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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26-56

by Mark Yang   04/09/2022  

Question



Message


누가복음 제 2 강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말씀/ 누가복음 1:26-56
요절/ 누가복음 1: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우리는 제 1 강에서 메시야의 선구자 세례 요한의 탄생 예고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의 탄생에 관한 예고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이 엄청난 소식을 전해 주면서 그가 하나님께 크게 은혜 받은 자임을 강조해서 말했습니다. 이 시간 마리아가 받은 바 은혜와 또한 마리아의 몸을 빌어 탄생하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생각해 봄으로써 은혜 받고자 합니다.

Ⅰ. 은혜를 받은 자(26-31)

  엘리사벳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수태한지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찾아 갔습니다. 약 2천년전 그 옛날 갈릴리 나사렛은 공기 맑고 조용하고 아담한 전형적인 시골 동네였습니다. 동네 앞에는 개울이 흐르고 여름이면 아이들이 물장난을 치며 놀았습니다. 아침 저녁이면 집집마다 모락모락 연기가 나고 이른 아침과 서늘한 오후가 되면 아낙네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우물가로 가서 물을 길었습니다. 새벽이면 닭 우는 소리가 기상 나팔과 같이 마을을 울려 퍼지고, 낮이면 뻐꾸기가 “뻐꾹 뻐꾹”하며 울었습니다. 봄이 되면 젊은 처녀들은 들에서 나물을 캐고 젊은 청년들은 양을 치며 풀피리를 불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만나 눈이 마주치는 날이면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들은 다시 만나기를 고대했습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순박하고 진실되고 인정이 많았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이런 동네에 살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는 청년과 정혼한 순박한 시골 처녀였습니다. 당시 유대의 결혼 풍습은 정혼을 하게 되면 법적으로는 부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년 동안은 동거하지 않고 각자 집에서 순결을 지키다가 1년 후에 혼례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법적으로는 요셉의 아내였지만 실제로는 순결한 처녀였습니다.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마리아는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와 같이 청순하고 아름다운 핑크빛 꿈을 간직하고 행복한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비록 몰락한 왕가의 가난한 목수이지만 뼈대 있는 다윗의 자손으로서 왕손의 품위가 있었습니다. 그는 의롭고 진실되고 인격이 있고 유모가 있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이런 요셉과 믿음의 가정을 이루어 아들 딸 둘만 낳고 오손도손 살 것을 생각하면 세상에 아무 것도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밤마다 아름다운 꿈의 마차를 탔습니다. 마리아는 이 꿈이 영원히 지속될 것을 바랐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마리아가 요셉의 조끼를 뜨고 있을 때 전혀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뜻밖의 인사를 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28). 마리아는 깜짝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했습니다. 마리아는 현재 요셉의 은혜로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떤 은혜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그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음을 강조해서 말했습니다.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30). 이는 마리아에게 임한 은혜가 절대적이고 불가항력적이고 취소할 수 없는 은혜임을 말해 줍니다.

  그러면 “은혜를 받았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은혜란 아무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혜란 헬라어로 카리스(““““s)인데 이는 아름다움, 기쁨, 즐거움, 감사, 친절 등의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선물이나 초대를 받거나 물질적인 축복을 받았을 때 은혜 받았다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은혜는 은혜이지만 값싼 은혜입니다. 은혜에는 값비싼 은혜가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인류 구속역사에 쓰임받는 은혜입니다. 마리아에게 임한 은혜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인류 구속역사에 쓰임받게 된 것입니다. 마리아는 요셉의 아내가 되어 밥하고 빨래하고 김장철이 되면 김치 담그고 남편 시중들고 아이들을 낳고 키우며 일생 아무 의미없이 살다가 물거품과 같이 사라질 시골 처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아 성모 마리아가 되어 인류의 어머니로 귀히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마리아에게 임한 말할 수 없는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를 감당하는 데는 아픔이 따랐습니다. 아기자기한 꿈을 부인해야 하는 아픔, 사람들로부터 오해받는 아픔, 예수님을 낳고 키우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아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칼이 마음을 찌르는 듯한 아픔 등 여러가지 아픔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픔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바 은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를 더욱 깊게 할 뿐입니다.

