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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4-25(에덴 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

by Mark Yang   08/14/2019  

Question


창세기 제 3 강


에덴 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


말씀: 창세기 2:4-25 요절: 창세기 2:16,17

Ⅰ. 생기를 불어 넣으신 하나님(4-7)
1. 2:4절부터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Jehovah: 스스로 있는 자, 완전하신 분, 구속자)?
2.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기 전 땅의 상태가 어떠했습니까(5,6)?
3. 하나님께서 사람을 무엇으로 지으셨습니까(7a)? 또 사람이 어떻게 생령이 되었습니까(7b)? 여기서 (1)인간의 생명의 근원에 대해서 (2)영혼의 소유자로서의 인간에 대해서 생각해 보 시오.

Ⅱ. 계명을 주신 하나님(8-17)
1.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습니까(8)?
2.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에덴 동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살펴보시오(9-14).
(1)그 땅의 나무들은 어떠했습니까?
(2)동산 가운데 있는 두 가지 특수한 나무는 무엇입니까?
(3)에덴에서 발원한 네 강의 이름을 말해 보시오. 이 강들은 각각 어디로 흘러갑니까?
3.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 동산의 주인공으로 세우신 사실이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15)?
4.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계명의 말씀이 무엇입니까(16,17)? 이 말씀을 볼 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가 어떠합니까(16)? 또 어떤 영적 질서를 세우셨습니까(17)? 여기서 인 간에게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보시오.

Ⅲ. 돕는 배필을 주신 하나님(18-25)
1. 하나님께서 홀로 있는 아담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자 하셨습니까(18)? 이 때 아담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19,20)? 여기서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임을 알 수 있습니까?
2. 하나님께서 여자를 어떻게 만드셨습니까(21,22)? 하나님께서 주신 동역자를 맞이하는 아담 의 기쁨이 어떠했습니까(23)?
3. 성경이 말하는 바 결혼의 의미가 무엇입니까(24)? 여기서 ‘연합’이라는 말이 주는 뜻을 생 각해 보시오. 왜 사람이 이혼해서는 안 됩니까?(참조. 마19:5,6)
4. 하나님께서 이루신 가정의 행복한 모습을 말해 보시오(25).
☆ 이상을 공부해 볼 때 에덴 동산은 어떤 점에서 낙원입니까?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지극하 신 사랑에 대해 말해보시오.


Message


창세기 제 3 강


에덴 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


말씀: 창세기 2:4-25
요절: 창세기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1장에서 하나님은 그 크신 권능과 무한하신 지혜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창조주의 영광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역사는 여섯째 날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축복하심으로 절정에 달하였습니다. 인간 창조는 하나님의 창조의 면류관이었습니다. 1:1-2:3절은 창조에 대한 총론이라면 2:4-25절은 인간 창조에 대한 각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그를 위해 아름다운 에덴 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인간의 행복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얻기 위해 부단한 투쟁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참된 행복이며, 또 어떻게 해야 이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시행착오를 거듭해 왔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은 참된 행복의 조건이 무엇이며, 또 어떻게 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 하는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Ⅰ. 생기를 불어 넣으신 하나님(4-7)

