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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Ⅱ부:마태복음 28:1-20(부활하신 예수님)

by Mark Yang   08/16/2019  

Message


마태복음 II부 15강

부활하신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28:1-20
요절: 마태복음 28: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은 인류 역사상 가장 충격적이고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인류를 괴롭히던 사망권세가 파하여지고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죄로 인하여 무너졌던 창조의 질서가 세워지고 만유가 회복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사건이 역사적인 사실인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변개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은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이며, 또 부활신앙을 가진 자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배우고자 합니다.

I. 말씀대로 살아나신 예수님(1-15)

때는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후 첫 날이 되려는 미명이었습니다. 이 날은 예수님이 사망권세를 파하시고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부활의 아침이요, 승리의 아침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새벽 동이 뜨기 전에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무덤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자기들의 소유로 복음역사를 헌신적으로 섬기던 자들이었습니다.(눅 8:2-3)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지내는 것을 가까이서 지켜보았습니다.(마27:55,56,61) 그들은 사랑하는 예수님을 잃은 슬픔과 허무와 절망으로 인해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죄없이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습니다. 특히 막달라 마리아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녀는 과거 일곱 귀신에 사로잡혀 자아를 상실하고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을 때 예수님의 기이한 사랑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마리아는 구원의 은혜에 기초하여 온 진심을 바쳐 주와 복음역사를 섬겼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결코 잊을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선하신 예수님께서 왜 악인들의 손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야 하셨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그녀가 예수님을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시체에 향유를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와 다른 마리아는 누가 그들을 위해 무덤의 돌을 굴려 줄 것인가 염려하면서 무덤으로 갔습니다.(막16:3)

세상에 어느 누가 이 두 슬픈 여인들을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늘로부터 큰 위로와 기쁨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에 이르렀을 때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2:23,24절은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었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음이라” 악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무덤에 장사지냈습니다. 그러나 사망권세가 예수님을 무덤에 가둘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그의 전능하신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 형상은 번개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 이것은 천사의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의 모습은 아무런 생기가 없는 죽은 시체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광채가 나는 영광스러운 모습이 되셨습니다.(계1:13-16) 막달라 마리아는 더 이상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를 필요가 없었습니다. 무덤을 지키고 있던 군병들은 이 엄청난 광경을 보고 심히 무서워 떨다가 갑자기 수족이 마비되고 새파랗게 질려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여인들도 심히 두려워 떨었습니다.

이때 천사가 여인들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것을 보라” 여인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 예수님은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나무에 달려 비참하게 돌아가신 고난의 주요, 슬픔의 주였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 배척받으시고 비방의 표적이 되신 분이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은 악에게 패배당하신 분이시요, 죽음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는 무력한 분이십니다 그들은 이 예수님을 생각하면 슬펐습니다. 그들의 심령에는 슬픈 운명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구원의 은혜가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충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내면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는 아직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이 여인들과 같이 신앙생활하는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구원의 은혜도 분명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충성합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이 없기 때문에 이조 여인과 같이 슬픈 운명을 안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런 자들의 얼굴은 어둡고 우수에 잠겨 있습니다. 감정적이어서 조금만 슬픈 일이 있어도 눈물을 잘 흘립니다. 또 나는 어쩔 수 없다는 패배주의와 운명주의에 시달리며 한숨을 잘 쉽니다. 어떤 분은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부활의 능력을 덧입기 위함이 아니라, 배척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자기의 처지와 비슷하여 위로를 받을 수 있고 체질에 맞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 때 우리는 슬프고 운명적이고 패배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활이 현재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앤드류라는 사람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국 크리스챤 중의 70%가 부활과 심판을 믿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을 때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죽음이 주는 허무와 슬픔과 운명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고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6절을 보십시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천사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2가지로 증거해 주었습니다.