  그러면 마리아만 이런 은혜를 받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이 말씀 속에는 인류 구속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방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항상 은혜로 택하신 자들을 통하여 구속역사를 이루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롬9:11, 11:5). 하나님은 소망없이 늙어가는 아브라함을 다만 은혜로 택하사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또한 막내로서 아버지 심부름이나 하며 양을 치던 목동 다윗을 은혜로 택하사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시고 메시야의 그림자로 귀히 쓰셨습니다. 또한 갈릴리 촌부들을 은혜로 택하사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사도들로 귀하게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시대 시대마다 은혜로 사람을 택하셔서 구속 역사에 귀히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우리를 은혜로 택하사 만민 구속역사에 귀히 쓰시고 계십니다. Augustine Hope Song 목자님을 은혜로 택하사 모스크바 개척역사에 귀하게 쓰시고자 하십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함께 하셔서 은혜를 감당할 힘과 능력과 지혜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택하시고 사명을 주실 때는 반드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사명을 주신 후에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28:19,20)

  31절을 보십시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마리아에게 임한 은혜를 구체적으로 메시야를 잉태하여 낳는 것입니다. 천사는 낳을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 하도록 알려 주었습니다.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마1:21). 인간에게 많은 문제가 있는 것 같지만 결국 인간을 못쓰게 만드는 가장 심각하고도 근본문제는 죄 문제입니다. 과거 우리나라가 가난했을 때는 돈을 많이 벌어 잘 먹고 잘 살게 되면 행복할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를 외치며 허리 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어느 정도 잘 먹고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향락문화가 사회 전반에 퍼져 사람들의 영혼을 파멸로 이끌고 있습니다. 신문 지상에 보도되는 인신매매나 토막살인, 생매장, 성폭행 등은 겉으로 나타난 죄의 증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죄의 중병을 앓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 죄로부터 구원할 수 있습니까? 부모입니까? 의사입니까? 선생입니까? 세상에는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죄로 인한 고통과 파멸로부터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는 오직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4:12절에 보면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천지에 있는 이름 중 가장 아름답고 귀하고 높은 이름입니다.

Ⅱ.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32,33)

