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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7:1-17 

by Mark Yang   04/22/2022  

Message


2004년 누가복음  제 5 강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 : 누가복음 7:1-17 
요절 : 누가복음 7: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이제 여름수양회가 열흘 조금 더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름수양회를 허락하시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고자 하심을 감사합니다. 남은 기간 우리가 더욱 힘써 믿음의 도전을 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백부장의 믿음과 죽은 청년을 일으키신 예수님을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믿음을 새롭게 하고 자기 한계를 극복하며 남은 기간 여름수양회 역사를 온 힘을 다해 섬길 수 있길 기도합니다.  

I. 이만한 믿음(1-10)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이방인이요 로마인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의 장로들과 예수님께 칭친을 들으며 자기의 병든 종을 죽음에서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였습니까?  

첫째, 그에게는 아주 깊은 인간애 humanity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 백부장은 사랑하는 종이 한명 있었다 하였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니까 그는 그 종을 valued highly- 즉 아주 귀하게 여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원문을 보니까 이 사랑한다는 말에는 ‘존경한다’는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종의 충성을 당연한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신분의 차이를 고려해 사랑과 정을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가 병들어 죽게 되면 그냥 적당히 내어 버립니다. 그런데 본문의 백부장은 그 종을 사랑하고 또한 그 종의 충성을 귀하게 여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는 그를 살리고자 각별히 마음을 썼습니다. 똑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을 보면 이 종은 중풍병에 걸려 많은 고생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부장은 이런 그를 불쌍히 여기고 살려보고자 애썼습니다. 그에게는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자기 종에 대한 깊은 인간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고소하고자 한손 마른자를 이용했던 것과는 아주 대조적인 것이었스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양은 자기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백부장을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때마침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통해 종을 살려내고자 했습니다. 그는 동네 유대인 장로들을 찾아가 그들이 예수님께 가서 자기 종을 살려달라는 말좀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자기같이 자격없는 이방인보다는 예수님과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같습니다.  그런데 4절을 보십시오. 백부장이 부탁하자 유대인의 장로들이 정말 예수님께 나가 그를 대신해 종을 구해달라고 하는데 성경은 이 장로들이 예수님께 간구했다- 즉 ‘간절히 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볼때 유대 장로들도 이 백부장을 사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 장로들은 예수님께 나와서 “이일 하시는 것이 합당하니이다”하고 말했습니다. ‘합당하다’는 말은 원문에 강조형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그 이유로 5절 말씀을 말했습니다. “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였다는 말에서의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이는 이타적인 사랑, 자기 희생적인 사랑으로서 주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는 백부장이 유대인들을 아주 헌신적으로 사랑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는 점령군으로서 유대에 왔지만 정작 그가 한일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유대인들의 고통을 깊이 이해하고 그들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의 필요에 따라 대민봉사를 하며 회당까지 지어주었습니다. 이를 볼 때 그가 유대인의 종교, 그들의 신앙을 깊이 존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써 그는 말이나 행동 모든 것에서 유대의 장로들에게 깊이 인정받기에 이르렀습니다. 헤롯 대왕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고자 성전을 지어주었지만 유대인의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 모든 것이 정략적인데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국적과 민족을 초월한 그의 따뜻한 인간애는 로마에 대해 적대감으로 충만한 유대인들 마음 조차도 감동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런 깊은 인간애는 사람을 깊이 이해하게하고 헌신하며 섬기게 합니다. 이런 인간에게 없으면 하나님을 믿는다해도 사람을 돕고 살려가는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애가 없으면 형식적이고 사무적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애가 깊은 사람은 하나님과 마음을 합하여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는 깊은 인간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의 유혹에 넘어가 타락했을 때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 귀하신 성자 하나님,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 구원코자 하셨습니다. 헬라어에 ‘케노시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비움’이란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만 자신을 비워 인간으로 오시되 인간의 종의 모습으로 오셨음을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이 ‘케노시스’ 속에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절대 희생적 사랑, 그 한없는 인간애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고통 속에 있고 힘없는 사람들을 더욱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상대가 종이든, 세리이든 창녀이든 아무 구분없이 뜨겁게 사랑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나온 각종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 귀신들려 울부짖는 사람, 죄로 고통하는 사람들을 모두 뜨겁게 영접해주셨습니다. 이들의 모습은 일그러졌고 냄새나고 귀신들려 괴성을 질렀지만 예수님은 이들에 대한 깊은 인간애를 가지시고 일일이 고쳐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자기를 고소해 십자가에 못박게 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피를 흘려 고통 속에 죽어가시면도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몇해전 우리 모임은 수색에 있는 정박아 보호소 천사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천사의 집은 동네 한가운데 있었는데 동네 사람 아무도 그들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지내는가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서 그곳에 보일러 설치를 해주고 그들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우리에게 아주 좋은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해 그들은 그 동네에서 쫒겨나 동네 뒷산 꼭대기로 옮겨가야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동네에 그런 이상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 불쾌해 진정서를 내 그들을 그렇게 쫓아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보일러 설치해주는것을 보고는 좋은 일했다고 하지만 정작 그들은 그 정박아를 영접할 수 없었던 것이요 퇴치시켜야할 대상으로만 본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시대는 인간애가 메말라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이런 사람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그들을 마음으로 영접하며 사랑하며 섬기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버드 대 교수였던 헨리 나우엔은 캐나다의 정신 박약아 공동체인 데이브레이크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는 사람의 모습이야 어떠하든 인간 자체를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탤런트 김혜자씨는 국제아동기금(unicep) 회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데 기아로 고통하고 있는 아이들을 섬기면서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는 책을 썼습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이 제목을 생각할 때 여기 한 영혼의 인격을 아주 귀중히 여기는 인간애가 숨겨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나는 희망이 언제나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준다고 믿는다. 슬픔의 유일한 치료제는 나눔이며, 사랑이 그 어떤 전쟁과 죽음보다 강하다는 걸 믿는다.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을 도울 힘이 내게 없다고 생각할 때에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볼 때면 여전히 그들을 도울 힘이 내게 남아 있음을 나는 안다” 

