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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1:1-14(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신 하나님)

by Mark Yang   08/16/2019  

Message


▣ 말씀 / 골로새서 1:1-14
▣ 요절 / 골로새서 1:13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신 하나님

골로새는 에베소에서 동방으로 약 160km 지점에 있는 부르기야 주의 도시로서 동서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리코스 강을 사이에 두고 골짜기 양측에 북쪽에는 히에라폴리스, 남쪽에는 라오디게아가 있고, 동쪽에 골로새가 있었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직접 개척한 교회가 아니고 그의 제자인 에바브라가 개척하였습니다(1:7). 그는 골로새 교회 뿐만 아니라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도 개척하였습니다(4:12,13). 골로새서는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침투한 이단을 막기 위해 쓴 변증적 서신으로서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1차로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에바브라가 찾아와서 골로새 교회에 각종 이단들이 침투하여 교회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보고 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은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구주가 되심을 증거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절대적인 진리를 거부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는 포스터모더니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종교 다원주의라는 이름 아래 각종 이단들이 우리의 생활 깊숙이 침투하여 우리의 믿음을 약화시키고 상대화시키고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분위기 가운데서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그 안에서 행하고 그 안에 뿌리를 박음으로 믿음의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2:6,7). 오늘 제 1강에서는 신앙생활의 3대 요소와 골로새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기도제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I. 믿음과 사랑과 소망 (1-8)

1,2절은 인사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가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간구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무슨 자격이나 업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형제 디모데,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이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피로 한 가족이 되어 사랑을 나누고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들입니다.

3-5절은 사도 바울이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감사제목입니다. 일반적으로 감사제목을 보면 하나님이 축복하심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거나 직장에서 승진했다거나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거나 좋은 집을 사고 차를 사고 아들을 낳았다거나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감사제목은 좀 더 차원 높은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과 하늘에 쌓아둔 소망으로 인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항상 있어야 하는 3대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고전 13:13).

첫째, 믿음. 믿음은 사랑과 소망의 전제 조건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사랑과 소망도 생길 수 없습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의 중요한 차이점은 다른 종교들은 창시자가 만든 교리를 믿지만 기독교는 예수님의 인격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믿는 믿음은 어떤 신조를 기계적으로 암송하는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과 인격이 맞부딪히는 인격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죄와 사망에 빠진 나를 구원하는 나의 구원자이심을 믿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고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영혼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미래와 사후까지도 책임지고 인도해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예수님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 문제이기 때문에 이는 정체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남녀가 결혼을 하여 부부가 되어 새로운 관계성을 맺게 됩니다. 그 관계성은 단지 법적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으로 맺어져야 참된 행복이 있게 됩니다. 만일 부부가 결혼하여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다고 해서 서로 무관심하고 피차 힘써 사랑과 신뢰를 쌓기에 노력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 관계성은 파국으로 치닫게 될 것입니다. 부부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을 쌓기 위해서 서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낮추고 서로 양보하고 서로 이해하고자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과의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을 쌓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기 위해 부단한 영적 투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정체되어서는 안 되고 끊임없이 성장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믿는 것이고 삶은 믿음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인격을 변화시키고 삶을 변화시키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새 역사를 창조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소극적이고 부정적이고 운명적인 사람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밝고 힘찬 역동적인 사람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고 말씀하심으로 믿는 자에게는 불가능이 없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네 믿음대로 되라.”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심으로 믿음은 기적을 낳는 원동력이 됨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리라”(빌 4:13)고 고백함으로써 믿음은 운명과 역경을 극복하고 새 역사를 창조하는 놀라운 힘이 있음을 증거했습니다.

둘째, 사랑. 사랑은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참된 사랑을 낳게 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중풍병자 네 친구들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졌을 때 그 믿음은 중풍병자를 어찌하든지 고쳐 주고자 하는 친구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와 같이 참된 믿음은 성도들에 대한 실천적인 사랑의 행위로 나타나게 됩니다. 사랑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약 2:17). 그런데 성도에 대한 사랑은 남녀간의 달콤한 에로스적인 사랑이나 친구간의 우정인 필로스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으로써 아가페적인 사랑입니다. 이는 진실된 사랑으로써 이러한 사랑만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사람을 근본적으로 살릴 수 있습니다.

