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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8:1-15

by Mark Yang   04/22/2022  

Message


누가복음 제1부 19강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말씀/ 누가복음 8:1-15
요절/ 누가복음 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이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쉼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심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심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너무나 심오한 것이어서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설명하시기 위해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비유는 쉽고 재미있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들을 때는 별 뜻이 없는 것 같지만 문제의식을 가지고 깊이 생각해 보면 생각하면 할수록 깊은 뜻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서 사람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이며, 또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이 시간 말씀의 뜻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풍성한 열매를 맺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복음 역사를 섬긴 여인들 (1-3)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죄 많은 여인의 죄를 사해주신 후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온 땅을 복음화하고자 하시는 열정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전파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여기에는 장차 믿는 자들이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평과,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을 때 우리의 심령에는 참 생명과 평화, 은혜와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성경은 실낙원과 복낙원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낙원 곧 하나님의 나라를 상실한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시고 인간들을 사단이 다스리는 흑암의 나라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이 다스리는 빛의 나라로 옮기기 위함이었습니다(골 1:13). 우리가 하는 일도 복음 전파를 통하여 사단에게 빼앗긴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전도 여행을 하실 때 함께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열 두 제자들과 어떤 여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 너무나 초라한 수행원들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은 복음역사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귀한 자들이었습니다. 열 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사도로 임명하신 자들이지만 현재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하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이었고 세상 욕심으로 가득찬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장차 세계를 움직일 위대한 사도들이 되리라는 희망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희망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장차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이 될 것을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늘 이들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또 어떤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 그 외 다른 여러 여자들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과거 일곱 귀신에 사로잡힌 자였습니다. 그녀는 한 때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리자 추한 여인이 되어 다 그녀를 멀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녀를 불쌍히 여겨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고침을 받은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아름다운 믿음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요안나는 사회적인 지위와 부를 가진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와 결혼한 것을 볼 때 능력 많은 여인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음란하고 부패한 궁중에 살면서 마음이 병들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이 내면의 병을 치료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크신 능력으로 이 병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 후 요안나는 온 진심을 바쳐 복음 역사를 섬겼습니다. 그 외에도 수산나와 여러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과거 욕심과 정욕을 좇아 살며 형제들을 병 들이는 쓸모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로부터 고침을 받게 되자 복음 역사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귀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항상 배고픈 제자들을 섬기려면 많은 물질이 필요했습니다. 여인들은 자기들의 소유로 희생적으로 역사를 섬겼습니다. 물질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기도와 사랑으로 역사환경을 만들었습니다. 왕성한 복음 역사가 일어나는 이면에는 이러한 여인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흥왕하게 역사가 일어나는 이면에는 구원의 은혜를 덧입은 자매님들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희생적으로 역사를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의 섬김은 참으로 귀합니다. 여인들이 뒤에서 기도와 사랑과 섬김으로 잘 뒷받침하면 형제들은 영적으로 성장을 하고 복음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매님들이 형제들의 사랑이나 받으려고 뒤에서 끌어 당기면 형제들은 병들게 되고 복음역사는 결코 성장할 수 없게 됩니다.

II. 씨 뿌리는 자의 비유 (4-15)

4절을 보십시오. 전도 여행의 결과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심고자 그들이 알아듣기 쉽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농부가 밭에 나가 씨를 뿌렸습니다. 씨는 여러 곳에 떨어졌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딱딱한 땅을 뚫고 들어갈 수 없어 이리저리 굴러 다니다가 사람들에게 밟혔습니다. 그러다가 먹이를 찾고 있던 배고픈 참새가 이게 웬 떡이냐 하며 맛있게 쪼아 먹었습니다.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졌습니다. 이 씨는 곧 싹이 나왔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수분을 빨아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습기가 없으므로 햇빛을 견디지 못하여 말라버렸습니다. 가시떨기 속에 떨어진 씨는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가시도 함께 자라나 그 기운에 막혀 더 이상 성장을 못하고 시들시들하다가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싹을 내고 뿌리를 깊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수분과 영양분을 마음껏 빨아올렸습니다. 싹은 자라서 무성한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마침내는 100배의 풍성한 결실을 하였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씨는 100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왕성한 생명력과 놀라운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땅이 좋지 않으면 그 생명력과 가능성은 모두 주어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하며 외쳤습니다. 이를 볼 때 말씀을 들을 귀가 있고 듣지 못하는 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좁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들으면서 헛생각을 합니다. 프로 야구나 주말 명화나 연속극을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메시지에 꼬투리를 잡기 위해 바리새인과 같이 비판적인 마음으로 듣습니다. 이런 자들은 아무리 많은 말씀을 들어도 심령에 아무런 역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나서 이야기를 해 보면 말씀과는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는 영적인 귀가 뚫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갈급한 심령으로 은혜를 받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듣습니다. 이런 자의 심령에는 말씀이 능력으로 역사하여 하루가 몰라보게 놀랍게 성장하게 됩니다. 이런 자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적귀를 가진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자 어떤 사람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며 또 어떤 이는 너무 당연한 소리를 해서 시시하다 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뜻을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말씀의 깊은 뜻을 알고자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가 비유의 뜻을 물었습니다. 그들은 인생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는 자들이요, 어찌하든지 배우고자 하는 겸손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의 말씀대로 살고자 애쓰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심히 기뻐하시고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영적인 소원을 가지고 말씀의 뜻을 알고자 간절히 찾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영적 소원이 없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리워져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라고 하셨습니다. 비밀은 그 내용이 아주 귀하고 또 감추어져 있습니다.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열심히 찾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3:44절에서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가장 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죄사함의 은혜가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산 소망이 있습니다. 인생을 의미있게 하는 참된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비밀이기 때문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비밀을 찾는 자만이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잠언 기자는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간절히 찾으면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하였습니다(잠 2:4,5). 하나님의 세계는 마치 바다와 같습니다. 바다는 겉으로는 출렁이는 파도와 갈매기가 보일 뿐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다는 속으로 들어가 보면 엄청난 보화가 있습니다.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아름답고 진기한 세계가 펼쳐집니다. 이와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의 뜻을 찾으면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깨달아 알 수 있게 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비유의 뜻을 설명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비유에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씨가 떨어진 곳은 사람들의 마음 밭을 가리킵니다. 씨를 뿌리는 자는 성경 선생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성경 선생들이 말씀의 씨를 뿌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말씀의 씨는 각각 네 종류의 마음 밭에 떨어졌습니다.

