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로 승리하신 예수님
■ 말씀 :골로새서 2:8-23
■ 요절 :골로새서 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골로새 성도들을 미혹하는 이단의 정체를 파헤치면서 주신 경계의 말씀입니다. 그는 이단의 공허함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을 대조함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축복이 어떠한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특히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승리의 역사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단의 정체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단이나 다른 모든 종교와 구분 짓는 기독교의 가장 뚜렷한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기독교가 존재할 수 없고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착한 일을 많이 하신 예수님의 아름다운 생애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은 십자가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바울은 2:15절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승리의 인생을 살기를 원하지만 대부분이 원치 않게 패배감을 느끼며 패배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는 승리에 대한 개념이 잘못되었고, 또 진정으로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는 비결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십자가로 승리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진정으로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I. 이단의 공허함 (8, 16-23)
바울은 8절과 16-23절에서 골로새 성도들을 미혹하여 그들의 신앙을 파괴하려는 이단의 정체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당시 거짓 교사들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예수님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가르침으로써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상대화시킨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유일하고 독자적인 구주가 아니고 하나님이 계시하신 많은 진리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과 꼭 같습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산의 정상에 오르는 데에는 여러 길이 있듯이 하나님께로 이르는 데에는 여러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에도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이 있기 때문에 무슨 종교든 잘 믿기만 하면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만 믿어야 된다는 편협함에서 벗어나 타 종교와도 대화하며 공존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리지만 이는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부인하는 거짓 가르침으로써 우리가 경계해야 합니다. 당시 거짓 교사들이 그리스도 외에 부가하려고 했던 것들은 대개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헛된 철학입니다(8). 8절을 보십시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인생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성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철학은 ‘인간은 짐승과 같이 먹고 마시며 아무렇게나 사는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고귀한 존재’임을 가르쳐 줍니다. 철학은 인간은 이 땅에 던져진 존재인데 왜 던져졌으며, 무엇을 위해 던져졌는가? 인생의 사는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도록 해 줍니다. 이처럼 철학은 인생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도록 해 주지만 문제해결은 제시해 주지 못합니다. 인간의 허무, 무의미, 불안, 공포 문제를 다루지만 그 문제들을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둘리’(Dooley)라는 철학자는 철학을 “누구든지 생각하다가 머리가 돌아버리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일들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특히 당시 철학자들은 할일 없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궤변으로 학설을 논증하는 것으로 소일하였습니다. 그들은 멋있고 화려한 수사구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하였는데 이는 사람을 속이는 헛된 속임수에 불과함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철학의 공교로운 말에 넘어가 참된 신앙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8절과 20절에 나오는 세상의 초등학문은 알파벳 문자인 ABC를 말하는 것으로서 모든 일의 초보적 원리를 뜻합니다. 이는 철학이나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천사숭배, 금욕주의와 같은 것들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이런 것들을 매우 심원한 지식이라고 가르쳤지만 실상은 가장 초보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초등학문에는 당시 과학의 여왕이었던 점성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별을 보고 미래를 예언하고 사람들의 운명을 점쳐 주는 것을 말합니다. 줄리우스 시저나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모두 별의 충고를 받지 않고는 한 발도 내디디지 않으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사람의 행불행은 별에 달여 있는데 행복한 별 밑에서 출생한 사람의 전 생애는 행복하고, 불행한 별 밑에 출생한 사람의 전 생애는 불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별의 노예였습니다. 그들은 어떤 암호와 공식을 암기함으로써 별의 숙명적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째로, 유대교의 율법주의입니다(16,17). 바울은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율법에서 부정한 음식을 금하는 규례를 말하고,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은 유대인의 모든 성일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절기는 거의 매월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은 3대 절기로서 모든 유대인들이 반드시 지켰습니다. 물론 안식일은 목숨을 내놓고 지켰습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과 안식을 지켜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을 노엽게 하여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로서 오실 그리스도를 위해 예비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실체이신 그리스도가 오신 후로는 이런 것들은 아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같은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막 7:14-23). 또 성령께서는 율법주의에 매여 있는 베드로에게 율법에서 금한 온갖 부정한 음식들을 보여 주시면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고 하심으로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깨우쳐 주셨습니다(행 10:9-16).
