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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2:1-7(그 안에 뿌리를 박으라)

by Mark Yang   08/16/2019  

Message


▣ 말씀 / 골로새서 2:1-7
▣ 요절 / 골로새서 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라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우리가 믿고 섬기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놀라운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과 천사들까지도 창조하신 창조주가 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신 분으로서 만물의 으뜸이 되시며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그 안에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하나님과 인간과 만물이 하나 되게 하신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들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구주가 되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온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상대적으로 섬길 분도 아니시고 삶의 일부분으로 섬길 분도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절대적으로 섬길 분이시며, 삶의 전부를 다 바쳐 섬길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주로 받은 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을 주로 영접한 자로서 어떤 삶을 사는가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지만 삶이 뒤따르지 아니할 때 아무런 변화도 없고 성장도 없고 열매도 없기 때문입니다. 한 분 한 분이 예수님께 뿌리를 박음으로써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고 큰 영향을 끼치는 믿음의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 (1-5)

1-5절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으로서 맡은 바 직분에 충성하는 바울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골로새서 4:13절을 보면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와 히에라볼리 교회는 에바브라가 개척한 교회들입니다. 바울은 그곳 성도들을 한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그들을 위해 어떻게 힘쓰는 것을 그들이 알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서 힘쓴다는 것은 헬라어로 ‘아고니’로서 영어의 ‘agony'는 여기서 나왔습니다. 이는 심적으로 몹시 괴로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이란 어떤 의미에서 심적 고통입니다. 늘 생각하고 걱정하고 마음으로 아파하는 심적 고통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시공간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일은 할 수 없지만 양들을 위해서, 선교사들을 위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내 일처럼 함께 마음 아파하며 간절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사실 우리가 발로 뛰고 일하는 것보다 기도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도록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바울은 구체적으로 그들에게 편지 쓰기에 힘썼습니다. 그의 편지는 성경이 되어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두기고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돕고자 하였습니다(4:7). 바울이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데도 그들을 위해 왜 이렇게 힘쓰는 것입니까?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빚진 자의 심정을 가졌기 때문입니다(롬 1:14,15).

