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제 4 강
구속의 씨를 약속하신 하나님
말씀: 창세기 3:1-24 요절: 창세기 3:15
Ⅰ. 유혹자 사단(1-6)
1. 뱀의 특성이 무엇입니까(1)? 본문에서 뱀은 무슨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참조. 계12:9) 사 단의 유래(유다서6, 벧후2:4)와 본성(요8:44)에 대해 살펴보시오.
2. 사단은 여자의 마음에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의 씨를 심었습니까(1)? 사단의 유혹 방법이 무엇임을 알 수 있습니까?
3. 여자의 대답이 무엇입니까(2,3)?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의 말씀과 어떻게 다릅니까? (2:16,17) 이를 볼 때 여자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게 된 근본 원인이 무엇임을 알 수 있습니까?
4. 사단은 이런 여자에게 무슨 거짓 확신을 심었습니까(4)? 또 어떻게 여자의 마음을 교만케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 했습니까(5)? 이런 사단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5. 사단의 음성을 들은 여자의 선악과를 보는 눈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6a)? 아담은 왜 범죄 하게 되었습니까(6b,17b)?
Ⅱ. 하나님의 저주(7-24)
1.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의 내면에 어떤 예기치 않은 변화가 일어났습니까(7,8)? 그들은 왜 하나님의 낯을 피했습니까(10)?
2. 하나님께서 타락한 아담에게 최초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9)?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은 범죄한 이들의 죄를 어떻게 문책하셨습니까(11,13a)? 아담과 여자의 변명이 무엇 입니까(12,13b)? 이를 볼 때 인간 상호간의 관계성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2:23)
4. 하나님은 뱀을 어떻게 저주하셨습니까(14,15)? 이 가운데 하나님의 인류 구속의 계획이 어 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여자의 후손’은 누구를 가리킵니까?(갈4:4) 장차 그가 할 일과 또 그가 당할 고통이 무엇입니까?(히2:14,15, 사53:5,6)
5. 여자는 어떤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까(16)?
6.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땅이 받은 저주는 어떠합니까(17,18)?(참조. 롬8:20-22) 이런 세상 에서 아담은 먹고 살기 위해 어떤 수고를 해야 합니까(17b,19a)? 또 그 결국이 어떠합니까 (19b)?
7. 아담은 아내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였습니까(20)? 하나님은 저주 가운에서도 인간을 향한 그의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셨습니까(21)?
8.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22,23)? 그러나 영생에 대 한 소망을 어떻게 남겨 두셨습니까(24)?
☆ 이상을 공부하고 첫 범죄 때부터 범죄한 인간을 찾아오시고 구속의 씨를 약속하신 하나님 의 거룩한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시오.
창세기 제 4 강
구속의 씨를 약속하신 하나님
말씀: 창세기 3:1-24
요절: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
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또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사 인간의 행복을 위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아름다운 에덴 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과 기쁨과 평화였습니다.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참생명과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행복을 영원히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영적 질서를 잡아 주는 거룩한 명령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인간의 행불행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써 불행을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결과는 엄청났습니다. 오늘 말씀은 인간 불행의 근본 원인이 무엇이며, 또한 범죄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이 구속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Ⅰ. 유혹자 사단(1-6)
아담과 하와가 아름답고 평화로운 에덴 동산에서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을 때 이를 파기하려는 한 침입자가 나타났습니다. 이는 바로 사단이었습니다. 1a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간교하다는 말은 좋은 의미로서는 ‘슬기롭고 지혜로우며, 영리하고 신중한 것’을 뜻하지만, 나쁜 의미로는 ‘간사하고 교활하고 기회주의적인 것’을 뜻합니다. 뱀은 본래 모든 짐승들 중에 가장 아름답고 영특하게 창조 되었습니다. 뱀은 그 색깔이 아름답습니다. 또 자기를 주의 상황에 따라 잘 변형시키고, 순발력이 뛰어나 기회만 포착되면 순간적으로 달려들어 상대방을 쓰러뜨립니다. 뱀은 확실히 다른 짐승보다 영리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하셨습니다(마10:16). 사단은 뱀의 이런 특성을 이용한 것입니다. 계12:9절에서는 사단을 큰 용, 옛 뱀, 마귀, 온 천하를 꾀는 자라 하였습니다. 성경은 사단을 마귀, 악령,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이 세상 임금, 이 시대의 신, 귀신의 왕 바알세불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실제로 존재하며, 인격을 가진 천사와 같은 영적 존재입니다. 또한 인간세계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큰 영향력을 끼치는 능력있는 존재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원수요, 우리 믿는 자들의 원수입니다. 우리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반드시 사단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단의 유래와 그 본성이 무엇입니까?