율법주의는 과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참된 신앙을 왜곡시키는 주된 원인이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고 하고자 애쓰기 보다는 무엇을 함으로써 하나님께 인정받고자 합니다. 이런 자들은 잘 할 때는 자기 의에 빠져 교만해지고, 그렇지 못할 때 자학하고 불의에 시달립니다. 율법적인 신앙을 가진 자들은 율법의 잣대로 남을 판단하고 자기도 판단합니다. 이런 자들은 마음에 평화가 없고 항상 무엇인가를 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립니다.
스트로맨이라고 하는 유명한 연구원이 미국의 교회 청년들 중에서 7천여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에 응답자의 60%가 ‘선행’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70%가 ‘봉사’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와 같이 믿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구제나 선행이나 봉사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히 11:6). 우리는 선행이나 봉사를 했느냐 안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그 동기가 믿음으로 했느냐 안했느냐를 문제시해야 합니다. 실수를 했더라도 그 동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다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리 잘 했다 할지라도 그 동기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심각한 죄가 됩니다. 일대일을 하거나 섬기는 일을 하거나 구제 사업을 열심히 했는데 그 동기가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고자 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심각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되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고전 10:31, 엡 5:10).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원하는 대로 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노력하게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셋째로, 천사숭배입니다(18,19). 18,19절은 천사숭배에 관한 경계의 말씀입니다. 천사숭배자들은 사람이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직접적으로 나아가는 것은 교만한 일이기 때문에 그 중보자로서 천사를 숭배해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중보역할을 무효케 하였습니다. 그들은 겸손한척 하였지만 실상은 헛된 환상에 도취되어 교만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굳게 붙들어야 할 분은 머리 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붙들 때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양분을 공급받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 금욕주의입니다(20-23). 20-23절은 금욕주의에 관한 경계의 말씀입니다. 영은 선하지만 육은 악하다는 이원론은 육신적으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쾌락주의와 악한 육신을 쳐 복종시켜야 된다는 금욕주의를 낳았습니다. 금욕주의자들은 육체의 욕망을 제어하기 위해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온갖 계명을 만들어 지켰습니다(21). 유대교에서도 엣세네파는 세상의 모든 욕망을 끊고 엄격하게 계명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초보적인 원리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세상에 속한 사람들처럼 이런 것들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20). 신앙생활은 금욕적인 생활이 아닙니다. 성경은 일원론으로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받아야 함을 말해 줍니다(딤전 4:4). 성경은 몸을 나쁘게 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사용해야 함을 말해 줍니다(고전 6:19,20). 우리는 몸을 지나치게 아껴서도 안 되고 함부로 써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에 순결해야 하고, 또 몸을 잘 관리하여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롬 6:13). 말하자면 몸에 대한 청지기 사상을 가져야 합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벌었고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써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관리하고 사용하여야 합니다. 금욕주의는 사람이 만든 것으로서 꾸며낸 경건과 거짓된 겸손과 몸을 학대하는데 지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육체의 욕망을 억제하는 데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22,23).
이상에서 이단의 특징은 한마디로 말해서 공허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내면의 허무와 불안과 두려움을 없이하기 위해 만든 우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겉으로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줄 것처럼 요란하게 떠들어 대지만 실상은 빈껍데기에 불과합니다.
II.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함 (9-15)
사도 바울은 이단의 공허함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을 대조함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축복이 어떠한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특히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승리의 역사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그 안에서 충만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9,10). 9,10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영지주의자들은 육은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올 수 없다고 생각하여 성육신의 진리를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 충만이 성도들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고, 그리스도의 충만이 성도들에게 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로서 천사들까지도 지배하시는 완전한 권세를 가지신 분이심을 말해 줍니다.
