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제 18 강
성령을 힘입어 일하신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12:22-50
요절: 마태복음 12:28
I. 예수님과 바알세불(22-37)
1. 사람들이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께서 어떤 놀라운 역 사를 이루셨습니까(22)? 이에 대한 무리들과 바리새인들의 반응이 어떻게 달랐습니까(24)?
2.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바리새인들의 말이 왜 불합리합니까(25,26)? 만일 그들의 말을 인정한다면 누가 그들의 재판관이 됩니까(27)?
3. 예수님은 누구를 힘입어 귀신을 쫓아냅니까(28a)?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28b)? 예수님의 비유에서 강한 자의 집에서 세간을 늑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 니까(29)? 누구만이 귀신들린 자를 구원할 수 있습니까?
4. 어떤 자들이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며 해치는 자입니까(30)? 우리가 왜 적극적으로 예수 님 편에 서야합니까?
5.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란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합니까? 이는 어느 정도 심각한 죄가 됩니 까(31,32)?
6. 바리새인들은 어떤 점에서 독사의 자식들입니까(33-35)? 우리가 왜 말을 조심해야 합니 까(36,37)?
Ⅱ. 요나의 표적(38-45)
1.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왜 예수님께 표적을 구했습니까(38)? 예수님께서 이들 에게 보여주실 표적이 무엇입니까(39,40)? 이 표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2. 심판 때에 왜 니느웨 사람들과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합니까(41,42)? 이 세대 사람들의 죄가 무엇입니까? 이 세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43-45)?
Ⅲ. 예수님의 참 가족(46-50)
1.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누가 찾아 왔습니까(46,47)? 이들이 왜 예수님을 찾 아 왔을까요?
2. 예수님은 어떤 자들이 예수님의 참 가족이라고 하십니까(48-50)? 여기서 예수님의 가족 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오.
마태복음 제 18 강
성령을 힘입어 일하신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12:22-50
요절: 마태복음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오늘 본문에는 세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고와(22-37), 표적을 구하는 악한 세대에 대한 경고와(38-45), 예수님의 가족관입니다(46-50). 여기에는 예수님 편이냐, 아니면 사단 편이냐 하는 분명한 영적 가치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분명한 영적 가치관을 확립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치신 예수님(22)
22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예수님께서 한 손 마른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 주시자 사람들은 이제 눈 멀고 벙어리된 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눈이 먼 것만 해도 불쌍한데 벙어리까지 되었으니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임에 틀림 없습니다. 벙어리는 보통 귀머거리입니다. 그는 숨쉴 수 있는 코만 빼 놓고 모든 것이 막혔습니다. 사람이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큰 축복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고, 재미있는 영화나 TV프로도 볼 수 있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자연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또 귀로는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고, 각종 소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입으로는 감정이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세가지 중 하나라도 결핍된다면 큰 인생 문제가 되어 어둡고 슬프고 운명적이고 절망적인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데리고 온 이 사람은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세 가지 기본 권리를 모두 상실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가장 불행한 것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고 영원한 세계로 인도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고 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불행하게 된 근본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 원인을 의학적으로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성경은 귀신들렸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믿음을 얻을 수 있는 통로는 눈과 입과 귀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 통로를 모두 막아 버렸습니다. 마귀는 그를 비참하고 쓸모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실로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이 소망이 없는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를 사로잡고 있는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불행하게 만든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아시고 이를 제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수술을 하시거나 주문을 외우시는 등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그를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여느 때와 같이 말씀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의 혀가 풀려 말을 하게 되고 눈을 떠서 세상을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막힌 그의 눈과 귀와 입을 다 열어 주심으로 그를 온전히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재창조의 역사로서 놀라운 권능의 역사요 부인할 수 없는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오늘날도 귀신들려 영적으로 눈멀고 귀먹은 자들이 많습니다. 영적인 소경은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귀먹고 벙어리된 자는 영적인 말을 알아 듣지도 못하고 말할 줄도 모릅니다. 이는 마귀의 역사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의 영적 눈을 감기게 하고 귀를 막고 입을 막아버립니다. 이런 자들은 도움이 필요한 불쌍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자들을 도울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것과 같이, 우리도 이런 자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가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크신 능력으로 고쳐 주십니다. 우리는 이번 수양회 때 이러한 주님의 능력을 많이 체험했습니다. 영적인 눈이 감기고 귀가 막혀서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었던 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갔을 때 성령께서 친히 역사하사 영적 눈을 떠서 영적인 세계를 보고, 또 영적 귀와 입이 열려서 영적인 말을 알아 듣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실로 놀라운 성령의 역사입니다.
