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 Display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by Mark Yang   08/18/2019  

Message


요한일서 제 3 강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말씀/ 요한일서 3:1-24
요절/ 요한일서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우리는 2장에서 신자의 삶은 빛 가운데 행하는 삶임을 배웠습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이란 형제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오늘 제 3장에서는 우리가 마땅히 형제를 사랑해야 할 절대적인 이유와, 형제를 사랑하게 될 때 누릴 수 있는 영적 축복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신앙 공동체내에서의 사랑의 중요성을 깨닫고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1).
사도 요한은 2:28절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생각은 마지막 날에 확실히 이루어질 신자의 구원의 완성과 이를 가능케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1a절을 보십시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보라!'는 감탄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보여 준 어떤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크고 놀라운 사랑입니다. 우리는 데레사 수녀가 1948년이래 인도 캘커타에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보여 준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기억합니다. 그가 보여 준 사랑은 종교와 인종을 초월하여 온 인류의 가슴을 촉촉이 적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준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진노의 심판 아래 있는 죄인들을 용서해 주는 용서의 사랑이요, 또한 영원한 파멸로부터 구원하는 구원의 사랑입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사형선고를 받고 일생동안 창살없는 감옥에 갇혀 비참한 인생을 살다가 결국에는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은 한번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선악간에 심판을 받고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한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계21:8). 하나님은 이런 인생을 불쌍히 여기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 죄값을 다 치르시고 아무 값없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해 주신 것만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신 후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죄의 노예를 하나님의 보배로운 자녀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신분상승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사랑과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답답하고 힘들고 괴로울 때마다 점쟁이에게 가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아가 "아버지여" 하며 모든 마음의 괴로움을 다 털어놓고 기도함으로써 참된 위로와 안식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에 아끼시고 귀히 여기시고 그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쓸모없게 되었을 때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채찍으로 때리시고 쓰실만한 사람으로 훈련시켜 주십니다. 더 나아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십니다(벧전1:3,4). 실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사랑받는 자녀로 삼아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 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체험한 사도 요한은 감격하여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근거요 원동력이 됩니다.
1b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엄청난 신분을 소유하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함부로 대하고 조롱하고 핍박합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자녀의 희망 (2-3).
우리가 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하나님의 자녀다운 내면성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의 법도를 좇아 살지 않고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 살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신자의 순결을 지키며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삶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정욕과 욕심을 좇아 사는데 나만 순결하고 진실된 삶을 사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요사이 한보그룹의 부도사태로 인해 온 국민이 절망과 좌절과 분노와 허탈감으로 인해 깊은 한숨을 쉬고 있습니다. 이는 아무리 사정을 하여 자르고 잘라도 부패고리가 너무 깊어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치권에서는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해 책임지려고는 하지 않고 서로 책임만 전가하고 물고 헐뜯기에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속속들이 부패하여 각곳에서 썩은 것이 곪아 터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바르고 정직하게 살면 손해 본다는 생각이 팽배하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순결하고 진실되고 바르고 정직하게 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부패한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깨끗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2,3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관해서는 사도 요한도 완전히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음 세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은 풍부합니다. "그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막13:26)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 예수님은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재림하십니다. 그러나 그 시기는 아무도 모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게 되면 그와 같이 변화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영혼은 구원을 얻었지만 육신은 아직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육의 몸 때문에 죄의 소욕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탄식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의 간절한 소망은 이 육의 몸마져 온전히 구원을 받아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롬8:23). 이 육의 몸이 구원받아 영화롭게 되는 것을 '영화'(Glorification)라고 합니다. 이 영화는 예수님의 재림과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그때 우리의 육의 몸은 우리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이 죽지 않고 썩지 않고 강하고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됩니다(고전15:42-44). 그때는 다시 죄의 소욕에 시달리지 않게 됩니다. 약하고 추하고 욕되고 죽고 썩고 부패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몸이, 강하고 신령하고 죽지않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 변화는 너무나 놀라운 것이어서 믿기가 힘들지만 믿어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의 몸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어 주님과 대면하며 자유롭게 교제를 나누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이 무엇일까요? 원하는대로 물질을 펑펑 써 보는 것일까요? 높은 지위에 않아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러보는 것일까요?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백년 사는 것일까요? 이러한 축복은 물질적이고 현세적이고 일시적이어서 참된 축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은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에덴이 에덴일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을 그 중심에 모시고 그 음성을 들으며 자유롭게 교제를 나눌 수 있다는데 있었습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때만이 그 영혼이 진정으로 만족을 얻고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인간이 불행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 관계성이 끊어지게 되어 에덴을 상실하게 된데 있습니다. 에덴을 상실한 인간은 그 무엇을 하던지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사 죄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다시 하나님과 관계성을 회복하여 창조주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육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행복을 누리고 있지만, 예수님이 재림하심으로 우리의 몸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면 그때는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사랑하는 사람끼리 얼굴을 마주 보고 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인 인간이 영화로우신 창조주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며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행복의 극치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 믿는 자들만이 간직하고 있는 소망입니다.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춘향이가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하고 감옥에 갇히면서까지 정절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는 이도령이 나타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참된 희망이 있을 때 우리는 부패한 이 시대와 타협하지 않고 춘향이와 같이 순결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셋째, 범죄에 대한 경계 (4-12).
