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제1부 8강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신 예수님
말씀/ 누가복음 4:1-15
요절/ 누가복음 4: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복음역사를 시작하시기 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이를 물리치신 사건입니다. 마귀의 시험은 유혹적입니다. 이 유혹은 너무나 달콤하여서 이기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인류 구속 역사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배웁니다. 사람들이 승리의 인생을 살기를 원하지만 패배하는 것은 마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승리의 인생을 살려면 반드시 마귀의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그러면 마귀의 시험이 무엇이며, 예수님께서 이를 어떻게 물리치셨습니까?
I.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1-4)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40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세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시험 받으실 때의 영적 상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기 때문입니다(야 1:14). 또한 죄의 소욕이나 인간적인 생각으로 가득차 있을 때 사단이 그 마음에 역사하여 회의와 불신과 두려움을 심기 때문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은 성령께서 주체가 되시며, 마귀는 성령의 역사에 쓰임받는 도구에 불과함을 말해 줍니다. 마귀 곧 사단은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습니다(욥 1:12). 그러므로 우리는 근본적으로 사단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역사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앞으로 감당할 복음역사를 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때 마귀에세 시험을 받으시셨습니다. 아담은 부족함이 없는 아름다운 에덴 동산에서 시험을 받았으나 예수님은 거칠고 메 마른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시기가 얼마나 힘든 상태에 있었는가를 말해 줍니다. 시험에는 test, trial, temptation 세 종류가 있습니다. test는 실력을 알아보는 시험이고, trial은 여러 가지 환란을 통해서 주시는 연단을 의미합니다(벧전 1:6). temptation은 유혹으로서 사람을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시험은 유혹입니다. 마귀는 유혹적입니다. 그의 유혹은 너무나 달콤하고 설득력이 강하여서 인간의 힘과 의지와 지혜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습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행복을 줄 것처럼 유혹하지만 그 목적은 사람을 타락시켜 결국 자기 종으로 삼고자 함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복음역사를 시작하기 전에 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셔야만 하셨습니까?
첫째로,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아담이 에덴의 행복을 상실하고 타락한 것은 결국 사단의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실패로 그 허리 안에 있던 모든 인류도 함께 타락하여 사단의 종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사단이 심어주는 두려움과 불안과 사망 권세에 시달리다가 결국에는 죽게 되는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입니다. 예수님은 둘째 아담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인류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셔야만 하셨습니다. 아담 한 사람이 사단의 유혹에 짐으로 모든 인류가 패배한 것과 같이, 예수님 한 분이 사단이 유혹을 이김으로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승리하고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고전 15:22; 롬 5:17) 이로써 예수님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없이 하시고 인간들을 사망 권세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히 2:14,15).
둘째로, 시험받는 연약한 인간을 이해하고 돕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우리는 지저분한 생활을 청산하고 의롭고 순결하게 살고자 굳게 결심하지만 사흘도 못가서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이는 육신을 입고 있어 근본적으로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는 의지가 박약한 자신을 학대하고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와 꼭같이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인간의 연약함을 잘 이해하시고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습니다(히 2:18, 4:15). 그러므로 우리는 연약하여 넘어질 때마다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 4:16).
그러면 예수님은 마귀에게 어떤 시험을 받으셨습니까? 마귀는 먼저 예수님의 배고픔을 이용하여 먹는 문제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 기도를 하시느라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몹시 주리고 지치셨습니다. 이는 인간의 의지로 견딜 수 있는 극한 상태입니다. 세상에는 예수님과 같이 40일 동안 금식하다가 죽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통 하루만 굶어도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모든 것이 먹을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속담에도 사흘 굶어 담 넘어가지 않을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분은 사흘동안 굶고 난 후 전봇대를 보니 떡볶기와 같이 보였다고 합니다. 유대 광야에는 돌이 많기 때문에 예수님의 눈에는 돌이 모두 맛있는 떡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바로 이때 마귀가 친구처럼 찾아와 속삭였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귀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가정법을 사용함으로써 예수님을 충동시켜 말려들도록 유도하였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그런데 아들이 배고프다니 말이 되니?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능력으로 먼저 먹는 문제를 해결해야 되지 않겠니?” 하는 것입니다.