바울이 심적 고난을 당하면서 그들이 알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먼저 그들이 마음에 위안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 말은 위로를 받고 용기를 준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그들을 위해서 얼마나 애써 기도하고 있는가를 알므로 그들이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어 힘든 상황에 대처하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그들이 사랑 안에서 연합하기를 원했습니다. 교회의 특징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죽을 때 교회는 죽음으로 끝나게 되지만 사랑이 있을 때 교회는 살아나게 되고 강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서로 경쟁하기보다 마음을 비우고 서로 낮아져서 섬기기에 힘써야 합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상대방을 존중하기에 힘쓰며, 자기 것을 꾸리고자 하기보다 자기를 희생하여 상대방을 섬기기에 힘써야 합니다. 이렇게 사랑이 풍성한 모임이 될 때 이단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모임이 됩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그들이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기를 원했습니다.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함이란 표준새번역에서는 ‘풍부하고도 완전한 이해력’이라고 하였고, 현대인의 번역에서는 ‘이해함으로 얻게 되는 완전한 확신의 부요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설프게 알고 막연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조금의 회의나 의심이 없이 확실하게 아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기는 믿는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지 못하고 막연하게 알거나 머리로만 알게 될 때 마음에 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예수님이 나의 구주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기분이 좋을 때는 확신이 들어서 주님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것 같다가도,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헛것을 믿는 것 같고 무엇인가 홀려서 신앙생활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렇게 완전한 확신이 없을 때 상황에 따라서 오락가락하게 되고 사람들의 말에 쉽게 미혹되고 넘어지게 됩니다. 또 예수님을 믿다가 실제 생활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핍박을 받게 될 때 예수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누가 무엇이라고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어떤 불이익을 당하고 핍박과 조롱을 받고 심지어는 목숨의 위협을 받을지라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고 고백할 수 있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골로새 성도들이 이단에 미혹된 것은 이런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하였습니다(3). 지식은 ‘그노시스’로서 진리를 이해하는 힘이고, 지혜는 ‘소피아’로서 진리를 굳게 간직하고 계속하여 붙드는 힘입니다.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그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삶의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그 안에 참 만족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 안에 참 평화가 희망이 있습니다. 그 안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원한 생명이 있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보화는 귀한 것입니다. 가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팔아서 투자해도 조금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13:44절에 보면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아서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발견했을 때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 3:8).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팔아 보화 되신 그리스도를 사기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한 것이 아니라 기꺼이 기쁨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았습니다. 모라비안 지도자였던 진젠도르프 백작은 사회적인 지위와 조건들을 다 버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헌신했을 때 그의 친구들이 물었습니다. “자네의 야망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는 “그리스도 뿐, 오직 그분 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깊은 밤에 성 어거스틴이 성경을 묵상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꿈속에서 주의 천사가 나타나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무엇을 원하는가?” 그는 꿈속이었지만 그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주님 외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보험회사에서 세일즈맨으로 일하고 있던 어떤 청년이 NBC의 라디오 공개방송에서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가 들려준 저음의 바리톤은 방송을 통해 전 미국 국민에게 울려 퍼졌고 노래에 매료된 사람들이 그에게 끝없는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갑자기 그는 유명 스타가 되어 여러 방송사에서 끊임없는 계약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앞으로의 그의 인생은 출세와 돈이 보장된 스타로서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에는 왠지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밀려들어와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머리 숙여 기도하였습니다. 그가 기도하던 그 시간에 그의 어머니도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의 책상 위에 조그마한 쪽지 하나를 갖다 놓았습니다. 그가 종이를 펼쳐보니 어머니가 자주 애송하던 밀러 부인의 성시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그는 그 성시를 조용히 읽다가 감동을 받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마음에서 울려나오는 멜로디를 종이에 써 내려갔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네덜란드의 암스텔담에서 전 세계의 전도자들이 모였을 때 그는 특별 찬양을 했습니다. 찬양이 끝나자 장내의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나서 끝없는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주신 박수갈채와 그리스도를 바꾸지 않겠습니다.” 그가 바로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평생을 동역한 조지 베브리 쉐아(George B. Shea)입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를 쓸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높은 영적 지식을 소유할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계시된 비밀이십니다. 다만 믿는 자에게 제한 없이 계시된 공개된 비밀입니다. 이 비밀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인생에 대해 아무 문제의식이 없는 자나 영적 소원이 없는 자에게는 감추어져 있고, 영적 소원을 가지고 간절히 찾는 자에게만이 열려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영적 소원을 가지고 찾는 자만이 이 비밀을 깨달아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 2:4).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b)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로서 알면 알수록 신비스러운 분이십니다. 인간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알면 알수록 실망하지 아니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알면 알수록 기쁨을 주고 생명을 주고 희망을 줍니다. 그리스도는 그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가득한 하나님의 비밀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무도 그럴듯한 말로 그들을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4). 바울은 비록 몸으로는 그들을 떠나 있으나 마음은 그들과 함께 있어서 그들이 질서 있는 생활을 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굳게 선 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5). 5절에서 ‘규모’와 ‘믿음의 굳은 것’은 군대 용어로서 규모는 정리, 정돈을 의미하고, 견고는 견고한 방파제나 밀집부대를 의미합니다. 로마 군단은 훈련된 질서와 견고함으로 인해 어떤 적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규모 있는 생활을 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굳게 설 때 어떤 이단도 물리칠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II. 그 안에서 행하라 (6,7)

