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제 9 강
한 몸과 많은 지체
말씀/ 고린도전서 12:1-31
요절/ 고린도전서 12:12
Ⅰ. 다양한 은사 (1-27)
1. 사도 바울은 이제 고린도 교인들에게 무엇을 알게 하고자 합니까(1)? 그들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무엇에 끌려갔습니까(2)? 그러나 이제 그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3)?
2. 은사, 직임, 역사는 여러 가지이지만 왜 그 우열을 가려서는 안되며, 또 이로 인해서 서로 분쟁해서는 안됩니까(4-6)?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7)?
3. 성령이 각 사람에게서 나눠주시는 은사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각 은사가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를 유익하게 합니까(8-10)? 이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은 어떻게 그의 주권을 행사하십니까(11)?
4. 바울은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어떻게 비유합니까(12)? 인간적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한 몸이 되었습니까(13)?
5. 몸은 왜 한 지체뿐일 수 없습니까(14)? 만일 몸에 한 지체뿐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15-19)? 그러나 그 모든 지체는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20)? 우리가 어떤 은사를 가졌든지 신앙 공동체에서 자기를 분리시킬 수 없습니까?
6. 왜 각 지체는 다른 지체를 경히 여길 수 없습니까(21)? 우리 몸에서 약하게 요긴한 지체는 무엇입니까(22)?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거나 아름답지 못한 지체에 대해서는 어떻게 합니까(23)?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몸을 고르고 분쟁이 없도록 하셨습니까(24-26)? 왜 우리 각자가 서로 귀하게 여기며, 서로를 돌봐야 합니까(27)?
Ⅱ. 다양한 직분 (28-31)
1. 교회에는 어떤 직분이 있으며, 그 역할이 각각 무엇입니까(28)? 각 직분을 맡은 자들은 각자의 직분과 다른 사람의 직분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29,30)?
2. 우리는 어떤 은사를 사모합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어떤 은사를 사모하라고 합니까(31)? 가장 큰 은사는 무엇일까요?
고린도전서 제 9 강
한 몸과 많은 지체
말씀/ 고린도전서 12:1-31
요절/ 고린도전서 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고린도전서 12-14장까지는 성령의 은사에 관한 문제를ㅔ 다루고 있습니다. 12장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를 말하고, 13장에서는 이러한 은사들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기본 원리가 되는 사랑에 대해서 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4장에서는 고린도 교회 내에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방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 문제로 인해서 무질서하고 시끄러웠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12장에서 각 은사들이 어디서 왔으며, 또 무슨 목적으로 주셨는가를 밝힘으로써 다양한 중에 통일성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몸과 지체 비유를 통해서 각 은사들은 서로 유기체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성령 안에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다양한 은사 (1-27)
첫째, 영적 은사를 받을 수 있는 기본 요건 (1-3). 사도 바울은 영적 은사에 대해서 논하기 전에 먼저 고린도 성도들이 영적 은사를 받을 수 있었던 근거가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1절에서 바울은 그들이 신령한 것에 대하여 무지하지 않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령한 것이란 영적인 은사들로서 하나님께서 구원 역사를 위해서 믿는 자에게 주시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자랑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2절에서 먼저 고린도 성도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 전에 얼마나 비참한 생활을 했는가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과거 그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말 못하는 우상에게 끌려 다니는 생활을 했습니다. 우상이란 인간이 두려움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상은 우리를 구원할 아무런 힘이나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말 못하는 우상에게 끌려 다니는 생활을 한 것입니까? 이는 우상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 배후에 귀신이 역사 하기 때문입니다 (고전10:20). 결국 우상 숭배하는 것은 악령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끌려간다는 것은 처형을 받기 위해 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으로서 우상 숭배의 결국은 멸망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상에게 끌려 다니는 생활은 맹목적이고 충동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으로서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비참한 생활입니다. 우상은 항상 음란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정욕의 노예가 된 자들은 "내가 이런 생활을 해서는 안되는데, 이것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야"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서 그런 생활을 반복하게 하게 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과거 원치 않게 이런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구원함을 받고 새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주라 고백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요, 또 현재 고린도 성도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는 저주를 받을 자다"는 것은 예수님을 대항하는 모든 말들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입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를 대적하는 악령의 역사를 말합니다. 불신자들은 악령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평안이 없고 늘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또한 정욕과 욕심에 사로잡혀 지내며, 결국에는 부끄러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본질적으로 진노의 자식으로서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반면에 "예수는 주시다" 라고 신앙 고백하는 자들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가 되시고 나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왕이 되신다는 신앙 고백하는 것은 인간의 힘이나 의지로 되지 않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신앙 고백한 자들은 영생을 얻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 내면에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들을 주렁주렁 맺게 됩니다. 영적인 은사들은 예수님을 주로 신앙 고백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령의 은사들을 받을 수 있는 기본 요건은 예수님을 주로 신앙고백 하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이 없이는 결코 성령의 은사를 받을 수 없습니다.
