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Ⅱ부 제14강
유대인의 왕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27:1-66
요절: 마태복음 27:37
Ⅰ. 빌라도에게 재판 받으신 예수님(1-26)
1. 새벽에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무슨 의논을 했습니까(1)? 그리고 누구에게 넘겨주었습니까(2)?
2.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무엇을 깨달았습니까(3,4)? 그 최후가 어떠했습니까(5)? 이에 무슨 말씀이 이루어졌습니까(6-10)?
3. 총독은 예수님의 어떤 점을 심문했습니까(11a)?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서 무엇을 인정하셨습니까(11b)? 심 문 받으시면서도 자신의 왕되심을 시인한 예수님에 대해 말해보시오.
4.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서 왜 기이히 여겼습니까(12-14)?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고소에 왜 침묵했을까요? (사53:7)
5. 빌라도는 무리들이 명절특사로 바라바와 그리스도 중 누구를 선택하리라고 기대했습니까(15-17)? 왜 그런 기대를 할 수 있었습니까(18)?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심에 대해 생각해 보시오. 아내는 빌라도에게 어떤 조언 을 했습니까(19)?
6. 그런데 무리들은 왜 바라바를 택했습니까(20-21)?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무엇을 요구했습니까 (22,23)? 이런 무리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7. 빌라도는 책임을 누구에게로 돌리고자 했습니까(24,25)? 그의 최후 판결이 무엇입니까(26)? 빌라도의 죄가 무엇입니까?
Ⅱ.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27-44)
1. 군병들이 관정 안으로 데리고 가서 어떻게 예수님을 희롱했습니까(27-31)? 그들은 왜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 할 수 없었습니까?
2. 군병들은 누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웠습니까(32)? 골고다에서 못박히시기 전 예수님은 왜 쓸개탄 포도 주를 마시기를 거절했을까요(33,34)?
3. 군병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했습니까(35)?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어떤 죄패가 붙여졌습니까(37)?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셨습니까? 이 예수님은 어떤 왕이 되십니까?
4. 예수님은 어떤 자들 중 하나같이 되셨습니까(38)?(사53:12) 사람들은 무엇때문에 예수님을 희롱했습니까 (39-44)? 그들이 기대하는 왕은 어떤 왕입니까?
Ⅲ. 죽으시고 묻히신 예수님(45-66)
1. 제 육시(정오12시)부터 제 구시(오후3시)까지 온 땅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45)? 예수님의 고통이 어떠 했습니까(46)? 예수님은 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 받으셔야만 하셨습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르짖는 소리 를 듣고 무슨 오해를 했습니까(47-49)?
2. 예수님은 어떻게 운명하셨습니까(50)? 그때 성소에서는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51a)? 이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까?(히10:19,20)
3.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땅에서는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51b,52,53)? 예수님의 죽으심이 하나님 안 에서 죽은 자들에게 어떤 역사를 이루심을 알 수 있습니까? 이 역사는 무엇에 대한 예표가 됩니까?(고전 15:52) 이를 지켜 본 백부장의 고백이 무엇입니까(54)?
4.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 본 여인들은 누구입니까(55,56)?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습니까 (57-61)?
5. 종교지도자들은 왜 예수님의 무덤을 굳게 지켰습니까(62-66)?
마태복음 Ⅱ부 제 14 강
유대인의 왕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27:1-66
요절: 마태복음 27: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가 붙였더라”
어느덧 4월이 되었습니다. T.S 엘리옷은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러나 4월은 잔인한 달이 아니라 생명이 약동하는 부활의 달입니다. 예수님은 4월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죽음을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전제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태어나면 언젠가는 모두 죽습니다. 죽음은 우리를 슬프게 하고 허무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일반 사람들의 죽음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일반 사람들의 죽음은 죄값으로 인한 것이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입니다. 이시간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는 가운데 은혜 받고자 합니다.
Ⅰ. 빌라도에게 재판 받으신 예수님(1-26)
26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자신이 십자가에서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실 의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후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시기 위해 피땀 흘려 기도하셨습니다. 그 밤에 예수님은 체포당하시고 공회 앞에서 철야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공회는 재판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서 해뜬 후부터 해 지기까지 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죽이고자 작정을 하고 밤에 불법 집회를 열고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날치기 통과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사형집행 권힌이 없었기 때문에 새벽에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겨 주었습니다(1,2).