1:1-2:3절에 나타난 하나님은 Elohim, 즉 권능자이지만, 2:4절부터는 여호와 하나님(Jehovah)으로 나타납니다. ‘여호와’란 ‘스스로 있는 자’, ‘완전하신 분’, ‘구속자’란 뜻으로서 인간과의 관계에서 기록된 이름입니다. 2:4-6절은 인간 창조 이전의 땅의 상태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땅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고 또 경작할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들에는 사람이 재배하여 자랄 수 있는 초목이나 채소가 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다만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실 뿐이었습니다. 세상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빚어 만드셨습니다. 인간을 가만히 살펴보면 참으로 신비스럽습니다. 적절한 형체와 동작, 눈, 코, 귀, 입, 두 손과 두 다리, 뿐만 아니라 1초에 40억 개의 자극을 처리할 수 있는 뇌의 기능이나 신체 각 조직에 적절하게 연결되어 있는 장기 기능, 면역 기능, 여러 가지 정보 기능을 담당하는 유전인자 등 모든 것이 신비스럽기만 합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지혜로 인간을 정교하게 만드셨습니다. 다윗은 시139:13, 14절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그러나 아무리 인체가 잘 만들어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생기가 없으면 시체에 불과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흙덩이에 불과한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러자 인간은 생령, 즉 살아 움직이는 영을 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생기란 하나님의 생명력을 말합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하나님의 생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없는 인간은 살았으나 시체에 불과하게 됩니다. 에스겔 37장에 보면 한 골짜기에 마른 뼈들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기가 그 속에 들어가자 그 뼈들이 곧 살아나서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이를 볼 때 사람의 본질은 하나님의 생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배웁니다.
첫째, 인간은 육과 영의 소유자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육의 소유자입니다. 육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에 적절한 수면과 음식과 운동과 정서 활동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육적 욕구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영적 욕구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영적 욕구는 영의 양식을 먹고 하나님과 교제할 때만이 충족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서 생명력을 공급받을 수있고 영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둘째, 인간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사람에게 생명이 있기 때문에 활동하고 계획하고 생각하고 미워하고 반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끊어지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 생명이 도대체 어디서 와서 또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많은 과학자들이 생명의 신비를 캐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생명의 근원은 불가사의한 것으로 단정 짓고 생명의 현상만을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생명의 근원을 알지 못할 때 존재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절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우리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우리의 생명은 부모가 주신 것도 아니요, 부모의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요, 나는 생명의 청지기입니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인생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사람들은 생명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원하는 대로 함부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요 나는 생명의 청지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때 인생을 함부로 살 수 없고 진지하게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생명을 주실 때는 분명히 어떤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으로 생명의 열매를 많이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사용하거나 또 육신의 쾌락을 위해 낭비하는 것은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16-21절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부자는 열심히 일을 하여 일생 동안 먹고 즐길 수 있는 양식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영혼에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이제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 그러나 이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나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을 위해 써야 됩니다. 그때 의미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또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할 때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생명이 내 것이라고 생각할 때 내가 책임져야 됩니다.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고자 할 때 장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게 됩니다. 내 인생 뿐만 아니라 부모나 자식들의 인생을 책임지고자 할 때 우리는 중압감에 짓눌려 신음하게 됩니다. 그러나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또 부모님의 인생, 자식들의 인생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안심하고 열심히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Ⅱ. 계명을 주신 하나님(8-17)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을 “던져진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고독과 소외 문제와 자아 상실의 문제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황막한 땅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인간을 위해 특별히 에덴 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에덴이란 delight, 즉 희락, 유쾌함,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심히 사랑하사 희락의 동산, 기쁨의 동산, 행복의 동산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에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1) 에덴의 환경(9-14)
하나님은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셨습니다. 에덴에는 영양가가 풍성하고 향기 그윽한 각종 과일들이 풍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사는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먹는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아름다움의 문제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먹기에 좋을 뿐만 아니라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가 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동산 중앙에 있는 것을 보면 이 두 나무는 에덴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나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생명 나무는 그것을 먹는 자에게 생명을 주고 영생을 주는 나무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도덕적 판단력을 주는 나무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악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악을 경험하고 악에 빠지지 않도록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신 것입니다. 아담이 이 나무를 볼 때마다 순종하는 것이 선이요, 불순종 하는 것이 악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선을 택하고 악을 버릴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동산 중앙에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신 것은 인간을 향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10-14절에는 에덴에서 발원한 네 강의 이름이 나옵니다.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 강입니다 에덴 동산은 실제로 지구상에 존재하였는데 홍수 때 없어졌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새롭게 구속받은 성도들을 위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마련하셨습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강은 에덴에서 발원하여 온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네 근원이 되었습니다. 강은 인류 문명의 젖줄기라고 합니다. 이를 볼 때 에덴 동산은 축복의 원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주위에는 정금, 진주, 호마노, 물방울 다이아와 같은 각종 진기한 24K 보석들이 흔한 돌처럼 널려 있어 반짝반짝 아름답게 빛이 났습니다. 맑고 시원한 강물이 에덴을 굽이쳐 흐르며 각종 물고기가 헤엄을 치며 놉니다. 또한 각종 아름다운 꽃들이 에덴 동산을 수 놓고 아름다운 향기가 동산을 진동합니다 또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춤을 추며 표범과 어린 염소가 함께 누워 장난을 합니다. 사자와 토끼가 서로 팔씨름을 하다가 사자가 져 줍니다. 여기에는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고,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습니다. 생노병사의 괴로움도 없고, 치열한 생존 경쟁도 없고, 속되고, 가증한 것이 없습니다. 공해도 없고, 소음도 없고, 핵무기의 위험도 없습니다. 에덴 동산은 풍요롭고, 아름답고, 밝고, 희망찹니다. 참 자유와 생명과 평화와 사랑과 은혜가 온누리에 차고 넘칩니다. 여기에는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와 찬송만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의 빛으로 충만합니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기 때문입니다.(사11:9) 에덴 동산은 전혀 부족함이 없는 낙원입니다.