둘째,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 (4-11). 4-6절에는 은사와 직임과 역사가 나옵니다. 이것은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선물이요, 직무는 은사를 받아서 일하는 것을 말하며, 역사는 직무를 맡아서 구체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이를 주시는 성령은 같고, 또 직임은 여러 가지나 이를 주시는 그리스도는 같으며,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같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 역사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심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개인의 허영이나 자랑거리로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유익하게 하려 하심입니다(7). 모든 은사들이 한 하나님에게서 나왔으며, 또한 이를 주신 목적은 교회를 유익하게 하기 위한 것임을 생각할 때 서로 비교하여 교만을 부리거나 열등감에 빠져 자학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은사의 출처와 목적을 말한 후에 구체적으로 은사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십니다. 여기에 나오는 은사들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지적 능력에 관한 것으로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이 이에 속합니다..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통찰력을 지녔다면,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같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요지를 잘 이해하고 파악하는 힘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는, 특별한 믿음의 힘에 관한 것으로서 믿음과 병고치는 은사와 능력 행함과 예언과 영들 분별함을 말합니다. 믿음은 구원을 얻는 일반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능력을 행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 능력 행함은 병고치는 것 외에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라든지, 사람을 저주하는 일이나 사업적인 능력을 행하는 것이나 믿음으로 양을 잘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예언은 미래사에 대한 예언과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설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들 분별함은 성령의 역사인가 악령의 역사인가를 구분하여 내는 은사를 말합니다. 고 탁명환 소장님 같은 분은 특별히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를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셋째는, 방언 말함과 방언 통역함입니다. 방언은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기 위한 신령한 언어와 또 사람들이 땅에서 사용하는 모든 언어를 말합니다. 방언의 은사라 할 때 특히 외국어를 잘 말하는 은사도 포함됩니다. 이러한 모든 은사들은 하나님께서 구원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기 위해 각 사람들에게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각 사람이 여러 가지 다른 은사들을 가지고 있다면 혼란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 영적 은사들은 여러 곳에서 중구난방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한 성령께서 그 뜻대로 나눠주신 것이기 때문에 다양한 가운데서 통일성이 있는 것입니다. 요사이 각 당에서 봄에 있게 될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자들을 공천하는 일로 많은 곤욕을 겪고 있습니다. 입후보자들을 공정하게 공천을 하면 문제가 되지 않을텐데 사욕이 개입되기 때문에 시끄럽습니다. 다양한 가운데서 통일성을 이룬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여기에는 고차원적인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성령께서 무한하신 지혜로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시기 때문에 혼란이 있을 수가 없고 다양한 가운데서 통일성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다양성 가운데서 통일성이 있어야 함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획일적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 모임이 모든 사람이 꼭 같은 스트레오 타입적인 인간을 만든다고 비판을 합니다. 얼른 보기에는 같은 목적, 같은 사명, 같은 방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으로 바라본 것에 불과합니다. 조금만 깊이 살펴보면 각 사람이 각기 다른 독특한 개성과 각기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어떤 분은 있는 듯 없는 듯이 조용한 반면에, 어떤 분은 온 세상이 다 자기 것인 양 시끄럽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용히 앉아서 책읽기를 좋아하고, 어떤 분은 앉아 있으면 좀이 쑤셔서 견디지를 못하고 온 몸으로 뛰어다니기를 좋아합니다. 어떤 분은 일대일로 성경을 잘 가르치는 은사가 있는 반면에, 어떤 분은 일대일은 잘 못하지만 섬기는 은사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말을 잘 하는 은사가 있는 반면에, 어떤 분은 말은 잘 못하지만 잘 들어주는 은사를 가졌습니다. 또 어떤 분은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잘 하는 예술적인 은사가 있는 반면에, 예술적인 것과는 무관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각기 다른 개성과 은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조화를 이루어서 구원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우리 가운데 성령께서 친히 역사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가 되도록 각 뜻대로 각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영적 은사들을 나누어주심으로 다양성 가운데서 통일성이 있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를 자랑하거나 자기 주장을 내세우며 자기 나름대로 하기보다는 성령의 뜻을 알고 성령의 역사를 좇기에 힘써야 합니다.
