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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8:26-39

by Mark Yang   04/22/2022  

Message


누가복음 제 1부 21강

네 이름이 무엇이냐

말씀/ 누가복음 8:26-39
요절/ 누가복음 8:30a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인간은 짐승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존엄하고 또 온 천하보다 귀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 문명의 발달과 물질 위주의 가치관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존엄성은 땅에 떨어지고 인간은 물질과 육신의 노예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는 자아를 상실하여 사회에 반항하며 자기를 학대하는 젊은이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귀신들려 부르짖으며 괴로와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들을 이해하고 도와주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새 인생을 살게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더러운 귀신 들린 거라사인과 이를 고쳐 주시는 예수님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한 몹쓸 영혼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 주님의 크신 구속의 사랑이 한 분 한 분의 심령에 충만히 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성난 거라사인 (26-29)

예수님은 전날 하루 종일 말씀을 가르치시고 체자들과 함께 잠시 휴식을 취하시고자 호수저편으로 건너 가셨습니다. 그러나 가는 도증 광풍을 만나 큰 어려움을 겪으신 후에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셨습니다. 거라사는 데가볼리의 한 도시입니다.이곳은 본래 유대 지방이었으나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점령한 후 헬라식 도시를 건설하여 헬라의 이주민들이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 후 B.C 63년에 폼페이우스의 원청으로 로마군이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그곳에는 로마 제 14군단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거라사에 이르자마자 예수님을 맞이하는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였습니다. 그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27b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그는 옷을 벗고 있었으며 또 무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왜 옷을 입지 않았을까요? 몸에서 열이 나서 답답하여 견딜 수 없어 벗었는지 모릅니다. 실제로 귀신 들린 자는 폼에서 열이 난다고 합니다. 또 히피와 같이 문화에 대한 반발로 그렇게 했는지 모릅니다. 옷은 인간 문화의 상징으로서 인간을 인간답게 합니다. 반면 옷은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고 신분과 빈부의 차이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본문의 청년은 이에 심하게 반발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기폰 문화에 반발하고기성세대에 반발하고 체제에 반발했습니다. 그는 자유를 원했습니다. 자유에 대한 갈망은 그를 구속한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벗어 던지게 했습니다.

