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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전서 1:1-31(십자가의 도)

by Mark Yang   08/16/2019  

Question


고린도전서 제 1 강

십자가의 도

말씀/ 고린도 전서 1:1-31
요절/ 고린도 전서 1:18

I. 온전히 합하라 (1-17)

1. 누가 누구에게 편지합니까(1,2)? 바울은 신자들을 어떻게 보았습니까? 여기서 교회란 무엇임을 알 수 있습니까? 바울은 그들에게 무엇이 있기를 간구합니까(3)?
2.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가 무엇입니까(4,5)? 이로 인한 결과가 무엇입니가(6,7)?
3. 고린도 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확신이 무엇입니까(8)? 이런 확신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9)? 미쁘신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오.
4.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권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10)? 그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11,12)? 그들이 왜 이렇게 파를 나누어 다투었을까요? 교회가 분쟁하게 될 때 내적, 외적으로 어떤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까요?
5. 성도들이 왜 파를 나누어서 분쟁해서는 안됩니까(13)? 바울은 왜 몇 사람 외에는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오히려 감사하고 있습니까(14-16)?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보내신 주된 목적이 무엇임을 인식하고 있었습니까(17a)? 이를 위해 그는 어떤 점을 조심하였습니까(17b)?

II.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18-31)

1. 십자가의 메시지가 전파될 때 어떤 두 종류의 반응이 나타납니까(18)?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십자가의 메시지가 왜 미련한 것으로 보일까요? 그러나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까?
2. 당시 어떤 사람들이 지혜로운 자로 여김을 받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셨습니까(19-21a)?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지혜가 무엇입니까(21b)?
3.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22)? 왜 그들이 이런 것들을 구했을까요? 이런 그들에게 십자가의 메시지가 어떻게 보였습니까(23b)? 그러나 바울은 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했습니까(23a,24,25)?
4. 고린도 성도들은 대부분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26)? 하나님께서 이런 자들을 택하신 데에는 어떤 뜻이 있습니까(27-29)? 그들은 왜 그리스도만을 자랑해야 합니까(30,31)?