셋째, 한 몸과 많은 지체 (12-17). 사도 바울은 성령께서 각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나누어 주심으로써 다양성 가운데서 통일성을 이룬다는 것을 몸과 지체 비유를 통해서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몸과 지체는 통일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 인간의 몸은 하나님께서 매우 신비스럽게 창조하셨습니다. 우리의 몸은 신경계, 면역계, 호르몬계, 근골격계, 순환계, 비뇨 생식계 등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어 각기 독특한 역할을 하지만 서로 유기적으로 일정하게 연결되어 있어 상호의존적입니다. 또 몸은 하나이지만 머리, 팔, 다리, 손, 눈, 코, 귀 등 여러 가지 다양한 지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지체들은 각기 독특한 역할을 하지만 서로 유기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상호의존적입니다. 각 지체들은 혼자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으며, 몸을 떠나서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 안에서도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각기 다른 인종과 신분들이 있지만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으며,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동일한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음을 의미하고,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다는 것은 거듭난 사람의 내면에 성령께서 내제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각기 다른 인종과 출신과 신분,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 되어 조화를 통일을 이룬다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각 사람의 마음에 한 성령께서 역사 하실 때 조화와 통일성을 이루어 하나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몸과 많은 지체가 서로 조금도 거스림과 부딪힘이 없이 조화와 통일성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몸을 지배하고 있는 생명 때문입니다. 생명이란 참으로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생명이 무엇이라고 명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몸을 지탱하는 것은 생명임에 틀림없습니다. 만일 모든 지체가 다 온전하다 할지라도 몸에 생명이 없다면 시체에 불과할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4층에서 아래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런데 몸을 보니까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몸은 멀쩡하더라도 생명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 생명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이것은 생명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우리 몸은 육체라는 빈 껍데기만 남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서 활기 있게 하는 것은 성령이십니다. 만일 신앙 공동체에 성령께서 역사 하지 않으신다면 그 모임은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인간적인 모임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둘째로, 몸의 한 지체는 다른 지체에 대해서 열등감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14-20). 사도 바울은 15,16절에서 발이 손에게 느낄 수 있는 콤플렉스와 귀가 눈에게 느낄 수 있는 콤플렉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발은 우리 몸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발은 온몸을 지탱하기 위해 늘 모든 무거운 십자가는 다 집니다. 또 발은 몸을 이동해 주는 운송 수단이 됩니다. 우리는 발로 달리기도 하고 족구도 하고 축구를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발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손에 비교하면 별 필요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손이 하는 일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우리는 손으로 식사를 합니다. 피아노를 치고 바이올린을 켜기도 합니다. 또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또한 상이나 꽃다발을 받는 것도 발이 아니라 손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손을 매우 귀히 여깁니다. 손에 반지를 끼기도 하고, 자주 손을 씻고 또 크림을 발라 줍니다. 그러나 발은 손과 비교하여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분명히 글씨는 손으로 썼는데 사람들이 글씨를 잘못 쓴 경우에 야단할 때는 "너는 글씨를 발가락으로 썼니" 하며 발을 욕합니다. 이렇게 발이 애매하게 무시당하다 보면 나중에는 열등감에 빠져 데모를 하기 쉽습니다. 만일 발이 손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고 "이제는 절대로 손이 하는 일에 협력을 안하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큰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또 귀가 눈과 비교하여 콤플렉스를 느끼기 쉽습니다. 사람들은 눈은 몸의 등불이므로 화장도 하고 매우 소중히 다룹니다. 그러나 귀를 화장하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또 눈이 나쁘면 안경을 끼지만, 귀는 안경을 걸치는 역할만 하여 무거운 십자가만을 집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며 속담에서조차 귀를 무시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귀를 무시하지만 귀가 없으면 얼마나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지 모릅니다. 한쪽 귀만 안 들려도 사회생활을 해 나가는데 지장이 많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인물도 잘생겼고, 학벌이나 가문도 좋아서 인간적으로는 아무 부족함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한 쪽 귀가 잘 안들리는 문제로 인해 자폐증 환자와 같이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귀는 우리 몸에 없어서는 안될 매우 중요한 지체입니다. 귀는 청력 기능과 함께 몸의 균형을 잡아 주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발이나 귀가 다른 지체와 비교하여 열등감에 빠져서 나는 몸에 붙어 있지 아니하였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다 할지라도 몸에 붙어 있지 아니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발이나 귀는 다른 지체와 비교하여 열등감에 빠져서 자학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고유한 특성에 만족하고, 맡은 바 사명에 충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모임 가운데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열등감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 나는 아무리 일해도 빛이 안나는 이런 직분을 맡았는가?" 생각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서 자신의 직분에 대하여 불만을 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며, 내가 없으면 모임이 지탱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맡은 바 직분에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별 중요하지 않게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이기 때문에 그것을 매우 귀히 여기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충성해야 합니다.
