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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5:12-26

by Mark Yang   04/22/2022  

Message


누가복음 제 11 강

          사죄의 권세자 예수님

말씀/ 누가복음 5:12-26
요절/ 누가복음 5: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
                    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
                    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본문에는 문둥병자와 중풍병자가 나옵니다. 문둥병자는 온 몸에 문둥병이 들려 추하고 더러운 인생을 살고 있었으며, 중풍병자는 의존적이고 무기력한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고, 중풍병자를 일으키사 자립적이고 생명력이 충만한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죄로 말미암아 문둥병자와 같이 되고 중풍병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죄 사함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사죄의 권세자가 되십니다. 이시간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 사죄의 은혜를 덧입고 능력있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신 예수님(12-16)

  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나아왔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단순히 문둥병자라고 하였는데 의사인 저자 누가는 온 몸에 문둥병이 들렸다고 하였습니다. 수많은 병중에서 문둥병처럼 사람을 추하고 더럽게 하는 병은 없습니다. 문둥병은 만성질환으로 조직과 신경을 파괴시켜 살을 썩게 하는 무서운 병입니다. 몸의 말초부에 결절이 생기고 그 결절이 터지면 궤양이 고름이 되어 흐르게 됩니다. 나균은 피부 뿐만 아니라 연골 조직도 부식시키기 때문에 눈썹이 다 빠지고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코가 문들어 집니다. 심하면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 몸둥이만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또 나균은 몸의 어느 부위나 침범하는데 특히 눈을 상하게 하여 눈을 멀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신경을 파괴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고통스럽다가 곧 무감각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로 찔러도 아픈 줄 모르고, 찬 것 더운 것을 분간하지 못합니다. 또 잠복 기간이 길기 때문에 조기에 발견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문둥병균은 습하고 어둡고 더운데서 잘 자랍니다. 그래서 팔레스틴 지방에 문둥병자가 많았습니다. 우리나라도 따뜻한 남쪽 지방에 문둥병자가 많았습니다. 특히 경상도에는 문둥병자들이 많아서 경상도 문둥이라고 하였습니다.

