 아무런 자격이 없는 비참한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을 끌고 와서 날카롭게 정죄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심으로 먼저 자신을 살펴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자 모두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하나씩 하나씩 물러갔습니다. “비판하지 말라.” 이는 우리 주님의 엄한 명령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이 말씀은 비판해서는 안되지만 옳고 그름을 분변하는 분별력은 가져야 함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남을 비판하기보다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힘쓰다 보면 무분별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인본주의 신앙도 받아들이고, 세속적인 것도 받아들이고 세상과 타협하기 쉽습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순수 복음신앙을 잃어버리고 세속적인 것에 짓밟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영적 분별력을 갖도록 하신 것입니다. 거룩한 것과 진주는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가리키고, 개나 돼지는 율법주의 자들과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자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은 거룩하고 보배로운 진주와 같기 때문에 세속적이고 인본적인 것과 구별하여 거룩하게 보존되어야 합니다. 만일 순수 복음신앙을 지키지 않고 조금이라도 인본주의나 물질주의와 타협한다면 교회는 인본적이고 세속적인 자들에 의해 사정없이 찢기고 말 것입니다.
둘째, 구하라(7-11). 우리가 남을 비판하지 않고 또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자 할 때 쉽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또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높은 수준의 삶을 생각할 때 절망적인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온유한 자가 되기 위해 애를 쓰지만 자신도 모르게 혈기를 부리고 신경질을 내는 것을 보고 자신에 대해 절망할 때가 많습니다. 이때 우리는 체질 탓을 하며 영적 투쟁을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갖기를 원하십니까? 7절을 보십시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이 말씀은 간곡하고 절실하고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말로만 기도할 뿐만 아니라 손발을 놀려서 행동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우리가 포기치 않고 끈질기게 기도할 때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1장에서 한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친한 친구가 있는데 그가 여행 중에 몹시 굶주린 상태로 왔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집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또 그때가 한 밤중이라 가게 문이 다 닫혀 먹을 것을 살 수도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가까운 곳에 사는 친구 집에 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그는 배고픈 친구에 대한 목자의 심정 때문에 떡을 구하지 않고는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자세로 계속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할 수 없이 자다가 일어나서 떡을 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눅11:5-8).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축복을 이미 마련해 놓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적극적으로 구하지 않으면 주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쟁취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감나무 밑에 누워서 감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자세로는 받을 수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감나무에 올라가서 따서 먹어야 합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고 하였습니다.(약4:2b,3)
9-11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해야 됨을 가르쳐 주십니다.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부모는 없습니다. 아무리 죄 많은 인간일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지 아니하시겠는가고 말했습니다(롬8:32).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때로 우리는 어린 아이와 같아서 자기 중심적으로 떼를 쓰고 또 조급하게 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잘 아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셋째, 황금률(12). 예수님은 이제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12). 이 말씀은 모든 윤리의 최고봉으로서 황금률(The Golden Rule)이라고 합니다. “네가 싫어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하지 말라”고 말한 사람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소극적인 것으로서 다분히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러나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적극적인 것으로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희생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 받고 사랑 받고 이해 받고 존경 받고 섬김 받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나와 동일한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내가 남에게 바라는 마음이 있는 대로 남에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인정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먼저 남을 인정해 주십시오. 사랑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먼저 남을 사랑해 주십시오. 우리가 인정 받기 보다 인정해 주고, 이해 받기 보다 이해해 주고, 사랑 받기 보다 사랑하기에 힘쓸 때 결국 모든 것이 다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는 마치 메아리와 같습니다. 우리가 산에 올라가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이 나쁜 놈아!” 라고 소리질러 보십시오. 그러면 “나쁜 놈아! 나쁜 놈아! 나쁜 놈아!”라고 메아리가 들려 올 것입니다. 반면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소리를 질러 보십시오. 그러면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는 메아리가 들려 올 것입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인정해 주고 사랑해 줄 때 결국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고 사랑을 받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인정 받고 풍성한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본성이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어서 남을 섬기고 사랑해 준다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섬김 받기에 합당한 분이시지만 오히려 우리를 겸손과 온유로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깊이 이해해 주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마침내는 자기의 고귀한 생명까지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습니다.
