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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5:27-39

by Mark Yang   04/22/2022  

Message


누가복음 제1부 12 강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말씀/ 누가복음 5:27-39
요절/ 누가복음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고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 주심으로 새 인생을 살게 하신 예수님의 크신 구속의 사랑을 배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중풍병자와 대조적인 세리 레위가 나옵니다. 레위는 겉은 멀쩡하지만 그 내면이 죄로 인해 깊이 병들어 시름 시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제자로 부르사 그의 병든 내면을 치료해 주심으로 성 마태가 되게 하셨습니다. 병든 죄인들은 향한 우리 주님의 구속의 사랑은 측량할 수 없이 깊고 넓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구속의 사랑이 한 분 한 분의 심령에 충만히 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 세리 레위를 부르신 예수님(27,28)

  2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후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자 얼굴을 돌리며  더러운 놈  하고 침을 뱉으며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주목하시고 가까이 다가가  나를 좇으라 고 하심으로 초청하셨습니다. 그러면 레위는 어떤 사람이며,  나를 좇으라 는 말씀이 레위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레위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상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세리들은 용돈을 많이 만들기 위해 공갈 협박을 하고 거짓말을 잘합니다. 그래서 세리생활을 하게 되면 인간성을 상실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 당시의 세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당시 세리는 창기와 함께 공인된 죄인이었습니다. 로마는 식민지 백성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시켰는데 세리는 정한 세 외에 더 징수하여 백성들의 피를 빨았습니다. 이로인해 사람들은 세리를 매국노, 이방인과 같이 멸시하고 소외시켰습니다. 세리는 악명높은 죄인이었습니다. 레위는 이런 세리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쩌다가 악명높은 세리가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는 고상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하여 보람있고 가치있는 일을 하는 위대한 사명인의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실과 타협하여 소시민적인 인생을 살아갑니다. 현실은 진리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사명인의 삶을 용납치 아니합니다. 현실은 권세와 타이틀과 돈을 필요로 합니다. 세상은 권력과 돈만 있으면 안되는 일도 됩니다. 권력과 돈이 주는 매력은 참으로 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권력과 물질을 얻고자 몸부림치며 투쟁합니다. 레위가 처한 현실은 로마 식민치하로서 백성들은 먹고 사는 생존 문제로 위협을 받았습니다. 레위는 현실을 직시하고 어려운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돈이 필요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돈을 벌고자 굳게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돈을 가장 잘 벌 수 있는 세리직을 택했습니다. 그가 이런 결심을 한 데에는 눈물겨운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르는 전세값을 감당치 못해 부모님이 자살을 기도했는지도 모릅니다. 빚 때문에 돈 있는 자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고 부자에 대한 복수심이 그를 세리로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는 악명높은 세리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에게 정복 당했지만 선민의 자부심 때문에 죽음도 불사하고 유대인으로서의 중심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레위는 돈을 벌기 위해 선민의 자부심과 민족과 양심까지도 다 버렸습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남을 짓밟고 상처를 주는 무정하고 무자비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공갈 협박을 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착같이 돈을 긁어 모았습니다. 또 모은 돈으로 부동산 투기를 하고 또 재벌과 결탁하여 외제를 수입하여 비싸게 팔므로서 많은 수익을 남겼습니다. 그는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가 돈을 많이 벌게 되자 사람들은 그에게 굽신거렸고 그는 사시사철 꽃이 피는 넓은 정원과 테니스코트와 수영장이 달린 호화 주택을 샀습니다. 모든 가구도 이태리제 가구로 장식했습니다. 자가용도 최고급 벤츠로 로마에서 직수입하여 구입했습니다. 주말마다 골프도 쳤습니다. 그에게는 이제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생활은 그에게 잠시 기쁨과 만족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실로 잠시 뿐이었습니다. 그의 생활은 마땅히 행복해야 했지만 행복은 커녕 오히려 무서운 공허와 허무가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돈만 있으면 행복의 여신이 그에게 미소를 보내리라 생각했으나 이는 큰 착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고독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마음의 고통을 함께 나눌 진실된 친구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친구라고는 서로 속고 속이는 세리들 밖에 없었습니다. 고독은 그를 미치게 하였습니다. 그는 절망이라는 죽음의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로소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이 그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스스로의 힘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영혼은 절망의 심연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소망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내면의 고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좇으라  이 말씀이 세리 레위에게 주는 뜻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의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바로 잡아 주는 말씀입니다.