(1) 사단의 유래: 유다서 6절과 벧후2:4절을 보면 사단은 본래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처소를 떠난 범죄한 천사입니다. 에스겔서 28:12-17절을 보면 사단은 덮는 그룹으로서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는 최고의 수호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은 본래 완전한 인으로서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축복을 많이 받자 마음이 교만해져서 하나님과 동등 되고자 하다가 쫓겨나 어두움의 세력을 잡은 자가 되었습니다.
(2) 사단의 본성: 예수님은 요한 8:44절에서 사단의 본성을 살인자요, 거짓말쟁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살리는 것이라면 사단의 속성은 죽이는 것입니다. 또 사단은 그 속에 절대적인 진리가 없어 거짓말을 참말처럼 잘하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사단은 대적자, 중상자, 참소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단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고, 또 인간의 약점을 책잡고 허물과 실수를 비방하고 고소합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불의에 빠지게 하고 불신앙에 빠뜨려 결국에는 하나님을 떠나게 만듭니다.
(3) 사단의 유혹 방법: 1b절을 보십시오. 사단은 여자가 홀로 있을 때 친한 친구처럼 접근하여 부드럽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 질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여 그 본뜻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은 각종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어도 좋다는 무한대한 자유를 빼 버렸습니다. 또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거룩한 명령의 말씀을 빼 버렸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도록 율법적으로 금지한 것처럼 부정적인 측면에서 질문하였습니다.
또한 ‘참으로’하는 부사를 넣어 질문함으로써 여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을 심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그렇게 절대적으로 믿지 말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할 때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절대적으로 믿지 말고 한 번 돌려서 상대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였습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 이성으로 성경을 분석하여 말씀을 상대화시킴으로써 말씀에 대한 회의를 불러 일으키는 사단의 역사입니다. 이처럼 말씀에 대한 회의는 범죄의 동기가 됩니다. 회의는 사람을 무너뜨리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회의주의자 David Hume은 “회의는 심장을 갉아먹는 생쥐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사단은 오늘날도 꼭같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병이 몸이 연약해졌을 때 찾아오는 것처럼, 사단은 우리의 마음이 연약해지고 피곤한 생각이 들 때 친구처럼 찾아와 마음에 회의를 심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살아계시는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세상이 왜 이렇게 불의하고 모순 투성인가? 하나님이 참으로 나를 사랑하시는가? 성경이 참으로 절대적인 진리인가? 이렇게 꼭 십자가를 지고 힘들게 신앙생활을 해야 되는가? 이런 회의는 십자가를 지기 싫고 특히 소감이 잘 안 써질 때 잘 찾아옵니다. 한 번 회의에 사로잡히게 되면 회의가 회의를 낳아 내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이상한 방향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마음에 의심이 들면 두려움이 생기고 무기력해져 버립니다. 이런 의심이 들면 이것이 사단의 역사임을 깨닫고 즉시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조용히 생각해 보면서 정리를 좀 해야 되겠다고 하면 자신도 모르게 말려들어 결국 사단의 밥이 되고 맙니다.
여자는 사단이 대화해 올 때 처음부터 단호히 물리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마음 문을 열고 사단을 영접하고 대화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2, 3절을 보십시오.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이 대답은 2:16,17절 말씀과 대조해 볼 때 비슷할 뿐이지 전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여자는 ‘각종 나무 실과는 임의로 먹으라’는 말씀을 빼 버림으로 자유를 빼 버렸습니다. 사단도 자유를 빼 버리고 여자도 자유를 빼 버렸습니다. 자유를 빼 버리면 남는 것은 율법입니다. 또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로 바꾸었습니다. 또 ‘만지지도 말라’는 말씀을 첨가시켜 과장해서 표현했습니다. 또한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함으로써 절대적인 명령의 말씀을 상대화시켜 약화시켰습니다. 이를 볼 때 여자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없고 거룩한 명령의 말씀을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과 대화를 시작한 여자의 마음에는 이미 독이 들어가 역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자의 가장 큰 약점은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단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을 때 말씀에 대한 깊은 경외심으로 말씀을 정확히 인용하여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마4:4, 7, 10). 그러나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지 않았고 감사치도 않았습니다.
사단이 이 틈을 놓칠 리가 없습니다. 재빨리 여자의 약점을 간파하고 원 투 스트레이트로 맹공격을 퍼부었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사단은 절대 죽지 않는다는 거짓 확신을 심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부하게 하였습니다. 말씀에 대한 의심의 씨는 점점 자라나 결국에는 말씀을 정면으로 거부하게 하였습니다. 사단은 여자의 마음에 거짓 확신을 심은 후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교만을 심었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와 같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선악과를 따 먹기만 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듯 믿음으로 따 먹도록 확신있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니! 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이렇게 마음이 교만해지면 영적 눈이 가리워져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게 됩니다. 인간이 타락하게 된 근본 원인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한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교만은 모든 죄의 뿌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교만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잠16:18)
사단은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 했습니다. 만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까봐 하나님이 두려워서 금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율법화시켰습니다. 우리가 목자의 사랑을 의심하게 되면 목자를 불신하게 되고 관계성이 파괴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되면 하나님을 불신하게 되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사단의 의도는 여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생명을 파괴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 종으로 삼고자 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단의 의도를 파악해야 됩니다.