  천사는 계속해서 마리아의 몸을 빌어 탄생하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해 주었습니다. 이는 마리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에 관한 지식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큰 자가 되십니다. 32a절을 보십시오.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우리는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같은 분들을 생각할 때 그들의 고매한 인격과 업적을 보고 위대한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위대함에 비할 때 실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그의 위대성을 논할 때 주 앞에 위대한 자라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그 본질 자체가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완악한 마음을 감동 감화 시키는 위대한 말씀의 종이요, 귀신의 세력도 물리치시는 영계의 지배자가 되십니다. 또한 광풍도 잠잠케 하시는 자연계의 지배자가 되시고, 죽은 아이도 살리시는 생명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해결할 수 없었던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본체가 하나님으로서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정한 위대성은 엄청난 창조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나라의 모든 영광과 권세와 특권을 다 버리시고 종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말구유에 태어나심으로 인간의 모든 슬픈 운명을 담당하셨습니다. 또한 공생애 동안 선한 목자로서 냄새나는 각종 죄인들을 품고 섬기셨습니다.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고귀한 몸을 희생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분이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 되십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만 하고 다스려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감당치 못하고 다시 죄 가운데 빠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구주로서의 예수님과 왕으로서의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32b을 보십시오. “주 하나님께서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다윗의 뿌리에서 나신 왕이심을 말해 줍니다. 다윗은 어떤 자였습니까? 그는 하나님의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그 시대에 하나님을 뜻을 좇아 섬겼습니다(행13:32,36). 권력의 속성에는 한번 권력을 잡으면 어떤 모양으로든지 계속 그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지속성과 권력을 절대화 시키려고 하는 절대성과 권력이 절대적이 되면 부패하게 되는 부패성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공과 의를 행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공과 의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에게는 아부하는 간사한 자, 기회주의자들이 붙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 그는 백성들을 짓누르지 않고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는 선한 목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심히 기뻐하시고 그의 씨에서 메시야가 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대로 예수님을 다윗의 위를 물려 받은 왕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행13:22,사11:1). 그러나 예수님은 정치적인 왕이 아니라 영적인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자신의 왕되심을 선포하신 후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8:36,37). 예수님은 진리의 왕이시요 사랑과 평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이 진리의 왕이시요 사랑과 평강의 왕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나라의 행 불행은 누가 다스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율법적이고 감정적인 사울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는 백성들은 공포에 떨며 많은 괴로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이 나타나 공의와 사랑과 평화로 나라를 다스리자 백성들은 기뻐하며 행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가정의 행 불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술을 먹고 처자식을 때리게 되면 그 집안은 지옥이 되어 버립니다. 이때 자식들은 율법적이고 감정적인 아버지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받고 반발심과 증오심이 싹트게 됩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이해해 주고 사랑과 진리로 다스릴 때 자녀들은 행복을 누리며 자라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도 사단이 다스리느냐? 예수님이 다스리느냐에 따라 행 불행이 좌우됩니다. 우리의 마음에 정욕과 시기심과 미움과 불평과 인간적인 생각이 가득하게 되면 사단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때 우리의마음은 지옥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예수님이 내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도록 한다면 우리의 내면은 참 기쁨과 자유와 놀라운 평강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겸손과 온유로 섬기시고 나의 허물과 실수, 연약함과 죄짐을 다 담당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나 결코 권위를 부리거나 강압적으로 다스리지 않으시고 인격적으로 다스리십니다. 계3:20절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은 지금도 “똑똑” 내 마음 문을 노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음 문을 열면 내 마음에 들어와 나와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셋째로, 그 나라는 무궁합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메시야 왕국의 특징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는 일시적입니다. 한 때 영국은 많은 식민지를 가진 대영제국으로서 해가 지지 않을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해가 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미국도 그 영광이 영원할 것 같았지만 급속히 쇠하여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 나라는 흥하고 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성경은 나라들과 왕국들에 대해 여러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바벨론에 끌려가 그곳에서 느부갓네살, 벨사살, 다리오, 고레스왕 네 왕 밑에서 총리직을 지냈습니다. 그는 변천하는 국제 정세 가운데서 한 이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한 거대한 신상을 보았는데 그것은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 얼마는 진흙이었습니다. 그 신상은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있다가 사람의 손으로 만들지 아니한 한 뜨인 돌이 나타나 거대한 신상을 다 부숴버렸습니다. 거대한 신상은 세상 나라를 의미하고, 한 뜨인 돌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세상 나라는 거대한 신상과 같이 크고 광채가 나고 두렵게 보이나 결국에는 산산히 부숴지고 맙니다. 세상 나라는 철이 녹슬어 부패해지는 것 같이 부패하여 망하고 맙니다. 여기에 세상 왕들의 고민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나라는 결코 폐하지 아니하며 그 권세는 영원합니다(단2:44, 7:13,14). 우리는 대한민국의 시민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빌3:20). 하나님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세계로 옮기셨습니다(골1:13).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 나라에 연연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1:1 말씀공부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데 전력투구합니다.

Ⅲ. 주의 계집종이오니(34-38)

  천사로부터 성탄 메시지를 들은 마리아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처녀가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이 자기에게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마리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천사는 이런 마리아에게 35절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성령의 역사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는 인간 이성을 초월한 기적으로서 신비에 속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에 그 본체가 하나님이 되십니다. 또한 마리아의 몸을 통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가 되십니다.(딤전2:5)

 천사는 계속해서 본래 수태치 못한다 하던 엘리사벳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늙어서 아들을 배었음을 증거하고 결론적으로 말했습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37).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십니다. 믿음이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이때 마리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요셉과 상의한 후에 결정하겠으니 하루만 여유를 달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즉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결단했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마리아는 감정적으로 결단하거나 어쩔 수 없이 운명적으로 결단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결단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께 자신의 전 인생을 맡겼습니다. 그에게는 개인신앙이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순종하는 데에는 꿈을 깨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꿈은 왕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의 아내가 되어 아들 딸 낳고 아기자기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큰 꿈보다도 이런 소박한 꿈을 깨기가 훨씬 더 어렵습니다. 대개 불순종하는 자들을 보면 아기자기한 꿈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뿐 아니라 마리아는 요셉의 오해와 사람들의 비난,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다만 주님만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결단했습니다. 이때 그는 인류 역사에 길이 빛나는 성모 마리아로 귀히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이렇게 순종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주의 계집종이오니”(I am the Lord's servant) 마리아는 요셉의 아내요 부모의 딸이기 이전에 주의 여종이라는 분명한 자세가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여종으로서 주님께서 원하시면 언제든지 기꺼이 자신을 드릴 수 있는 그릇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준비된 자를 귀하게 쓰십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여인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큽니다. 여인들이 정욕과 욕심과 허영을 좇아 살 때 그 나라는 소망이 없습니다. 또 여인들이 불순종하고 반발적일 때 남자들은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이 순종적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믿음으로 살 때 그 시대는 소망이 있습니다. 또 형제들은 그 품안에서 믿음의 용사로 자라날 수 있습니다. 형제들은 마리아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는 믿음의 여인을 사모합니다. 우리 가운데 마리아와 같은 믿음의 여인들이 많이 나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Ⅳ. 마리아의 찬송시(39-56)

