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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Ⅱ부:마태복음23:1-39(외식하는 자들을 책망하신 예수님)

by Mark Yang   08/16/2019  

Question


마태복음 Ⅱ부 제 9 강


외식하는 자들을 책망하신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23:1-39
요절: 마태복음23:26

Ⅰ. 저희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1-12)
1. 예수님은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하셨으며 어떤 자들에 대해 경계하셨습니까(1,2)?
2. 우리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무엇은 행하고 지켜야 되지만 무엇은 본받지 말아야 됩니까(3)? 그들은 목자로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으면서 양들을 얼마나 괴롭게 했습니까(4)?
3. 그들은 모든 행위를 누구에게 보이고자 했습니까(5a)?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습니까(5b-7)? 이런 삶의 괴로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오.
4.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어떤 자로 칭함을 받기를 좋아했습니까(8-10)? ‘랍비’, ‘아비’, ‘지도자’는 어떤 위치에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그런 칭호를 받지 말아야 합니까? 유일한 지도자가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오.
5.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리새인들과 어떻게 달라야 합니까(11)? 어떤 자가 높아집니까(12)?

Ⅱ. 화 있을찐저(13-39)
1. 예수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어떻게 저주하셨습니까(13a)? 그들은 사람들의 구원을 어떻게 방해했습니까(13b)? (마12:24)
2. 그들은 유대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힘썼습니까(15a)? 그러나 그 후에는 그들의 외식으로 어떤 자들이 되게 했습니까(15b)?
3. 그들은 어떤 점에서 소경된 인도자들입니까(16-19)? 그들의 전도된 가치관과 물질주의에 대해 말해 보시오. 예수님은 성전과 금, 제단과 예물 중 어느 것이 더 크다고 말씀하십니까(20-22)?
4. 그들은 십일조는 드렸지만 무슨 더 중요한 것은 버렸습니까(23)? 그들은 사소한 것은 얼마나 잘 보며 반면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잘 보지 못합니까(24)?
5. 그들의 겉과 속이 어떻게 다릅니까(25)? 그들은 먼저 무엇을 깨끗이 해야 합니까(26)? 특히 그들 내면의 어떤 것을 씻어내야 합니까?
6. 그들은 어떤 점에서 회칠한 무덤과 같습니까(27,28)? 그들의 겉 행동과 말은 선지자들과 의인을 얼마나 존중하는 것처럼 보입니까(29,30)?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들은 어떤 점에서 독사의 자식들입니까(31-34)? 그들은 누구의 피 값까지 치루어야 합니까(35,36)?
7. 예루살렘의 죄가 무엇입니까(37)? 예수님께서 그들을 돕기 위해 얼마나 애쓰셨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거절함으로써 어떤 벌을 받게 됩니까(38,39)?


Message


마태복음 제Ⅱ부 9강


외식하는 자들은 책망하신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23:1-39
요절: 마태복음 23: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예수님은 이때까지 겸손과 온유로 죄로 병든 인생들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품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품과 같이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이 예수님의 품 안에서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인생들이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실로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진리와 공의가 충만하십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무섭게 책망하십니다. “화 있을찐저” 예수님의 책망은 질풍노도와도 같고 타오르는 불길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모습에서 죄를 미워하시는 거륵한 모습과 죄를 심판하시는 심판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내 속에 있는 바리새인적인 요소를 회개하고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영적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저희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1-12)

예수님은 이때까지 종교지도자들의 완악한 마음을 돌이키고자 인내심을 가지고 여러가지 비유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기는 커녕 오히려 예수님을 잡고자 여러 모양으로 시험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방향을 바꾸어 무리와 제자들을 그들의 악영향으로부터 보호하시고(1), 또 그들에게는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의 문재가 무엇입니까?