4-9절 사이에는 '죄'라는 단어가 무려 10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사도 요한은 4절에서 죄를 불법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불법이란 말은 죄가 죄됨을 드러내는 구약의 율법을 상기시킵니다. 웨스터민스터 소요리 문답을 보면 "죄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불복종, 즉 위반입니다." 죄란 단순히 하나님이 계시하신 율법을 범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자 하는 불법정신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죄는 하나님께 대한 고의적인 반항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떠나 자신이 원하는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의 성향입니다. 그래서 죄는 자기 중심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자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더라도 순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를 회개하되 자기 중심성을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중심적인 자, 이웃 중심적인 자가 되기에 힘써야 합니다.
5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리스도의 사역은 '죄'를 없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물이 되사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써 근본적으로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죄를 없이 하는 일은 죄없으신 분만이 할 수 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죄를 없이하셨다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당연히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한 생활을 해 나가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셈이 됩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한다고 하였고,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 9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는 죄가 발붙일 수 없다고 강력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여기서 '하나님의 씨'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거할 때 범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요한은 이미 1:10절에서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요한의 말에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는 "범죄하지 아니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난해한 구절 중의 하나로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어떤 견해는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조건하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견해는 6절은 해석이 가능할지 몰라도 9절은 불가능합니다. 9절은 어떤 특정한 그리스도인을 말하지 않고 모든 그리스도인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견해는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죄를 지어도 고의적인 죄는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죄를 범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은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짓되 지속적이며 습관적인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헬라어 동사의 시제에 의해 뒷받침 됩니다. 6절과 9절에서 죄를 짓지 아니한다고 할 때의 시제는 모두 현재 시제입니다. 헬라어에서 현재 시제는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NIV에서는 "No one who lives in him keeps on sinning"(6), "No one who is born of God will continue to sin"(9)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무한정 죄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지을 수 있고 또 실제로 종종 죄를 짓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무한정 죄안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의 세력권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바로 아래 신음하고 있다가 하나님의 크신 권능으로 말미암아 출애굽하여 완전한 자유인이 된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출애굽하였을 때 바로가 더 이상 그들에 대하여 권리 주장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속에 남아 있는 노예근성으로 인해 그들은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었지만 과거 죄악된 습관이 남아 있어서 자신도 원치 않게 자주 죄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정욕을 좇아 행하던 사마리아 출신들은 사마리아끼가 남아 있고, 이기적인 세리 출신들은 세리끼가 남아 있고, 의존적이고 무기력한 중풍병자 출신들은 중풍끼가 남아 있습니다. 이런 끼를 빼기 위해서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죄에서 벗어나 거룩함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불신자들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죄가 쌓여서 못쓰게 되다가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7,8절은 아무도 우리를 미혹하지 못하도록 배후에 역사하는 마귀와 싸워야 함을 말해 줍니다. 미혹이란 분별력을 흐리게 하여서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귀는 의심과 불신과 두려움을 심어서 복음신앙을 무너뜨리고 자기의 종으로 삼고자 합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벧전5:8). 그러므로 근신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근본적으로 마귀의 일을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10-12절에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대조되어 나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지만, 마귀의 자녀는 의를 행치 아니하고 형제를 미워합니다. 가인과 아벨은 그 좋은 예가 됩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은 어쩌다가 실수로 죽인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동생의 행위는 의롭고 자신의 행위는 악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볼 때 살인이라는 행위는 마음의 미움과 시기심과 질투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마5:21,22).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에서부터 일어나는 형제에 대한 미움과 시기심과 질투심을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 진실한 사랑 (13-24).