  문둥병은 상처난 부위를 통해 접촉으로 생기는 병이기 때문에 문둥병자는 격리 시킵니다. 율법에 의하면 문둥병은 부정한 병입니다. 레위기 13:45,46절에 보면 문둥병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윗 입술을 가리우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병 있는 날 동안은 부정하기 때문에 진 밖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문둥병에 걸리면 사랑하는 가족과도 생이별을 해야 하고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박탈 당하고 인간 폐업을 해야 했습니다. 예로부터 문둥병은 천형병이라 하여 하나님께 저주받은 병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때문에 문둥병자는 죄의식에 시달리며 저주스러운 인생은 살아야 했습니다. 문둥병자의 생활은 마치 무기징역을 받은 죄수생활과 같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문둥병자는 온 몸에 문둥병이 들려 그 상태가 심했습니다. 그의 온 몸은 궤양 투성이고 거기에서 고름이 샘물과 같이 흘러 나왔습니다. 그리고 살이 썩는 냄새가 송장 썩는 냄새와 같이 진동했습니다. 눈썹은 다 빠지고 코가 문들어지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나가 우주 괴물과 같이 흉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육신적 고통보다도 더 힘든 것은 정신적 고통이었습니다. 저는 문둥이의 처지를 이해하기 위해 시인 한하운의 슬픈 반생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하운은 유능한 청년이었으나 문둥병으로 인해 한없이 슬프고 고독하고 절망적이고 한맺힌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의 시 중에서 소록도로 가는  전라도 길 은 절망에 찬 그의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토 길, 숨막히는 더위 속에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길, 전라도 길  문둥병자는 문둥병과 싸우고 고독과 싸우고 절망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몇번이나 자살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삶에 대한 강한 애착심 때문에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모진 목숨 죽지 못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 어떤 고질병도 고쳐 주시고 몹쓸 죄인도 용납해 주신다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들리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은 그에게 삶의 희망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임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께로 나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무리들에 의해 둘러 싸여있기 때문에 무리들로부터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또 추하고 더러운 몸을 내 보이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깊이 형성된 자의식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 나아가면 나같이 추하고 더러운 자도 받아 주시고 깨끗케 해주실까 하는 의심과 불신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나아온 것은 그 자체가 큰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다만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 왔습니다. 그는 빈 손 들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왔습니다. 그는 사람들이나 주위 환경이나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나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오자 마자 머리를 땅에 대고 무릎을 꿇어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는 예수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얼마든지 그를 깨끗케 하실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는 일방적으로 간구하지 않고 다만 주님의 은혜와 긍휼만을 구했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나아와 간구했을 때 예수님은 그를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예수님은 먼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습니다. 이는 따뜻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때까지 아무도 그에게 손을 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니 손을 대기는 커녕 피하고 돌을 던졌습니다. 사람들은 나환자 촌을 심방하여 용기를 내어 악수를 하고 난 후에는 비누로 씻고 악령에 시달립니다. 문둥병자에게 손을 댄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이는 율법으로 금지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에게 다가가 손을 대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율법을 초월한 사랑이었습니다. 막2:41절에 보면 예수님은 그를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긍휼과 자비로 충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뼈에 사무친 그의 고독한 내면을 아셨습니다. 그가 사랑에 굶주려 있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육신의 병 뿐만 아니라 내면의 병까지도 치료하시고자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습니다. 이는 사랑의 손길이요 자비의 손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대실 뿐만 아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내가 원하노니 (I am willing). 이 말씀은 그를 향하신 예수님의 절실한 소원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그가 깨끗케 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자식들이 병에 걸려 고통할 때 부모들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낫기를 소원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그가 문둥병으로부터 고침을 받고 정결한 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추하고 더럽게 된 우리의 내면을 깨끗케 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죄로 말미암아 문들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순결하고 진실되고 고귀한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되기를 소원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의 말씀에 그의 살은 신기하게도 갓 태어난 어린 아이의 살과 같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는 이제 새로 태어난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용히 복음 역사를 섬기시기 위해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다만 그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여 예물을 드려 건강 진단서를 받도록 하셨습니다.

  성경은 문둥병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레13,14장). 특히 죄로 인해 저주를 받을 때 문둥병이 발하였습니다(민12:10). 문둥병은 그 증상이 죄와 너무나 흡사합니다. 문둥병이 사람을 추하고 더럽게 만들듯이, 죄도 사람을 추하고 더럽게 만듭니다.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짐승과 같이 추하게 되고 더러운 냄새가 납니다. 또 문둥병이 살과 연골 조직을 썩게 만들어 신체 조직을 파괴시키듯이, 죄도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부패시키고 인격을 파괴시켜 인생을 못쓰게 만듭니다. 문둥병이 사람을 격리시키듯이, 죄도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사이를 분리시킵니다. 문둥병이 전염하듯이 죄도 강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문둥병이 처음에는 고통을 느끼다가 조금 지나면 무감각하게 되는 것과 같이, 죄도 처음에는 죄의식을 느끼며 고통하다가 나중에는 무감각해져서 전혀 죄의식조차 느끼지 않게 됩니다. 특히 죄가 하나의 문화를 형성할 때는 오히려 죄짓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됩니다. 예를 들어 미국은 1961년 베트남 전쟁이후 성 자유화 물결이 일게 되고 이것이 나중에는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아무 부담없이 죄를 즐기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죄를 짓지 않고 순결하게 사는 사람은 병신 취급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애꾸눈 사회에서 두 눈 가진 사람이 병신 취급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결과 미국은 내부가 점점 썩어 들어가 이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도 잘 살게 되자 향락 문화가 형성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죄의식조차 느끼지 않고 용감하게 죄를 짓고 아무 문제가 없는 듯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실상 그 내면은 점점 갚이 병들어 파멸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인간은 아름답고 순결하고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추한 문둥병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이 병은 인간의 힘으로는 치료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추하고 더러운 죄를 씻음받고 깨끗하게 될 수 있습니까?