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어떻게 잡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바로 잡은 자와 바로 잡지 못한 자는 처음에는 별 차이가 없지만 세월이 갈수록 점점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게 됩니다. 인간은 불멸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때 심령에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만을 위해 이기적인 삶을 살 때 행복할 것 같지만 불행합니다. 양을 먹이는 목자 생활에는 시간과 물질과 꿈을 포기해야 하는 많은 희생이 요구됩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기쁨으로 목자 생활을 하는 것은 여기에는 생명을 살리는 참 기쁨과 보람과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위는 이 행복의 비결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아야 행복할 줄로 생각하고 남을 해치면서까지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많은 물질을 소유할 수 있었지만 인간성을 상실하고 존재의미와 가치를 상실했습니다. 결국 죄악의 열매만 맺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삶은 그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뜨렸으며 그의 영혼을 파멸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그의 인생은 빗나간 인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나를 좇으라  하심으로 그의 인생의 목적을 바로 잡아주신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살던 데서 이제는 예수님을 배우고 본받으며 예수님을 위해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좇게 되었을 때 그의 영혼은 소생하기 시작했으며,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나를 좇으라 (         )는 말씀은 현재 미완료형으로서 계속해서 좇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제자에로의 초청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사건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공인된 죄인 출신인 세리 레위가 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영향력이 좋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비난거리가 될 뿐만 아니라 제자들 사이에서도 큰 문제가 됩니다. 플라톤은 제자를 뽑을 때 강한 기억력과 불타는 향학심, 높은 지조, 훌륭한 품격을 가진 자만을 뽑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카데미아의 입구에  기하학을 모르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 고 써 붙였다고 합니다. 위대한 스승일수록 가능성 있는 훌륭한 제자를 두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멸시하는 몹쓸 죄인인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자를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까? 이는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를 제자로 삼아 장기적으로 치료하지 않는다면 살아날 수 없기 때문에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양성은 사업이 아니라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데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길 뿐만 아니라 그에게 놀라운 소망을 두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소망이 없다고 정죄하고 짤라 버렸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놀라운 희망을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장차 많은 병든 영혼을 품고 섬기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될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허물과 약점을 담당해 주시고자 결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긍휼과 소망이 죄로 인해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던 한 병든 영혼을 살렸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사랑과 긍휼이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나를 좇으라  이는 세리 레위에게 임한 구원의 음성이었습니다. 이 부르심으로 인해 레위의 인생은 180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 부르심은 레위에게 임한 큰 은총이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레위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레위는 예수님을 좇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는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세상의 잔재미도 버리고 죄악된 습관도 버렸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을 좇기 위해 자기를 중심한 옛 생활을 청산했습니다. 또 그는 생각만 하지 않고 일어나 좇았습니다. 이는 탕자가 자신의 죄악된 생활을 뉘우치고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온 것과 같습니다(눅15:20a). 이와 같이 회개에는 반드시 버리는 것과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진실되게 회개했습니다. 그는  나를 좇으라 는 초청에서 몹쓸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놀라운 구속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또한 예수님 안에서 참된 삶의 의미와 인생의 목적과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이를 발견했을 때 조금도 주저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곧 일어나 좇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잃었지만 가장 고귀한 예수님을 얻게 되었습니다. 과거 레위는 돈 때문에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민족도 잃고 친구도 잃고 인간성도 잃고 양심도 잃고 하나님의 형상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좇게 되었을 때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찾았습니다. 참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고 고귀한 사명도 찾고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도 찾았습니다. 과거 그는 죄 때문에 잃어버린 자였으나,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찾은 자가 되었습니다.

