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제Ⅰ부 7 강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
말씀/ 누가복음 3:1-38
요절/ 누가복음 3:3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
파하니”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선구자 세례 요한의 사역에 관한 것입니다. 그의 사명은 예수님이 복음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역사환경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인류 구원 역사의 새 장을 여는 역사적 사명이었습니다. 본문은 그가 이 사명을 감당할 때의 시대 상황과 이런 가운데 그가 어떻게 메시야의 길을 예비했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봄학기에 주께서 우리 가운데 친히 역사하실 수 있는 역사환경을 만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요한(1-14)
저자 누가는 역사가의 눈으로 먼저 복음역사가 시작될 때의 시대 상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은 당시 정치적 상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때는 로마 황제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15년째였습니다. 그는 가이사 아구스도의 의붓 아들로서 황제가 되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 때에 강대해진 로마 제국은 디베료 가이사 때에는 더욱 강대해졌습니다. 로마 제국의 식민통치는 더욱 조직화되고 강력해졌습니다. 각 지역마다 총독을 두어 다스렸는데 유대 지방에는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있었습니다. 또 헤롯 대왕이 B.C 37-4년까지 유대를 다스리다가 죽은 이후로 나라는 그의 세 아들에 의해 분할통치 되었습니다. 헤롯은 갈릴리의 분봉왕으로서, 그 동생 빌립은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는 아빌레네의 분봉왕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독재정치를 했습니다. 그 중 헤롯은 여우같이 간사하고 음란했습니다(눅13:32, 막6:18). 이런 지도자들 밑에서 백성들은 많은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이 부패하면 종교 지도자들이 깨어 있어 백성들을 위로하고 소망을 심어주고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야 됩니다. 그러나 당시 종교적인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저자 누가는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 제사장으로 있었다고 기록함으로써 당시 교권정치가 얼마나 심했는가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직은 본래 종신직이었지만 안나스는 로마 정부에 의해 강제 폐위 당하고 그의 사위인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나스는 실제로 뒤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보자로서 말씀과 기도의 종이요, 백성들의 선한 목자요, 그 시대의 양심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안나스와 가야바는 악의 상징이었습니다. 안나스는 교활하였으며 가야바는 권모술수에 능한 자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평소 원수처럼 지내던 헤롯 당원과 손을 잡기도 하고, 가룟 유다에게 돈을 주고 흥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위선과 가식에 찬 생활은 부패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그 시대는 실로 어둡고 절망적이었습니다. 관리들은 부패하고 군인들은 강포하였으며 백성들은 귀신 들려 울부짖고 질병과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연쇄 방화범이 늘어나고 불량배들이 발호하고 전세값이 폭등하고 주가가 폭락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이런 어두운 시대에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 세례 요한을 통해 선한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1:80절을 보면 요한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었습니다. 빈 들은 어떤 곳입니까? 빈 들은 광야로서 사람이 살지 않는 조용한 곳입니다. 세속문화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한적한 곳입니다. 빈 들은 집이나 학교나 직장이나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곳은 그 어디나 될 수 있습니다. 요한은 빈 들에서 시대와 구별된 경건한 생활을 하며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이런 그에게 어느날 위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자 그는 침묵을 깨고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을 때 그는 어두운 시대에 담대히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늙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낳은 연약한 외아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그는 포효하는 호랑이와 같이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 위대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양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평범한 시골 농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부패한 시대에 도전하여 말씀을 전하는 정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자신의 신앙문제로 괴로워하는 무명의 수도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롬1:17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임했을 때 그는 자신의 신앙적인 갈등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부패한 카톨릭 세력에 도전하여 위대한 종교개혁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어두운 시대를 이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뿐입니다.
이상에서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먼저 위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내 심령에 임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의 역사입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능력이 많고 신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성경을 잘 안다 할찌라도 그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좀 부족하다 할찌라도 위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능력있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연약한 자가 강해지고 무기력한 자가 생명력이 넘치는 자로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능력있는 복음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심령에 임하도록 간절히 영적투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빈 들에서 하나님을 찾고 그의 음성을 듣고자 간절히 기다리는 자에게 임합니다.