베드로후서 1:3,4절은 말합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여기서 우리는 생명과 경건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위하여 살다가 일생을 마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우리를 흑암의 세계에서 건져내사 그의 기이한 빛의 세계,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들어와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생이란 단지 생명이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지옥에서 영원히 산다면 이것은 영생이 아닙니다. 영생은 반드시 참된 행복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곳, 하나님이 사랑과 평화, 은혜와 진리로 다스리시는 낙원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계 21:3,4).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받기 위해 사랑 깡통을 차고 이리 저리 구걸하다가 실망을 하고 마음의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인간의 사랑은 아무리 채워도 우리의 공허한 내면을 결코 채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텅빈 내면을 채우고 진정한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 뿐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격하여 외쳤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요한 1서 3:1) 사도 바울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노래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37) 사랑 받을 아무 자격도 없고 전혀 꼬투리도 없는 자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에게 사랑을 구걸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릴 수 있는 축복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마음에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하늘나라의 평화입니다(롬 5:1, 요 14:27).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구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요 1서 5:14,15). 조지 물러는 5만번의 기도응답을 받았습니다. 과거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을 때는 무엇을 하나 참된 만족과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된 만족과 기쁨을 맛보며 그 안에서 충만함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메마르고 공허한 인생을 살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충만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생명도 충만하고 사랑도 충만하고 평화도 충만하고 은혜도 충만하고 기쁨도 충만하고 감사함도 충만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둘째, 그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게 되었습니다(11,12). 11,12절은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여졌는가를 말해 줍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할례와 육적인 할례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육적인 할례는 손으로 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할례는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의 할례입니다. 육적인 할례는 육체의 일부분을 자르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할례는 육체의 전부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으로서 육의 모든 정욕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육적인 할례는 아브라함의 할례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는 장차 올 그리스도의 할례의 모형이요 그림자였습니다. 실체가 오면 그림자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에 육적인 할례의 의미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할례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를 의미합니다(12). 작년에 베네수엘라 부활절 수양회에서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수영장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완전히 물속에 잠겼다가 일어났습니다. 완전히 물속에 잠기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상징하고, 물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연합하게 됩니다. 이로써 우리는 부활의 새 생명과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롬 6:4).
셋째, 십자가로 승리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13-15). 13-1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신 놀라운 역사에 대해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과거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헬라어로 죄는 빚과 같습니다. 죄지은 자는 빚진 자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말씀을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옵시고”라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마 6:12). 우리가 빚을 지게 되면 빚을 갚아야 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채권자가 빚을 독촉이라도 하는 날이면 그 심적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빚을 너무 많이 져서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을 경우 그 인생은 파산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되었습니다. 이 빚은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 빚으로 인해 파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를 짓누르고 얽어매고 모든 행복을 앗아가는 그 지긋지긋한 빚을 다 탕감하여 주셨습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육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는 무서운 심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는 둘째 사망으로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의 결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매우 심각합니다. 사람이 실수를 범하고 이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 인생은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만회할 수 없는 기회가 없다면 그처럼 두렵고 끔찍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죄의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파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죄를 일방적으로 용서해 주심으로 놀라운 사죄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우리를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주는 놀라운 해방선언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실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값을 다 치루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의문에 쓴 증서는 율법의 기록을 말합니다. 이는 부채 목록으로서 우리가 빚을 진 것을 서명한 각서를 말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범한 죄를 낱낱이 기록하고 이를 기초로 우리를 정죄합니다. 