II. 레위와 함께 식사하신 예수님(29-32)

  레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을 때 그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에게 전에 맛보지 못한 생명과 기쁨이 생겼습니다. 마음에 강같은 평화가 임했습니다. 새로운 삶의 희열과 희망이 심령에서부터 용솟음쳤습니다. 과거에는 세상이 온통 잿빛으로만 보였으나 이제는 밝고 환하게 보였습니다. 모든 것이 새롭고 사랑스럽게 보였습니다. 삶의 의욕이 생기고 밥 맛이 나고 힘이 났습니다. 이와같이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예수님을 좇게 되면 내면에 참 기쁨과 생명과 희망이 생기게 됩니다. 레위는 샘솟는 기쁨을 억제할 수 없어 예수님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양과 소를 잡아 바베큐를 만들었습니다. 탕수육, 팔보채, 양장피, 궁중전골과 같은 최고급 음식들을 풍성하게 준비하였습니다. 그는 잔치를 준비하느라 많은 물질을 썼지만 예수님을 위해서 썼기 때문에 조금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과거 자기를 위해 물질을 썼을 때는 기쁨이 없었으나 예수님을 위하여 물질을 쓸 때 심령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생겼습니다. 그는 이 잔치에 같은 세리 족속들을 많이 초대했습니다. 레위의 집에서 오랫만에 웃음 꽃이 만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며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오랫만에 영양보충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안드레는 장막팀들을 위해 비닐 봉지에 남은 음식을 담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한창 자신들의 Life Testimony를 이야기하며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있을 때 냄새를 맡고 찾아온 불청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세리들과 함께 음식 먹는 것을 보고 날카롭게 비난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의 수호자들로서 세속에 물들지 않고 율법을 좇아 살고자 투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반면 세리들은 율법을 어기고 육신의 정욕과 욕심을 좇아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들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은 구제불능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율법의 눈으로 보고 이에 미달되면 가차없이 짤라 버렸습니다. 그들은 자기 의가 강하고 율법적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죄인들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이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과 소망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품고 그들의 허물과 죄악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이 말씀에는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보실 때 의사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의사는 사람이 병들었다고 해서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또 몹쓸 자라고 소망을 끊지 않습니다. 의사는 병과 사람을 분리해서 보고 병만 치료해 주면 건강하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습니다. 의사의 목적은 돈을 많이 버는데 있지 않고 병을 치료해 줌으로써 사람을 살리는데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영적 의사로서 죄인을 치료하여 살리러 오신 것입니다.

   내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이 말씀에서 회개시킨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회개시킨다고 하면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회개시킨다는 것은 병든 마음을 사랑으로 치료해 주는 것입니다. 레위는 이기심으로 그 내면이 깊이 병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남을 생각할 줄 몰랐고 남을 위해 희생할 줄 몰랐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가 겸손히 낮아져서 남을 섬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 그는 고독으로 병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놓고 그 세계에 빠져 지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의 병든 내면을 아시고 그와 임마누엘하여 주셨습니다. 그와 함께 음식을 잡수시고 그를 품고 섬겨 주셨습니다. 그의 병이 너무 깊어 3년동안 그와 공동생활하시며 병든 내면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의 옛 본성이 살아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때도 그를 참아 주시고 진리의 말씀과 거룩한 사랑으로 섬겨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마침내 레위는 살아났습니다. 그의 병든 내면이 깨끗이 치료되었습니다. 그는 악명높은 세리 레위에서 산상복음을 쓴 성 마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부패의 근원이었던 그가 이제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을 보실 때 병든 죄인으로 보셨습니다. 세상에는 레위와 같이 겉은 멀쩡하지만 내면이 병이 들어 병든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욕으로 깊이 병들어 늘 정욕적인 생각에 시달리고 정욕적인 행위로 자신을 더럽힙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므로 거룩하고 순결하고 고귀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정욕으로 인해 짐승과 같이 추하고 더러운 인생을 살아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운명주의와 패배주의로 깊이 병들어 있습니다. 도덕적이고 개척적이고 패배를 모르는 불사조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할 청년임에도 불구하고 매사에 삶의 의욕을 잃고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믿지 못하는 불신으로 깊이 병들어 있습니다. 이때문에 항상 사람을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관계성 맺기를 꺼려합니다. 또 어떤 분은 자학하는데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많은 시간과 능력을 자학하는데 다 써버립니다. 특히 인생 반생기를 들어보면 술먹고 가정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으로 내면이 깊이 병든 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면이 깊이 병들었지만 자신이 병들었다는 사실을 인식조차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병든 자신을 인식하려면 거울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인생들의 문제는 죄로 인해 내면이 병든 것이 문제입니다. 내면이 병들었기 때문에 영적 의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내면의 병들은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고 정신과 의사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신과 의사도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병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치료할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의 구속의 사랑만이 치료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속의 사랑은 우리의 병든 내면을 치료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인도에 선교사로 가 계시는 William Kim 선교사님은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고 가정을 떠남으로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이로인해 아버지와 가진 자에 대한 증오심으로 눈에는 살기가 돌고 얼굴은 굳어서 쳐다보기가 무서웠습니다. 그가 가죽 잠바를 입고 전경들 앞을 지나가면 전경들이 형사인 줄 알고 깍듯이 인사를 했습니다. 그의 내면은 깊이 병들어 모든 사람들이 그를 부담스러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속의 사랑으로 그의 병든 내면이 치료함을 받았을 때 그는 누구보다도 온유하고 사랑이 풍성한 목자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인자한 아버지 같이 생각하고 그의 품에 안기기를 원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병들어 쓸모없는 자를 치료하여 쓸모있는 자로 만들어 쓰시는 위대한 영적 의사가 되십니다. 저는 가난한 과부의 외아들로 자라나 내면이 깊이 병들어 운명적이고 연약하여 병든 병아리 같이 아무 쓸모가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이사무엘 선교사님과 여러 주님의 종들을 통하여 저의 병든 내면을 치료해 주심으로 건강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병든 자들을 품고 섬기는 목자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심령에 감사와 찬송이 넘칩니다. 병든 죄인들을 정죄치 않으시고 품고 섬겨 주시는 예수님의 크신 구속의 사랑을 찬송합니다.

