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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21-39

by Mark Yang   04/22/2022  

Message


누가복음 제 I부 5 강

기다리는 사람들

말씀/ 누가복음 2:21-39
요절/ 누가복음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본문 말씀은 아기 예수님이 율법을 쫓아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장면입니다. 이때 시
므온과 안나가 나옵니다. 그들은 어두운 시대에 믿음으로 살며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두운 그 시대를 지키는 자들이요 시대를 밝히는 하나님의 등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에게 메시야를 보여 주셨습니다.

I. 주께 드려진 아기 예수(21-24)
2:1-20절에서 천사는 구주 탄생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알려 주었습니다. 구주께서 세상
에 오신지 8일이 되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난 지 8일만에 할례를 행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었다는 언약의 표징입니다(창17:11,12).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세상 사람과 구별되어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할례는 오늘날로 말하면 세레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난 지 8일만에 율법을 줄아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할례하는 날 부모는 천사가 수태하기 전에 일러준대로 이름을 예수라 하였습니다(21).
22절을 보십시오.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부모는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레위기 1224절을 보면 여인이 남자를 낳으면 7일 동안 부정하고 33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케 되어 그 후에 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면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1년된 어린 양을 취하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 비둘기 새끼나 산 비둘기를 취하여 드려야 했습니다. 만일 여인의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하면 산 비둘기 한 쌍과 집 비둘기 새끼한 쌍을 드려야 했습니다. 이는 어린 양의 가격의 약 1/10정도 되는 것으로 아주 가난한 자들이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비둘기 한 쌍이나 흑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한 것을 보면 그 집안이 얼마나 가난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이심을 알았습니다. 세상의 구주를 하나님께 드리는 의식은 그 어떤 의식보다도 장엄하고 호화스러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이 의식은 너무나 초라하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웬만하면 어린 양으로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형편이 어려워 할 수 없이 비둘기 한 쌍으로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생 동안 여우도 굴이 있고 공증의 새도 깃들 곳이 있지만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이 가난한 생애를 사셨습니다(늑9:58). 예수님이 이렇게까지 가난하게 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8: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하늘과 땅과 땅에 속한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서 가장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부모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출애굽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킬 때 애굽의 장자를 다 멸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장자는 어린양의 피로 속하셨기 때문에 멸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초태생은 사람이나 짐승을 무론하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거룩히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였습니다(출13:2).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가 자신들의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것임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이 믿음으로 아기 예수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식을 자기가 낳았기 때문에 자기 소유로 생각합니다. 자식을 하나님의 소유로 생각하는가? 부모의 소유로 생각하는가?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게 됩니다. 하나님의 소유로 생각할 때 하나님의 듯대로 키우게 되고 그때 자식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그러나 부모의 소유로 생각할 때 부모가 원하는 대로 키우게 되고 자식을 마음대로 주장하게 됩니다. 이때 자식은 반항적이 되고 삐뚜러지게 됩니다.
이상에서 볼 때 부모는 할례를 행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주의 율법을 쫓아 행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39). 그러면 이 모든 일이 율법을 쫓아 행하여진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갈4:4,5절을 보십시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또한 로마서 15:8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중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율법에서 자유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율법아래 나시고 율법을 낱낱이 지키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견고케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잘 이해하시고 그들을 속량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속하시기 위해 율법아래 나시고 율법을 다 지키심으로 율법 아래 있는 인간과 꼭 같이 되셨습니다(히2:17). 이는 예수님의 큰 겸손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자유로운 분이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율법에 구속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예수님을 본받아 어찌 하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고 간증했습니다.(고전9:19)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셨습니다(마5:17).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법도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주신 것이기 때문에 거룩하고 신성하고 절대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의 말씀을 쫓아 살 때 하나님의 자녀다운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죄 아래 팔려 연약하여 율법을 지킬 내적 힘이 없습니다(롬7:14,18).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믿음으로 율법을 잘 지킬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주께 드리는 의식을 행하고 있을 때 늙은 두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시므온과 안나였습니다.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것과 같이 듣는 해 되신 예수님이 오시기 전 이 세상은 가장 어두웠습니다. 이런 어두운 시대에 시므온과 안나는 하나님의 등불을 지키는 자들이었습니다.

