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의 문을 열어 주소서
말씀/ 골로새서 4:2-18
요절/ 골로새서 4: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
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오늘 본문은 2-6절까지는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의 기도생활이 어떠해야 하며, 불신자들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교훈입니다. 그리고 7-18절까지는 본 서신을 가지고 가는 사자들에 대한 소개와 문안 인사입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이 서신을 썼습니다. 그는 서신을 마치면서 골로새 성도들에게 기도에 항상 힘쓸 것을 권면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도할 문을 열어 주시도록 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특히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 대해 생각해 봄으로써 은혜 받고자 합니다.
I. 그리스도인의 기도 생활 (2-4)
2-4절까지는 기도에 대한 권면입니다. 사도 바울이 서신을 마치면서 기도에 대해 권면한 것은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말씀과 기도와 찬송은 신앙생활의 삼위일체라고 말합니다. 그 중에서도 기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기도 없는 신앙생활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성경은 기도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 땅에 계실 때 누구보다도 기도에 힘쓰셨고, 제자들에게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눅 11:1-13).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눅 11:9)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눅 18:1)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 21:36)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막 14:38)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때에 졸다가 시험에 들었던 사도 베드로도 후에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사도 바울의 서신에는 기도에 대한 권면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엡 6:18)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 2:1) 성경은 이렇게 기도에 대한 권면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한마디로 기도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가장 은혜로운 수단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죄 많은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것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짐승을 잡아 희생제물을 드림으로 죄사함을 받은 후에야 나아갈 수 있었고, 그것도 중보자 되는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서는 함부로 나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직접 나아가면 죽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많은 인간 사이에는 너무나 두꺼운 죄의 장벽이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짐승의 피와 레위 자손 중에서 세운 제사장은 장차 올 참된 것의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흠 없고 점 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죽으심으로 단번에 완전하고도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히 10:10-1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의 장벽을 상징하던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막 15:38). 이로써 누구든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렸습니다(히 10:19,20).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제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 4:16). 우리는 새벽에도 기도할 수 있고, 점심 식사 후에도 기도할 수 있고, 밤중에도 일어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집에서도 기도할 수 있고, 출근하면서 버스나 전철에서도 기도할 수 있고, 산책하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화장실에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위로부터 무궁무진한 보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힘든 일이 생기면 대개 술을 마시거나 잠을 자거나 게임을 하거나 음란 동영상을 봄으로써 스트레스를 풉니다. 그러면 더 스트레스가 쌓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은 힘들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합니다. 기도할 수 있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해소되어 건강에도 좋습니다. 이것은 믿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우리는 이 특권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기도해도 소용없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이는 사단이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을 심음으로서 기도를 중단하도록 하기 위한 사단의 고도의 전략입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이 들수록 더욱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골로새 성도들에게 기도에 대한 사도 바울의 권면이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여기서 우리는 기도에 대해 몇 가지 배울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기도는 항상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힘쓰다’는 말은 현재 명령형으로서 언제나 꾸준히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항상 힘쓰지 않으면 기도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항상 힘쓰라고 한 것입니다. 기도는 절대로 자연스럽게 되지 않습니다. 기도하다가 쉽게 응답되지 않으면 낙심해서 포기해 버립니다. 또 몸이 아프거나 피곤 때문에 계속해서 기도하기 힘듭니다. 우리는 문제가 있으면 기도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기도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않아 슬그머니 포기해 버리기 쉽습니다. 11월이 되면 수능 때문에 새벽기도에 참석하는 숫자가 급증하다가 수능이 끝나면 그 수가 현저하게 줄어든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프면 기도하고 건강하면 아니하고, 실패하면 기도하고 성공하면 아니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건강해도 기도하고 병들어도 기도하고, 실패해도 기도하고 성공해도 기도하는 것이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만나는 교제입니다. 교제는 항상 하지 않으면 소원해집니다. 마틴 루터는 매일 아침 꾸준히 한 시간을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아침에 한 시간을 기도하지 않으면 그날은 마귀가 나를 이긴다.” 우리는 기도의 습관을 가짐으로 기도를 생활화하여야 합니다. 아무의 방해를 받지 않는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것은 가장 좋은 습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새벽 미명에 일어나 습관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막 1:35).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은 한결같이 습관적으로 새벽에 기도한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항상 기도에 힘씀으로써 기도가 몸에 밴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째로, 깨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현재분사형으로서 언제나 깨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 때로 피곤을 이기지 못해 졸기 쉽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다가 코를 고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도 때로는 기도를 하는 것도 아니고 자는 것도 아닌 비몽사몽간에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나면 스피릿이 다운되고 몸이 더욱 무거워집니다. 어떤 사람이 골방에 들어가서 오래 동안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상하여 문을 열어보니 아예 엎어져서 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잠을 자거나 졸거나 비몽사몽 상태로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주의 재림을 맞이하는 태도로서 항상 깨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막 13:35). 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막 14:38)고 하셨습니다.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사단의 시험에 들게 됩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는 예고가 있지만 사단의 시험은 예고가 없습니다. 대개 시험은 유형이 있지만 사단의 시험은 교묘하여서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단의 시험에 든 사람은 자신이 사단의 시험에 들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힘들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사단의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얼마나 길게 기도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깨어 기도했는가가 중요합니다.
