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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6:20-36

by Mark Yang   04/22/2022  

Message


누가복음 제 14 강 

       예수님의 제자의 내면성( 1 )

말씀/ 누가복음 6:20-36
요절/ 누가복음 6: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예수님께서 절망적인 시대에 열 두 제자를 택하시고 , 그들에게 영적 지도자로서 큰 소망을 두시고 사도라 칭하셨음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문제가 참다운 인물이 없는 것을 통감하시고 인물을 키우고자 작정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택하신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져야 할 내면성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제자로서 가져야 할 지식이나 기술보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내면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인생관과 가치관 확립, 인격도야와 같은 내면적인 것보다는 물질이나 타이틀, 기술과 같은 외적인 것을 중시하고 이것들을 얻기 위해 온 심혈을 기울입니다. 그 결과 인간문화와 과학문명은 놀랍게 발달하였지만 인간성과 도덕성과 영성은 고갈되어 내면성이 메마른 기형적인 사회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온갖 부정부패와 음란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내면성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의 내면성을 배워서 이 시대를 감당할 수 있는 영적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 복 있는 자(20-26)

  20-26절에는 복 있는 자와 화 있는 자가 대조되어 나옵니다. 여기서 복은 헬라어로 마카리오스(        )인데 즐거움이란 뜻이 있습니다. 이는 거룩하고 신성한 즐거움, 죽음을 초월한 영원한 즐거움으로서 최고의 행복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반면 화는 그 반대로서 가장 불행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의 개념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예를 들어 세상 사람들은 부요한 자가 복이 있고 가난한 자는 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부요한 자는 화가 있다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소유나 외모를 보지만 예수님은 존재나 내면을 보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핍박을 받는 자들은 어리석고 비참한 자들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들은 진정으로 복있는 자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 가난한 자: 2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여기서 가난한 자는 어떤 자를 두고 말하는 것일까요?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일까요? 지적으로 가난한 자일까요? 일반적으로 부요한 자나 지식인들보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나 많이 배우지 못한 자들이 겸손하여서 복음을 잘 영접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가난이나 지적인 가난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하는 가난은 마태복음 5:3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심령이 가난한 자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가난이란 결핍된 상태, 가진 것이 없는 빈 상태를 의미합니다. 가난한 자는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겸손합니다. 또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배우고자 하고 이를 채우기 위해 애써 투쟁합니다. 헝그리 복서들을 보면 돈을 벌기 위해 주린 배를 움켜쥐고 피나는 투쟁을 합니다. 이를 헝그리 스피릿(Hungry spirit)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가난한 자는 영적으로 부족함을 느끼고 이를 채우고자 부단한 투쟁을 합니다. 예를 들어 믿음의 부족함을 느끼는 자는 롬1:17절이나 히11:6절을 요절로 잡고 믿음의 사람이 되고자 애를 씁니다. 또 사랑의 부족함을 느끼는 자는 고전13:4절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말씀을 요절로 잡고 사랑을 배우고자 애를 씁니다.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눅17:21,롬14:17)

둘째, 주린자: 21a 절을 보십시오.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여기서 주린 것은 보통 배고픈 정도가 아니라 오랫동안 먹지 못해 견딜 수 없을 만큼 절박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런 자는 주야로 먹을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면 주린 자는 무엇에 주리는 것입니까? 지식에 주린 자는 자나깨나 책을 붙들고 씨름합니다. 돈에 주린 자는 돈을 벌고자 혈안이 되고, 권세에 주린 자는 권세를 얻는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쾌락에 주린 자는 짐승과 같이 되어 방황하고, 인정에 주린 자는 이상한 짓을 해서라도 인정받고자 몸부림칩니다. 사랑에 주린 자는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사랑받기 위해 어린양을 하고 별별 데모를 다합니다. 또 잠에 주린 자는 틈만 나면 잠을 잡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림들은 아무리 채워도 밑빠진 독에 물붓기와 같아서 진정한 만족이 없습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공허만 느낄 뿐입니다. 그러면 무엇에 주려야 진정으로 행복한 것입니까? 마태복음 5:6절에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의 (義)란 하나님의 의로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에 주렸다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고자 몸부림치며 투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상대적인 세상 가치관을 좇아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의롭고 진실되고 거룩하게 살고자 애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에 주린 자는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자 애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기도에 힘씁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시42:1,2). 또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모하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시119:11).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하므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시119:20).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시119:103).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함으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시119:131). 이렇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말씀에 주릴 때 영혼의 참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어거스틴은 지식과 정욕에 주린 자였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지적 욕구와 육신의 쾌락을 채우고자 방황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채울수록 진정한 만족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품에 안겼을 때 진정한 만족과 평강과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려서 헐떡이는 자는 참으로 복된 자입니다.