II. 시므온의 믿음 (25-35)
시므온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첫째로, 그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25a). 어두운 시대에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상하게 돌아가는 세상을 바라볼 때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서 단지 먹고 살기 위해 롬부림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의미없는 투쟁을 죽을 때까지 계속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붙여졌습니다. 사람들은 먹고 살기도 바쁜데 언제 말씀 공부하고 하나님을 믿느냐고 말합니다. 그런 사치스러운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살기 힘들다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었고 탄지 물질과 세상 명예와 권세만이 있었습니다. 진리 탐구의 전당인 대학도 입학도 하기 전에 취직 걱정부터 합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는 시대가 어두울수록 더욱 간절히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생명이요 희망이었습니다. 그는 시대와 타협치 않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몸부림쳤습니다. 이런 그는 하나님께 의로운 자라 하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또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쫓아 순종하는 생활에
서 나옵니다. 경건한 사람이라고 할 때 이는 세상 사람과 구별된 영적인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사람들이 다 세상 가치관을 쫓아 살 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쫓아 살았습니다. 그는 말씀을 연구하고 1대1로 말씀을 가르치느라 항상 바쁜 생활을 했습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지 오늘이 구청인지도 몰랐습니다. 이런 시므온은 사람들이 볼 때 평범한 노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매우 귀증한 사람이었습니다. 빛나는 셋별과 같은 자였습니다.

둘째로,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25b).
당시 이스라엘의 형편은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으며 비참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없이 많은 데모를 하였지만 그때마다 로마군병들에 의해 무참히도 짓밟혔습니다. 그들은 심한 좌절과 절망의 심연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는 회의와 불신과 불안과 두려움만이 백성들의 심령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삶의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에게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오실 것을 희망했습니다. 그는 하
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메시야를 보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오셔서고 통하는 이스라엘을 위로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희망은 시대가 어두울수록 더욱 불타 올랐습니다. 그는 메시야만이 이스라엘의 희망이요 인류의 희망임을 믿었습니다. 그는 이 희망가운데 믿음으로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오늘날 캠퍼스 지성인들은 시대문제로 고통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먹고사는 문제로 고통하고 있습니다. 죄와 불의로 고통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 고통을 위로해 줄 수 있습니까? 메시야만이 이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마음의 상치를 싸매줄 수 있습니다.

셋째로,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였습니다. 25b절을 보십시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는 성령이 충만한 자였습니다(26). 그리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성전에 왔을 때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를 불 때 그는 성령의 지배를 받고 성령의 인도함율 받고 사는 자입니다. 육신을 줄는 자는 육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런 자는 항상 육신의 생각만 합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편하게 살까?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생각만 합니다. 이런 자들은 마음의 육심과 정욕을 쫓아 행합니다. 이런 자의 내면은 환난과 곤고요 그 결국은 멸망입니다(롬2:9,8:5,6). 반면 영을 줄는 자는 영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런 자는 항상 영의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복음 역사를 잘 섬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좀 더 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양들을 잘 먹이고 키올 수 있을까? 그의 마음은 항상 진리의 말씀과 양들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자의 내면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기뻐하시고 성령으로 그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시므온은 마침내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을 안고 심령에 벅
차오르는 감격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29-32절은 시므온의 찬송시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시므온은 하나님을”주재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주재란 천지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절대 주권자란 듯입니다. 시므온이 살고 있는 당시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를 통치하고 있었고 유대는 헤롯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온통 그들의 세상 같이 보였고 그들에 의해 세상 만사가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세상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 통치하에 있는 것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해 된 것임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 뜻대로 통치하고 계시고 세상 역사를 운행하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또한 그의 생에도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께서 말씀하신대로 메시야를 만나고 평안한 안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즉음을 평안히 놓임받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의 심령에는 잔잔한 평화가 차고 넘쳤습니다. 그가 어떻게 인생을 마치면서 심령 깊이 참 평안을 누힐 수 있었을까요?