사도 요한은 이제 진실된 사랑이 무엇이며, 진실된 사랑을 할 때 누릴 수 있는 축복이 무엇인가를 말해 줍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신자가 믿음으로 의롭게 살 때 세상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존경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불의가 드러나기 때문에 핍박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믿는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어두움이 빛을 싫어하는 것과 같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14절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한다고 해서 우리도 같이 미워해서는 안됨을 말해 줍니다. 만일 같이 미워한다면 우리도 그들과 꼭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신자의 무기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게 될 때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게 됩니다. 형제를 미워하게 되면 사망의 세계에 거하게 되지만, 형제를 사랑하게 되면 생명의 세계에 거하게 됩니다. 사망의 세계는 허무의 세계요 고통과 슬픔과 절망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세계는 기쁨과 희망과 빛의 세계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고,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증오심과 복수심이 있는 곳에 죽음이 있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니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게 됩니다(15).
16절은 참된 사랑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형제를 사랑해야 할 절대적인 이유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사랑이란 함께 한곳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랑이란 TV 채널권을 양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랑을 감각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늘날은 3F(feeling, fashion, female)시대라고 합니다. 이어령 교수는 미래는 감각과 정이 중시되는 '필링의 시대', 감각과 이미지가 중시되는 '패션의 시대', 생명 존중과 섬세함의 여성문화가 존중받는 '피메일의 시대'가 역사의 새 장을 열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감각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매우 강합니다. 그래서 사랑도 감각적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이란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역사적 사실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요한복음 3:16절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사랑은 먼저 죄인을 찾아 오신 선수적인 사랑이요,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신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또한 무조건적으로 죄인을 용서하신 용서의 사랑이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또한 존재 자체를 귀히 여기시고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는 사랑입니다. 과거 우리는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고귀한 목숨을 버리심으로써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내 힘으로 사랑할 수 없는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께로부터 값없이 크신 사랑을 받았으므로,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여기서 마땅하다는 것은 헬라어로 '오페이로'( )로서 '빚을 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우리가 형제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선심을 베푼다거나 어쩔 수 없이 의무로 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빚을 갚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진 자로서 이 빚을 형제에게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17,18절은 사랑이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해서 거창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임을 말해 줍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이란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합니다. 행함이란 실천이 없는 것과 대조되는 말이고, 진실함이란 거짓과 대조적인 말입니다. 진실함이란 거짓이 없는 순수한 사랑을 말합니다. 이는 실천하더라도 실천하는 동기가 잘못될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자선사업을 하더라도 순수하게 형제를 도와 주고자 하는 마음보다 자기 이름을 드러내거나, 어떤 유익을 위해서 하기 쉬운 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볼 때 사랑이란 재물을 가지고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베풀고 섬기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있습니다. 미국의 찰스 피니라는 사람은 공항 면세점을 경영하면서 번 돈을 13년동안 무려 5천억원 이상을 익명으로 자선단체와 병원에 기부해 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는 집과 자동차도 없는 청빈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선한 일을 한 것이 어느 기자의 추적으로 밝혀졌는데 이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돈이 매력적일 수 있겠지만 누구도 한번에 두켤레의 신을 신을 수는 없겠지요." 그는 분명히 나누고 베푸는 삶에 참된 행복이 있음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많이 있어야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누고 베푸는 삶은 그 마음에 사랑이 있다면 없는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콩 한쪽이라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라면 하나라도 끓여서 함께 먹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있어도 남에게 나누고 베풀 수 없고, 사랑이 있으면 아무리 적은 물질이라도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사는 자는 윤택한 삶을 살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축복하심으로 풍족하게 됩니다. 잠언 11:24,25절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19절은 우리가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할 때 진리에 속한 줄을 알게 되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할 수 있습니다. '굳세게' 한다는 말은 '평안함을 누리다', '안심하다', '안식하다'는 뜻입니다. 20절은 19절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진실되게 형제를 사랑하기에 힘쓴다 할지라도 도와 줄 사람이 너무 많아 잘 도와 주지 못해 때로는 양심에 가책을 느낍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는 안위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21-24절은 우리가 형제를 진실되게 사랑하게 될 때 누릴 수 있는 축복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응답받을 수 있다는 것은 실로 큰 특권입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살게 됩니다(24).

참된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참된 사랑은 형제를 살리고, 자신도 참된 행복을 누리며, 더 나아가 공동체를 살립니다. 우리가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사랑의 공동체를 통해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