여자는 사단의 달콤한 음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사단의 말을 들은 여자의 마음에는 탐욕이 생겼습니다. 여자가 탐욕의 눈으로 그 나무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습니다. 여인의 마음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생긴 것입니다.(요일2:16) 여자는 따 먹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강한 충동이 일어나 마침내 손을 들어 그 실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을 유혹하여 먹게 했습니다. 이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범죄하게 되었습니다.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을, 남자는 여자의 말을 더 들었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누구의 말을 더 듣는가 하는 것은 생과 사의 중요한 문제임을 배우게 됩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써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5:12절은 말합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것이 원죄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않았지만 아담의 허리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권 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가 노예인 자는 자식도 노예의 신세를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원죄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짓는 본죄가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Ⅱ. 하나님의 저주(7-24)
(1) 타락(7-13)
7-13절까지는 범죄함으로 인간 내면에 생긴 결과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단의 말대로 눈은 밝아졌으나 하나님과 같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악에 눈을 뜨고 타락하기 전 하나님 앞에서 가졌던 순수하고 고귀한 영적 순결을 잃어버리고, 벗었다는 수치심과 자의식과 죄의식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순결과 진실을 잃고 죄된 자신의 모습을 숨기는데 급급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낯을 피하여 숨게 되었습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기쁨과 감사로 충만하여 달려와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안겼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그들에게 기쁨이요, 즐거움이요, 생명이요,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범죄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은 그들에게 두려움과 불안과 공포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들은 누가 쫓아오지도 않는데 쫓기는 심정으로 도망하여 숨었습니다. 이처럼 범죄한 영혼은 도망합니다. 또 그들이 숨은 것을 보면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게 되고 죄를 사모하는 죄의 소욕이 생겼습니다. 또 9절에서는 존재의미를 상실하고 10절에서는 그 내면에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죄지은 인간의 마음은 항상 불안하고 두렵습니다.(롬2:9) 내면에 평안이 없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그들이 불순종하자 그들 내면에는 전혀 예기치 않게 수치심, 죄의식, 자의식, 불안, 도피 심리, 죄의 소욕, 두려움 등이 생겨났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갑자기 어디서 생겨나게 된 것입니까? 실존주의자들은 이러한 인간 내면의 문제를 단순히 심리적인 현상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는 심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데서 생겨난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는 하나님이 지배하는 영역인 하나님의 세계에서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빛과 생명과 사람과 평화가 충만한 세계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사단에게 순종하게 되자 이제는 사단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굴러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사단의 세계는 어두움과 죽음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내면의 실존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런 아담을 찾아 오셔서 그의 실존을 일깨워 주시고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이는 범죄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음성입니다. 이때 아담은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기 보다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고 책임전가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은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말함으로써 아내를 경멸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솔직히 시인하지 아니함으로써 자신을 기만했습니다. 이처럼 죄를 변명할 때 죄가 더 가중되고 문제 해결은 더욱 어렵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실된 고백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진실되게 죄를 고백할 때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요일1:9,10)
하나님께서는 이제 여자에게 추궁하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그러자 여자도 뱀에게 책임전가를 했습니다.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인간 상호간의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파괴되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도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2) 저주 (14-24)
14-24절까지는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하나님은 판사가 죄인에게 선고를 내리듯이 범죄한 뱀과 여자와 남자에게 차례로 합당한 벌을 내리셨습니다. 뱀은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종신토록 흙을 먹게 되었습니다. 흙을 먹게 되었다는 것은 극도의 비열과 멸시의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여자와 원수를 맺고 결국에는 여자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멸망하게 됩니다.