첫째, 길가와 같은 마음 밭
12절을 보십시오.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이들은 말씀을 듣습니다. 1:1 말씀 공부를 합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이 강하여 한 말씀도 영접치 않고 모두 튕깁니다. 이런 자들의 마음은 그 특징이 비판적이고 딱딱하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여기 저기서 주워들은 말씀에 대한 상식으로 인해 딱딱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회주의나 해방신학, 철학적인 지식으로 다져져서 말씀이 뚫고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영접치 않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가 역사하여 구원을 얻지 못하도록 그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 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습니다(딤후 3:15). 그런데 마귀는 말씀에 대한 회의를 심어서 말씀을 영접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결국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여 사단의 밥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은 5절에서 마귀를 먹이를 찾는 공중의 새에 비유하셨습니다. 이와같이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습니다(벧전 5:8). 마귀는 결코 잠을 자거나 놀지 않고 열심히 일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영접치 않으면 마귀는 지체하지 않고 찾아와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 가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공부할 때 딱딱한 마음 밭을 회개의 쟁기로 갈아서 한 말씀이라도 마음에 영접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둘째, 바위와 같은 마음 밭.
13절을 보십시오.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여기서 바위란 흙이 얇은 돌밭을 말합니다. 이런 마음 밭을 가진 자는 말씀을 들을 때 기쁨으로 받습니다. 스폰지가 물을 흡수하듯 할렐루야를 연발하며 말씀을 영접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으니 답답한 가슴이 탁 트인다고 소감 발표를 합니다. 이런 양을 만나 목자는 오랜만에 좋은 양을 만났다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감정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말씀을 받아 들이기는 해도 아주 피상적으로 받아 들이고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습니다. 말씀 공부를 해도 마음에 한계를 그어놓고 그 이상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어느 정도 성장하다가 뿌리가 없기 때문에 성장을 멈추어 버립니다. 그러다가 시험의 때에 견디다 못해 넘어지고 맙니다.