한 영혼에 대한 깊은 인간애에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 한계를 극복하며 새역사를 창조케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더 데레사 여사는 길에 버려져 고통하는 사람을 보고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보호자 없이 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데려다가 씻겨주고 의사를 불러다고 치료해주었습니다. 이를 안 수녀원의 원장은 데레사가 수녀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킨다며 그녀를 말려달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데레사는 신분의 벽, 원장이 말한 그 수녀로서의 품위가 어떠하든 다만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섬기면서 매마른 세상 속에 세상을 감동시키는 사랑의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히퍼는 기독교인의 최고 윤리 형태를 ‘타자를 위한 인간’이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너를 위해서 오늘 내가 여기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깊은 인간애와 그리고 하나님 사랑에 기초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애는 어떤 특정한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인간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형상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인간애의 이야기에 감동하고 또 이를 실천하고 싶은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죄로 인해 원래 하나님이 주신 인간애에 많은 손상을 입었지만 기도하며 예수님을 배워나갈 때 우리는 상실한 인간애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성장하고자 할 때 많은 성경지식을 가져야합니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한 영혼에 대한 깊은 인간애를 배워야함에 깨닫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서 우리 시대 방황하는 한 영혼의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의 우리 시대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고통을 깊이 이해주고 함께 해줄 한 사람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안될 때 사람들은 자포자기하며 세상을 저주하며 더 함부로 살고 심지어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하며 인생을 비관하며 자살까지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 그러므로 우리가 한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을 배우고자 간절히 기도해야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시어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그를 끝까지 사랑하는 종이 되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둘째로 그가 자기 종을 낫게 할 수 있언던 비결은 예수님께 대한 절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장로들의 말을 듣고 그들과 함께 백부장의 집을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집에 가까이 왔을 때 백부장은 벗들을 보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6,7,8)