이스라엘은 약40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아무런 비젼도 없었고 회개의 역사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자 그들 가운데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메시지를 전하지 아니했습니다. 백성들의 죄 문제에 도전하여 죄를 회개하고 죄 사함 받도록 도왔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비현실적인 것 같이 보입니다. 정치적 부패, 사회 구조악, 경제 분배 문제, 민생치안, 물가고와 같은 현실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지를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증상치료에 불과하고 근본적인 치료가 되지 못합니다. 폐결핵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몸에 열이 난다고 해서 아스피린을 먹인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약이 독하지만 원인치료를 위해 폐결핵 약을 먹여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근본 문제는 하나님을 떠난 죄 문제입니다. 세례 요한은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죄 사함을 받도록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죄로 인해 고통하는 백성들에게 생명의 메시지요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러한 세례요한의 사역은 이미 800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는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4-6). 세례요한의 사명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골짜기, 큰 산과 작은 산, 굽은 길, 험한 길의 4종류의 길이 있습니다. 골짜기는 자신의 부족함을 바라보고 깊은 불의에 빠져서 자학하거나 열등감과 패배감에 시달리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런 자는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이고 운명적입니다. 이런 자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겸손한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교만한 자입니다. 이런 자는 불의를 주장하는 것을 회개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큰 산과 작은 산은 자기가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자들을 말합니다. 큰 산은 크게 교만한 자이고 작은 산은 언덕으로서 좀 덜 교만한 자를 말합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 의와 자기 생각이 강하고 자존심이 셉니다. 자기는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특별대우를 받고자 합니다. 이런 경우는 다이나마이트를 터뜨리고 불도저로 밀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가지 사건을 통해서 자기가 깨지고,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를 깨닫도록 도와야 합니다.
굽은 길은 성격이나 가치관이 삐뚜러진 자들을 말합니다. 이런 자는 반발심이 강하고 냉소적입니다. 대개 가정 환경이 불우하여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자들은 책망하면 더 삐뚜러져 버립니다. 이런 자들은 이해와 사랑으로 받아주고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어린아이 돌보듯이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녹여야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험한 길은 비포장 도로와 같이 거친 성격의 소유자들입니다. 이런 자는 혈기가 많아서 좌충우돌을 잘합니다. 이 때문에 남에게 상처를 잘 주고 또 상처를 잘 받습니다. 이런 자는 겸손하고 온유하신 예수님을 잘 배워서 그 내면이 변화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골짜기를 메우고 큰 산과 작은 산을 낮추고 굽은 길을 바르게 하고 험한 길을 평탄케 하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마음을 겸비케 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만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본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역사입니다. 모든 인류는 죄를 범함으로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늪에 빠진 자와 같이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는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을 위해 구원자 예수님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모든 인류는 예수님을 통해서 죄와 사망의 늪에서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류는 구원이 필요합니다. 인류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은 복지사회가 아니라 구원입니다. 이 구원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유일한 구원의 희망이 되십니다.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자 온 유대지방과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요단강으로 몰려 왔습니다. 이때 요한은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무엇이라 말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요한은 양들이 몰려온다고 무조건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했을까요? 독사는 겉은 아름답지만 속에는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무서운 독을 품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끼치고 있는 악영향이 독사의 독과 같이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선민으로서 마땅히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 살며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생활로 인해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을려고 하다가 신자들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생활을 보면 저런 자가 될까봐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될 때 그 영혼을 실족시키는 무서운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는 장차 무서운 진노가 임하게 됩니다. 그들이 장차 올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길 밖에 없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까? 회개란 죄를 깨닫고 고백하고 그 길에서 돌이키는 것으로서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의미합니다. 세상으로 향한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개에는 두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죄에 대해 진정으로 슬퍼하며 이제는 과거의 잘못과 관계를 끊겠다고 진지하게 결심하는 것이고, 둘째는 결심한 행동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죄를 뉘우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열매를 맺기까지 부단한 영적 투쟁을 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습관적으로 잘 드러눕는 사람은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드러눕지 않고 투쟁적인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또한 육신의 정욕을 위해 좋지 못한 영화를 보거나 또 죄악된 곳을 출입하는 자는 이를 끊을 뿐만 아니라 순결한 생활을 함으로써 거룩함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교만하고 내면이 거친 자는 겸손과 온유의 열매를 맺고, 불순종과 반항심이 강한 자는 순종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내적 열매가 맺혀질 때 자연히 외적 열매도 맺혀지게 됩니다.