  구약에서는 인간이 죄를 범하고 깨끗함을 받으려면 양이나 염소와 같은 정결한 짐승의 피를 흘려 대속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는 그 효력이 불완전하고 일시적이었습니다. 이는 임시변통에 불과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근본적으로 없이 하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순결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고 외쳤습니다(요1:29).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피는 그 효과가 완전하고 영원합니다(히9:12). 예수님의 피는 어떤 몹쓸 죄인도 변하여 새 사람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벗어나 새 삶을 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벧전1:18,19). 예수님의 피는 죄악된 습관을 끊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겸손하게 시인하고 믿음으로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갈 때, 주님께서는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시고 십자가의 보배 피로 더러운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십니다(요한1서1:7-9). 나의 죄가 너무 추하다고 해서 내가 어느 정도 씻고 나아가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공로가 전혀 필요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피 공로만 의지하고 주님께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보배 피는 샘물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범죄하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마다 늘 새롭게 씻어 주시고 깨끗케 해주십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소문이 더욱 퍼지자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병도 나음을 얻고자 나아왔습니다. 이때 일에 말려들어 방향을 잃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용히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서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방향을 찾고 위로부터 영력을 덧입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신 후 다음 사건에서는 병 고치는 것보다 죄사함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II .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 주신 예수님(17-26)

  17절을 보십시오. 하루는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쟁쟁한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온 것은 말씀의 은혜를 받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활동을 조사하여 꼬투리를 잡고자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얼마나 말씀을 잘 가르치는가 보기 위해 품을 잡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도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는 말씀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또한 병고치는 능력도 함께 하였습니다.

  예수님께는 한창 말씀을 가르치고 계실 때 분위기를 깨뜨리는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님 앞에 들여 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마가복음2:2절에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애써 중풍병자를 메고 왔는데 장애물에 부딪힌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낙심하여 포기하거나 아니면 오늘만 날인가 하며 연기합니다. 힘든 상황에 굴복당하여 뒤로 물러가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그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한계상황에 부딪쳤을 때 낙심하여 뒤로 물러가거나 포기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찌하든지 길을 찾고자 했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대로 그들이 뜻을 굽히지 않고 도전하고자 했을 때 창조적인 지혜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계신 곳을 정조준하여 기와를 벗기고 큰 구멍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병자를 침상 채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그들의 공수낙하 작전은 대 성공이었습니다. 그들은 spirit이 충만한 영적 그린베레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복음 역사를 섬기려면 길을 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양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려고 하면 반드시 장애물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장애물로 인해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장애물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장애물에 도전하여 극복해 나갈 때 믿음의 능력을 체험하고 믿음의 용사로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새 역사 창조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역사 창조는 결코 순리적인 방법으로 되지않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지난 3월22일에 새 센타 건물의 콘크리트를 치는데 새벽 7시부터 다음날 새벽 3시까지 믿음으로 완성하였습니다. 이를 하루만에 완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믿음으로 불가능에 도전하여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주위 사람들과 함께 일하던 일군들은 모두 놀라고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역사에 동참한 모든 분들이 산 믿음을 배웠습니다. 최초로 북극을 탐험한 Robert E.Peary 는 다섯번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는 동상으로 인해 발가락이 8개나 짤리고 병상에 눕게 되었습니다. 그는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때 벽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길을 찾고야 말겠다. 그렇지 않으면 길을 만들겠다.  그는 결국 믿음으로 도전하여 여섯번만에 성공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계 복음화를 위해 여러번 로마에 가고자 했으나 그 때마다 길이 막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치 않고 계속해서 쉬지않고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쇠고랑을 차고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가서 복음으로 로마를 정복했습니다. 사람들은 복음 역사를 이루고자 할 때 환경이 어렵고 양들이 소원이 없기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환경이나 양들 문제가 아니라 목자의 믿음과 심정 문제입니다. 목자에게 믿음과 심정이 있을 때 불가능이 없습니다.