또 그는 집에 거하지 않고 무덤 사이에 거했습니다. 그곳의 무덤은 석회암 굴로 되어 있었습니다. 무덤은 시체 썩는 냄새가 나며 죽음의 요소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곳은 음산하여 아무도 그곳에 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가정과 사회를 떠나 무덤을 거처 삼아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과 관계성을 단절하고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놓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무덤에 사는 것을 볼 때 그의 내면은 무덤과 같이 어둡고 부정적이고 운명적이며 죽음의 요소로 가득차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밝은 것보다 어두움을 사랑하고 거룩한 것보다 지저분한 것을 좋아 하였습니다. 그가 왜 가정과 사회를 떠나 무덤에 살고 있을까요? 가정과 사회가 그를 속박하는 감옥처럼 느껴져서 뒤쳐 나왔는지 모릅니다. 대개 아버지가 술을 먹고 어머니와 자녀들을 구타할 때 자녀들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 생겨 가정을 감옥처럼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파괴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애정 결핍과 반발심으로 인해 성격이 삐뚤어지고 내면에 깊은 상처를 안고 괴로와하게 됩니다. 이들에게는 가정이 안식처가 아니라감옥처럼 느껴집니다. 오늘날에는 레인맨에 나오는 자폐증 환자와 같이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놓고 무덤 삼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가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우리는 본문에서 그 이유를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고 있는 거라사라는 환경을 살펴볼 때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거라사 지방은 하나님 없는 이방 사회입니다. 또 이곳은 인간보다도 돼지를 더 중히 여기는 물질주의 사회입니다. 또한 이곳은 알렉산더나 폼페이우스가 원정한 것을 보면 동서문 화가 교차하는 개방적인 사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로마 군인이 침입하여 창칼로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것율 보고 미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또 그가 살고 있는 곳은 도시였습니다. 도시는 개인주의적이고 향락적이며 치열한 경쟁사회입니다. 이런 곳에서 살다보면 정서가 불안해지고 자신도 모르게 스트레스가 쌓이게 됩니다. 특히 그가 살고 있는 도시는 군인들이 주둔하는 곳이었습니다. 군인들이 살고 있는 곳은 어디나 음란과 강포가 난무하게 마련입니다. 아마 그 도시에는 몸을 파는 여인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 청년은 이런 음란한 분위기에 살면서 죄의 소욕에 시달리다가 호기심에 이끌려 죄를 범한 후 심한 죄의식으로 미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환경이 더러우면 병균이 서식하듯이, 모름지기 하나님 없는 이방 문화에서는 귀신이 역사하게 마련입니다
어쨌든 이 젊은이는 옷도 입지 않고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 것을 볼 때 참 자유인이 된 것 같습니다. 그가 무덤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간섭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는 가정과 사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으로부터는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5:5절에 보면 그는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채워지지 않는 육구불만으로 인해 짐승과 같이 소리를 지르며 자기 몸을 짓렇는 자학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젊은이의 근본 문체는 귀신이 들렸다는 것입니다. 귀신이 그 사람을 강하게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육신의 소욕대로 살게 되자 귀신은 그 틈을 타서 한마리, 두마리, 그 마음 속에 들어왔습니다. 마침내는 6,000마리의 떼귀신이 그 몸과 마음을 점령하여 그를 완전히 사로잡아 버렸습니다. 그는 자유인이 되기를 원했지만 귀신 때문에 자유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귀신의 세력에 지배당하여 자아를 완전히 상실해 버렸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을 보자 그 앞에 넙즉 엎드리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그의 행동과 말은 서로 맞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간절히 도움을 구하면서도 동시에 예수님을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같은데 동시에 예수님을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분열현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시자마자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에게 역사하자 그는 심한 갈등을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도 말씀을 공부하게 되면 이러한 갈등이 생깁니다. 처음에는 말씀이 참 좋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말씀을 공부하게 되면 숨은 죄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갈등하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진리의 말씀대로 살고 싶지만 또 한편으로는 육신의 소욕대로 마음대로 살고 싶습니다. 이런 갈등이 생기면 점점 말씀이 부담스러워지고 목자님이 나를 구속하고 괴롭히는 것처럼 생각되어 제발 나를 괴롭게 말아 달라고 간청하게 됩니다. 전화도 걸지 말고 심방도 오지 말고 제발 혼자 있게 내버려 달라고 합니다. 이는 말씀이 그 속에 역사하여 귀신들이 분열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그 특징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알지만 경배치 않고 순복치 않습니다. 마음의 교만 때문에 늘 하나님께 대적하고 반항하고 진리를 거스립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으로 인해 멸망할 것 같은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29b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그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자 했습니까? 사람들은 그가 왜 미쳐 날뛰는가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가 미쳐 날뛰지 못하도록 쇠사슬과 고랑으로 묶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어디서 힘이 났는지 쇠사슬을 끊고 광야로 달려 갔습니다. 쇠사슬과 고랑은 그의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문제만 더욱 악화시킬뿐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약물이나 전기쇼크로 이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람만 못쓰게 만들 뿐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합니다. 올바른 치료를 하려면 올바른 진단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귀신 들린 자를 도울 수 없습니다. 또 귀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힘과 지혜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귀신은 인간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입니다. 귀신을 내어 쫓으려면 귀신을 결박할 수 있는 더 강한 세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만이 귀신을 결박하여 쫓아내실 수 있습니다. 귀신들린 자는 두려움과 자의식, 허무와 절망을 안고 무덤 사이에서 곤두박질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파멸의 구렁텅이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구세주가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II.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예수님 (30-39)

예수님은 이런 그를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29b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를 만나시자마자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과 귀신을 분리시켜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귀신 들린 사람을 볼 때 그 사람 자체가 못쓰게 된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사람이 귀신들리면 소망을 끊어버리고 쇠사슬과 고랑으로 묶어 두어 식물인 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못쓰게 만든 근본 원인이 귀신이므로 귀신만 쫓아낸다면 그 사람은 본래의 자아가 회복할 수 있다고 보셨습니다. 이는 마치 병든 자를 볼때 병과 사람을 분리하여 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볼 때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어찌하든지 고쳐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는 귀신들려 발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모습은 짐승과 같아서 쳐다보기 조차 힘들었습니다. 그의 머리는 마구 헝크러져 있었고 그의 몸은 제대로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하여 있었습니다. 돌로 제 몸을 짓찧었기 때문에 온 몸이 상치 투성이었습니다. 옷도 입지 않아 그는 짐승인지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아무도 이러한 그와 상관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버려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밤새도록 피곤한 가운데서 광풍을 헤치고 거라사 땅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만난 사람은 더러운 귀신들려 울부짖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도 그를 부담스러워 하지 않으시고 적극적으로 그와 상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고귀한 존재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불쌍히 여기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시자마자 말씀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둘째, 예수님은 그에게 이름을 물어 보셨습니다. 
30a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예수님은 그가 반발한다고 뒤로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오히려 그의 이름을 물으심으로 더 적극적으로 도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름을 물으신 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귀신의 정체를 드러내고자 하심이었습니다. 귀신은 간교하여 자신을 위장하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귀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귀신들렸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자신을 위장합니다. 그리고 뒤에 숨어서 인간을 조롱하고 파멸로 이끕니다. 예수님은 이런 귀신의 정체를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둘째는, 그의 존재 의미를 깨우쳐 주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이름이란 그 사람의 전 존재를 나타냅니다. 그는 귀신에 사로잡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고 자아를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귀신의 세력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존재 의미를 상실하고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이름을 물음으로써 존재 의미를 일깨워 주시고 하나님 앞에서 본래의 자아를 발견하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한 결과 증 가장 비참한 것은 존재 의미를 잃고 자아를 상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에게 찾아 오셔서 가장 먼저 “네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창 3:9). 또한 명예와 사랑과 물질을 추구하다 자아를 상실하고 한계상황에 부딪혀 절망하고 있는 야곱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창 32:27)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는 예수님의 사랑의 질문이었습니다. 여기에는 한 영혼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관심과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기 원하셨습니다. 그의 문제는 사람들과의 관계성 단절이었습니다. 그는 귀신 때문에 어느 누구와도 바른 관계성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과도 바른 관계성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의관계성 문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 단절에서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성이 단절되자 모든 사람과의 관계성이 단절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이름을 물음으로써 그와 올바른 관계성을 맺고자 하신 것입니다.