성경 마지막인 요한계시록 21, 22장에는 구속받은 성도들이 들어갈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나옵니다. 그 곳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같고 백옥과 수정같이 맑습니다. 또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그 성곽은 백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으며, 그 성곽의 기초석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달마다 맺힙니다. 그곳에는 밤이 없고 등불과 햇빛이 필요없는 것은 하나님이 햇빛이 되어 저희에게 비취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곳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성도들이 들어가 세세토록 왕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외적 환경만으로는 진정한 에덴이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에덴이 되기 위해서는 내적 환경이 필요했습니다.

(2) 거룩한 명령(15-17)
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다스리며 지키게 한다는 것은 일하며 에덴 동산을 잘 관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으로 하여금 잘 먹고 놀고 편하게 쉬며 무위도식하도록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사람이 먹고 놀고 쉬며 인생을 즐기는 것이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병든 자들의 행복론입니다. 이것은 행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사명을 주시고 열심히 일하도록 하셨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열심히 일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에덴을 다스리며 지키는 사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삶의 좌표가 되는 거룩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16, 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게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 말씀에는 먼저 무한대한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식단을 짜 주어 식단대로 먹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이 마음대로 먹도록 자유를 주셨습니다. 여기에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영생할 수 있는 자유도 포함됩니다. 이것은 거의 무한대한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보트로 만들어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존재로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도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시고 자율적으로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할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제한을 두셨습니다. 각종 나무의 실과는 다 먹어도 좋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자유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유와 제한은 반드시 공존해야 합니다. 자유가 없는 제한은 굴종이고, 제한이 없는 자유는 방종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순종할 수도 있고 순종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까지 주셨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면 생명이 있고 불순종하면 죽음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자유에는 책임이 수반됩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도록 하신 것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 질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인간은 축복된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을 잊고 자행자지 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심으로 이를 볼 때마다 보이지 아니하는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운 영적 질서였습니다. 창1:28절이 인간과 만물 사이에 질서를 세워 주는 말씀이라면, 2:17절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영적 질서를 세워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의 질서입니다. 피조물이 이 질서를 어기면 죽게 됩니다. 생명과 자유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의 질서 속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아담에게 없어서는 안될 생명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지켜도 좋고 안 지켜도 괜찮은 권면의 말씀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명하여 가라사대 ... 정녕 죽으리라”는 절대적인 명령으로 주셨습니다. 이 명령은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삶의 좌표가 되는 거룩한 명령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삶의 좌표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이 말씀을 굳게 붙들고 살 때 하나님께서 주신 에덴의 모든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없을 때 삶의 중심을 잃게 되고 표류하는 배와 같이 되어 에덴의 행복을 상실하게 됩니다. 에덴에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의 말씀이 없다면 더 이상 에덴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 에덴을 소유하기를 원한다면 영적 질서를 잡아 주는 거룩한 명령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세계 속에서 죄의식으로 인해 괴로와 하다가 롬1:17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때 그 말씀은 그에게 생명을 주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오랫동안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롬13:12-14절 말씀을 거룩한 명령의 말씀으로 붙들게 되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은 그에게 생명의 빛을 주었고 탕자 어거스틴을 성 어거스틴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도 어떤 형편 가운데 있든지 거룩한 명령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때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고 마음에 에덴을 소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이 부담스럽고 마음에서 거룩한 명령을 놓아 버릴 때 자유로울 것 같지만 실상은 모든 자유와 행복을 상실하고 사정없이 전락하게 됩니다. 당신의 마음에 거룩한 명령의 말씀이 있습니까?