군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단체입니다. 군의 명령체계는 군의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군대에서는 지휘관이 한마디 명령의 말을 떨어뜨리면 모든 것이 그 명령의 말대로 그대로 이루어지는 곳이요 또 그래야 합니다. 그래서 군부대의 구호에 ‘안되면 되게 하라’가 있습니다. 십수명의 군인들이 며칠간 열심히 콘크리트로 진지를 잘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지휘관이 검열 나와 ‘ 아 이거 왜 이래. 위치 각도가 좀 틀렸잖아. 이쪽 담장선에 맞추서 5도 각도를 틀어서 24시간 내에 다시해’ 하고 떠났습니다. 지휘관이 남기고간 그말 한마디- 이로 인해 장병들은 야밤에 불밝히고 밤새워 죽어라고 일을 했습니다. 지휘관이 그 다음날 같은 시간에 거기 가보니 자기가 말한대로 모든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지휘관이 말만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곳- 안되면 되게 해서라도 이루어내는 곳- 그곳이 군대입니다. 본문의 백부장은 군생활을 하면서 이런 명령의 본질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이 말씀으로 세상 모든 일을 주관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우주의 총사령관이셨습니다. 백부장은 군의 명령 체계와 같이 주께서 말씀만 해주신다면 굳이 예수님께서 자기 집으로 안오셔도 자기 하인이 낫는다고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에 놀라셨습니다.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여기서의 이만한 믿음이란 ‘이렇게 큰 믿음’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에 감탄하시며 그의 간구데로 그의 종을 그시로 낳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되 우주의 절대 통치자, 총사령관으로 믿는 이런 백부장의 믿음을 가질 수 있길 기도합니다. 이사야서 48:13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에 폈나니 내가 부르면 천지가 일제히 서느니라” 이는 세상 모든 것이 주님의 말씀 아래 있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구약 66권의 책을 주셨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의 책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우리의 삶 속에 믿음으로 적용시켜 나갈 때 우리는 큰 능력의 역사를 체험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백부장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어 총사령관 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절대 신뢰해 나가므로 이 불신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길 기도합니다. 

II. 죽은 청년을 일으키신 예수님
  예수님이 이렇게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신 후 나인 성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성을 향해 가실 때 이 성에서 한 장례 행렬이 나왔습니다. 한 과부의 독자가 젊어서 죽은 것이었습니다. 장례 행렬을 따라오는 과부는 엉엉 소리내 울고 있었습니다.  독자를 잃은 과부의 슬픔이 어떠했을까요. 우리가 이를 어떻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과부에게 있어서 그 아들은 인생의 의미요 목적이었습니다. 자기 존재의미요 삶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자식이 아플 때는 두배로 마음이 아프고 자식이 기뻐할 때는 두배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 아들이 기말 고사 성적이 잘 나왔다며 모처럼 친구들과 놀고 오겠다더니 도무지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과부는 아들을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되어도 돌아오질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3일만에 pc 방에서 컴퓨터 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만 게임에 푹 빠져 그 자리에 앉아 게임만하다가 마침내 혈액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아 죽고 만 것이었습니다. 이에 과부는 그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토록 잘되기를 바란 아들이 그만 이런 모습으로 죽어버리다니 얼마나 억울하고 슬프겠습니까? 과부는 아들의 관을 따라 길을 내려오면서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보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 죽는 것 처음 본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죽어서 우는 것을 처음 보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과부의 슬퍼하시는 것을 보니 너무 안타깝고 불쌍해서 그냥 지나가실 수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마음의 고통을 깊이 이해하시고 그녀의 슬픔을 거두어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울지말라” 세상에 그 누구도 지금 이렇게 울고 있는 과부에게 ‘울지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울게 내버려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의 주가 되십니다. 죽은 자도 능히 살릴 수 있으십니다. 그래서 여인에게 울지 말라 며 말씀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까이 가셔서 그 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러자 청년이 관뚜껑을 삐그덕 밀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앉아서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도 그 청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게임을 하지 말도록 해라, 그리고 안암쎈타 여름수양회에 꼭 가거라” 그리고 그 청년을 그 어미에게 주셨습니다. 순간 어두움과 슬픔에 가득찼던 장례 행렬은 기쁨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여기 저기서 ‘예수님, 짱! 진짜 짱! 예수님 캡캡캡! ’하며 찬송이 터져나왔습니다. 