둘째, 사단을 결박하신 예수님(23-29)
예수님께서 눈 멀고 벙어리된 자를 고쳐주시자 이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무리들은 다 놀라 말했습니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무리들은 표적을 통해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야일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하게 사실을 있는 그대로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이적 자체는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이제는 이적을 베푸는 방법을 논함으로써 백성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지 못하도록 불신의 독을 퍼뜨렸습니다. 그들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않고 진리를 왜곡되게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보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시기심 때문에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통해 일어나고 있는 성령의 역사도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고의로 성령의 역사를 훼방했습니다. 오늘날도 성령의 역사를 비난하는 사단의 역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쓸모 없는 한 인간이 변하여 새 사람되는 것을 기뻐할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변화되기 전의 타락한 상태가 더 좋으니 제발 성경공부하지 말고 예수님을 믿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인간적인 생각으로 불신과 회의와 두려움을 심어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를 시기하여 그 배후에 역사하는 사단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과 감정적으로 맞붙어 싸우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주장이 모순되고 어리석음을 논박하셨습니다. 첫째로, 사단이 사단을 쫓아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분쟁하는 것은 항상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뿐이며 그것은 또한 육신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영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소말리아나 유고와 같이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고 스스로 분쟁하는 모임이나 집은 서지 못합니다. 원수는 밖에 있는 원수보다 내부에 있는 원수가 더 무섭습니다. 나라가 잘 되고 모임이나 가정이 잘 되려면 서로 싸우지 않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이 잘 되려면 남편과 아내가 마음과 뜻이 하나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짝지어 주신 후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창2: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연합이란 단순히 육신의 결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의 결합, 영적인 결합을 의미합니다. 결혼이란 하나님 안에서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 되기 위해서는 믿음이 같아야 되고 사명이 같아야 됩니다. 또한 서로 자기를 죽이고 서로 양보를 하고 서로 이해해 주고 또 상대방을 귀히 여기고 존경하고 사랑해야 됩니다. 하나 되는 곳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서로 약점을 헐뜯고 비난하고 서로 무시하고 미워하고 때리고 열심히 싸워 보십시오. 그 집안은 틀림없이 콩가루 집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나라가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사단은 자기들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어리석게 자기들끼리 싸우지 않습니다. 귀신들은 자기들끼리는 의리가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누구를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의 제자들 중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스승들이 옳지 않음을 비난하고 판단할 것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 사단을 힘입어 하신 것이 아니면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하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로만 아니라 능력으로 임합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내어쫓으심으로 악의 영역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셨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사단과의 싸움입니다. 사단은 강하고 간교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힘과 지혜로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사단과의 영적 싸움에서 이기려면 사단보다 더 강한 성령을 힘입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8). 예수님께서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바로 그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가 있습니다. 사단의 나라는 사단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사단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삶 속에 들어와 사람을 지배합니다. 사단의 지배를 받을 때 그 마음은 늘 죄의식과 두려움과 절망과 허무에 사로잡혀 환난과 곤고로 가득차게 됩니다.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와 같이 슬프고 운명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귀신의 세력을 몰아내시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삶을 지배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지배하시게 되면 모든 어두움의 세력이 물려가고 그 심령에는 밝은 생명 빛과 하늘 나라의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이때 그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역사를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이 비유에서 강한 자는 사단, 집의 세간은 사단에게 고통을 받는 사람, 더 강한 자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사단의 권세로부터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사단을 결박하고 그 세간을 늑탈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강하여서 인간을 사로잡아 자기의 소유로 삼고 마음대로 조종합니다. 이 사단의 권세는 마치 출애굽기에 나오는 바로의 권세와 같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 삼아 마음대로 부려먹고 끈질기게 놓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강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의 머리를 쳤을 때 놓아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기는 우리에게 구원의 역사의 모형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받은 것은 쉽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한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영적 전쟁입니다. 이것은 강한 사단을 결박하고 세간을 늑탈하는 것과 같은 전투입니다. 우리는 한 영혼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맛있는 것을 사 주고 카운슬링을 하고 아쉬운 소리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 잘 안됩니다. 이때 우리는 자신의 한계에 절망하고 인간에 대한 혐오감을 갖고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상 양도 말씀을 공부하고 예수님께로 나와서 문제를 해결함 받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나 자기 원대로 잘 안되는 것은 사단이 그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러한 강한 사단을 결박할 수 있는 더 강한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줄기차게 도전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고 바로에게 열 번이나 도전했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완강한 바로로 인하여 낙심했으나 계속해서 믿음으로 도전하였을 때 모세는 점점 담대해지고 바로는 점점 약해졌습니다. 마침내 장자재앙으로 바로의 머리를 박살냄으로써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단의 영역을 하나씩 하나씩 정복해 나가셨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결박되었기 때문에 완전히 무력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사단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결정적으로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완전히 정복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위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종말의 때에 사단은 완전히 정복되어 멸망하게 됩니다. 사단은 이미 정복되었으므로 우리는 이미 승리가 보장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성령을 훼방하는 죄(30-37)