법정에서 아무리 자신의 무죄를 주장해도 그가 행한 모든 것을 녹화한 것을 증거로 제시하면 변명할 여지가 없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범한 모든 죄목을 일일이 하늘나라의 고성능 마이크로 필름으로 녹화해 놓으셨다가 심판 날에 제시할 것입니다. 우리가 범죄한 것을 기록해 놓은 이 율법의 채무증서는 우리를 거스리고 대적합니다. 우리를 고소하고 정죄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저주스러운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빚 문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셨습니다.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셨다는 것은 흔적도 없이 완전히 없이하여 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전과자가 형을 다 살고 나오면 그의 기록에는 붉은 줄이 그어집니다. 이는 죄값은 다 치루었지만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음을 말해 줍니다. 전과자는 그 흔적 때문에 일생 죄인 취급을 당하고 고통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목록을 흔적도 없이 완전히 지워버리셨습니다. 고대의 문서는 종이로 만든 파피루스나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에 기록하였습니다. 파피루스나 양피지는 잉크가 마르기 전에 지워버리면 아무 기록한 일이 없었던 것과 같이 백지가 되어버립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의 기록을 흔적도 없이 완전히 지워버린 것입니다. 옛날에는 법적인 선고가 무효가 되었을 때 게시판에 고정시켜 못을 박았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를 거스리고 대적하고 고소하는 율법의 기소장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다는 것입니다. 도말하신 것과 십자가에 못박으신 것은 부정과거형으로써 한번으로 영원히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 효력이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함을 말해 줍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의 죄가 한번 용서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주님께 나아가 회개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용서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 일서 1:9절은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 4:16, 10:19).
셋째로,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정사와 권세는 악한 천사 곧 사단을 가리킵니다. 벗어버렸다는 것은 로마의 장군이 승리의 개선을 할 때 그가 정복한 포로들을 무장 해제시켜 노예로 삼아 끌고 개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사단의 노예 상태에 있게 되었습니다. 사단은 우리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 권세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써 사단의 권세를 격파하시고 그 힘을 벗어버리셨습니다. 이로써 원수들을 무장 해제시키시고 포로로 사로잡으시고 영광스러운 승리의 개선을 하셨습니다. 사단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 승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골통을 깨시고 죽음의 권세를 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최후 승리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패배인 것 같이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승리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중죄인을 처형하는 사형도구로서 수치와 멸시와 고통의 상징이었고, 무엇보다도 패배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죄인들이 자신들의 죄로 인해 수치와 멸시와 고통을 당하며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아무 죄가 없는 의로운 죽음으로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권세를 파하시고 궁극적으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십자가는 수치와 멸시의 십자가가 아니라 영광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패배의 십자가가 아니라 승리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저주의 십자가가 아니라 축복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싫어하여 회피하지 않고 십자가를 사랑하고 적극적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는 승리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승리의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승리의 인생은 돈을 많이 벌고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승리는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고, 죽음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승리는 우리 내면에 역사하는 죄의 소욕을 이기고 악을 정복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원하는 것을 다 얻었다 할지라도 죄의 소욕과 악에게 굴복당한다면 그 인생은 패배한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소욕을 이기고 악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매일 매일 십자가 밑에 나아가 죄짐을 풀고 사죄의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하고 그 고난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승리의 인생을 살기를 원하지만 고난은 원치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할 수 있는 대로 편안히 하면서 영광은 누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고난 없이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길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운동선수가 금메달을 딴 이면에는 피나는 연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악기로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다거나 성악가가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도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는 피나는 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No cross no crown 이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난 없이는 결코 승리가 없음을 가르쳐 줍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의 고난에 동참하면 반드시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보증수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승리의 인생을 살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하고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참으로 묘합니다. 십자가를 사랑하고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지고자 하면 십자가는 나에게 큰 은혜로 다가오고 십자가는 가벼워집니다. 그러나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십자가를 회피하고 조금이라도 십자가를 멀리하고자 하면 십자가는 나에게 큰 부담으로 느껴지고 한없이 무거워집니다. 은혜와 기쁨이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사랑함으로써 매일 매일을 승리할 때 일주일을 승리할 수 있고 한달을 승리할 수 있고 1년을 승리하고 일생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사랑하고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를 증거함으로써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