셋째로, 감사함으로 기도 해야 됩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되 원망이나 불평 섞인 기도를 하기 쉽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며 따지는 기도나, 무조건 해 달라는 떼쓰는 기도나, 응답해 주지 않으시면 어떻게 하겠다는 협박성의 기도를 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원망하는 마음, 섭섭한 마음, 요구하는 마음을 다 내려놓고 감사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6,7절은 말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부모는 자녀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아와 간구를 하면 잘 들어줍니다. 불평을 하거나 당연한 듯이 요구하게 되면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없어집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감사기도를 많이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염려와 근심, 불신과 절망,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감사함으로 구할 것을 아뢰야 합니다. 이렇게 깨어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말과 행동과 생활에 힘이 있고 스피릿이 넘칩니다. 때로 우리는 신앙생활의 한계를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씀도 깊이 들어오지 않고 심령이 답답하여 미칠 것 같이 영적인 바닥을 드러낼 때가 있습니다. 이는 깊은 기도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깊은 기도를 배울 때 영혼이 고갈되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이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의 저수지에서 얼마든지 생명수를 길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중보기도에 힘써야 합니다(3,4). 사도 바울은 3,4절에서 골로새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바울은 기도 부탁을 하되 하루속히 감옥에서 해방되도록, 재판이 빨리 되어서 재판에서 승소할 수 있도록, 감옥에서 너무 괴로우니 안식과 평화를 주시도록 기도를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전도의 문을 열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도록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중보기도를 해 주면 기도에 힘입어 복음을 좀 더 효과적으로 분명하고도 담대하고 은혜롭게 전달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사도 바울의 불요불굴의 정신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열악한 조건이 개선되어야 하나님의 역사를 잘 섬길 수 있을 것 같이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는 하는데 지금은 힘들어서 못하고 상황이 좀 좋아지면 후에 꼭 하겠다고 생각하고 유보합니다. 이렇게 유보하다 보면 1년이 가고 2년이 가고 10년이 가고 20년이 갑니다. 조건이 개선되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조건이 개선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좀 더 나은 조건 개선을 꿈꾸게 되어 평생 조건 개선만 바라다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바울은 조건 개선을 바라기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거룩한 소원이요 거룩한 열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의 간절한 기도를 받으시고 감옥에서 전도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로마 황제의 군대인 근위병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골로새서를 쓴 시기는 로마 감옥 초기였고, 빌립보서를 쓴 시기는 후기였습니다. 빌립보서 1:12,13절에 보면 그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감옥에서도 전도의 문을 열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했을 때 자기를 지키기 위해 매 4시간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군인들이 그의 눈에 보였습니다. 그들은 로마 정부가 바울에게 붙여 준 고정 일대일 양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복음화의 첨병이 될 수 있는 훌륭한 제자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매 4시간마다 교대했으므로 하루에 6명과 일대일을 할 수 있었고 이렇게 해서 온 시위대 안에 복음이 전파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로마 감옥에서 슬프고 어둡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로 자신을 이기고 환경을 이기고 시대를 이김으로 새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였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매임을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는 비밀을 말하고 싶어 늘 입이 근질근질하여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말씀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은 그 비밀을 자기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전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함으로 이를 듣는 사람은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을 받고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생명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지내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입을 열지 아니하면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그들을 끌어내며 명령했습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행 5:18-20) 사도 바울이 고린도를 개척할 때 대적하는 자들로 인해 마음에 두려움이 들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고전 18:9,10). 이에 1년 6개월 동안 유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을 때 고린도가 개척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고전 18:11).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고전 1:21). 하나님은 우리가 입을 열어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입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입은 보통 입이 아닙니다. 우리의 입을 통하여 죄로 인해 죽어가던 자가 영생을 얻게 됩니다.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아무 소망 없이 시름시름 죽어가던 자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갖고 활기찬 인생을 살게 됩니다. 과거 우리의 입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괴롭히는 쓸모없는 입이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받은 우리의 입은 사람들의 병든 마음을 치료하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살리는 복스러운 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입을 열어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함으로 우리를 통해서 생명이 살아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이 기도부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중보 기도의 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기도 부탁을 잘 하지 않습니다. “기도 부탁하기가 미안해서” “이런 것 가지고 부탁하는가? 내가 알아서 해야 되지 않는가?” “지난번에 나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 주었는데 또 부탁하는 것은 너무 해. 사람이 체면이 있어야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것도 많은데 나 같은 사람까지”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기도 부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바울은 중보기도의 힘을 믿었기 때문에 기도 부탁을 했습니다. 다니엘도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친구들에게 기도 부탁을 하였습니다. 곽베드로, 마리아 선교사님은 수시로 우리에게 자세하게 이 메일을 보내어 기도 부탁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중보기도는 지원사격과 같습니다. 