첫째. 그들은 말만하고 행치 않았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며”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 절대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백성들에게 미치는 정신적, 영적 영향력은 지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하는 바는 옳으므로 행하고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말하는 바는 구구절절이 옳았으나 문제는 말만하고 전혀 행치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치는 것과 실제 생활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들이 미치는 악영향은 매우 치명적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그들을 비판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영향력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비록 말은 잘 못할지라도 좋은 영향력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은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가 말을 잘하는 신자는 많지만 시대이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는 영향력있는 신자가 드물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영향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영향력은 말없이 천리를 갑니다. 영향력이 좋은 자는 양들이 냄새를 맡고 찾아 옵니다. 그러나 영향력이 좋지 않은 자는 아무리 양들을 좇아다녀도 오히려 양들이 피해서 도망을 갑니다. 영향력은 말을 잘 하는데 있지 않고 실제 생활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좋은 영향력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까? 이는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모든 면에서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도록 하셨습니다(벧전2:21). 예수님은 친히 낮아지시고 겸손의 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생들로부터 섬김 받기에 합당하시지만 오히려 섬기시고 희생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이를 기초로 섬김의 도리를 가르치셨습니다(막10:45). 또 예수님은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생활에 있어서도 우리의 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면에서 언행일치가 되는 삶을 사셨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말씀에 힘이 있었고 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한마디로 예수님을 본받는 생활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바리새인으로서 이중적인 생활을 했습니다(롬7:14,15).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본받는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그는 가장 영향력 있는 영적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 때 그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지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빌3:17). 우리는 양들에게 “나는 잘 헤메고 들어 눕지만 너는 나를 본받아서는 안되고 예수님을 본받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라도 양들은 은연 중에 목자를 본받게 마련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족하지만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고자 애쓸 때 자연히 영향력 있는 영적 지도자로 성장하게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4절을 보십시오.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웁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도 지키기 힘든 까다로운 율법의 세부 규칙들을 백성들로 하여금 철저히 지키도록 강요했습니다. 이로 인해 양들은 늘 짓눌리고 죄의식에 시달려서 주눅이 들어 기를 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대신 무거운 짐을 지시고 우리에게는 가벼운 멍에를 메도록 하셨습니다(마11:29). 예수님은 인생들의 죄를 정죄하는 대신 친히 담당해 주셨습니다(벧2:24).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목자 생활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목에 힘을 주고 권위를 부리며 양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이를 지키도록 강요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될 때 양들은 목자의 Push를 견디다 못해 실족하고 맙니다. 목자는 양들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모든 짐을 벗겨 주고 대신 그 짐을 져주고자 힘써야 합니다. 그 때 양들은 그 품 안에서 쉼을 얻으며 나중에는 무거운 십자가도 질 수 있는 내면이 강한 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둘째, 그들은 사람 앞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그들은 하는 모든 행위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경문이란 율법이 적힌 양피지 조각을 넣어 두는 가죽으로 만든 함이었습니다. 이곳에는 출13:1-10, 11-16, 신6:4-9, 11:13-21 네 성구를 넣어 두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기도할 때 이것을 손목에 차고 이마에 붙었습니다. 본래 이것은 주야로 말씀을 붙들고 투쟁하도록 제정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은혜를 쉽게 잘 잊어버리는 좋지 못한 습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름수양회 때 눈물, 콧물 흘리면서 은혜 받고도 낙엽이 떨어지자 가을 남자가 되어 가버립니다. 우리는 은혜 망각 환자들입니다. 그래서 늘 말씀을 붙들고 투쟁해야 겨우 그 은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잘 아시기 때문에 말씀을 주야로 붙들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그 의도가 변질되어 당시에는 귀신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부적과 같이 차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경문을 넓게 만들어 더 경건하게 보이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웃술은 율법을 기억하기 위해 겉옷 위에 드리우로 푸른 실로 장식한 것을 말합니다(민15:38). 이 웃술은 경건을 나타내는 척도가 되어 그들은 이를 크게 하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율법을 열심인 것처럼 과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잔치 집에 가면 언제나 상석을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또 시장 어귀에 서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사 받는 것을 좋아하며 랍비라 칭함을 받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눈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보다 눈애 보이는 사람의 영광을 구했습니다. 사람들의 안정과 칭찬을 사모하였습니다. 그들은 허영심과 명예심의 노예였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사람들의 영광을 구하며 사람 앞에서 신앙생활할 때 뼈저린 자기 기만과 거짓된 이중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얻기 위해 사람 앞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사람에게 얽매인 피곤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또 하나님도 속이고 다른 사람도 속이고 자기 자신도 속이는 거짓과 위선이 가득찬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하나님 앞에서 신앙 생활 할 때 자행자지 할 수 없고 두렵고 떨림으로 살게 됩니다. 이 때 우리의 삶은 진지해지고 진실되어집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심령에 자유함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8-10절을 보십시오.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랍비’, ‘아비’, ‘지도자’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백성들을 어떻게 잘 도울 것인가 하는데 관심이 있기보다 타이틀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랍비님’, ‘아비님’, ‘지도자님’하고 불러주는 것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오늘날도 박사학위에 관심이 많고 사람들이 ‘박사님, 박사님’하고 불러 주는 것을 좋아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우리도 양들이 ‘목자님, 목자님’하고 불러 주기를 바라며 칭호나 명예심에 집착하기 쉽습니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목자는 양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중매장이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고 영광을 받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생과 자도자는 하나 곧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또한 우리의 아버지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 뿐이십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서 형제로서 평등합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어떤 자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이 보시는 참 지도자상은 양들 위애 군림하는 자가 아니요 겸손하게 양들을 섬기는 자입니다.

Ⅱ 화 있을진저(13-39)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끝내 회개치 않자 화를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본문에는 일곱 가지 화가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싫어하시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죄에 대한 슬픔의 표현이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입니다. 그들에게 왜 화가 있습니까?

첫째, 그들은 천국 문을 닫았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성경선생들로서 백성들을 천국으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성경의 핵심은 그리스도이십니다(요5:39).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요14:6). 그러므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마땅히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백성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지 않고 또 백성들도 예수님을 영접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여 천국 문을 닫았습니다(마12:24).