Ⅱ. 말씀을 듣고 행하라(13-29)
13-29절에서 예수님은 산상보훈의 결론으로 두 개의 길과, 두 개의 나무와, 두 개의 기초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자가 참으로 지혜로운 자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첫째, 지혜로운 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갑니다(13,14). 13,14절을 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여기서 좁은 문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요10:9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요14:6절에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분명히 좁은 길입니다. 이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고독합니다. 그러나 이 길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이 길은 좁고 협착하여 힘들지만 생명이 있습니다. 영원한 하늘 나라의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 즐거움과 비교할 수 없는 영적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왜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까? 이는 좁은 문은 그 길이 힘들고, 넓은 문은 그 길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안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 무엇이든지 쉽고 편한 것을 찾습니다. 신앙생활도 할 수 있는 대로 십자가를 지지 않고 편안히 하고 싶습니다. 이 때문에 십자가 없이 신앙생활하는 인본주의 크리스챤들을 보면 멋있게 보이고 십자가를 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어리석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넓은 길은 쉽고 편하지만 우리를 멸망으로 인도합니다. 좁은 문이냐 넓은 문이냐 하는 것은 생명이냐 사망이냐 하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둘째, 지혜로운 자는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15-20). 예수님은 계속해서 거짓 선지자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우리를 넓은 길로 인도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한번만 회개하면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 십자가를 지고 힘들게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없다는 등 우리에게 쉬운 길을 제시하며 참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달콤하게 속삭입니다. 이런 자들은 겉은 하나님의 종인 것처럼 가장하지만 속은 노략질하는 이리입니다. 그들은 교묘하게 사람들의 환심을 사서 사람들을 속이고 사리사욕을 취합니다. 우리는 이런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야 합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16). 우리는 열매로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말이나 역사로 사람을 속일 수는 있지만 인격의 열매, 생활의 열매는 속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근본적으로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가 되려면 근본적으로 회개하고 성령으로 거듭나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본래 돌 감람나무로서 아무 쓸모없는 열매만을 맺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접붙인바 됨으로써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주님께서 열매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지혜로운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습니다(21-27). 예수님은 우리가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고 좋다고 감상만 하고 실제 생활에서 행치 않을 위험을 보셨습니다. 사실 산상보훈의 말씀은 보배로운 말씀이기는 하나 실천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에 주여, 주여 하고 지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은 입술로만 신앙생활 하기 때문에 입술만 천국에 들어갈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등 능력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능력은 행하지만 주의 이름을 위해 살지 않는 자들이요, 말은 잘 하지만 주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가리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 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행치 않는 자가 어떤 자와 같은가를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자는 평소 말씀을 공부할 때 문제의식을 가지고 깊이 생각하고 말씀을 실생활에 적용시켜 인생관과 가치관을 확립하기에 힘씁니다. 말씀을 순수하게 받고 말씀 앞에 회개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애씁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나가기에 힘씁니다. 이런 자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인생의 기초를 견고히 쌓고 그 내면은 점점 변화되어 어떤 시련도 감당할 수 있는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같은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자는 말씀을 공부하되 형식적으로 공부합니다. 이런 자는 롯과 같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는 인생의 기초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무시하고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 만을 중요시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회피하고 요령껏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런 자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인생의 기초를 반석 위에 쌓았습니다. 이로인해 만백성의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롯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현실의 유익을 좇아 살다가 시련의 날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초를 반석 위에 두었는지, 모래 위에 두었는지 평소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알 수 있습니다. 핍박이나 질병, 불의의 사고와 같은 창수가 나거나 또 세상 유혹과 의심과 불신의 바람이 불 때 그 기초가 무엇인가 드러나게 됩니다. 결국에는 죽음의 현실에 직면하거나 마지막 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 같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 인생은 집을 짓는 자입니다. 집을 짓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기초공사입니다. 기초공사는 눈에 보이지 않고 또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기초공사입니다. 기초공사를 튼튼히 할 때 높이 지을 수 있고 또 어떤 시련에도 견딜 수 있습니다. 뉴욕에 가면 고층 건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Radio City Building, Chrysler Building, Empire State Building은 모두 견고한 반석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인생의 기초가 튼튼해야 높이 지을 수 있고 시련에도 견딜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기초가 되시는 반석되신 분이십니다. 반석되신 예수님께 인생의 기초를 놓음으로써 어떤 인생의 시련 가운데서도 견딜 수 있는 참으로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마치자 무리들이 그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이는 그 가르치심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로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