때에 가룟 유다가 에수님의 정죄됨을 보고 심령에 변화를 일으켜 스스로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판 댓가로 받은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갖다 주며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사실과 자신이 범죄했음을 시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치 않고 양심의 타격을 받고 후회만 했습니다. 결국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사도행전 1:18절에 보면 그는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은혜를 배반한 자의 말로는 비참했습니다. 그는 돈 때문에 예수님을 팔았으나 돈 한 푼 써보지도 못하고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표지로 삼았습니다. 이로써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빌라도 앞에 서셨습니다. 빌라도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조롱삼아 심문했습니다. 이는 종교 지도자들이 고소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들은 공회에서는 신성모독죄로 정죄했으나 빌라도 앞에서는 정치적인 죄목으로 고소했습니다. 그들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마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총독의 심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아셨기 때문에 이에 말려들지 않으려면 묵비권을 행사해야 했습니다. 이를 시인하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란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에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니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요18:37) 예수님은 목숨이 위험한 가운데서도 빌리도 앞에서 선한 증거를 하셨습니다. 이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위 상황이 좋을 때 자신이 크리스찬임을 밝히는 것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대적인 분위기 가운데서 크리스챤임을 드러내는 것을 어렵습니다. 초기 기독교 박해 시대에는 크리스챤임을 밝히는 것은 굶주린 사자의 밥이 되거나 화형을 당하는 순교를 의미했습니다. 오늘날도 소련에서는 크리스챤임을 밝힐 때 박해의 대상이 됩니다. 이반 모이세예프라는 소련 병사는 군대에서 자신이 크리스챤임을 밝힘으로써 수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킴으로써 결국에는 장렬한 순교를 했습니다. 백승원 목자님은 어머니 산소 벌초에 가서 크리스챤으로서 끝까지 절하기를 거부함으로써 형들에게 심한 구타를 당하여 영광스러운 상처를 입었습니다. 우리는 빌라도 앞에서 선한 증거를 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어떤 박해와 불이익이 있더라도 크리스챤임을 떳떳히 밝혀야 겠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33)
종교지도자들은 여러 가지 말로 예수님을 고소했습니다. 보통 고소를 당하면 사람들은 침을 튀기면서 열심히 자기를 변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억울하게 고소를 당하는데도 한마디도 대답을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겟세마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자 결심하셨기 때문에 구차히 변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싸우지 아니하시고 자신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에 묵묵히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사53:7). 빌라도는 예수님의 의연한 모습에 압도 당하여 기이히 여겼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아무 죄가 없는데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로 에수님을 넘겨준 줄 알았습니다. 그들의 시기심은 온 인류의 메시아를 죽이는 무서운 죄를 낳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고 명절 특사로 석방하고자 했습니다. 또 그의 아내도 꿈 이야기를 하며 예수님을 석방하도록 조언을 했습니다. 당시 바라바라는 유명한 죄수가 있었는데 빌라도는 무리들로 하여금 예수님과 바라바 중 하나를 택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무리들이 틀림없이 예수님을 구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큰 오산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이미 무리를 매수하여 바라바를 구하도록 하였습니다. 무리들은 종교지도자들의 충동에 넘어가 바라바를 구하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도록 소리질렀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당황하여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막무가내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하며 고래고래 소리질렀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소리가 이겼습니다(눅23:23). 무리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호산나 찬송하리로다”하며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마21:9). 그러나 이제는 정반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감정적이고 충동적이 되어 눈없는 괴물이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절대적인 진리에 기초해서 분명한 주관을 가지고 행동하지 아니하고 상황에 따라 줏대없이 행동하는 자는 다 무리에 속합니다.