기도의 후원부대가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미국 남북전쟁 때의 일입니다. 한창 전쟁이 치열할 때 당시의 대 설교가 비처 목사님 댁에 모자를 눌러쓰고 남루한 옷차림을 한 키가 큰 한 신사가 찾아와 문을 두드렸습니다. 사모님이 나가보니 그 사람은 “목사님을 좀 뵙고 싶습니다”라고 할 뿐 누구라는 것을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목사님이 바빠서 안되겠는데요.” 사모님은 이렇게 핑계를 대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렇습니까” 하고 물러갔습니다. 사모님은 아무래도 좀 이상해서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당장에 문을 열고 뛰어나가 그 신사를 집안으로 안내했습니다. 그가 모자를 벗는데 보니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었습니다. “무슨 이유로 오셨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지금 나라가 참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기도를 하는데 링컨은 한 시간을 기도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링컨은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울부짖으며 기도했습니다. 그는 혼자 기도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겸손하게 기도 부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기도부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중보기도의 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한 소녀가 난치병으로 오랫동안 누워 있었습니다. 이 소녀는 병상에서 복음을 전해 듣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과 같이 교회에 출석하지도 못하고 전도나 봉사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 못하는 자신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심방 오신 목사님이 소녀에게 비록 병상에서나마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얼마 후 마을에서는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이 교회를 찾게 되었고, 신앙의 부흥이 불꽃처럼 일어났습니다. 소녀는 그 부흥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는지에 대해 가족에게 자주 물었습니다. 수개월 후 소녀는 마침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소녀가 죽은 다음 한 가지 놀라운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소녀의 베개 밑에서 56명의 이름이 적힌 종이 한 장이 나왔는데 거기에는 최근 마을에서 구원받은 56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각 사람의 이름 앞에는 빨간 십자가 표시가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이 기도한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한 사람씩 표시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중보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중보기도를 잘 들어 주십니다. 우리는 양들을 위해서,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중보기도 해야 합니다. 또 북한에 전도의 문을 열어 주시도록, 중국에 선교의 자유를 허락해 주시도록, 이슬람 세계에 전도의 문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II. 그리스도인의 불신자에 대한 자세 (5-6)
5,6절은 불신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여기서 외인은 불신자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늘 불신자와 함께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불신자들을 피해서 산속에 들어가서도 안 되고, 유대인들처럼 우리만의 공동체를 형성해서 외부와 차단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항상 전도의 대상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우리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을 보고 우리의 삶을 봅니다. 우리나라 초대 교회사를 보면 기독교는 서양종교로 생각하고 반감이 매우 심했습니다. 이런 적대적인 환경 가운데서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들이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희생적으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특히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이 창궐할 때 목숨을 내놓고 환자들을 돌보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불신자들을 향하여는 지혜로 가르치라고 하지 않고 지혜로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실제 삶에서 본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신자와 문제가 생겼을 때 말로 해서 이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말 싸움을 하면 이겨도 상처를 입고 져도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므로 말 싸움이나 감정적으로 대립하지 말고 지혜롭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는 어디서 생기는 것입니까? 잠언 9:10절은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지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생겨납니다.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세월은 헬라어로 ‘카이로스’(.καιρός)인데 이는 시간 또는 기회란 뜻입니다. 시간이 곧 기회입니다. 돈도 있고 건강도 있고 지식도 있고 열정도 있지만 시간 곧 기회가 없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기회란 가만히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는 만들어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시간을 속량하라. 시간을 사라’는 말로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최대로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시간은 선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여 선교할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였으면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찾아가서 위로해 주고 실제적인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만일 기회를 놓치면 전도의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바울은 6절에서 불신자들에게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말을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는 것은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말고 그 마음을 유쾌하게 하고 좋은 인상을 끼칠 수 있는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김장할 때 배추에다 소금을 치면 뻣뻣하던 배추가 부드러워집니다. 이처럼 화난 사람에게 말을 잘 하면 화가 스르르 풀립니다. 속담에도 말 한마디로 천량 빚을 갚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잠언 15:1절에 보면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잠언 15:23절에서는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항상 불신자들을 전도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자신을 죽이고 불신자들에게 친절하게 말하고 좋은 인상을 끼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III. 소개와 문안 인사 (7-18)
바울은 이제 서신을 끝내면서 그의 서신을 전달할 사자들을 소개하고(7-9), 문안 인사를 합니다(10-18). 그는 먼저 두기고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두기고는 바울을 통해 복음을 믿게 되고 어려울 때 바울의 수종자로서 바울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섬겼습니다. 그는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군이요 주 안에서 함께 한 종으로서 바울의 깊은 신임을 받는 자였습니다(7). 바울이 두기고를 그들에게 보내는 것은 그들에게 바울의 사정을 알게 하여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함이었습니다(8). 오네시모는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과거 주인의 돈을 훔쳐서 도망 나온 무익한 노예였으나 복음을 영접한 후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혀 다른 신분이 되었습니다.