30절을 보십시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이 말씀에서 볼 때 모으는 자와 흩는 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종류의 사람은 도덕적인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을 중심한 영적 기준으로 나누어집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는 모으는 자요,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자는 흩는 자입니다. 세상에는 모으는 힘과 흩는 힘, 두가지 힘만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힘은 결코 조화될 수 없습니다. 이는 빛과 어두움, 선과 악, 정의와 불의가 서로 조화될 수 없고 영원히 서로를 대적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는 모으는 자로서 모으는 역사를 이룹니다. 이런 자들은 진리의 말씀으로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심습니다. 이들은 자기를 죽이고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역사를 세우고자 애씁니다. 반면 흩는 자들은 예수님께 대한 불신과 회의를 심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과 신앙생활에 대한 두려움을 심습니다. 이런 자들은 세상 욕심에 사로 잡혀 하나님의 역사를 파괴합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예수님 편에 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모으는 역사를 이루지 않으면 결국 흩는 자가 되어 사단 편에 서게 됩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중립이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반대했습니다. 또 양무리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31,32). 이 말씀은 엄숙한 경고이지 판결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할 만큼 거의 선을 넘어서려는 위치에 와 있음을 인식시키신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끈질기게 의도적으로 끝까지 거절한다면 영영히 사함 받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지하고 또 실수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한 때는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고 성도들을 핍박한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알지 못하고 행하였기 때문에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역사에 귀히 쓰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딤전1:13). 또 베드로도 말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고의적으로 성령을 거스려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경우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고의로 예수님을 배반하고 부인하였으므로 성령을 거스려 말한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죄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십자가의 은혜를 고의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죄 만큼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해야 합니다(33).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열매, 즉 이적은 시인하면서도 그 열매를 맺으신 예수님을 시인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악한 말을 하는 것은 독사의 자식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말할 수 없고 말을 하면 자연히 사람들의 마음에 독을 심었습니다. 그들이 악한 말을 하는 것은 그 마음에 악한 것을 가득 쌓았기 때문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사람의 마음은 마치 창고와 같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창고에 의와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쌓으면 자연히 그 쌓은 것에서 선한 것을 내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의 창고에 음란과 정욕과 부정과 거짓을 쌓게 되면 자연히 그 쌓은 것에서 악한 것을 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말을 했다 하면 욕을 하고 욕을 하지 않으면 말이 안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자는 평소에 그 마음에 욕을 가득 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음란한 생각을 하고 좋지 못한 영화나 비디오를 자꾸 보게 되면 그것이 마음에 쌓여서 좋지 못한 영상이 떠 올라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무엇을 쌓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그 사람의 인격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기에 힘쓰는 자는 말을 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영적인 말을 하게 됩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함을 얻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말은 마음 속에 품었던 생각을 음성으로 표현하는 것이므로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말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말로 상처를 주고 실족시킬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주의한 말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줌으로써 문제가 생기면 그런 말 한 기억이 안 난다고 발뺌을 합니다. 그러나 내가 한 말은 다 녹음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말을 조심하려고 해도 인격이 변화되지 않고 본성이 악하면 자신도 모르게 헛소리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하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본성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네째, 요나의 표적(38-50)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이제 서기관들과 합세하여 예수님을 시험코자 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38). 그들의 요구에는 악의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수많은 표적을 보아 왔으나 믿을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고의적이고 사악한 적개심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세대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셨습니다. 악하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사악하여 해롭고(harmful) 해치는(hurtful) 마음의 상태를 말하고, 음란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신실치 못하고 영적으로 간음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하나님을 떠난 세대요 진리를 거스리는 세대입니다. 이런 세대는 진리의 말씀보다 기적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39). 요나의 표적이 무엇입니까? 