6,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임을 깨닫고 주로 받았으면 이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고 할 때 ‘주’ 앞에는 정관사가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만이 유일한 주요 그리스도가 되심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나의 영혼이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인도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는데 102번째 구주로 영접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수많은 구주 중 하나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이르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는 분으로서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께로 갈 수 없습니다(요 14:6).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그러므로 우리가 죄로 인한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나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영접한 후에 어떤 삶을 사는가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해 놓고 그 후에 삶이 따르지 않는다면 받은 바 구원의 은혜를 헛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영접하였으면 계속해서 그 안에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한다는 것은 현재 능동태로서 계속해서 적극적으로 행하라는 뜻입니다. 이는 그 안에서 생각하고 그 안에서 행동하고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7절은 그 안에서 행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세 가지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 안에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이는 식물의 비유로서 나무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뿌리를 박아야 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을 주로 영접한 자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안에 뿌리를 박아야 함을 말해 줍니다. 나무의 성장은 겉모습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뿌리에 달려 있습니다. 나무의 겉모습이 아무리 화려하고 멋있을지라도 뿌리가 견실하지 못하면 그 나무는 얼마 못가 시들어 죽고 맙니다. 또 뿌리가 깊이 박히지 않으면 비바람이 불면 넘어지게 됩니다. 얼마나 깊이 뿌리를 박는가에 따라 위로 큰 나무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겉모습보다도 내면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어떤 위대한 사람이나 사상이나 모임에 뿌리를 내려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 모임의 세계선교에 대한 비전에 매료되어 세계선교 비전에 뿌리를 내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선교 비전은 좋지만 실제로 선교사로 나가게 되면 많은 십자가가 따르게 됩니다. 비전은 비전이고 현실은 현실입니다. 선교 비전에 뿌리를 내린 사람은 냉혹한 현실에 부딪히면 넘어지고 맙니다. 어떤 사람은 UBF라는 모임에 뿌리를 내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이 모여 있는 단체는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모임에 희망을 두고 있었는데 실망스러운 모습이 보이면 ‘이 모임은 아니야’ 하며 다른 모임을 찾아 떠나갑니다. 그리고 다른 모임에 희망을 두지만 다른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이 모임 저 모임을 찾아 전전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예수님을 배우고자 투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알되 예수님의 인격과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권능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그가 예수님에게 깊이 뿌리를 내렸을 때 기독교 역사에 길이 빛나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마니교라는 이단 사상에 뿌리를 내렸을 때 해악을 끼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에 예수님께 깊이 뿌리를 내렸을 때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치는 대 기독교 사상가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예수님 안에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 비유를 통하여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뿌리를 내려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4,5,7)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아니라 말씀을 붙들고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실생활에서 예수님을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은 예수님의 사람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신앙생활은 하지만 성장이 없고 삶의 열매가 없는 이유를 목자가 말씀을 잘못 전한다느니, 모임의 프로그램이 문제가 있다느니, 모임에 사랑이 없다느니 등 외부적인 요인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외부적인 요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예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예수님 안에 뿌리를 박지 않고 예수님과 세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쳐놓고 신앙생활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는 겉으로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척 해도 결코 성장할 수 없고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꼭 같이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지만 아브라함은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렸지만, 롯은 말씀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세상과 양다리 걸치며 자기 유익을 좇아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결국 롯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죄의 열매만 남기는 비참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말씀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손해도 보고 아픔도 많았지만 믿음의 거목으로 성장하고 생명의 열매를 남기는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뿌리를 내리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뿌리를 내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이는 예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게 되면 모든 것을 다 잃고 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 두려움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되 어정쩡하게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언제든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100% 헌신하지 않고 50% 정도 하고 상황에 따라서 60,70, 80% 수위를 조절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100% 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나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런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100% 헌신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100 % 헌신하지 않으면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서 100% 완전히 썩지 아니하면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99% 썩어도 안 됩니다. 99% 썩는 사람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열매도 맺지 못하는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100% 온전히 썩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100% 썩고자 하면 자기가 부서지고 깨어지고 분해 되는 아픔이 있습니다. 죽음의 고통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부서지고 깨어지는 죽음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온전히 썩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고통은 생명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입니다. 이는 마치 산모가 새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 하는 산모의 고통과 같습니다. 산모의 고통 없이 새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 같이, 주와 복음을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고서 생명의 열매를 맺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인생은 투자입니다. 투자 없이는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땅에 숨겨놓고 투자를 하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모든 것을 잃게 되고 주님께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사람이라는 책망을 받고 무서운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투자할 수 있는 기회는 두 번, 세 번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한번밖에 없습니다. 단 한번밖에 없는 고귀한 인생을 어디에 투자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을 전적으로 투자하기에 가장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 투자하는 자는 결코 손해 보지 아니하고 엄청난 유익을 남기게 됩니다. 영생을 남기게 됩니다. 예수님께 전적으로 인생을 투자하고 손해 보고 망했다고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온전히 투자하지 않고 세상과 양다리 걸치며 적당히 투자한 사람만이 망하게 됩니다. 인생을 전적으로 예수님께 투자해 보십시오. 반드시 행복의 열매를 거두고 최후에는 영생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4,25)