첫째로, 빈 무덤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빈 경우는 도적이 시체를 훔쳐 갔거나, 아니면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은 군병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시체를 훔쳐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 훔쳐가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조작극을 꾸민다고 할지라도 얼마 못 가 거짓이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수건이 서로 딴 곳에 개켜져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요20:6,7) 그런데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가 오늘날까지 이태리의 요한 대 성당에 보관되어 있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해 줍니다. 이것을 ‘튜린의 수의’라고 하는데 1978년 36명의 세계적인 저명한 과학자들이 최신 과학 장비로 튜린의 수의를 연구해 본 결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모습과 예수님의 부활도 입증하고 있습니다. 피가 천에 닿아 일정 시간에 되지 않으면 자국이 선명하게 남지 않고 반대로 일정 시간이 넘어도 뚜렷하지 않다고 합니다. 36시간이 가장 또렷한 자국을 남기는데 수의에는 36시간 된 자국이 뚜렷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또 세마포에 영상이 뚜렷이 남은 채로 약 2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조금도 부패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광채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제자들에게 고난받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을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마16:21, 20:19, 26:32).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에 예언된 것이었습니다.(시16:8-10) 이는 예수님의 부활이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수많은 부활의 증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기쁨으로 순교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내놓고 투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재판했던 빌라도가 로마 황제에게 쓴 보고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볼 때 예수님은 분명히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이 역사적인 사실인 것처럼,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도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서 생명의 주가 되시고 죽음을 이기신 승리의 주가 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문제는 결국 죽는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가 애써 쌓아 놓은 모든 것을 무로 돌리고 행복을 앗아가 버립니다. 죽음은 참으로 두려운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아무리 태연하려고 해도 태연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두렵게 합니다. 죽음은 죽는 그 순간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를 지배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주위에서 죽음의 소식을 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 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가족 또는 친한 친구가 죽은 때는 그 죽음이 바로 나의 죽음으로 실감있게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그때 죽음은 나에게 깊은 허무와 절망을 심어 주어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하고 무기력한 인생을 살게 합니다. 죽음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이와 같이 부활도 이론이 아니라 실제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나의 부활로 영접할 때 부활의 생명력이 내 속에 역사하여 모든 어두움의 요소들, 죽음의 요소들, 운명적인 요소들을 물리치고 맑고 힘찬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때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두려움이 변하여 용기가 됩니다. 부정적인 자가 변하여 긍정적인 자가 되고 운명적인 자가 변하여 섭리에 기초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산 소망을 줍니다. 사도 베드로는 핍박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보내는 서심에서 이렇게 찬송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 사람들이 인생을 살다가 절망하는 것은 결국 썩고 쇠하고 없어질 이 땅의 것에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소망을 둘 때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살기 위해 꾸리고 이기적이 됩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 소망을 둘 때 이 땅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 자신 있게 헌신하고 희생할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삶의 가치관과 삶의 스타일과 희망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를 바꾸어 놓습니다. 인간적인 사람을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시켜 놓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나의 죽으심으로 영접할 때 죄사함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부활을 나의 부활로 영접할 때 우리는 한계를 모르는 능력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으로 절망하고 있는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천사는 여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과 아울러 사명을 주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천사는 여인들에게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부활의 소식은 시급히 증거되어야 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부활의 소식을 알지 못할 때 사람들은 사망권세에 시달리며 살다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함으로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의사가 죽어가고 있는 응급환자에게 빨리 가서 치료함으로써 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여인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자 달려갔습니다. 여인들은 올 때는 장례식에 가는 것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무덤에 왔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소식을 들은 후 그들의 발걸음은 날아 갈 듯이 가볍고 힘찼습니다. 가는 도중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들을 사랑하사 그들에게 부활의 확신을 심어 주기 위해 친히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샬롬”하며 아침 인사를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조금도 변하지 않으시고 과거와 동일하셨습니다.(히13:8) 여인들은 너무 기뻐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천사가 말한 것과 동일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말씀하신 대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보기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야 변하여 새 사람이 되고 담대한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 기쁨이 충만하고 능력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11-15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은폐하려는 종교지도자들의 부패한 모습이 나옵니다. 그들은 파숫군들로부터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 긴급 회의를 열어 어떻게 은폐할 것인가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군병들에게 뇌물을 써서 그의 제자들이 밤에 도적질하여 갔다고 거짓말을 퍼뜨리도록 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 유언비어가 오늘날까지 유대인가운데 두루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아무리 은폐하려고 해도 은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오히려 역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II. 세계 선교 사명을 주신 예수님(16-20)