  그들이 지붕을 뚫고 병자를 침상채로 달아 내렸을 때 예수님은 그들의 행동에서 무엇을 보셨습니까? 20a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들의 외적인 행동을 보시고 책망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중심의 믿음을 보시고 크게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를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저희의 믿음에는 중풍병자의 믿음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근본문제를 육신의 병보다도 영혼의 죄 문제로 보셨습니다. 겉으로 볼 때 그의 문제는 중풍병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중풍병만 낫게 되면 모든 인생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한 인생을 살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내면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육신의 중풍병이 낫더라도 그는 여전히 중풍병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인간은 자립적이고 개척적이고 생명력이 넘치는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창1:28). 예를 들어 인간의 뇌는 40개국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말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무능해지고 무기력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자립적이고 생명력이 넘치는 능력있는 인생을 살기 원하지만 원치않게 중풍병자와 같이 의존적이고 무기력한 삶을 살아갑니다. 부모를 원망하고 환경과 시대를 탓하며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이는 영혼의 근본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면의 죄 문제가 해결되면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감사하게 되고 자립적이고 생명력이 충만한 능력있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송명희 시인은 나면서부터 뇌성마비로 팔다리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남의 도움 없이는 화장실도 혼자 갈 수 없었습니다. 글도 제대로 쓸 수 없어 기묘한 자세로 한 자 한 자 쓸 때마다 큰 고통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는 이로 인해 인생을 저주하고 자기를 낳아 준 어머니를 원망하며 저주스러운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 죄 사함을 받았을 때 그의 삶은 180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육신의 고통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배우고 감사와 찬송과 감격에 넘치는 시를 지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사람을 못쓰게 만드는 것은 죄 문제입니다. 이 죄 문제만 해결된다면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능력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죄를 짓고 나서 고통스럽기 때문에 고통을 잊기 위해 또 죄를 짓습니다. 죄의식을 경감시키기 위해 술을 마시고 마약을 피우고 빠징코를 합니다. 그러면 죄는 더 가중되어 그 영혼을 짓누르고 파멸의 길로 치닫게 합니다. 죄는 반드시 댓가를 요구하는데 그 결국은 사망입니다. 인간들은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고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죄는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선행이나 고행이나 율법을 지키는 엄격한 종교적인 생활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 죄 문제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용서 받을 때만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태복음 18:23-34절에 나타난 천국 비유는 인간상호간의 죄는 백 데나리온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죄는 일만 달란트임을 가르쳐 줍니다. 1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므로 100데나리온은 100일간의 품삯으로 오늘날로 하면 약 300만원에 해당됩니다. 이는 노력하면 능히 갚을 수 있는 금액입니다. 그러나 금 1달란트는 노동자 한 사람이 약 250년을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이 빚으로 인해 무서운 고통에 시달리며 살다가 마침내는 이 빚 때문에 인생을 파산하고 심판을 받아 멸망해야 했습니다. 인간이 이 빚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탕감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사 구원하시기 위해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심으로 빚을 탕감하여 주셨습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놀라운 사죄의 선포입니다. 이는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에게 무죄를 선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사죄의 은혜를 받을 때 나를 강하게 얽어매고 있던 사슬이 뚝 끊어지고 내면에 무한한 자유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희열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죄의 은혜를 베푸시는 사죄의 권세자가 되십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하며 신성모독이라고 분노했습니다. 그들의 견해는 맞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과 그 능력의 역사를 통해 이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교만과 시기심이 그들의 영적 눈을 멀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로 알게 하기 위해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러자 그 사람이 곧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사죄의 은혜가 그를 자립적이고 생명력이 충만한 인생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이같이 사죄의 은혜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킵니다. 이를 본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26). 죄 사함 받고 인생이 변화되는 역사는 기이한 역사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기이한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죄의 권세자 예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