Ⅲ. 돕는 배필을 주신 하나님(18-25)

에덴 동산은 외적, 내적으로나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낙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 한 가지 좋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문제의식을 느끼시고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짓고자 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결혼 문제로 염려하고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고 있으면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문제의식을 느끼시고 나에게 가장 알맞는 동역자를 마련해 주십니다. 19, 20절에는 아담이 창조적 지성을 발휘하여 사명을 감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담은 짐승들을 자세히 관찰한 후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너는 코가 기니 코끼리, 너는 목이 기니 기린, 너는 무섭게 포효하니 호랑이, 짐승들이 이름을 부여받고 기뻐할 때 아담은 사명을 감당하는 기쁨이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혼자서 사명을 감당하니 벅차고 또 하나님께서 보실 때 좋지 않았습니다. 짐승들은 아담의 동역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아담에게는 함께 생각하고 기도하고,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고, 사명을 감당할 동역자가 필요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옆구리에서 갈비대 하나를 취하여 아름다운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여자를 아담에게로 데리고 오자 아담을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며 애정 고백을 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배웁니다.

첫째는, 성서적 여성관입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지을 때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셨습니다. 돕는다는 것은 밥이나 빨래를 해주고 하녀처럼 시중들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남자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돕는다는 것은 결코 종속적인 의미가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서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머리뼈에서 취하지 않으시고 또 남자에게 짓밟히지 않도록 발뼈에서 취하지 아니하시고 그와 동등되게 하기 위해 옆구리에서 취하였습니다. 또한 그의 보호를 받기 위해 팔 밑에서 취하시고 그의 사랑을 받기 위해 심장 가까운 곳에서 취하였습니다. 이처럼 위치는 동등합니다. 그러나 질서상 남자가 먼저입니다.(엡5:22) 여성의 사명은 남자를 돕는 것입니다. 형제들은 큰소리를 잘 치지만 갈비대가 하나 없기 때문에 어딘가 부족합니다. 자매님들은 이 부족한 부분을 메꾸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성들에게 섬세한 예민함과 부드러움을 주신 것은 이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매님은 형제가 좀 부족하더라도 역사 창조의 주인공으로 설 수 있도록 역사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형제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고 형제를 지배하려 든다거나, 또 형제를 의지하고 사랑이나 받고자 한다면 형제를 병들이고 자신도 비참하게 됩니다. 대개 여자들은 자신의 운명이 남편에 의해 좌우된다고 생각하고 좋은 남편감을 고르고자 애씁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자매님이 어떻게 돕는가에 따라 형제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자매님이 어머니와 같이 형제가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도울 때 형제는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위대한 사명인으로 자라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여성에게 주신 사명은 고귀한 것입니다.

둘째는 성서적 결혼관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에 결혼을 창설하실 때 사명을 중심으로 이루셨습니다. 결혼은 정욕을 채우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하나님이 짝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시는 것이므로 거룩하고 신성합니다. 사람이 함부로 나눌 수 없습니다. 이혼은 하나님의 신성한 주권을 범하는 것이요 몸을 나누는 큰 죄입니다. 오늘날 파괴된 가정이 날로 늘어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결혼을 신성하게 생각지 않고 정욕을 좇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혼만큼은 자기 원하는 대로 자기 이상을 좇아해야 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 결혼만큼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복음적으로 해야 됩니다. 그래야 행복의 기초를 놓을 수 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로다” 결혼을 하게 되면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독립적인 개체로서 한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연합’이라는 말은 육체적 결합 뿐만 아니라 인격의 결합, 영적 결합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연합하기 위해서는 마음과 뜻이 같아야 합니다. 또 믿음도 같고 사명도 같고 방향도 같고 목적도 같고 소망도 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이는 부끄러움이나 자의식이 전혀 없는 행복의 극치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결혼은 에덴 중의 에덴입니다.

이상에서 하나님이 창설하신 에덴 동산을 살펴볼 때 행복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는 아름다운 환경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사명이 있습니다. 또한 자유가 있고 영적 질서가 있고 거룩한 명령의 말씀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명을 함께 감당할 믿음의 동역자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에덴 동산을 창설해 주신 사랑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 안에서 참 자유와 생명력과 무한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에덴 동산을 만들어 주신 극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인하여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