셋째로, 몸의 한 지체는 다른 지체에 대해서 우월감을 가지고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21-25). 몸의 한 지체가 다른 지체에 대해서 열등감을 느끼고 자학해서도 안되지만 반면에 다른 지체 대해서 우월감을 가지고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눈은 매우 귀하게 여깁니다. 그렇다고 해서 눈이 아무리 귀하지만 손이 없으면 그 불편한 것이 한 두가지 아닐 것입니다. 눈에 티가 들어갔을 때 눈이 평소에 손을 무시했다면 손이 말을 듣지 않고 눈의 티를 빼내지 않는다면 눈은 상하고 말 것입니다. 또 눈에 눈곱이 꼈을 때 손이 씻어 주지 않는다면 그 눈은 보기 흉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권투를 할 때 사람들은 눈을 때립니다. 그러면 손으로 눈을 보호합니다. 그런데 손이 "너 평소에 나 무시했지, 너는 맞아도 싸"라고 한다면 눈이 부어서 앞을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이 결코 손을 무시하고 업신여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머리가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발을 무시하면 큰일납니다. 만일 머리가 어디로 가자고 해도 발이 가지 않고자 고집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머리가 앞에 위험물이 있으므로 경고하고 빨리 피하도록 명령을 내렸는데 발이 이를 재빨리 피하지 않는다면 다 같이 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머리도 발을 무시할 수 없고 또 무시해서도 않됩니다.
우리의 몸은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귀한 것들로 입히고,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답게 치장합니다. 예를 들어서 귀는 귀걸이로 아름답게 꾸미고, 발은 양말이나 아름다운 신발을 신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몸을 고르게 하며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게 하시고 서로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받은 은사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아 보인다고 해서 우월감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무시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중요한 만큼 다른 사람도 중요하며, 다른 사람이 없이는 내가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상대방을 매우 귀히 여겨야 되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들이 존귀히 여기지 않는 직분일수록 더 귀히 여겨야 합니다.
넷째로, 모든 지체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26-27). 몸의 각 지체는 서로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게 됩니다. 발가락은 무시하기 쉬운 지체입니다. 우리는 발가락 하나쯤은 없어져도 괜찮겠지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발가락을 다쳐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발가락에 세균이 감염되어 이로 인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몸의 각 지체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이, 우리 믿는 자들도 몸인 그리스도께 붙은 지체들로서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27). 그러므로 우리는 지체 의식을 가지고 서로를 귀히 여기고 돌봐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 인간 갈등이 생기고 분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Ⅱ. 다양한 직분 (28-31)
사도 바울은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몸과 지체 비유를 들어 설명한 후 교회 내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구원 역사를 위해서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습니다.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고치는 은사요, 또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첫째, 둘째는 서열 개념이 아니라 단지 은사를 차례대로 열거한 것 뿐입니다. 사도, 선지자, 교사는 가르치는 직분이요, 능력과 병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은 행정적인 직분에 속합니다. 29,30절은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은사를 가질 수 없음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31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가져야 할 보편적인 은사인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은사는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받을 수 있는 은사이면서도 모든 은사보다 우월한 것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에 있어 가장 아름답고 가장 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것보다도 사랑의 은사를 사모해야 됩니다.
이상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우리가 각자 맡은 바 직분에 대해 감사하고 충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은사는 비교해서 열등감이나 우월감에 빠져서도 아니되며, 또 다른 사람의 직분에 대해 시기하거나 업신여겨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서로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깊이 인정하고 서로를 귀히 여기고 동역 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하는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있어야 됩니다.
둘째로, 지체의식의 중요성입니다. 우리는 서로 바쁘다는 핑게로 서로에 대해서 무관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상 이는 바쁜 것이 아니라 지체의식이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체의식을 가지고 서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고, 상대방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지체의식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슬픔을 나눌 때 사랑의 관계성이 깊어지게 됩니다. 지체의식을 가질 때 분쟁과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를 통해서 생명 구원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게 됩니다.
셋째로, 은사 개발(開發)을 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 은사가 없는 것 같애"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인 이상 은사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한가지 이상 씩은 은사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은사 개발에 힘을 써야 합니다. 내가 어떤 은사를 받았는지 그 은사를 알고, 그 은사를 아주 귀하게 여기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충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남과 비교해서는 안됩니다. 또 나의 은사를 개발할 뿐 아니라 양들의 은사를 발견하고 개발해서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을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체 의식을 가지고 서로를 귀히 여기고 돕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생명 구원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