Message


고린도전서 제 1 강


십자가의 도


말씀/ 고린도전서 1:1-31
요절/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고린도서는 바울이 A.D. 55-57년경에 에베소에서 썼습니다. 로마서가 교리적인 서신인 반면, 고린도서는 실제적인 서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서는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복음적인 원리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진리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과학기술문명, 물질문화문명의 급속한 발달로 하나님 없는 인본주의, 상대주의가 팽배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지 못하고 불확실성의 시대 가운데서 표류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장 말씀은 이런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분명한 영적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십자가의 복음진리로 이 시대에 도전하여 새로운 생명문명을 창출해 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온전히 합하라 (1-7)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행18:17) 고린도 성도들에게 편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는 발칸반도 남쪽에 위치한 항구도시로서 교통, 상업, 정치의 중심지로서 '헬라의 다리'라 불리워졌으며, '전 헬라의 빛'이라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B.C. 146년 로마의 장군 '뭄미우스'에 의해 온 도시가 파괴되고 시민은 노예화 되었습니다. 100년 동안 폐허로 방치되어 있다가 B.C. 46년에 시이저에 의해서 식민지 도시로 재건되면서 급속도로 발전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 황제 때에는 인구 60만의 대도시로서 '아가야' 지방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고린도는 고대 헬라의 전통적 철학이 성행하여 "철인을 만나는 일 없이 고린도 거리를 걸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고린도는 올림픽 경기가 개최될 정도로 스포츠와 오락이 발달하였으며, 각종 우상이 성행하고 퇴폐적이고 음란한 문화가 발달하였습니다. 사랑의 여신 비너스를 섬기는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1,000명이 넘는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밤이 되면 창녀로 둔갑하였습니다. 젊은이들은 술취하고 방탕하였습니다. 그래서 헬라 연극에 등장하는 고린도 사람은 항상 술취한 모습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유명한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등불을 들고 고린도시를 다니면서 "사람을 찾습니다"라고 외쳤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만큼 고린도에는 건전하고 쓸만한 청년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라는 이름은 부요와 사치, 방탕과 술취함, 불결의 대명사로 알려졌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A.D. 50년 경 사도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1년 6개월간 심혈을 기울여 개척하였습니다. 이때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동역자로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떠난 뒤에는 아볼로가 와서 역사를 섬겼습니다. 당시 고린도시가 국제 항구도시로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던 것처럼, 고린도 교회에도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2절에서 볼 때 하나님의 교회란 건물이나 제도나 조직이 아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자들의 모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바울은 먼저 고린도 성도들에 대한 감사제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구변 곧 말 잘하는 은사와 모든 지식에 풍족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들이 복음을 이해하고 전파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재림신앙을 소유할 수 있도록까지 하였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현재 고린도 성도들은 문제투성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책망할 것이 많았습니다. 이들의 현재 모습을 바라볼 때 절망할 수밖에 없지만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성장할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이런 확신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이는 그가 미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미쁘신 하나님은 고린도 성도들을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교제케 한다'는 것은 "코이노니아( )"로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죄사함을 얻을 수 있고 영생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영적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점점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하나님이 쓰실만한 내면성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아무리 부족한 양이라 할지라도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고린도 성도들이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하려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글로에의 집 편을 통해 고린도 교회내에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면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여기서 같은 말이란 '동일한 교리'를 말하고, 같은 마음이란 '같은 생각, 계획, 경륜'을 말하며, 같은 뜻은 '같은 판단'을 의미합니다.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세상에 대하여 공동전선을 펴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온전히 합하라'는 의미는 "카타르티조( )"로서 '어떤 것을 제자리에 맞추어 모든 부분이 조화를 이루어 온전하도록 만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의학용어로서 '어긋난 뼈를 바로 맞추다'라는 의미입니다. 뼈가 어긋나 있으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겠습니까? 당시 고린도 교회의 분쟁은 뼈가 어긋난 것과 같은 고통스러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분파를 나누어서 '나는 바울파다, 나는 아볼로파다, 나는 게바파다, 나는 진짜 그리스도파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아마 '바울파'는 개척자 바울을 중심으로 하는 '정통 주류파'이었고, '아볼로파'는 학문과 성경지식에 능하고 말을 잘하는 아볼로를 추종하는 자들이 만든 '지식 진보파'라 할 수 있습니다. '게바파'는 유대인 중심으로 만든 '율법 보수파'였고, '그리스도파'는 자기들만이 참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순복음파'였습니다.
당시 철학자들은 창시자들의 이름을 따라 플라톤파, 아리스토텔레스파, 스토아파, 에스쿠루스파로 나누어서 그들의 학파를 만들어 학문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들은 당시 헬라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서 파를 만든 것 같습니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학파를 만드는 것이 학문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적인 세계에 있어서는 여당, 야당이나 분파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를 한 몸으로 하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신학적인 교리 때문에 분파를 나눈 것이 아니라, 지도자에 따라서 따라서 파를 나누었습니다. 사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가 파를 조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자기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파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사람을 높이고 사람을 자랑하였습니다. 자랑을 넘어서 우상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분파와 서로 경쟁하고 미워하고 시기하였습니다. 서로 상대 분파에 대한 비난을 하고 불신을 심었습니다. 이러한 분쟁은 그리스도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그리스도 중심으로 섬기지 아니하고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으로 섬겼습니다. 이로 인해서 교회는 영적인 모임이 되기보다는 정치적인 모임이 되어 성령의 그릇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음과 뜻을 합하여 외부의 복음의 원수들과 싸워야 하는데도 내적으로 분파를 나누어서 분쟁을 함으로써 힘을 쓸데없는 곳에 소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분쟁은 은혜가 되지 못하고 영향력이 좋지 않아서 양들을 실족시키는 큰 죄를 범하게 됩니다. 분쟁으로 인해 자기도 망할 뿐만 아니라 교회도 망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분쟁 문제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서로 분파를 나누어 싸우기를 좋아합니다. 조선시대에는 남인, 북인, 노론, 소론의 사색당파로 나누어 싸웠습니다. 심지어는 임진왜란 때는 피난을 가면서도 싸웠습니다. 각 당파는 국가를 위한 정책을 펴는 것이 아니라 반대파를 제거하고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분쟁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결국 자기도 망하고 나라도 망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우리 국민들의 기질은 기독교에서도 여설히 드러나 불신자들에게 큰 악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복음역사를 이루는데 큰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이는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하나가 될 때만이 가능합니다.
우리 모임도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합하지 아니할 때 여러 파로 나뉘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분파성을 극복하고 하나님 역사 가운데 계속해서 쓰임받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자기 중심, 사람 중심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각자의 개성과 특성은 잘 살리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마음을 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중심으로 하나가 될 때 세상에 대하여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믿는 자들이 왜 파를 나누어서 분쟁해서는 안됩니까? 13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는 나뉘어 질 수 없는 유일하신 분이시요 절대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나 사상, 철학은 절대적이지 못하고 수시로 변하는 상대적인 것들이지만 오직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습니다 (히13:8). 사람을 중심으로 파를 나누게 되면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절대성이 상대화되고 인물을 숭배하는 죄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죄와 죽음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또한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수도 없습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하는 것으로 세례를 받게 되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됩니다. 바울은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분파를 조성할 빌미를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보내신 목적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입니다(17).