  마리아는 믿음으로 순종했지만 마음에 위로와 카운슬링이 필요했습니다. 이때 그는 일어나 갈릴리 나사렛에서 산 중에 있는 유대 한 동네로 찾아 갔습니다. 이것은 약 150km나 되는 먼 거리였습니다. 또 당시는 길이 험하여 위험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확신을 얻기 위해 신앙 선배인 엘리사벳을 찾아 갔습니다. 천사가 일러준대로 하나님의 역사를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 누구를 찾아 가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간적인 사람은 자기에게 인간적인 위로나 동정을 줄 수 있는 인간적인 친구나 신앙이 인본적인 자를 찾아 갑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소리를 듣고 회의와 불신에 사로잡혀 목자를 원망하고 모임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사람은 신앙선배를 찾아가 겸손하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때 영적으로 힘을 얻고 마음의 의심과 불신을 극복하고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목자님께 찾아 가면 결론이 뻔하다는 생각 때문에 찾아가기를 주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론이 뻔할지라도 도움이 필요할 때 목자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영적 생명에 관계되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41-45절까지는 엘리사벳의 카운슬링입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문안하자 아이가 복중에서 뛰놀았습니다. 이때 엘리사벳은 성령이 충만하여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된 일인고”(42,43) 엘리사벳은 백발이 성성한 늙은 할머니요 마리아는 젊은 처녀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은 딸과 같은 마리아에게 “내 주의 모친”이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사벳은 자기는 메시야의 선구자를 잉태하고 마리아는 메시야를 잉태하였다고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영적인 눈으로 보고 “주의 모친”이라고 불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의 믿음의 결단을 축복해 주고 믿음의 확신을 심어 주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여기서 우리는 신앙적인 카운슬링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배웁니다. 카운슬링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적인 카운슬링을 하게 되면 회의와 불신을 심고 어린 소자를 실족시키는 큰 죄를 범하게 됩니다. 엘리사벳이 만약 “네가 은혜를 받았기는 하지만 처녀로서 참 안됐다. 요셉과 의논하고 결정하지 않고 너무 섣불리 결단했구나 너 요셉을 어떻게 감당할래” 이런 인간적인 소리를 했다면 마리아는 힘들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온전히 하나님 편에서 바라보고 마리아가 얼마나 축복받은 자인가를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우리는 카운슬링을 할 때 하나님 편에서 바라보고 또 상대방이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확신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신앙적인 카운슬링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가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엘리사벳의 신앙적인 카운슬링을 들은 마리아의 심정에서는 찬송시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46-48). 엘리사벳의 확신에 찬 카운슬링을 통하여 마리아의 심령에 드리워진 일말의 의심과 근심의 구름이 사라지고 밝은 태양 빛이 심령에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그러자 그 내면 깊은 곳에서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샘물이 터지듯이 터져 나왔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에게 임한 은혜를 찬양하고(46-48), 그 은혜가 일반 백성에게 임함을 노래했습니다(49,50).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비천한 자는 높이시지만 권세있는 자는 내리치시고, 주리는 자는 배불리시지만 부자는 공수로 보내시는 공의로운 분이심을 발견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심을 깨닫고 찬양했습니다.

  우리도 이번 성탄절에 마리아와 같이 나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함으로써 심령 깊은 곳에서 나오는 감격에 찬 찬송시를 읊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