참으로 이 예수님 안에 사망의 세력, 어두움의 세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세상의 어떤 슬픔도 물러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생명의 주, 부활의 주가 되십니다. 이 부활과 생명의 주님을 생각할 때 우리가 어둠속에서, 사망의 세력에 사로잡혀 관 속에 누워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죽은 우리 영혼에 생명을 주시고 무기력에 누워있는 우리에게 소망과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요즘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이에 따르는 포기라는 말 속에서 마치 죽은 자같이 누워 지내고 있습니다. 그것도 새파랗게 젊은 사람들이 더 그렇습니다. 이들은 세상 경쟁이 워낙 치열하니까 학과 공부, 취직문제, 장래문제 등 여러 면에서 제대로 된 실패를 해보기도 전에 먼저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 버립니다. 한번 두려움에 빠지면 손발이 마비되고 생각도 안돌아가 그 마음이 어두움에 싸여 참으로 비참해진 자신을 발견할 뿐입니다.  그러면 이런 자신이 싫어서라도 여기서 어떻게 하든 벗어나고자 해야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러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마치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나 된양 그 좌절과 어둠 속에서 계속 뭉기적 거립니다. 그러면서 ‘아, 나는 안돼, 정말 안돼’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자기 나름대로의 체질에 맞는 절망이라는 관짝을 만들어 ‘나를 절망이라고 불러다오’ 하며선 그 안에 들어가 눕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현대 그룹의 정주영씨는 ‘시련을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는 무엇을 하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또한 당장의 결과에 연연해 하지않았습니다. 실패는 성공을 향해 나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당연한 ‘시련’으로 생각하고 도전에 도전을 거듭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굴지의 그룹 ‘현대’를 만든 것입니다. 그의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를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거기를 보면 빈대이야기가 나오는데 빈대가 얼마나 집요하게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피를 빨아 먹고자 하는가- 그는 그 빈대 스피릿의 대단함에 감탄을 하게 됩니다. 한번은 정주용 씨가 밤마다 극성스럽게 달려드는 빈대를 견디다 못해 묘안을 냈습니다. 그는 양동이에 물을 담아 침대의 다리 4개를 그 속에 넣었습니다. 그러면 빈대가 오다가 양동이 물에 빠져 침대로 못올라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생각을 한 정주용씨는 자신이 정말 기막힌 생각을 했다며 득의양양해 이제 편하게 잠을 잘 수 있겠구나 하고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이 된 일인지 새벽에 다시 빈대에 물어 뜯겼습니다. 그래서 너무 이상에서 도무지 이놈의 빈대가 어디로 와서 이렇게 자기를 무는가를 살펴보았는데 양동이 물에는 빈대가 빠져 죽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방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이 빈대들이 천장에서 그에게로 똑똑 떨어지는것을 발견했습니다. 빈대는 육로로 가는 길이 차단되자 길을 우회해 천장으로 기어올라 고공 낙하를 하며 사람에게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빈대는 결코 ‘나는 할 수 없어’ 하며 포기하고 관속에 드러눕는 일이 없습니다. 빈대- 그들에게는 정말 지붕을 뚫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빈대에게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었습니다. 정주용씨는 이 빈대에게서 깊이 배웠습니다. 삼성은 10여년 전부터 다가올 미래를 바라보면 자체 개혁을 이루어갔습니다. 처자식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바꾸자는 말을 하며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끝없는 도전과 개혁을 통해, 10년이 지난 지금 삼성은 세계 최우수 기업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언젠가 삼성의 홈페이지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실패는 바느질 할 때만 쓰는 말이고 포기는 김장할 때만 쓰는 말이다.’ 