무리들의 소리에 빌라도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는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책임 회피를 했습니다. 그리고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 주었습니다. 그는 재판관으로서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는 타협의 명수로서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위기를 모면하는 훌륭한 정치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재판관으로서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정의편에 서서 올바르게 재판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총독의 지위를 잃지 않고자 불의와 타협했습니다. 그는 옳은 것을 알면서도 이를 행치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도자는 특권이 있는 반면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책임을 감당하지 못할 때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Ⅱ.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27-44)
예수님은 이미 빌라도의 지시대로 심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당시 태형은 죄인을 홀랑 벗겨서 태형대에 묶어 놓고 실신해서 축 늘어질 때까지 온 몸을 채찍으로 치는 것이었습니다. 채찍에 맞아 죽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법에는 로마인은 몽둥이 40대, 비로마인은 채찍 40대, 유대인은 반항을 많이 해서 채찍 120대를 때렸습니다. 또 채찍 끝에는 납이나 뼈로 만든 덩어리가 달려 있어 채찍에 맞으면 피가 튀고 피부의 살점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무자비한 채찍을 120대나 맞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온 몸은 채찍 자국으로 피멍이 들었습니다. 이런 상태로 예수님은 총독의 거주지인 관정 안으로 끌려가 로마 군병들로부터 희롱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왕들이 입는 홍포를 입혔습니다. 그리고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웠습니다. 예수님의 이마는 가시에 찔려 방울방울 피가 흘러 내렸습니다. 그들은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하며 희롱했습니다. 그리고 침을 뱉고 갈대로 머리를 쳤습니다.
그들이 왜 이렇게 예수님을 희롱하는 것입니까? 이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군병들은 왕이라면 힘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마는 힘을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당시는 힘의 철학이 지배하여 힘이 곧 정의였습니다. 왕은 마땅히 힘이 있고 권세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한없이 초라하고 무력했습니다. 그들은 무력한 자는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실상 예수님은 힘이 없어 이렇게 조롱당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풍랑도 잠잠케 하시고 사나운 귀신들린 거라사인도 순한 양 같이 되게 하시는 창도의 권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채찍을 맞으시고 조롱을 받으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벧전2:24b).
그들은 희롱을 당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힌 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밤새도록 심문을 받으시고 심한 채찍을 맞으셨기 때문에 육신은 지칠대로 지쳤습니다. 죄수들은 70Kg정도 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경계가 되도록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를 지시고 한 걸음 한 걸음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마에는 피방울이 구슬처럼 맺혔다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골고다로 향하는 좁은 길 옆에는 많은 사람들이 상기된 모습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울며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언덕을 올라 가시다가 쓰러지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 가셨습니다. 얼마 가시다가 또 쓰러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또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몇 번이나 쓰러지셨습니다. 그러자 로마 군병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으로 하여금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워 함께 가게 했습니다. 그는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후에 이로 인해 그와 그 가정이 다 구원을 받고 큰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골고다에 이르셨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마취제 역할을 하는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죄로 인한 고통을 온전히 맛보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으면 고통을 피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고통을 감당코자 하셨습니다. 마침내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십자가형은 인류가 고안해 낸 형벌 중에서 가장 잔인한 것입니다. 이는 주로 흉악한 강도나 살인자에게 가해지는 형벌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면 얼마나 그 고통이 심한 지 십자가에 못 박힌 후부터 죽기까지 1,000번 이상 까무러친다고 합니다. 손에 못을 박으면 찢어지기 때문에 몸을 지탱할 수 있도록 손목에 박았습니다. 손목은 신경이 많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의 양 손목과 발목에 굵은 대못을 쾅! 쾅! 쾅! 박았습니다. 볽은 피가 솟구치며 쏟아졌습니다. 뼈가 으스러지고 온 몸이 뒤틀리며 심한 경련이 일어났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 고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시22:14-15) 요사이 많은 형제 자매님들이 온 힘을 다해 증축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자매님들은 벽돌을 담고 형제들은 이를 지고 4층까지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 듯이 한 걸음 한 걸음씩 올라갑니다. 4층까지 올라가면 다리가 풀립니다. 이렇게 하고 나면 밤에는 온 몸이 촛밀같이 녹게 됩니다. 그런데도 그 다음날이면 부활하여 또 열심히 섬기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쁨이 충만함을 보고 제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벽돌을 나르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예수님은 굵은 대못에 박혀 나무에 높이 달리셨으니 그 고통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이런 고통을 받으셔야만 하신 것입니까? 이는 바로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입니다. 3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머리위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목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참으로 이상한 죄패였습니다. 보통 죄패에는 그 삶이 범한 죄목을 기록했습니다. “살인마 김대두”, “공금 120억원을 횡령한 전 새마을 회장” 등과 같은 죄목이 붙어야 합니다. 그런데 에수님께서는 “유대인의 왕 예수님”이라는 죄패가 붙여졌습니다.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 예수님이라고 씌여진 것은 참으로 대조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의 왕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영적인 왕이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대로 우리의 허물과 죄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대로 우리의 허물과 죄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나의 교만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나의 정욕의 죄 때문에 보배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이기심의 죄 때문에 채찍에 맞으시고 나의 욕심의 죄 때문에 창에 찔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홍같이 붉은 죄 때문에 창에 찔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홍같이 붉은 죄 때문에 주홍같이 붉은 보배피를 흘리셨습니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십자가 십 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 쁨 영원하도다.”