이 시험은 빵 문제에 대한 시험입니다. 빵 문제는 육신을 가진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배고플 때처럼 서럽고 처량한 일은 없습니다. 사람이 철학을 논하고 예술을 추구하고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것도 배고픔이 해결 되었을 때 할 수 있습니다. 배가 고프면 사람이 비루해지고 추해집니다. 큰 뜻을 품고 사명인으로 살고자 하다가도 빵 문제가 걸리게 되면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원치않게 소시민적 생활인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귀는 빵 문제로 수많은 사람들을 전락시켜 그의 종으로 삼아 버렸습니다. 빵 문제는 안정된 생활에 관한 문제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먹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지 않는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안정된 생활이 아닌가?”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혼자 있을 경우는 괜찮은데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게 되면 물질 문제는 그 어떤 것보다도 절실한 문제가 됩니다. 젊은이나 늙은이나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질 문제에 얽매여 신음합니다. 사람들은 20세기를 불안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불안은 주로 먹고 사는 빵 문제에 기인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공부하고, 먹고 살기 위해 직장을 다닙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경제라는 고상한 이름 아래 이를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육신의 배고픔에 굴복당하여 돌로 떡덩이를 만들었다면 순간의 배고픔을 면할 수 있지만 물질 문제에 얽매여 신음하고 인간을 구원할 수 없게 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마귀의 말을 순종했으므로 마귀의 종이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은 이 시험을 어떻게 물리치셨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신명기 8:3절을 인용한 말씀으로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인간은 육신과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이는 성서적 인간관입니다. 인간은 육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육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에게 육의 양식이 필요한 것을 아시고 주기도문에서 날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육의 양식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짐승은 배가 부르면 만족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짐승과 달리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육의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이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영혼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혼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영적인 만족을 얻고자 끊임없이 영의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인간의 고귀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칼 막스는 인간이 영혼의 소유자임을 부인하고 육의 것만으로 추구하는 경제적인 동물로 보았습니다. 이로 인해 인간을 동물의 차원으로 전락시키고 인간의 존엄성을 땅에 떨어뜨렸습니다. 인간은 하루 밥 세 끼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고귀한 영적 존재입니다.
둘째로,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신명기 8:3절은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유혹을 소유한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빵이 필요하듯이, 영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고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에 참 만족과 기쁨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을 살찌웁니다.
그러면 육과 영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6;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네가 한 번 굶어봐라. 배가 고프면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극한 굶주림 가운데서도 육보다 영을 더 중히 여기심으로 영적 가치관을 확립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먹고 사는 절박한 현실문제가 생기면 말씀 공부를 뒤로 미룹니다. 그리고 현실이 어려우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 때 비로소 인간다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II. 다만 그를 섬기라 (5-8)
마귀는 첫 라운드에게 예수님께 여지없이 패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전열을 가다듬고 새롭게 공격을 했습니다. 제 2라운드 공이 울리자 마귀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올라 갔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여주며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이 시험은 권세와 명예에 대한 시험입니다. 세상 권세와 그 영광은 참으로 매력적입니다. 세상 권세에는 힘이 있습니다. 권세를 얻게 되면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섬김받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 권세에 두렵고 떨림으로 복종합니다. 다니엘 5:18,1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권력에의 욕망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권력을 얻고자 목숨을 내놓고 싸웁니다. 권력이 허무한 것을 알면서도 허무해도 좋으니 얻고자 합니다. 국회의원이 되고자 많은 돈을 뿌리고 몸이 부서지도록 선거유세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마귀에게 절만 하면 얻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유혹적입니까?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무서운 마귀의 계략이 숨어 있습니다.