II.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18-31)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말의 지혜로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전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여기서 '도'란 "로고스( )"로서 '말씀 또는 메시지'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란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한 말씀 또는 십자가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내의 분쟁 문제가 십자가의 말씀을 잃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고린도 성도들이 이 십자가의 말씀 위에 굳게 서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메시지가 전파될 때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게 여기고 십자가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멸망하는 자들입니다. 또 하나는 십자가의 도를 영접하고 구원을 얻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동일한 십자가인데도 십자가에 대한 반응에 따라서 멸망과 구원이 결정됩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나 동일합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축복과 생명이요, 영접치 않는 자들에게는 저주와 죽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당시 십자가에 대한 인식은 어떠했습니까? '십자가'란 살인, 강도의 흉악범, 이간질하는 자, 사기꾼, 적에게 투항하는 자, 비밀을 누설하는 자, 반역 선동자, 마술을 행하는 자, 그중에서도 노예나 하류층 사람들에게 가해진 형벌입니다. 이 형벌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 형벌이었던지 키케로는 "십자가 형벌이야말로 가장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형벌이다. 로마시민의 생각과 눈과 귀에서 멀리 사라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키케로와 동시대 사람인 바로(Varro)는 "쾌락을 말할 때는 귀에 즐거우나 십자가를 말할 때는 귀에 거슬린다. 십자가라는 말의 거슬림은 십자가 위에서 당하는 고통에 필적한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형에 처형당한 자는 매장도 하지 않고 맹수들이나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 십자가 형은 인간의 잔인성, 동물성, 악마성을 드러내는 처형법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란 말만 들어도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메시지를 미련하게 보고 이를 전파하는 전도자들을 조롱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를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당시에는 철학자들이 지혜로운 자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논하며 우주의 근본원리가 무엇인가를 탐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지혜로 우주의 근원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찾는 목적은 동방박사와 같이 순수하게 하나님을 찾고 경배하고자 함이 아니라, 단지 이성으로 진리를 찾고 즐기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리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를 자랑하고 마음이 교만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 지혜있다하나 우준하게 되어 헛된 것을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교만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시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지혜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의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20)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전도란 "케뤼그마( )"로서 구원의 메시지를 말합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이란 십자가에 관한 구원의 메시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헬라인들이 미련하다고 생각하는 십자가의 메시지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메시지를 영접하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지혜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겸손과 교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하게 십자가의 메시지를 영접하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유대인들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능력의 역사를 행하는 기적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유대교는 표적의 종교라고 할만큼 구약에는 수많은 표적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도 이땅에 와서 큰 표적을 행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영광스럽게 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무기력하게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영접하기란 어려웠습니다. 또한 신명기 21:23절에 보면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하였으므로 십자가에 달려 못박혀 죽으신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종교적인데 반해 헬라인들은 철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이성을 중시하였습니다. 그래서 헬라에서 철학이 꽃을 피웠고 정확하고 합리적인 헬라어는 세계어가 되었습니다. 로마가 무력으로 헬라를 정복했지만 헬라문화는 로마를 정복하였고 오늘날 서구문화 발전에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이 십자가를 바라볼 때 이는 너무나 비합리적이고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지혜를 찾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어떠합니까? 