둘째, 그들은 사람을 배나 더 지옥 자식으로 만들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이교도들을 유대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며 피싱을 했습니다. 그들의 선교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얻으면 이들에게 복음대신 율법을 가르침으로 자기들보다 더 열심있는 바리새인이 되게 하여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했습니다.

셋째, 그들은 전도된 가치관을 가르침으로 백성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또한 1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성전과 제단이 중요한 것이지 성전에 바쳐진 금이나 예물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이나 제단보다 성전에 바쳐진 금이나 제단에 바쳐진 예물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는 그들의 가치관이 전도 되어 하나님보다도 물질을 더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물질주의에 깊이 물들어 돈이라면 오금을 못 썼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소경’이요 ‘우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소경된 인도자로서 양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습니다.

오늘날도 물질을 사랑하는 마음이 영적 지도자들의 눈을 멀게하여 소경이요, 우맹으로 만듭니다. 물질주의에 사로잡히게 되면 모든 것을 물질을 중심으로 가치를 평가하게 됩니다. 이렇게 가치관이 전도될 때 영적 분별력을 잃고 타락하게 됩니다 물질은 주와 복음을 위해서 사람을 살리는데 가치있게 써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물질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물질을 귀히 여기고 사랑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넷째, 그들은 율법의 정신을 버렸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소유의 10/1을 바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들은 이를 지키기 위해 박하나 회향이나 약용식물인 근채의 줄기나 그 잎사귀까지 10/1을 드렸습니다. 이를 볼 때 그들은 믿음이 아주 훌륭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중요한 율법의 정신들, 곧 공의와 사랑과 믿음은 저버렸습니다. 그들은 마치 하루살이와 같이 작은 벌레는 걸러내고 약대와 같은 큰 짐승은 삼키는 자들과 같았습니다. 작은 계명은 까다롭게 굴면서도 큰 죄는 예사로 범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임에 참석하고 십일조를 드리고 1대1성경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내면에 의로움과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이 조각 되도록 투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와 사랑과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 될 때 어디를 가더라도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다섯째, 그들의 내면에 탐욕과 방탕이 가득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잔과 대접의 겉은 수세미로 문질고 퐁퐁으로 열심히 씻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머리를 감고 옷에는 향수를 뿌렸을 것입니다. 겉은 이렇게 청결했지만 그 안은 온갖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그들은 겉은 경건한 모양을 하고 말도 거룩하고 경건하게 하였지만, 그 내면은 물질과 권세와 명예에 대한 욕심과 음란하고 추한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말씀하셔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막7:21-23절을 보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열거되어 나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우리 인간의 본성은 타락하니 이 마음이 원하는 대로 두게 되면 자연스럽게 음란한 생각, 욕심, 시기심, 교만 등 온갖 죄악된 생각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례미야 선지자는 만불보다 거짓되고 심이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렘17:9). 우리가 어떻게 이 부패한 내면을 깨끗케 할 수 있습니까? 용문탕에 가서 열심히 씻으면 깨끗케 됩니까? 아니면 선행을 열심히 하면 깨끗케 됩니까? 산속에 들어가 좌선을 하면 깨끗케 되는 것입니까? 서독 Stuttgart 의 Xaver Schuler목자는 과거에 마음에 복잡한 생각이 들면 벽을 쳐다보고 요가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부패한 내면은 우리의 힘과 의지의 비상한 노력으로도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나아가 마음의 숨은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보배 피로 씻음 받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우리의 내면에 역사하는 죄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이를 파할 수 있는 더 강한 힘은 예수의 보배피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한1서 1:9절은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또한 밷전1:18, 19절은 말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만이 우리의 더러운 내면을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를 찬송합니다.

여섯째, 그들의 내면에 외식과 불법이 가득했습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회칠한 무덤은 걷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음의 요소로 가득합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지만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했습니다 우리는 육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에 원치 않게 실수하고 범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보배 피는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앞으로 지을 미래의 죄까지도 다 사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범죄했을 때 주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가서 진실되게 회개하면 주님께서는 다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문제 삼으시는 것은 우리가 죄를 짓고도 그렇지 않은 척하슨 외식입니다. 우리가 외식하게 되면 주님께서 무섭게 진노하십니다. 외식하는 것은 진실되지 못하고 거짓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실을 원하십니다.

일곱째,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대적하고 핍박했습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확장하여 단장하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몄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조상 때에 있었더면 선지자의 피를 흘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대적하고 핍박하다가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33). 그들은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다 담당해야 했습니다(35,36).

예수님은 일곱 가지 화를 선포하신 후 예루살렘을 향하여 탄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암탉이 독수리로부터 새끼들을 보호하기 위해 날개 아래 모음 같이 그 백성을 사랑의 품 안에 모으려 수없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황폐하여 버린바 되었습니다(38,39).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실된 회개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매일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 진실되게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의 보혈로 죄 씻음 받아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순수하고 진실된 영력있는 영적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