뿌리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평소에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험을 받을 때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좇아 믿음으로 살게되면 반드시 핍박을 받게 됩니다(딤후3:12).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기나 따돌림을 당하기도 합니다. 또 가정에서 핍박을 받기도 하고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외적 어려움 뿐만 아니라 내적 어려움도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대로 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쳐야 합니다. 육신의 소욕을 쳐 복종시켜야 합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에 갈등이 생깁니다. “내가 꼭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힘들게 신앙생활해야 되는가?" 이런 갈등을 하다가 견디지 못하여 넘어지게 됩니다. 이는 시험을 견딜 수 있는 뿌리 즉, 내적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뿌리만 있으면 시험을 통해 믿음이 더 깊어지고 크게 성장할 수 있는데 뿌리가 없기 때문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환난이나 핍박과 같은 시험을 햇빛에 비유했습니다. 햇빛은 식물 성장에 필요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이와같이 시험은 신앙성장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나무가 자라나려면 비바람을 맞아야 합니다. 온실의 나무는 크게 자랄 수 없고 또 연약합니다. 그러나 비바람을 맞고 자란 나무는 강하고 튼튼합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뿌리를 내리는 것이 중요함을 배웁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 안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골2:6,7 절에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라" 고 권면했습니다. 예수님안에 뿌리를 박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깊은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개인신앙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개인신앙이 있는 자는 분위기나 상황에 따라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불탑니다. 오히려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믿음이 살아있고 생명력이 넘칩니다. 개인신앙이 있는 자는 자립적인 믿음이 있기 때문에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뿌리를 내리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씀 안에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7절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말씀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한 말씀을 붙들므로써 말씀이 주는 은혜와 생명력을 덧입는 것입니다. 말씀이 주는 영양분을 끊임없이 공급받을 때 자신도 모르게 거목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에 뿌리 내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한 곳에 얽매이기를 싫어합니다. 벌나비와 같이 이곳 저곳을 날아 다니면서 맛있는 꿀만 따먹고자 합니다.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한 곳에 뿌리를 내려야 할 때가 오면 미련없이 다른 곳으로 가버립니다. 이런 자를 가리켜 철새신앙을 가진 자라고 합니다. 이런 자는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나무가 한 곳에 뿌리를 박지 않을 때 결코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뿌리를 내리지 않을 때 결코 그 믿음이 성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뿌리를 내리는 것이 중요한 만큼 쉽지가 않습니다. 자기를 깨는 영적 투쟁이 필요합니다. 바위와 같은 마음 밭에는 마음 깊은 곳에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는 바위가 있습니다.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바위를 깨뜨리고 돌을 들어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 속 깊이 감추고 있는 숨은 죄악이나 자기 이상이나 꿈을 들어내고 진실되게 회개할 때 비로소 뿌리를 깊이 내리고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셋째.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밭: 14절을 보십시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자는 말씀을 듣고 뿌리를 내립니다. 싹을 내고 자랍니다. 그러나 자라는 중에 가시떨기가 함께 자라게 됩니다. 가시는 생명력이 왕성하여 말씀의 씨가 받아야 할 영양분을 다 빼앗아 버립니다. 결국 가시의 기운에 막혀 비실비실 하다가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가시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생의 염려입니다. 이는 생활의 염려를 말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합니다. 학생들은 공부에 대한 염려가 있습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성적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세상에서 낙오하면 어떻게 하나? 염려합니다. 또 건강에 대한 염려가 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다가 요절하는 것이 아닌가? 염려합니다. 또 결혼에 대한 염려가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염려합니다. 요사이는 주택에 대한 염려를 많이 합니다. 이런 염려의 가시에 찔리게 되면 심령이 어두워지고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염려한다고 해서 결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염려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불신에서 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염려의 가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마6 33)

둘째는. 재리(riches)의 가시입니다. 이는 재물에 대한 욕심을 말합니다. 이성의 염려가 결핍에서 오는 것이라면 재리는 좀 더 잘 살고자 하는 세상 욕심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반드시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이때 욕심의 가시에 찔리기 쉽습니다. 욕심의 가시에 찔리면 인색해지고 자기 것을 꾸리게 됩니다. 또 희생, 개척, 사명의 십자가라는 단어가 부담스러워지고 불평이 많아집니다. 영적인 관심이 식어지고 세상에 대한 관심이 많아집니다. 사도 바울은 딤전6:9,10 절에서 재물에 애착을 갖고 부하려 하는 자들을 경고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사람이 부족할 때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부하여졌을 때 더 중심지키기가 힘듭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두렵고 떨림으로 감당하려고 하기보다 욕심을 부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습니다. (약1:15) 욕심은 굴러가는 눈덩이와 같아서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되고 결국에는 욕심에 깔려 죽게 됩니다.

셋째는. 일락(pleasures)의 가시입니다. 이는 세상쾌락을 의미합니다. 인생을 즐기고 잔재미를 누리고 싶은 미음입니다. 주말에는 등산도 가고 T.V 연속극도 보고 맛있는 것을 먹고 싶습니다. 연애를 하고 싶고 정욕을 즐기고 싶습니다. 세상 쾌락에는 순간적인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후에는 알 수 없는 허무와 공허감과 죄의식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따릅니다. 로마서 8: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이러한 염려의 가시, 재리의 가시, 일락의 가시에 찔리면 그 특징이 무기력해지고 또 신앙생활의 기쁨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내가 신앙생활에 생명력이 없고 기쁨이 없으면 이는 가시에 찔린 증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회개함으로써 가시를 뽑아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력과 기쁨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넷째, 좋은 마음 밭 15절을 보십시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좋은 땅은 착하고 좋은 마음 밭(noble and good heart)을 가진 자입니다. 이런 자는 생각하는 것이 고상하고 마음이 순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사는 것을 기뻐합니다. 이런 자는 겸손하고 진실하기 때문에 잘못이 있으면 변명하지 않고 회개하기에 용감합니다. 이런 자는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들과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깊이 생각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지키고자 애씁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농부는 씨를 뿌리고 그 씨가 잘 자라도록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병충해를 막고 새나 짐승과 같은 의부의 침입을 막으며 끊임없이 가꿉니다. 이와같이 말씀이 내 안에서 잘 성장하도록 끊임없이 돌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말씀이 내 안에서 큰 세력을 얻어 성장하게 됩니다. 또 열매맺는 데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당장에 열매를 맺고자 하는 조급함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열매를 맺는데는 적어도 10년을 참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지키고 인내할 때 때가 되면 100배의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어리석은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 때 우리의 내면에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됩니다(갈5:22). 또 동시에 외적으로도 나를 통해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고 새 삶을 살게되는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렇게 열매 맺는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되고 우리는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요15:8,11). 열매 맺는 생활은 인생의 본분이요 사명입니다(창1:28). 우리의 마음 밭을 잘 가꾸어서 좋은 마음 밭을 만들어 100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