여자에게는 잉태하는 고통이 있게 되었습니다. 잉태하는 것은 큰 축복이었으나 이제는 죽는 듯한 고통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또 자식을 기르는 수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자는 돕는 배필로서 사명을 잘못 감당함으로서 사랑과 자유의 평등한 관계에서 남자의 애정을 구하며 남편의 권위에 복종해야 하는 주종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여성의 지위는 본래대로 회복되었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땅도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자 땅도 인간에게 불순종하여 인간이 수고한 만큼 그 효력을 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인간과 더불어 만물도 함께 고통받게 되었습니다(롬8:22). 인간은 저주받은 땅에서 종신토록 수고해야 겨우 하루 밥 세끼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사명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 큰 축복이었으나 이제는 사명을 잃고 일하는 것이 큰 고역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이 얼마나 무서운 사형 선고입니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은 무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고생을 하더라도 그 대가로 열매가 있을 때 보람을 느끼고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수고가 결국 무로 돌아갈 때 우리는 절망하게 됩니다. 10년이 넘게 밤잠을 설쳐 가며 죽도록 공부하여 의사가 되고, 고시에 합격하여 판검사가 되고,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된다고 합시다. 그러나 죽으면 이 때까지 쌓아 놓았던 모든 것이 다 무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인생 무상을 노래하였습니다. 또 시편 기자도 “우리의 년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사는 날 동안에도 허무, 무의미, 무가치, 무관심, 무정, 무자비 등 무자 돌림의 죽음의 요소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죽음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죄를 범한 대가로 받게 된 형벌입니다(롬6:23a). 여기에는 사망이 쏘는 무서운 고통이 있습니다(고전15:55). 인간은 범죄함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죽음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죽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죽음은 영과 육의 분리입니다. 영적 죽음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우리는 영적 죽음으로 그 영혼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계21:8)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다시 연결되기 때문에 육신의 죽음은 있지만 영적 죽음은 없게 됩니다(요5:24).
22-24절은 실락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죄있는 상태에서 생명 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염려하셨습니다. 그래서 에덴 동산에서 그를 쫓아내시고 에덴 동편에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낙원에서 쫓겨남으로 낙원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낙원을 상실한 인간은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잘 먹고 잘 입어도 행복이 없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범죄한 인간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살펴 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는 것이 왜 그토록 무서운 죄가 되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너무 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반발심도 생깁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한 엄청난 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에 죄를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이 때문에 저주 가운데서도 놀라운 구속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Ⅲ.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
(1) 네가 어디 있느냐?(3:9)
3: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하여 숨어있을 때 먼저 그를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찾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먼저 죄인을 찾아와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도저히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는 죄인들이 먼저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 주심으로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찾아 오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이 질문은 아담이 숨어있는 장소를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미를 상실한 아담의 실존을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 안에 있을 때만 그 존재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열심히 감당할 때 존재의미를 느끼고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떠날 때 존재의미를 상실하고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왜 있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 존재인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존재의미를 상실한 인간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하고 사명도 상실하고 하나님의 형상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현재의 비참한 실존을 깨닫도록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질문하신 것입니다.
또 이 질문은 회개를 촉구하는 사랑의 음성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비참한 실존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담은 범죄한 후 무화과나무 앞으로 자신을 가리우고 숨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교만과 불순종의 옷, 자의식과 죄의식의 옷, 가식과 위선의 옷을 벗고 진실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죄를 고백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 이는 자신의 실존을 깨닫고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존재의미를 상실하고 물질이나 지식, 세상 명예와 권세의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가리우고 있는 인생들에게 애타게 말씀하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2) 구속의 씨를 약속하신 하나님(3:15)
3:1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너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말씀에는 인류 구속의 희망이 원시복음으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단이 여자와 또 그의 후손과 원수가 됨으로써 선과 악의 끊임없는 대립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 후로 육을 따라 태어난 자들은 영을 따라 난 자들을 박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을 따라 난 자들이 아무리 핍박을 받더라도 결국에는 여자의 후손이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승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가 보장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장차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실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여자는 생물학적으로 남자없이는 후손을 생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메시야는 남성의 도움 없이 순수한 동정녀에게 잉태되어 태어나기 때문에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갈4:4, 사7:14) 사단이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친히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모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 때문에 채찍에 맞으시고 창에 찔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 때문에 무서운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머리를 박살내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을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없이 하심으로 인간을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히2:14, 15)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는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영생을 누리고, 불순종하면 죽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언약은 아담의 자유의지로 얼마든지 지킬 수 있는 언약이기 때문에 행위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일방적으로 언약을 파기하였습니다. 이제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무능하게 되어서 더 이상 행위로는 언약을 지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친히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성자의 희생을 통해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영생을 얻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를 전혀 요구치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은혜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친히 이 은혜 언약을 허락하심으로 인간을 향한 놀라운 구속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아담은 절망 가운데서 여자의 후손을 통해 주실 소망의 약속을 받아 들였습니다. 이는 그의 아내 이름을 ‘하와’, 곧 생명이라고 한데서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그가 회개의 빛을 보이자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21).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입고 있던 죄의 옷을 벗기시고, 짐승의 피를 흘려 친히 만드신 의의 옷, 믿음의 옷, 사랑의 옷을 입히셨습니다. 종국에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피 흘리심으로 만든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게 하셨습니다(롬13:14).
뿐만 아니라 에덴 동산과 생명 나무 실과를 없애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를 지킴으로서 인생들에게 소망을 남겨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성도들이 들어갈 더 좋은 낙원을 예배하시고 영생을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범죄한 인간에게 구속의 씨를 약속하신 하나님의 크신 구속의 사랑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