24,25절을 보십시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고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그 누구도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대속제물이 되사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해 주심으로 죄사함과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영원한 파멸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를 없이 하는 능력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불타던 벤허를 사랑의 사도로 변화시킨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이기적인 레위를 성 마태로, 정욕으로 병든 어거스틴을 성 어거스틴으로 변화사킨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로마서 1:16절은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둘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옛날부터 사랑과 공의를 조화시키는 문제는 가장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죄를 미워하면서도 어떻게 죄인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죄를 없이 하기 위해서는 죄를 지은 인간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죄를 미워하시고 철저히 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죄인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잘 조화되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죄를 용납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도 만족시키시고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도 만족시켰습니다. 여기에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지혜의 극치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는 혐오스러운 것이요 어리석고 미련한 것으로 생각하고 어찌든지 버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십자가를 통하여 만민구원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혐오스러운 십자가, 저주의 십자가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십자가, 은총의 십자가, 광명의 십자가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에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말씀에 죄악된 시대를 극복하는 힘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십자가의 말씀이 살아 있을 때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 창조의 역사, 번영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말씀이 살아있는 개인이나 모임이나 민족을 축복하시고 귀하게 쓰십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말씀을 버릴 때는 축복을 거두시고 멸망케 하십니다.
일찍이 미국은 청교도 정신으로 세워진 나라입니다. 청교도 정신은 바로 복음 정신이요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그들이 십자가를 사랑하고 십자가의 말씀을 영접하였을 때 실제적으로 여러 부문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정치, 경제가 발달하였고 문화 예술이 발달하였습니다. 19c말-20c초 미국은 세계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세계질서를 수호하고 도움이 필요한 많은 나라를 지원하였습니다. 또한 영적인 제사장 나라로서 세계 선교를 위해서 아낌없이 물질을 드리고 각 교파들은 경쟁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대학은 진리의 상아탑으로서 시대를 이끌어 갈 많은 지도자들을 양성하였고 많은 선교사들을 배출하였습니다. 수많은 대학생들이 캠퍼스 시절 자기 인생을 드려 선교사가 되고자 결단하였습니다. 잔 헤론, 스크랜톤, 언더우드, 아펜젤러, 알렌, 마포삼열 등은 모두 다 20대 초반에 선교사가 되고자 결단하고 25,6세에 미개한 조선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런 젊은이들이 당시에 미국에는 43,000명이나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진리가 살아 있었을 때 미국은 참으로 '위대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월남전 이후 미국은 십자가의 진리를 버렸을 때 이기적이며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삶을 추구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섹스, 마약, 폭력이 보편화되고 영혼을 오염시키는 락, 헤비메탈, 랩 음악과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본산지가 되었습니다. 심각한 broken family으로 인하여 청소년들은 방황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나라 미국은 이제 "쓰러져가는 공룡"이 되어 세계 곳곳에 악영향을 미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를 볼 때 현재 우리가 누리는 축복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5,000년의 역사를 이어오며 우리나라는 늘 강대국에 시달리던 무력한 나라였습니다. 또한 하루 세 끼를 제대로 먹지 못하고 항상 배고픔에 주리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정서는 슬픔과 한이 서려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 민족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축복하셨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일인당 GNP 만불의 선진국 나라로 축복하셨습니다.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는 많은 문화 예술인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짧은 기간 동안에 민주주의가 놀랍게 발전하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축복하사 세계 50대 교회중 23개 교회가 우리나라에 있게 하셨고,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의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축복의 뒤에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 초기 성도들의 십자가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가 들어오기까지 약 8,000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신앙 때문에 목이 잘려 죽어갔습니다. 초기 개신교 역사에서도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헌신과 순교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초기 '복음궤짝'이라 불리던 '권서'들은 하루 평균 20km를 걸어다니며 방방곳곳에 성경을 보급하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들을 통해 성경공부모임인 '사경회'가 조직되었으며 이 운동은 1907년 '대부흥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복음적인 권서들과 사경회의 영향으로 한국의 크리스챤들은 순수하게 십자가의 복음진리를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혹독한 일제 신사참배의 핍박 아래서도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신자들이 오직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습니다. 