셋째, 우는 자: 21b 절을 보십시오.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주림에도 여러 종류가 있듯이 우는 데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슬플 때 울고 헤어질 때 웁니다. 또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서러워서 울기도 합니다. 또는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바라보고 자기 연민에 빠져 울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시골에 있는 불쌍한 부모님을 생각하고 남몰래 웁니다. 자매님들의 경우는 우는 것을 무기로 삼기도 합니다. 네로는 시를 짓기 위해 슬픈 감정을 자아내어 눈물 단지에 눈물을 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눈물은 값싼 눈물들입니다. 눈물은 참으로 고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연민에 빠져 값싼 눈물을 흘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인해 우는 자가 복 있는 자입니까? 참된 눈물은 자신의 죄로 인해 슬퍼하며 진실된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심령에 기쁨과 자유를 상실하게 되고 죄의식과 심판의 두려움에 시달리게 됩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면 그 순간은 죄의 쾌락이 있지만 그 후에는 무서운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목자의 책망을 받고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슬퍼하며 애통히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은 진실된 회개의 눈물을 받으시고 사죄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사죄의 은혜를 덧입을 때 심령에는 구원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다윗은 정욕에 눈이 어두워서 밧세바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충신 우리아를 전쟁 일선에 내보내어 죽게 했습니다. 그는 이 죄를 범한 후 종일 신음하며 그 뼈가 쇠하는 것 같은 고통을 맛보았습니다(시32:3). 그러나 그가 나단 선지의 책망을 받고 자신의 지은 죄로 인해 눈물을 흘리며 애통히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시51:1).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51:17).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의 지은 죄로 인해 슬퍼하는 그에게 사죄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때 그는 심령에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고 그 행복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32:1)

  우는 자는 자신의 죄로 인해 슬퍼할 뿐만 아니라 양들의 죄, 가족의 죄, 캠퍼스의 죄, 민족의 죄로 인해 슬퍼합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우상 숭배의 죄에 빠졌을 때 심히 슬퍼했습니다(출32:31). 예레미야 선지자는 백성이 죄로 인해 파멸해가는 것을 보고 눈물이 시내처럼 흘렀습니다(애3:48). 사도 바울은 동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배척했을 때 슬퍼했습니다(롬9:1,2). 예수님께서도 죄로 인해 멸망 일보 직전에 있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눅19:41). 우리도 양들을 돌보다가 마음이 상하여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또 가족의 불신과 이 민족의 죄로 인해 슬픈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눈물은 참으로 고귀한 눈물입니다. 하나님은 목자의 상한 눈물을 받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나중에는 우리 주님께서 친히 복음 역사를 섬기느라 흘린 모든 눈물을 딲아 주십니다(계21:4). 이때 우리는 진정으로 웃을 수 있습니다.