투자를 하는 데에는 때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젊을 때 투자해야 합니다. 젊을 때는 세상 욕심을 좇아 자기 원하는 대로 살다가 늙어서 투자하고자 하면 때가 늦습니다. 그 때는 투자하고자 해도 힘이 없습니다. 가치가 떨어집니다. 그 때는 “내가 왜 젊을 때 예수님께 전적으로 투자하지 못했는고”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우리가 늙어서 후회의 인생을 살 것이 아니라 젊을 때 힘이 넘치고 정열이 넘칠 때 주와 복음을 위해서 투자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많은 열매를 맺고 복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기초로 인생을 건설해야 합니다. 세움을 입는다는 것은 건축의 비유로서 그리스도께 기초를 두고 인생의 집을 지어나가야 함을 말해 줍니다. 집을 짓는 데에는 기초가 중요합니다. 기초가 든든하지 못할 때 허리케인이나 지진이 나면 무너지고 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의 가장 견고한 기초가 되십니다(고전 3:11). 예수 그리스도에 기초를 두고 인생의 집을 지은 자는 환난이나 질병이나 불의의 사고나 죽음의 풍랑이 몰아칠 때 결코 넘어지지 아니하고 견고히 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그 무너짐이 심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아서 인생의 비바람이 몰아쳐도 무너지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마 7:24-27). 이는 인생의 집을 견고하게 건설해 나가기 위해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해 줍니다.

셋째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받은바 말씀을 기초로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함을 넘치게 해야 합니다. 감사함이 없을 때 불평하게 되고, 불평하게 되면 사단의 시험에 들게 됩니다. 감사는 해도 좋고 안 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우리 믿는 자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해야 할 하나님의 뜻입니다(살전 5:18). 불평은 자신도 불행하게 만들고 주위 사람도 불행하게 만들지만, 감사는 자신도 행복하게 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합니다.

감사를 하되 넘치게 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어떻게 감사를 넘치게 할 수 있을까요? 이는 적극적으로 감사제목을 찾아서 감사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감사는 절대로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가만히 있으면 감사가 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절로 불평이 나옵니다. 불평을 하게 되면 죄가 되기 때문에 불평은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을 품고 지내거나 무덤덤하게 지내기 쉽습니다. 섭섭한 마음, 아니 섭한 마음도 품어서는 안됩니다. 무덤덤한 마음조차 사단이 역사할 수 있는 온상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감사제목을 찾아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감사가 넘치도록 해야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감사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살아 숨쉰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 두 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어떤 분은 목에 편도선이 자주 생겨 목젖을 없애 버렸는데 이를 없애고 보니 물을 마실 때 조절할 수 없어 그냥 마시게 되어 목젖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감사할 것을 찾으면 무궁무진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고 영생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늘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귀한 믿음의 동역자들과 함께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 참으로 감사합니다. 찬송가에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 주신 복을 세어보아라. 그러면 주의 크신 복을 내가 알리라”고 하는 찬송가가 있습니다(찬 489). 우리가 받은바 복을 하나 세어볼 때 감사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이지선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온 몸에 화상을 입어 그 아름답던 얼굴이 괴물과 같이 추하게 되고 손가락도 엄지 손가락만 남겨 놓고 몽땅 손가락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지난날의 삶도 잃고 꿈도 잃고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녀에게는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고 불평할거리만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사고를 당한 5년이 지난 지금 행복한 삶을 위한 비결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겐 없는 것, 가질 수 없는 것, 빼앗긴 것들을 바라보기보다는 정말로 가진 것이 적고 초라할지라도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만 바라보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마저 없었다면...’이라고 가정해보는 겁니다. 그러면 이미 수없이 많은 감사거리를 가진 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녀는 엄지 손가락만 있는 것도 감사하고 몽땅 손가락으로 타이핑을 할 수 있는 것도 감사합니다. 그녀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전히 제가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고 제 삶을 인도하시는 분을 의지하고 사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하시는 영화의 주인공으로,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열심히 살아가는 것밖에는 제가 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감사밖에는 드릴 것이 없습니다.“ 신앙의 사람은 이러합니다.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감사할 줄 압니다. 감사함으로 모든 역경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적극적으로 그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그 안에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한번밖에 없는 고귀한 우리의 인생을 주와 복음을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어정쩡하게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올인하여 투자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견고한 인생의 집을 짓기에 힘써야 합니다. 무엇보다 적극적으로 감사제목을 찾아서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때 우리의 삶은 생명의 열매로 차고 넘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