첫째는, 경배의 대상 문제입니다. 마귀는 세상 권세와 그 영광이 자기에게 속한 것이므로 그가 원하는 자에게 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마귀를 ‘이 세상의 임금’,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어둠의 세상 주관자’라고 말합니다(요 12:31; 엡 2:2, 6:12). 이를 볼 때 이 세상은 마귀에게 속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마귀가 자신을 주로 섬기는 모든 악한 자들과 악한 영들에 대해서만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치권아래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결코 세상 권세와 영광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는 자신이 마치 세상 권세와 영광을 줄 수 있는 양 위장하고 자신에게 경배하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거짓 약속을 했습니다. 결국 마귀가 노리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기 보다 마귀를 경배하고 섬기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 권세와 명예와 부를 얻기만 하면 행복하리라 생각하고 마귀에게 절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언제나 비참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경배하는 하는 문제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경배하느냐 사단을 경배하느냐 하는 두 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쉬운 방법으로 얻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장차 만유를 통치할 권세와 영광을 얻어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는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 구속 사업을 완성하신 후에 얻으실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영광, 이것이 예수님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든 자를 고치고 제자들을 키워야 하는 힘든 사명인의 삶을 사셔야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멸시와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저주스럽게 죽어야 하셨습니다. 이는 생각만 해도 끔찍스러운 일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50). 예수님도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에게 마귀는 힘들게 십자가를 지지 말고 쉽게 절만 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쉽게 일을 이루도록 하는 것처럼 큰 유혹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도 가장 유혹이 되는 것은 반드시 이렇게 힘들게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잇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서 십자가를 빼어 버린다면 생명력을 상실한 죽은 신앙이 되어 버립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결코 부활의 영광이 이를 수 없습니다. 십자가 안에 생명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험을 어떻게 물리치셨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예수님은 단호한 자세로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심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주’란 창조주요 절대 주권자란 뜻입니다. ‘너의 하나님’이란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속하시고 그의 소유로 삼으신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죄 가운데 구속하신 하나님만이 인생들로부터 경배와 섬김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계 4:10,11).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고자 결심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희생과 고난과 멸시와 핍박과 배척이 따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길만이 생명의 길임을 확신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라고 승리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기조가 결심하면 기쁨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부활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지 않고자 요리 조리 피하게 되면 십자가 그 사람을 따라 다니게 되어 결국 더 큰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우리가 능력있는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면 십자가를 사랑하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III.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9-15)
마귀는 예수님이 두 번이나 말씀을 인용하여 대적하는 것을 보고 세 번째는 작전을 달리해서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웠습니다. 성전은 해발 750 m인 모리아 산 위에 세워졌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기드론 시내 골짜기의 길이는 약 450 feet(약 135m)로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현기증을 느꼈다고 합니다. 마귀는 이런 높은 곳에 데리고 가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즉시 시편 91:11,12절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손으로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고 사뿐히 내릴 수 있도록 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슈퍼맨이 되고 표적을 좋아하는 유대인들로부터 메시야로서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시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했기 때문에 그럴듯하게 보여 영적으로 분별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하는 일이나 아무런 보장도 없이 충동적으로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일을 용서치 않으시고 정죄하시며 엄히 징계하십니다. 마귀의 이 시험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의심해 보도록 함으로써 하나님과 관계성을 파괴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명기 6:16절 말씀으로 이 시험을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 “말씀하시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결코 시험받을 대상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오 천지의 주재이시며 우리는 그의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신뢰하고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섬길 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조금도 의심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셨습니다. 이로써 마귀의 궤계를 파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마귀는 완전 K.O. 패를 당하고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라 얼마동안 떠났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예수님은 마귀가 시험할 때마다 대화하거나 타협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최종의 시금석이요, 이성에 있어서 최종의 판단 기준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과 의지와 경험과 지혜로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습니다(엡 6:17).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은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하여 갈릴리로 돌아오셨습니다.
유혹이 많은 봄학기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마귀의 시험을 물리침으로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