두기고와 오네시모와 누가의 공통점은 사랑을 받는 형제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랑을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받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을 겸손하게 섬기고 희생적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미움 받는 사람이 있고 사랑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 자기와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사는 사람을 보면 얄미운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을 희생적으로 섬기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됩니다.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내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존재인가 미움을 받는 존재인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10-15절까지는 문안인사입니다.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 사람으로서 바울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항상 함께 있었습니다(행 19:29, 20:4, 27:2, 몬 24). 그는 감옥에 갇혀 있을 아무런 이유가 없지만 바울을 섬기기 위해 그와 함께 갇혀 있었습니다. 바울이 곤경에 처할 때 언제나 아리스다고가 있었습니다. 곤경에 처할 때 함께 하는 친구가 참된 친구라고 하였습니다. 영어 속담에도 ‘Friend in need, Friend indeed’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바울의 좋은 친구요 동역자였습니다. 마가는 1차 전도 여행 중에 힘들어서 돌아갔고, 이로 인해 2차 전도 여행 때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게 한 장본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에 대한 편견이 있었는지 바울은 그를 영접하도록 부탁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처음에는 무익한 사람이었으나 나중에는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딤후 4:11). 처음에는 실망을 주었으나 나중에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마가는 전도자가 되어 애굽에 가서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유스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유스도는 유대인들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영접하지 못하여 가는 곳마다 그를 훼방하고 죽이고자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인이지만 복음을 믿고 복음의 일군이 된 사람들로서 참 할례당입니다. 이들은 동족의 미움을 받으면서도 바울과 함께 이방인 선교에 힘썼습니다. 바울이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잘 나갈 때는 함께 하기 쉽지만 그가 감옥에 갇히고 어려움을 겪을 때는 함께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남아서 바울과 함께 고난을 감당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함께 일하는 자들로서 바울의 위로가 되었습니다.
12,13절은 에바브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 및 히에라볼리 교회를 개척한 개척자로서 그들을 위해 많이 수고하였습니다. 에바브라는 그들이 이단에 미혹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온전한 성숙함) 확신 있게(흔들림 없이) 서도록 항상 그들을 위해 애써 기도하였습니다. 누가는 의사로서 많은 돈을 벌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세상 모든 욕망을 포기하고 바울과 동행하며 바울의 건강을 돌봐주었습니다(14a). 그리고 역사가로서 예수님의 행적을 자세히 살펴서 누가복음을 기록하고 바울과 동행하면서 사도행전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매우 귀한 보화를 남겨 주었습니다. 데마에게는 아무런 찬사가 없습니다. 후에 그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떠나갔습니다(딤후 4:10). 신앙의 변절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입니다.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고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이는 그들에게 동정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다가 감옥에 매인바 된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인사함으로 서신을 끝맺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바울에게는 항상 동역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동역자들을 매우 귀히 여겼습니다. 또한 그들도 바울을 귀히 여기고 바울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하였습니다. 바울이 죄수가 되었을 때 그의 친구가 되고 그를 섬기는 데에는 희생과 용기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는 바울의 충실한 동역자들이었습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주와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였을 때 그들의 이름은 성경에 기록될 만큼 참으로 영광스러운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동역자들을 귀히 여기고 동역자들은 바울을 귀히 여김으로 합심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독불장군처럼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동역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마 18:19). 우리도 아름다운 동역을 통하여 복음역사를 힘 있게 이루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하겠습니다. 또 깨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중보기도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도의 문을 열어 주셔서 한국 캠퍼스는 경한 일이요, 북한과 중국과 모슬렘과 세계 각 곳에 복음이 전파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역사가 편만하게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