셋째, 소망. 소망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소망은 삶의 원동력입니다. 사람들이 힘든 현실 가운데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은 각기 나름대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어떤 소망을 갖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을 것은 돈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노후를 위해 물질을 모으는 것에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상에서 출세하여 가문을 일으키는 것을 희망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이루지 못한 희망을 자식을 통해 이루어 보고자 자식에게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땅에 속한 희망으로써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진정한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소망은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우리가 세상의 거짓된 소망을 붙들고 살다가 인생 마지막 날에 내가 붙들고 산 것이 거짓된 희망임을 깨닫고 후회한다면 그 삶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참된 희망을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건설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아니하는 산 소망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소망에 대해서 노래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이 소망을 마음에 간직할 때 삶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 있게 헌신하고 희생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위해 하늘에 쌓아 둔 산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지 않고 땅에 소망을 두고 살아갈 때 롯과 롯의 처와 같이 환난을 당할 때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에 환난을 감당치 못하고 엎드러지고 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갈 때 이 소망은 영혼의 닻과 같아서 카트리나와 같이 아무리 인생의 거센 폭풍우가 몰아쳐도 결코 무너지지 아니하고 떠내려가지 아니합니다(히 6:19).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절망하지 아니하고 언제나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Fanny J. Crosby는 의사의 실수로 생후 6개월만에 맹인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 운명의 노예가 되어 저주스러운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갖게 되었을 때 8,000여편에 이르는 찬송가를 작시하였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조금의 동정심도 보이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그렇게 많은 재능을 주셨는데 왜 앞을 보지 못하도록 하셨는지 안타깝군요.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는데 왜 그렇게 하셨는지 모르겠군요.”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제가 이 땅에 태어나는 순간 하나님께서 나에게 한 가지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면 저는 맹인이 되게 해 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하늘나라에 가서 뜬 눈으로 첫 번째로 볼 수 있는 분이 주님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현실에 절망하지 아니하고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이상에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신앙생활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도대체 어디서 생기는 것입니까? 5b절은 말합니다.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이 말씀에서 볼 때 우리가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생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노력의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니라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 아무 값없이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듣기만 했는데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라는 엄청난 보화가 주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입니다. 이는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말해줍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성격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복음은 진리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 기쁜 소식은 여러 가지 기쁜 소식 중에서 한 가지가 아니라 세상의 어떤 소식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은 a gospel이 아니라 the gospel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건져 내어 영생을 주고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둘째로, 복음은 보편적입니다. 복음은 시대와 장소의 제한을 넘어서서 온 천하에서 자라며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복음은 어떤 민족이나 국가, 어떤 특수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에게 미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눅 2:10).

셋째로, 복음은 생산적입니다. 복음은 열매를 맺으며 자라납니다. 왜냐하면 복음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죄인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죄인을 통해서 가정과 사회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개개인의 삶이 변화되고 가정이 변화되고 사회가 변화되는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II. 골로새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 (9-14)