(찬138장)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나를 무겁게 짓누르던 죄의 짐이 풀어지고 심령에 참 자유과 생명과 평강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좌우면에는 강도 둘이 함께 못 박혔습니다. 예수님은 흉악한 죄인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39-44절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조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41-43)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높이 달리사 만인의 비방의 표적이 되셨습니다. 사람들의 조롱의 공통점은 예수님이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내려 오도록 유혹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예수님에게 이것처럼 큰 유혹은 없습니다. 여깃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의 역사를 파괴하려는 사단의 간교한 계략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말려들지 않으시고 이 모든 조롱을 다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를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온전히 희생하심으로 모든 인류의 생명을 살리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지키고 자기를 잃지 않고자 몸부림칩니다.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이기적이 되고 남을 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잃지 않고자 노력한다고 해서 자기를 잃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를 잃어 버립니다. 자기를 잃지 않는 길은 예수님과 같이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법칙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고 썩지 않으면 결코 새 생명이 탄생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잘 알면서도 자기를 잃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자기도 구원하고 남도 구원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생명 구원역사에는 결코 이런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했습니다. 자기의 꿈을 희생하고 자기의 시간과 물질을 희생하고 자기의 청춘을 희생한 자들을 통해 생명 구원역사가 창조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선교 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놀랍게 발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자신의 꿈과 이상을 포기하고 우리나라에 와서 자신을 온전히 희생한 수많은 선교사들과 믿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피를 흘린 믿음의 선배들의 희생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힘이 없어서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눈도 드게 하시고 죽은 나사로도 살리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힘으로 자기를 구원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를 온전히 희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수님을 살리시고 만민의 구주로 높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5)
Ⅲ. 죽으시고 묻히신 예수님(45-66)
45절을 보십시오. 제 육시 곧 낮 12시가 되자 온 따에 어두움이 임하여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시간은 아침 9시였습니다.(막15:25) 그러므로 예수님은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리사 고통하신 것입니다. 제 9시 곧 오후 3시쯤 되자 예수님의 고통이 극에 달하여 큰 소리로 절규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를 볼 때 예수님은 육신의 고통보다도 정신적인 고통이 더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이었습니다. 고통 중에 버림받는 고통처럼 큰 고통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에게 버림받으시고 이 순간은 우리의 죄때문에 하나님께도 버림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버림받으시고 슬픔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엘리 엘리’ 하시자 사람들은 엘리야를 부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심으로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첫째로,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렸습니다.51a를 보십시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성소는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마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죄의 장벽이 생겼습니다.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려면 반드시 중보자의 도움이 필요했고 또 피를 뿌려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중보자가 되셔서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죄의 장벽이 허물어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입니다.(히10:19,20)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이 왜 그렇게 큰 축복이 됩니까?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에덴의 환경보다 창조주 하나님과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끊어지자 에덴의 행복은 상실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점점 동물의 차원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죄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인간은 다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무덤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자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잠든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났습니다(52).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부활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53).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속죄의 역사가 이루어지자 무덤이 열린 것입니다. 이는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가 전개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성도의 몸이 일어난 것은 장차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얻게 될 예표였습니다.
백부장과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진실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보통 사람들의 죽으심과 달랐습니다.예수님은 죽으심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섬기던 여인들은 멀리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아리마대 요셉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는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하여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무덤에 넣어 장사 지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막기 위해 파숫군으로 하여금 무덤을 철통같이 지키게 했습니다(62-66). 이로써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완전히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심으로 우리 죄도 함께 죽고 묻혔습니다(롬6:4).
결론: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내 죄가 얼마나 지독하며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보게 됩니다. 또한 죄인을 향하신 우리 주님의 구속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죄로 인한 고통이 사라지고 사죄의 은혜를 덧입게 됩니다. 그리고 죄지을 생각을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고귀한 사명인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