우리가 여름수양회에 양들을 초청하고자 할 때도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실패에대한 두려움과 포기하고 싶은 유혹입니다. 양을 여름수양회에 초청하고자 할 때 몇 번 실패하다 보면 이제 더 이상 도전하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시 도전해보고자 할 때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이런 실패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금년에 이러면 내년 여름수양회 초청하지 뭐.. 하면서 다시 도전할 생각을 하지않고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이렇게 되면 정말 영원히 패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작년에도 그랬는데 금년에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축제 여름수양회를 준비하면서도 이를 준비하는 마음이 이러할 때 그 마음에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청년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밤세워 게임하는 것입니까? 김장하면서 한 포기 두 포기 하듯 한명 포기 두명 포기 하다가 나중에 다 포기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청년의 특징은 실패할 수 있는 특권이요 실패를 실패로 여기기는 커녕 이를 성공을 향한 시련으로 여기고 항상 담대히 도전하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실패라는 것이 없습니다. 포기라는 것도 없습니다. 다만 끝없는 도전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실패감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을 책망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예수님은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 청년아 일어나다.”  우리 중에 혹시 “나는 청년이 아니라 도저히 못일어나겠는데..” 하는 분 계십니까? 우리 쎈타 최고령자의 나이는 25살입니다. 그 다음에 제가 24살입니다. 여러분 대부분은 자매는 방년 20세, 형제들은 다 약관 20세입니다. 미래가 창창한 젊은이들이 ‘ 아 정말 힘들어 못살겠다 ’하고 탄식하거나 ‘내가 이 나이에 연극하랴, 내가 이 나이에 특송하랴’ 하면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요, 예수님의 젊은이들입니다. 지금 열심히 믿음을 배워 장차 인류 구속사를 책임져 나갈 대 사도들이 될 사람들입니다. 물론 우리가 영적 싸움을 해나가고자 할때 더러는 두려움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양 심방가서 ‘ 목자님 , 암만 그래도 저 수양회 안가요’하는 소리를 할까 바 좀 두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은 사단이 근거 없이 심어주는 것들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양을 만나는 것이 왜 두렵습니까? 다 사단이 심어준 근거 없는 두려움일 뿐입니다. 우리가 두려우면 기도하면 됩니다. ‘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단아 물러가라, 두려움아 물러가라’하고 외치면 정말 두려움이 떠나갑니다. 그리고 ‘주여 제게 믿음을 주시옵소서, 믿음없는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하면 주께서 우리에게 성령충만함과 함께 우리에게 담대함을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리 바위덩이 같은 마음을 가진 양에게라도 도전하고 그 바위를 깨뜨리고 초청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도전에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16세기 초 로마 카톨릭은 당시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는데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마르틴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진리에 기초해 이 거짓 된 면죄부 판매에 대해 분노해 일어났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그는 비텐베르크(Wittenberg)에서 95개조의 반박문을 들고 로마 카톨릭에 대항합니다. 이러던 그는 1521년 보름스(Worms)회의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로마 카톨릭의 압력을 거절하다가 끝내 파문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시민으로서의 모든 법적인 권리를 박탈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든지 그를 죽여도 법적으로 전혀 죄가 성립하지 않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그는 낙심되었고 두려웠습니다. 힘들 때가 너무 많았습니다. 어느날 루터가 크게 낙심하고 있자 이를 지켜보던 그의 아내가 검은 상복을 입고 그의 앞에 나타났습니다. ."누가 죽었소?"라고 그가 묻자 "하나님이 죽었습니다"라고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루터는 소리쳤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나님은 영원 불멸하시는 분이요. 하나님은 지금까지도 살아 계시고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 계실 것이오!" 그때 그의 아내는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마치 하나님이 죽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요?" 그 때 루터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용기를 되찾았다고 합니다. 그는 믿음으로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나 용감하게 도전하며 마침내 개신교 역사의 위대한 첫돌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위대한 개혁자도 때때로 두려움과 싸워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위대했던 것은 그 두려움을 순간 순간 기도와 믿음으로 극복하며 이를 이겨나갔기 때문입니다.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도 미국 개척을 시작하실 때 두려우셨다고 했습니다. Deprogram 으로, 그리고 매스컴으로 공격당할 때 큰 두려움에 빠졌다고 했습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주변으로부터 도전받고 이렇게 다 두려움에 빠집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 그 믿음의 위대함으로 칭송받는 사람들은 모두 이 두려움을 믿음으로 극복해냈다는 것입니다. 몰려오는 극심한 사망의 두려움을 물리치고자 예수님의 이름을 붙들고 처절한 기도의 싸움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큰 승리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예수님은 우리가 다가오는 여름수양회 역사를 앞두고 실패감과 두려움, 포기하고자 하는 모든 생각을 버리고 일어서기를 원하십니다. 여름수양회 역사뿐 만 아니라 모든 일에서 우리가 일생 청년의 스피릿을 가지고 일어나 믿음으로 도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 이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헛되이 돌아오는 경우가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항상 그 뜻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일어나 범사에 도전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 시간에도 진리를 몰라 방황하고 있는 캠퍼스 영혼들을 위해 깊은 상한 심정을 가져야겠습니다. 그들 영혼이 지금 얼마나 고통하고 있는가 생각하고 백부장과 같은 깊은 인간애를 가지고 이들을 위해 주님께 나가야겠습니다. 주님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여기 우리의 믿음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청년아 일어나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적극 순종해 우리 내면에 있는 사망 권세를 깨고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섬길 수 있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