9-11절은 골로새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12-14절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의 기업을 얻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기도의 최대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관한 소식을 들은 날부터 그들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해 왔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골로새 교회 내에 침투한 이단들을 물리쳐 주시도록 기도하기보다, 그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 때 분별력이 생겨서 스스로 이단을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찾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나의 뜻을 이루어 주시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비우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귀를 기울일 때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 주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두신 놀라운 계획과 뜻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마음에 들지 않고 불만스럽게 느껴지고 불평과 원망을 쏟아놓게 됩니다. 그러나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알게 될 때 모든 것이 감사하고 감격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송명희 시인은 정신은 멀쩡하지만 뇌의 이상으로 전신이 마비되어 육체에 장애가 온 뇌성마비로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자기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행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감사와 감격에 넘치는 인생을 살게 되었고 주님을 찬양하는 주옥같은 시를 써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진호야 사랑해”라는 책을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자폐아를 둔 어머니가 아이를 어떻게 키웠는가를 쓴 책입니다. 진호는 2대 독자로서 자폐아로 태어나 세 돌이 지나도록 ‘엄마’라는 말조차 못하고 어떤 것에 무섭게 집착을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서 장난감 자동차 바퀴를 쉴사이 없이 돌린다든지, 모래를 자기 얼굴에 마구 뿌려댄다든지, 유리 조각을 자기 얼굴에 뿌리면서 낄낄거리며 쾌감을 느끼는 등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면 괴성을 지르고 땅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매일 반복될 때 그의 어머니는 죽음보다 깊은 절망의 늪에서 고통하며 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수없이 자살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다가 죽음의 계곡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사람의 끝이 바로 하나님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녀는 처음에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기도하기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이 앉은뱅이를 일으켰듯이 진호를 기적적으로 낳게 해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녀는 절망 가운데서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내 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자녀다. 네 소유라는 생각을 버리고 내가 맡겨 준 대로 키워라. 그 아이에게 나의 계획이 있다.” 이 음성을 듣고 그녀는 눈물로 회개하고 그 아이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깊이 영접했습니다. 그 이후로 진호는 인생의 걸림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선물임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진호를 훌륭하게 키워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결심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아이의 행동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피나는 노력 끝에 진호는 정상인과 같은 아이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태 장애인 수영경기대회에서 2관왕을 차지하더니 올해(2005년) 9월에 체코에서 세계 장애인 수영선수권 대회에서 세계 신기록을 기록하고 금메달과 은메달과 동메달을 따는 기적을 일구어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알기 전과 후의 인생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처럼 내 인생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때 절망의 늪에서 벗어나 희망찬 인생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찬 인생에서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로,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원문에 보면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는 것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 인내하고 오래 참는 것은 모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기쁘게 하거나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자 할 때 기쁨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이 달아납니다. 기쁨 대신에 슬픔과 분노, 절망과 좌절이 찾아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면 알 수 없는 하늘나라의 기쁨이 위로부터 임하게 되어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여야 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뜻대로 행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성장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을 좀 더 알므로 하나님과 좀더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서로에 대해서 잘 알 때 더욱 깊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이 맺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 때 더욱 깊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이 맺어지게 됩니다. 인간은 알면 알수록 실망할 때가 많지만 하나님은 알면 알수록 신비스러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때 참된 기쁨이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11절은 위로부터 힘을 덧입을 때 강해질 수 있으며, 그 때 우리는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모든 견딤 곧 인내는 소극적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역경을 이기는 내적인 힘을 말합니다. 또 오래 참음은 사람에 대한 인내를 말합니다. 이는 나를 이해 못하는 사람, 내게 좋지 않게 대하고 모욕을 주는 사람, 나를 오해하고 나를 괴롭히고 핍박하는 사람과 싸우지 않고 조용하게 참는 것입니다. 내적으로 강해지지 않으면 인내할 수 없고 오래 참을 수 없습니다. 역경을 잘 견디지 못하고 사람들의 오해와 모욕을 참지 못하고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은 내적인 힘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내적인 힘이 약한 것은 위로부터 능력을 덧입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내하고 오래 참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과거 이방인으로서 약속의 언약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외인이었습니다.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요 어두움의 자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어두움 가운데서 끌어내어 그의 기이한 빛 가운데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을 수 있는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를 인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것이 수없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의 나라를 상속하게 된 것처럼 큰 감사제목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를 인해 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고 늘 입을 내밀고 불평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서 어떤 경우에나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된 것을 인하여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없고 늘 감사할 것 뿐입니다.

13,14절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는가를 말해 줍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우리는 과거 흑암의 권세 아래 있었습니다. 어두움에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두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두움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한창 꿈을 꾸고 젊음을 불태워야 할 어떤 젊은 여성이 허무의 세력에 붙잡혀 만 20세가 되는 날에 자살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녀에게는 공부하는 것도 허무하고 결혼하는 것도 허무하고 인생사는 것 자체가 허무하여 자살로 인생을 끝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이도 20세 전에 예수님을 만나 허무의 세력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어떤 회사 사장은 도박에 빠져 잠도 안자고 5일 만에 50만불을 날리고, 또 3일 만에 30만불을 날려 결국에는 회사가 망하고 쇠고랑을 차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움의 세력에 사로잡히게 되면 상대방이 하는 모든 것이 밉게 보이게 됩니다. 정욕의 세력에 사로잡히게 되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제할 수 없게 되어 정욕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정욕과 게임의 세력에 사로잡혀 정신병자와 같이 지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두움의 권세는 인격을 파괴시키고 가정을 파괴시키고 모든 관계성을 파괴시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옮기는 데에는 힘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옮긴다는 단어는 한 나라의 인구를 강제로 다른 나라로 이주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전쟁에서 이긴 정복자가 피정복지의 백성들을 포로로 하여 타국에 이주시키고 가두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지옥으로 끌고 가신 것이 아니라 정 반대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는 어떤 곳입니까? 이 나라는 빛의 나라요 사랑의 나라요 생명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계는 어두움의 세계입니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행복하게 사는 것 같지만 어두움의 그림자가 인생에 드리워있어 슬픔과 운명과 절망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부터 칠흑과 같은 어두움이 물러가고 환한 생명의 빛이 비추이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 앞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두움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옮기시고, 미움의 나라에서 사랑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죄와 두려움과 죽음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정죄의 세계에서 용서의 세계로 옮기셨습니다. 건져내사, 옮기셨다는 단어는 모두 부정과거형으로서 단 한번 만에 영원히 옮기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피흘려 죽으심으로 죄 값을 치루어 주시고 죄인을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기 위해 자신의 몸을 속전으로 드리심으로 아무 값없이 죄 사함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죄사함을 받게 되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게 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게 되면 마음에 참된 평화가 임하게 되고 기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뜻을 알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흑암의 권세에 갇혀 신음하는 자들을 구원하는 역사에 귀히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