넷째,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 자: 22절을 보십시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우리가 세상 풍조를 좇아 마음이 원하는대로 살 때는 아무도 우리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진실되게 믿음으로 살고자 하면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우리를 미워하고 멀리하고 욕을 합니다. 미친 놈, 얼빠진 놈, 한심한 놈 등 별 욕을 다합니다. 우리가 이런 핍박을 받는 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께 속했기 때문입니다(요15:19). 우리가 예수님을 믿더라고 롯과 같이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며 요령껏 신앙생활할 때는 핍박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의롭고 진실되게 살고자 하면 반드시 핍박을 받게 됩니다(딤후3:12). 사람들은 예수님을 진실되게 믿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는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핍박을 받을 때 기가 죽고 혹시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닌가? 내가 신앙생활을 너무 유별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회의하고 타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까? 23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우리가 핍박을 받을 때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이는 하늘의 상급이 크기 때문입니다. 핍박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고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핍박을 받게 되면 우리의 믿음이 순수해지고 깊어지고 강해집니다. 또한 우리의 내면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조각되게 됩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핍박을 햇빛에 비유하셨습니다. 햇빛은 식물 성장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이와 같이 핍박은 영적 성장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핍박을 통해서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24-26절에는 어떤 자가 화가 있는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부요한 자는 자기에게 부요하지만 하나님께 인색한 자를 말합니다. 이런 자는 자기 유익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물질과 시간을 쓰지만 주와 복음 역사를 위해서는 인색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한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 부자가 열심히 일을 하여 풍성한 소출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내가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며 행복한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곡간을 헐어 더 크게 짓고 곡식을 쌓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영혼에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이때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눅12:16-21). 이와 같이 자기에게는 부요하지만 하나님께 인색한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마음이 부요하게 되면 교만해져서 영적 소원을 상실하고 결국 구원의 은혜마저 잊고 자행자지하게 됩니다. 배부른 자는 영적 갈급함이 없는 자요, 웃는 자는 상한 마음이 없고 세상을 즐기는 자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선지자는 하나님 편에 서서 백성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사명을 감당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회개하기 싫어서 선지자를 미워하고 핍박합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 아름다운 말만을 합니다. 또 회개의 메세지는 전하지 않고 축복의 메시지, 평화의 메시지만을 전합니다. 이런 자들은 인본주의자들로서 사람들의 말에 예민합니다. 이런 자에게 화가 있게 됩니다. 우리도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얽매여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만 한다면 화가 있게 됩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은 실로 공허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보다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구해야 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애써야 합니다. 그때 진정으로 기쁨이 있고 아름다운 열매가 맺혀집니다.

II . 원수를 사랑하라(27-37)

  예수님은 점점 더 부담스러운 말씀을 하십니다. 27,28 절을 보십시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구약의 율법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의하면 원수는 마땅히 미워하고, 나를 저주하고 모욕하면 나도 같이 저주하고 모욕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는 속담과 같이(삼상24:13), 나도 꼭 같은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또 악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세상은 끊임없이 복수와 원한과 저주로 점철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에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며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잘 알지만 실제로 부딪히면 축복은 커녕 저주부터 나옵니다. 이는 인간 본성으로서는 실천하기에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원수조차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덧입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십자가에서 자기를 못박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마음의 응어리진 원한과 복수심을 녹이고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29절에서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도 심문 받으실 때 뺨을 치는 하속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내가 말을 잘못 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요18:23). 그러므로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이 뺨을 치면 저 뺨을 돌려대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나를 해하려고 요구하는 자에게 적극적으로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27-30절에서의 원칙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이는 31절에서 한마디로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 말씀을 가리켜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philo라는 랍비는  네가 원치 않는 것은 그에게 행치말라  는 소극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만큼 적극적으로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VIP 대접을 받고 싶습니다. 이해받고 인정받고 칭찬을 받고 싶습니다.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싶습니다. 내가 그런 만큼 다른 사람도 그런 대접을 받고 싶어함을 알고 적극적으로 남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존경해 주라는 것입니다. 요사이 저는 원세훈 목자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받습니다. 보통 직장에서 늦게까지 일하다가 퇴근하게 되면 몸과 마음이 피곤하여 쉬고 싶은 마음 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극복하고 직장에서 퇴근하여 밤 9-10시가 되는 데도 센타에 옵니다. 그때는 모임도 다 끝나고 아무도 따뜻이 반겨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얼마나 위로받고 사랑받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밤 늦게라도 오히려 도움이 필요한 자를 찾아 도와주고 또 기숙사에 양들을 심방하여 카운슬링을 합니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이 임하게 됩니다. 저는 때로 사랑을 받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 내가 사랑받고 싶은데 양들은 얼마나 사랑을 받고 싶을까 생각하고 사랑이 필요한 자를 찾아 사랑해 줍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제 심령에 위로부너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남을 적극적으로 대접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자이기 때문입니다(32-34). 우리가 만일 우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고 우리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한다면 세상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 사람들과 무엇인가 달라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의 사람으로서 아름다운 믿음의 향기를 풍길 수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제자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35,36). 우리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비범한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큰 상을 받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황태자요 황공주라 일컬음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요1:12). 그러나 이는 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지 내면은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합니다. 우리의 내면은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좁고 편협합니다. 그러나 끊임없는 영적 훈련을 통하여 우리의 내면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조각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어떤 사람도 품고 섬길 수 있는 넓고 깊은 내면의 소유자가 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와 악인에게도 인자로우신 분이십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죄를 위해 독생자까지도 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지 않으셨다면 아무도 구원 받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고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자비로와야 할 이유는 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