30,31절을 보십시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그는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이 구원은 만민을 위해 예비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부모의 아들로서 초라하고 연약한 아기에 불과합니다. 누가 이 아기가 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아기를 보는 영적 눈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이 온 세상만민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할 구주이심을 알았습니다. 그가 주의 구원을 보았을 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주의 구원을 보았다”는 것은 주의 구원을 체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주의 구원을 체험했기 때문에 즉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즉음은 사모하는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시므온은 예수님이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이스라엘의 영광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NIV영어 성경에는 예수님이 이방인들에게는 계시를 위한 빛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영광을 위한 빛이라고 말합니다(A light for revelation to the Gentitles and for glory to your people Israel ). 시므온은 예수님이 없는 세계는 온통 어두움으로 뒤 덮혀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방세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영적으로 무지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약 4M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아 어두웠습니다. 사람들은 어두움과 즉음의 그늘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빛이 없으므로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했습니다. 헛된 신에게 절하므로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달랬습니다. 그들에게는 빛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8:12).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는 계시의 빛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영적으로 눈먼 강아지와 같은 자들이 예수님을 만날 때 영적인 눈을 뜨고 놀라운 하나님의 세계를 보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영광의 빛이 되십니다. 영광이란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압제를 받으면서 하나님께 대한 불신과 회의와 불평불만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영광의 빛으로 임하심으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과 감사를 심으셨습니다. 영광의 빛이 임하자 그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던 모든 불신과 회의가 사라졌습니다. 대신 사랑과 기쁨과 은혜와 감사가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시므온은 이제 요셉과 마리아를 축복하고 특별히 모친 마리아에게 예언의
말을 했습니다.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으로 세움을 입었는가를 보게 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인생들의 패하고 흥함의 원인이 되십니다. 사람이 흥하고 패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달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구원과 멸망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9:33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귀한 보배가 되지만 영접치 않는 자에게는 부딪히는 돌, 거치는 반석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또 예수님 때문에 멸망 받을 수도 있습니다. 구원이냐 멸망이냐? 인생의 승리냐 패배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께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살 때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승리의 인생을 살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배척하고 자기 원하는대로 살 때 그 인생의 결국은 패망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그 몸으로 담당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높이 달리실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높이 달리사 저주와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머리를 흔들며 육을 하고 십자가의 강도도 함께 욕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저주와 조롱과 수치의 십자가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실상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밷전2:24). 예수님은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셨습니다. 나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으시고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사죄의 은혜를 멋입게 됩니다. 이때 예수님의 십자가는 은총의 십자가요 영광의 십자가가 됩니다.

십자가 앞에 결국 모든 마음의 생각이 다 드러나게 됩니다(35b).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마리아가 당할 심정 고퉁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요한1925). 마리아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즉일 때 칼이 마음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III.기도하는 안나(36-38)
시므온 외에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이 또 있었습니다. 이는 아셀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 할머니였습니다. 안나는 여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결혼한지 7년 만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대개 여인들은 남면과 자식들에게 소망을 두고 삽니다. 그래서 남편을 잃으면 소망을 잃고 절망하게 됩니다. 서구라파에서는 대부분의 여인들은 채가를 하여 삶의 희망을 새롭게 찾습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대부분 자식에게 희망을 두며 삽니다. 자식이 그 인생의 의미요 목적이 됩니다. 안나는 남면을 잃고 자식에게 희망을 두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희망을 두었습니다. 안나는 남편의 죽음을 통해 인생의 허무를 절실히 느꼈을 것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음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만 참된 소망이 있음을 깨닫고 그의 남은 생에를 온통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후 그의 생활이 어떠했습니까? 37절을 보십시오. “과부 된 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안나는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안나는 기도의 여종이었습니다. 과부는 외롭고 슬픕니다. 운명적입니다. 그러나 안나는 기도로 모든 외로움과 슬픔을 극복했습니다. 기도로 운명을 이겼습니다. 안나는 고통하는 이스라엘의 백성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문제 많은 양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세계 각처에 흩어져 복음역사를 섬기고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의 폭은 넓었고 깊었습니다. 그의 생활은 바로 기도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기도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다 주말을 즐길 때에도 그는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했습니다. 구정 때에도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했습니다. 이런 그의 생활은 1년 2년 10년이 계속 되었습니다. 10년 20년이 지나 84년이 되었습니다. 그의 머리는 희어져 백발이 되고 이는 다 빠지고 허리가 구부러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생활을 증단하지 않고 계속했습니다. 혁명이 몇번 일어나고 시대가 달라졌지만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그의 기도 생활은 아무런 힘이 없고 무의미한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의 기도는 어두운 그 시대를 지키는 등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의 기도를 멸시치 않으시고 마침내 메시야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는 마침이 때에 나아와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감사의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야기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주의 율법을 쫓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렀습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었습니다(40).

결론: 시므온과 안나가 살던 시대는 어두웠습니다.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단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칠 뿐이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믿옴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시므온과 안나는 시대와 타협하지 않고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이 어두운 시대에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메시야에 대한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희망은 모든 어려운 현실을 이기게 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희망은 어두운 시대에 절망하지 않고 희망찬 인생을 살게 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희망으로 그들은 시대에 요동하지 않고 믿음의 중심을 지키며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메시야를 소망하며 믿음으로 살 때 성령이 그 위에 계셨습니다. 우리도 이 시대의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메시야에 대한 희망 가운데서 이 시대를 이기는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참 희망을 알지 못하고 절망하는 양떼들에게 메시야에 대한 희망을 심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