여인들로부터 부활의 소식을 들은 열 한 제자들은 즉시 갈릴리로 가서 예수님이 명하시던 산에 이르렀습니다. 제자들은 그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감격과 희열로 벅찼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고 경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혹 유령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부활을 합리적인 이성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의심했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는 부활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얽매여 의심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당시 제자들의 형편은 두려움 많고 의심 많고 연약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이스라엘 회복을 바라는 세상적인 꿈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런 그들이 어떻게 만민 구속역사를 섬기는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을 연약한 자들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인류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 위대한 역사 창조의 역군들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엄청난 세계 선교사명을 주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권세(18): 1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예수님의 부활은 한 개인의 부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류역사의 악의 세력을 종식시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세상에는 선과 악, 빛과 어두움, 정의와 불의간에 싸움이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볼 때 선이 악에게 짓밟히고 불의가 정의를 삼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선이 악에게 패배한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악의 세력은 여지없이 꺾이고 선이 승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되셨습니다. 세상에서 한 나라의 통치자가 가진 권세만 해도 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나라뿐만 아니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또한 영계까지도 다 지배하실 수 있는 하늘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권세가 얼마나 엄청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이 권세를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땅의 왕들의 권세는 얼마 동안 권세를 잡았다가 폐하여 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세는 언제까지나 폐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입니다.(단7:14) 이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계17:14)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를 다스리시는 절대 주권자가 되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명령하시기 때문에 절대적인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명령이 무엇입니까?

둘째, 예수님의 명령(19,20a): 19, 20a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 말씀에는 두 가지 명령이 있습니다. 첫째는 가라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영적으로 어리고 부족할지라도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Therefore, go!” 이는 예수님의 절대 명령입니다. 우리는 이 명령 앞에 ”내 형편이 이런데 꼭 가야 합니까? 가고 싶지 않은데요“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군인을 사령관의 명령에 무조건 절대 복종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사령관 되신 예수님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명하시는 곳이면 미국이든, 서독이든, 캐나다든, 인도든, 호주든, 멕시코든, 아프리카든, 러시아든 그 어디든지 가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진격 명령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에 순종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이때까지 한 번도 이스라엘을 떠난 적이 없고 또 이방 나라를 멸시하는 강한 유다이즘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세계 각처에 나아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 삼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우리 나라에도 할 일이 많은데 외국에까지 가서 복음전할 필요가 있는가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기를 원하거나 또 나갈 상황이 되면 기꺼이 이에 순종합니다. 그러나 외국에 나가고 싶지 않다거나 상황이 힘들면 예수님의 명령을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마음으로부터 영접치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황이 되든 안되든 “가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영접하고 이 명령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땅의 것에 얽매이지 않고 심령에 참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지 않고 안주하고자 할 때 심령이 부패해지고 쓸모 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가지 않고 안주하고자 할 때 심령이 부패해지고 쓸모 없게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영접한다고 해서 당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5년후에 갈 수도 있고 10년후에 갈 수도 있습니다. 또 당대에 못가면 자손대에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언제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기꺼이 응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는 명령입니다. 제자양성은 단순히 복음만 전하고 무책임하게 내버려두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자립적으로 예수님을 배우고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가르칠 수 있을 때까지 책임성 있게 키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는 또 다른 제자를 낳게 됩니다. 이렇게하여 복음역사는 계승 발전되어 모든 족속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양성의 역사는 예수님의 복음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양성하심으로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할 비전에 불타셨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 사람을 제자로 삼을 수 있습니까? 첫째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야 합니다. 세례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다는 것을 공적으로 드러내는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 사람이 예수님을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하고 죄사함을 답아 구원하기까지 돕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을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구원을 이룰 수 있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빌2:12)

셋째, 예수님의 약속(20b): 20b절을 보십시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저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연약하고 어린 제자들이 어떻게 모든 족속을 제자 삼는 엄청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까? 세계선교는 우리 인간의 힘과 지혜와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사명을 감당할 힘과 지혜를 주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사실 세계선교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선교를 할 수 있는 것은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하시겠다는 신실하신 예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결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생들의 근본문제인 죄와 죽음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 만민의 구주요, 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 죄와 사망권세아래 죽어가고 있는 세상 만민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만민구속역사의 주체자로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