신앙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거는 것이 초기 우리 신앙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부유해지고 잘살게 되자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물질적으로 축복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계 제사장 직무를 감당토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제사장으로서의 사명감을 상실하고 물질 속에 안주하여 십자가를 기피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easy-going life를 추구하게 되었고 이 시대의 문화는 우리로 하여금 '좀더 쉽게 좀더 편하게 좀더 재미있게' 살도록 자극합니다. 이런 세상적인 가치관은 교회 내에도 깊숙히 파고 들어와 일반 신자들 뿐만 아니라 목회자들까지도 십자가의 진리보다도 '교회의 대형화, 교회의 기업화'를 추구합니다. 목회자들에게는 십자가의 메시지를 증거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삼박자 축복'을 전하기란 쉬운 일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를 가르치고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가르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더구나 십자가의 진리를 따라 인생을 산다는 것은 너무나 힘들게 생각됩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좀더 검소하게 좀더 순수하게 좀더 경건하게(3p:poor, pure, piety)' 사는 것을 거부하고 '좀더 안락하게 좀더 자유롭게 좀더 재미있게' 살고자 합니다. 이로인해 천만이 넘는 신자들이 있지만 부패한 사회를 막지 못하고 영향력을 상실하여 맛잃은 소금과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만일 우리나라가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계속하여 십자가의 복음진리를 외면한다면 우리나라도 교회사에 나타난 많은 나라들처럼 멸망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이 사무엘 선교사님과 초창기 목자님들의 절대복음신앙을 축복하사 세계 선교역사 가운데 우리 모임을 귀하게 쓰셨습니다. 그 결과 피까지 뽑아 헌신하던 개척 초기의 고생과 가난을 벗게 하시고 이제는 어느정도 안정과 축복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이제 90년대에 들어오면서 우리 UBF 역사는 제 2세대 역사로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안정된 2세대 분위기 속에서 우리들도 십자가의 복음진리를 외면하고 알게 모르게 세상적인 가치관을 좇기가 쉽습니다. 이 시대의 물질주의와 실용주의와 상대주의에 영향을 받기가 쉽습니다. 목자인 우리들이 십자가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센타의 안정과 숫적, 물질적 팽창에 많은 관심을 갖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보다 센타 중심의 역사를 세우기 쉽습니다. 또한 변화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90년대 신세대 양들을 접하다보니 이들을 위해 감각적인 Program을 짜고 좀더 간단한 문제지와 1:1 노트를 만들기도 합니다. 신세대 양들이 센타를 떠날까봐 십자가의 도와 십자가의 삶을 분명히 가르치지 못합니다. '신세대, 신세대'하다가 목자들조차도 신세대식 목자들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때가 참으로 위기의 때입니다. 우리가 이때 십자가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시대 분위기에 편승해 버린다면 우리 모임도 하나님의 축복을 상실하고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될 것입니다. 이제 갓 2세대에 들어선 우리 모임이 3세대에 들어서기도 전에 망하고 말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고 은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믿음이요, 십자가에 기초한 삶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대한 자세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십자가만이 모든 사상과 문명의 이기를 이기고, 시대를 이기고 반드시 승리를 가져다 준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당시 십자가는 비인간성, 동물성, 악마성의 표현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희생제물이 되었습니다. 한 번은 6천명의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만들 나무가 부족하여 처형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이 십자가는 당시에 문명을 파괴시키는 문명의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증오심과 복수심을 정복하고 구원과 용서와 화해와 사랑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의 생명이 살아나고 인류가 하나되는 새로운 문명을 창출되었습니다. 십자가는 패배의 십자가였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승리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했던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기 이틀전에 군복으로 정장을 한 후 베들레헴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이겼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붙들 때만이 진정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십자가의 메시지를 외면합니다. 다시 말하면 낮아져서 섬기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십자가의 정신을 외면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야 어찌되었던 간에 우리는 십자가의 도만이 이 시대를 살리고 새로운 생명문화를 창출해 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26-31절은 하나님의 구원역사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 중에는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않았으며, 능한 자도 많지 않았고 문벌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노예들이나 부두노동자들, 가난한 자들, 하층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자들을 택하사 귀하게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자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십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십니다. 그러므로 자랑하는 자는 인간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진 한국 백성들을 택하시고 축복하사 세계 선진국들, 강대국들을 부끄럽게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 한국 백성들을 통하여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시고 세계 선교, 만민구속역사를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저희들이 이 하나님의 뜻을 영접하고 자만하지 말고 더욱 겸손히 십자가의 도를 사랑하고 십자가의 말씀을 온 세계에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