III.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33-39)

  33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제 금식 문제로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본래 금식은 개인이나 민족의 죄를 회개하거나 민족적 재앙을 만났을 때, 또 세속에 물들지 않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금식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금식의 참 뜻은 상실하고 종교적 규례로서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하였습니다. 그들은 금식을 잘해야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들은 금식은 커녕 매일 먹고 마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너희들이 무슨 신자냐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혼인집 잔치를 예로 들어 제자들이 금식할 필요가 없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은 신랑과 함께 있을 때 금식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먹고 마시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여기서 신랑은 예수님, 혼인집 손님들은 제자들, 더 나아가 모든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를 볼 때 신앙생활이란 형식과 규례에 얽매인 금욕적인 생활이 아니라 밝고 기쁘고 생명이 넘치는 생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금식은 신랑되신 예수님을 빼앗길 때 해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를 의미합니다. 또한 영적으로는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지 않고 기쁨없이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때를 의미합니다. 이때 우리는 금식기도를 통해 죄를 애통히 회개하며 죄사함의 은혜를 덧입고 예수님을 중심에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새 옷과 낡은 옷,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 비유를 통하여 그들의 근본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새 옷과 낡은 옷,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부대는 근본적으로 서로 합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둘 다 못쓰게 되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됩니다. 여기서 새 옷과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말씀, 곧 복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사람이 변화되는 성령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는 종교의식이나 랍비들의 교훈, 장로들의 유전과 같은 낡은 전통과 관습을 의미합니다. 복음은 새 포도주와 같이 힘이 있고 생명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죄를 사해 주고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병든 죄인을 치료하여 쓸모있는 자가 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낡은 전통과 낡은 가치관을 파괴시키고 새 역사를 창조하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가 되십니다. 우리가 새 포도주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묵은 것이 좋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낡은 전통과 가치관 속에 머물러 있기를 원합니다. 끊임없이 개척하고 정복하는 인생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될 때 자신도 모르게 굳어버려 쓸모없는 낡은 가죽부대가 되고 맙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은 굳어버리는 것입니다. 굳어버릴 때 더 이상 배우지 않고 성장이 멈추어 버리게 됩니다. 흔히 복음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므로 시대에 맞게 변형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이 변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회개하고 자신을 개혁하고 모임을 개혁하고 사회를 개혁함으로 변형되어야 됩니다. 새 부대가 될 때 새 포도주 되신 예수님을 모신 기쁨이 차고 넘치게 됩니다.

  예수님은 병든 죄인을 치료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생명의 구주가 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