성서적으로 볼 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모두 다 사단의 노예가 되어 자아를 상실하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범죄하자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 단절은 바로 즉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육신의 죽음 뿐만 아니라 영원한 파멸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도 사단의 지배를 받고 악령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비로소 인간은 진청한 생명과 평화와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단절되면 인간은 사단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사단의 통치를 받게 될 때 인간은 자유를 상실하고 악령에 시달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생들을 사탄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즉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파하셨습니다. 이로써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없이 하시고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동안 사단의 종노릇하고 있는 인간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히 2:14,15) 이는 주님께서 영원한 파멸로 치닫고 있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Journey Team들과 지방 전도여행을 하면서 특히 Rusty Simoroldoa목자를 변화시킨 주님의 크신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Rusty목자는 범죄가 가득찬 미국 사회와 타락한 십대들의 영향을 그대로 받고 자라나 미친 거라사인과 같이 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주유소를 터는 등 강도 짓을 하고 약물을 복용하였습니다. 또 여자 친구와 동거하여 20세의 나이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회에 대한 반발심과 복수심으로 절도와 강도, 폭행사건으로 감옥에까지 갔습니다. 그의 영혼은 칠흙과 같고 그의 마음은 돌같이 굳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유를 찾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다 하였지만 오히려 그것은 그를 속박하고 파멸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법이나 체도나 사상이 그를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성난 거라사인과 같은 그를 은혜스러운 목자로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의 허다한 죄를 덮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돌 같은 그의 마음을 녹여서 잃은 양을 찾아 말씀으로 가르치고 기도하는 사랑의 목자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름을 물으시자 그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30a절을 보십시오.“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군대는 레기온으로서 로마 군인 6,000명으로 구성된 군단입니다. 이를 볼 때 그의 속에는 6천 마리의 떼귀신이 역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만 귀신, 정육 귀신, 이기심 귀신, 자의식 귀신, 운명주의 귀신, 불신 귀신 등 갖가지 귀신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귀신들은 더 이상 그 사람 속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께 무저갱으로 쫓아내지 말고 마침 산에서 먹고 있던 돼지떼에게로 들어가도록 간구했습니다(32). 이에 예수님은 허락하셨습니다. 그러자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갔습니다. 돼지들은 항상 식욕이 왕성하여 먹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돼지가 귀신들리자 식육을 잃고 갑자기 꿀꿀거리며 트위스트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너무 답답하여 자기들의 옷인 털을 마구 뽑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답답하자 일제히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로 다이빙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얼마동안 허우적 거리다가 물을 잔뜩 먹고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귀신들렸던 사람은 정신이 온전하여졌습니다. 그는 이제 단정히 옷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예수
님의 발아래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고치시는데 왜 많은 돼지를 희생시켰을까요? 마가복음에서는 2천마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막대한 채산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한 영혼이 돼지 2천마리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생명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는 그 사회의 그릇된 가치관에 도전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셨습니다(막 8:36).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탄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마침내는 자신의 고귀한 목숨까지 희생하셨습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귀신들렸던 사람이 예수님의 크신 능력으로 온전하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 놀라운 역사를 보고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돼지 2,000마리가 희생된 것으로 인해 망할 것 같은 두려움
에 사로잡혀 생명의 구주를 쫓아 보내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위해 배에 오르셨습니다. 이때 귀신들렸던 자가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로부터 고침을 받고 구원의 은혜에 감격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기이한 사랑으로 인해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허락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39a절을보십시오.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예수님은 그가 집으로 돌아가 받은 바 구원의 은혜를 증거하는 사명인의 인생을 살도록 하셨습니다.예수님은 그를 데가볼리 선교 지부장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을 통해 귀신 들려울부짖는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코자 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주시는 방향에 순종하여 온 성내에 돌아다니며 주님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아름다운 역사를 전파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유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자유로운 것같지만 근본적으로 참 자유가 없습니다. 이는 죄로 말미암아 사탄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을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여 진정한 자유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시간도 예수님은 귀신들려 자아를 상실하고 울부짖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질문하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