이는 요나가 밤낮 사흘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예수님도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묻히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은 최대의 표적이요 최후의 표적으로서 표적 중의 표적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삐뚤어진 마음을 회개치 않으면 정죄 받고 심판 받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강대국 백성으로서 약소 민족에게 악을 많이 행했습니다. 특히 유대 민족을 많이 괴롭혔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로서 궤휼과 강포가 가득한 피 성이였습니다(나훔3:1-4). 하나님은 죄악된 그들을 심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한 분이셔서 그들을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요나로 하여금 그곳에 가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이 죽기보다 싫어서 반대 방향으로 가는 배를 타고 멀리 도망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어디를 도망 가겠습니까? 하나님은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 넣어 훈련시키셨습니다. 요나는 할 수 없이 니느웨 백성들이 제발 회개하지 않고 심판 받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억지로 힘없이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요나3:4b).”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메시지를 들은 니느웨 백성들은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백성이 애통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였고 하나님의 종의 메시지를 두렵고 떨림으로 경청했습니다. 또 남방 여왕 시바는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듣기 위해 먼 곳에서 시간과 물질과 온 정열을 투자하여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왔습니다. 니느웨 백성들과 남방 여왕은 이방인들이었지만 진리를 사모하고 영적인 소원이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거의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지만 요나나 솔로몬의 희미한 가르침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시 자체가 되신 분으로서 요나나 솔로몬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신령한 하늘의 보고인 생명의 말씀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날마다 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회개하기는 커녕 오히려 성령의 역사를 훼방했습니다. 그들은 심판 날에 니느웨 백성들과 남방 여왕으로부터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43-45절에서 악한 세대가 회개치 않고 예수님을 영접치 않을 때 결국에는 어떻게 되는가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쫓겨나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했으나 얻지 못했습니다. 더러운 귀신은 방황하다가 옛날이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와 보니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어 더 거하기 좋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러운 귀신은 자기 혼자 있기가 심심하여 자기보다 더 악한 일곱 귀신을 데리고 왔습니다. 결국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은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받은 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중요한 교훈을 배웁니다.
첫째로, 마음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비어있는 상태로는 있을 수 없고 누군가의 다스림을 받고 무엇인가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누구의 다스림을 받고 무엇으로 채워지는가에 따라 마음의 상태가 좋아질 수도 있고 더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여름 수양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죄인된 자아를 발견하고 숨은 죄를 고백하고 놀라운 사죄의 은혜를 덧입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은 더러운 귀신이 나가고 깨끗이 소제되고 수리된 집과 같이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깨끗게 된 이 빈 마음을 그냥 내버려 둔다면 귀신이 활동하기 좋은 무대가 되어 수양회가 가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기 전보다 더 악한 상태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악의 세력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충분치 못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자신을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드려서 주와 복음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수양회 때 은혜만 받고 예수님께 안붙잡히고자 하는 자는 사단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예수님께 붙잡히겠습니까? 사단에게 붙잡히겠습니까?
둘째로, 우리의 빈 마음에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지 아니할 때 온갖 인간적인 생각, 정욕적인 생각, 세상 욕심이 나도 모르게 찾아와 내 마음을 점령하게 됩니다. 그러면 영적 소원이 사라지고 전보다 더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버립니다. 수양회 때 말씀을 받고 은혜가 충만하던 사람이 방학 동안에 고향에 다녀온 후 마음이 완악해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는 빈 마음에 말씀으로 채우지 않게 되자 귀신들이 역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단의 존재를 인식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영적으로 실패하는 이유는 사단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영적 싸움을 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강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힘과 지혜로 이길 수 없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기 때문에 악령의 세력을 능히 파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죄사함 받고 깨끗게 된 우리의 마음에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우리의 빈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울 때 세상의 악의 세력과 싸울 수 있는 영력을 덧입게 되고 또한 영적 소원으로 충만케 되어 모든 죄의 소욕을 삼킬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과 지혜와 능력을 공급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이 시대에 영향력을 끼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다섯째, 예수님의 가족관(46-50)
그 세대 사람들은 악하여서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이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순수하고 진실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투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심히 기뻐하시고 예수님의 가족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보다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맺어진 제자들을 더 귀히 여기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성령을 힘입어 사단의 권세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는 역사를 감당하셨습니다. 이 땅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와의 영적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단은 강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더 강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힘입어 일함으로서 사단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을
탈취하여 하나님께로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