그러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데 방해되는 요소가 무엇입니까?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헛된 자부심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 자손다와야 하는데 아무 내용도 없이 자부심만 가지고 있으니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능히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 내용도 없이 헛된 자부심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기 쉽습니다. 나는 UBF목자다. 나는 의대생이다. 나는 고대 법대생이다. 나는 그린베레다 라는 자부심만 갖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린베레가 그린베레답지 못하면 그린 벌레가 되거나 그린 걸레가 되어 버립니다. 저에게는 말씀의 종이라는 헛된 자부심이 열매 맺는데 방해요소가 됩니다. 제가 이 헛된 자부심을 버리고 주님께서 쓰실만한 말씀의 종이 되기 위해 부단한 영적 투쟁을 하고자 새롭게 결심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으면 안될 필연적인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는 것은 심판이 임박했음을 말해줍니다. 사람들은 심판을 먼 미래의 일로 생각하기 때문에 진실되게 회개하지 못하고 또 회개를 미루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심판은 결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에 있습니다. 심판에는 개인적인 심판과 종말론적인 심판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심판은 우리가 죽어서 개개인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고후5:10). 또 종말론적인 심판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이루어질 심판입니다.(마24:30,31) 우리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고 또 그리스도께서 언제 오실지 알 수 없으므로 회개는 결코 미룰 수 없는 것입니다. 수술실에 들어가는 사람이 수술 받다가 죽을지 모르므로 진실되게 죄를 회개하는 것 같이, 심판이 임박했음을 의식하고 진실되게 회개하고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학식이나 부나 혈통이나 신분이나 민족성과 같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생활의 열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인생은 한 그루 포도나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의 사명은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나무로서의 존재가치가 있습니다. 만일 나무가 때가 되어도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결국에는 찍혀 불쏘시개감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생명과 말씀과 사명 등 모든 필요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은 나의 책임입니다.
심판의 메시지를 들은 무리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모두 도망갔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회개하는 심정으로 충만하여 물었습니다. “그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때 요한을 그들에게 무슨 방향을 주었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이 말씀은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관심을 갖고 또 실생활 가운데서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일부터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살기 힘드니까 자신의 생존을 위해 투쟁하느라 이웃에게 무관심해지고 이기적이 되어 버립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무관심과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습니다. 사랑이 점점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구제 사업도 해마다 갈수록 현저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사회는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나누어져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집 강아지에게는 맛있는 것을 주지만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는 자들에게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선진국 백성들은 너무 잘 먹어 배가 나오고 비대증으로 고민하지만 수단과 같은 나라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기아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사랑이 메말라 바싹바싹 소리가 납니다.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울기보다는 사랑에 굶주려 울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분위기 가운데서 우리 크리스챤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고 주위에서 할 수 있는 일부터 이웃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12-14절에는 세리와 군병들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때 요한은 세리들에게는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군병들에게는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고 권면했습니다. 이를 볼 때 당시 세리들과 군병들의 횡포가 얼마나 심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권세를 이용하여 탐욕을 채웠습니다.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여 돈을 빼앗았습니다. 그 시대는 공의가 무너지고 뇌물이 성행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런 그들에게 공의의 열매를 맺도록 하였습니다.(암5:24)
요한은 이렇게 백성들의 죄에 도전하여 구체적으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함으로써 주의 길을 예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15-20절에서는 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소개함으로써 주의 길을 예비하였습니다.
Ⅱ.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요한(15-20)
백성들은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세례요한을 만나자 혹 이가 그리스도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의 고결한 인격과 상한 목자의 심정을 인하여 큰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요한은 백성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는 인기있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져서 못쓰게 되기 쉽습니다. 국민이 원한다면 어쩔 수 없이 메시야가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때가 영적으로 큰 위기입니다. 요한은 바로 이때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백성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소개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위대성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은 망하고 그리스도는 흥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증거했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16).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십니다. 물세례는 죄사함을 받기 위한 준비에 불과하지만 성령 세례는 우리의 죄악을 태워버림으로 근본적으로 죄를 없이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심판과 구원의 열쇠를 가지신 심판주가 되십니다(17). 예수님은 심판 주로서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그 외에도 여러가지로 백성에게 권하여 좋은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요한은 그 시대를 비취는 등불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봉왕 헤롯이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요한을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로써 의가 짓밟히고 희망의 등불은 꺼짐으로 그 시대는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세례 요한은 맡은 바 사명을 완수함으로 그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Ⅲ.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21-38)
21절을 보십시오. 때는 요한이 옥에 갇히기 직전이었습니다. 백성들이 다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고 있을 때 예수님도 오셔서 백성과 함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백성이 세례를 받는 것은 죄 사함을 받기 위한 것이지만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첫째로, 백성과 같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자신을 철저히 낮추시고 백성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는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짊어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로, 메시야로서의 공적 사역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 위에 강림하셨습니다. 이때까지 인간의 죄로 인해 하늘이 닫히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보자 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강림하셔서 인류 구속 역사를 시작하심으로 하늘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늘로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이는 성삼위께서 동시에 역사하시는 엄청난 역사였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야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약속된 메시야로서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23-28절은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이 족보는 마태복음에 나타난 족보와는 달리 다윗과 아브라함을 거쳐 하나님까지 올라갑니다. 이 족보가 말하는 바는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로서 인성을 가지신 분이시요,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본체가 하나님이심을 말해 줍니다.
새 봄학기에 우리 모두가 이 시대의 세례 요한으로서 주의 길을 예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