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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18-27

by Mark Yang   04/22/2022  

Message


누가복음 제 1부 24강

하나님의 그리스도

말씀/ 누가복음 9:18-27
요절/ 누가복음 9: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본문은 복음의 핵심이 되는 내용으로서 우리의 영적 생명에 관계되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복음 역사 초기부터 열 두 제자를 부르시고 이들을 중심으로 복음 역사를 이루어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또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하여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계시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이들과 공동생활을 하시면서 삶을 통하여 자신의 참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기말고사를 치루심으로 1학기 교육을 끝내고 2학기 교육을 시작하십니다. 1학기 교육이 예수님의 인격에 관한 교육이라면, 2학기 교육은 예수님의 사역에 관한 교육입니다. 이 두 내용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전공필 수 과목입니다. 이 시간 주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허락하사 복음 진리를 깨달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I. 베드로의 신앙고백 (18-21)

1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가라사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저자 누가는 여러 곳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3:21, 5:16, 9:18,28, 11:1, 22:39-46, 23:34). 예수님은 조용한 곳에서 홀로 기도하기를 힘쓰셨습니다. 특히 중요한 일을 앞에 두었을 때 기도를 많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복음 역사를 섬길 힘과 지혜를 덧입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을 잡아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신 후 제자들에게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두 질문은 모두 예수님의 인격에 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이는 요한복음 17:3절을 보면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서 아는 것이 아니라 깊은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관계성을 맺는 것은 그 자체가 영생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떨어지는 것은 그 자체가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인격에 관해 질문하시기 전에 왜 기도하셨을까요? 이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깨닫는 데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분이십니다. 이를 깨닫는 데는 위로부터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해야 합니다(엡 1:17). 이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이 영적인 눈을 뜰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했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 세례 요한은 검소한 생활을 하며 백성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증거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이러한 모습을 보고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헤롯은 자기가 목베어 죽인 세례 요한이 살아나서 능력으로 역사한다고 생각하고 악령에 시달렸습니다. 엘리야는 우상 숭배가 성행한 아합시대에 단독으로 바알 선지자 450인에게 도전하여 그들을 물리침으로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특심한 열심과 백성들에 대한 상한 목자의 심정이 충만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바로 그 엘리야라고 생각했습니다(말 4:5,6). 더러는 막연히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이 자기 나름대로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점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본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서 말씀의 종이요 기도의 종이요 백성들의 목자요 영적인 아버지였습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인물로 봅니다. 주옥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말씀의 종이요, 모든 불치의 병을 치료한 위대한 의사요, 비천한 어부들을 사람 낚는 사명인으로 키우신 위대한 교육가시오, 탁월한 민중의 지도자로 봅니다. 또 어떤 분은 세상에서 가장 선한 사람으로 봅니다. 예수님은 어느 모양으로 보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단지 위대한 인물로만 본다면 예수님의 본 모습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상대적으로 평가되어질 분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봐야 할 신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단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경배의 대상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의 견해에 만족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는 개인적인 답을 요구하는 질문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따르고 배우고 체험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분명한 개인 신앙을 갖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개인 신앙을 가질 때만이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이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베드로가 모든 사람들을 제치고 재빨리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이 대답은 짧았으나 예수님이 요구하는 정확한 답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그리스도”란 말이 의미하근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약속된 메시야가 되십니다. 그리스도란 메시야 곧 구원자란 뜻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죄와 사단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사 범죄한 직후부터 메시야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 3:15). 그리고 시대 시대마다 선지자들을 통해 메시야에 대한 약속을 견고케 하시고, 이 약속을 기초로 인류 구속 역사를 이루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속 역사의 때가 차자 마침내 약속된 메시야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약속된 바로 그 메시야가 되십니다(롬 1:2). 예수님은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보내시고 인치신 그리스도가 되십니다(행 18:3).

둘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마 16:16).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로서 나신 분이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신성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8:23절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분으로서 그 본체가 하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가 되십니다(딤전 2:5).

셋째로, 예수님은 참 경배의 대상이 되십니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 받은 왕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셔서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주의 주, 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이 예수님이야말로 인생들로부터 경배와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계 5:12).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메시야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이요 진정한 희망이 된다는 고백입니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만든 갖가지 메시야가 있습니다. 문선명이나 정명석이 만든 이단 종파 뿐만 아니라 물질이나 이즘이나 거짓 사상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메시야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행복을 줄 것 같지만 실상은 거짓 희망을 심고 사람들을 멸망의 길로 인도합니다. 많은 사람이 돈과 권력을 메시야로 삼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이를 얻기만 하면 행복이 굴러 들어올 줄 알고 이를 사모하며 이를 얻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요(딤전 6:10), 인간의 권세와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허무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벧전 1:24). 한 때 공산주의와 같은 이즘이 사람들의 메시야였습니다.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행복을 가져다 줄줄 알고 공산주의를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70년간의 경험을 통해서 공산주의는 거짓 희망을 심었고 인간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과학 기술주의를 메시야로 삼고 희망찬 시대가 도래할 것처럼 테크노피아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앞으로 2000년대가 되면 직장에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컴퓨터로 직장 일을 보며 여가를 즐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주부들은 시장이나 백화점까지 가지 않고도 컴퓨터로 집안에서 물건을 사는 홈쇼핑을 즐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로 인간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 편리해졌지만 이로 인해 인류가 파멸에 이를 것이라는 위기감이 팽창하여 불안과 두려움이 점점 더 가중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만든 메시야는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주거나 진정한 희망을 제시해 주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들의 유일한 생명의 길이 되시고 진정한 희망이 되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고 그를 의지하고 그에게 희망을 두는 자는 결코 실망치 않고 영광스러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구주로 영접한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앙고백은 구원과 관계되는 중요한 것입니다. 로마서 10:9절을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어떤 일이 잇어도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단호한 결단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는 출교를 당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자신을 분명하게 나타내면 불신 가정에서나 캠퍼스에서나 직장에서나 미움을 받고 따돌림을 당합니다. 윤성현 목자님은 KAL에서 칼 같이 일을 잘하여 인정을 받아 다른 부서에게 차출하여 갔습니다. 처음에는 윤성현 목자님의 겉모습이 술을 잘 마시게 생겼으므로 차장이 술 파트너가 왔다고 대대적인 환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윤성현 목자님이 크리스챤으로소 술은 안 마신다고 분명히 말하자 그때부터 차장의 안색이 달라지고 핍박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신앙고백할 때 핍박과 손해와 아픔이 따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두려워서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결코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고백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신앙고백을 통해서 예수님께 대한 충성과 사랑을 견코케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무리들과 달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배우고 따르는 제자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은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예수님께 나아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배우고 따르고자 하는 소원보다도 예수님을 통해 무엇인가 얻고자 했습니다. 이때 그들은 예수님을 피상적으로 알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공동 생활하면서 실제 삶 속에서 예수님의 인격에 접했습니다. 사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조금씩 깨달아 갔습니다. 그들은 개인적이고 인격적이고 체험적으로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이때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위대한 발견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를 아무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이는 복음 역사가 완성되기까지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II. 그리스도의 길 (22)

예수님은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하자 이를 기초로 그리스도로서 마땅히 겪어야 할 사역에 대해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많은 고난을 받고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버린 바 되고 죽임을 당한 후 제 삼일에 살아나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must‘라고 하심으로 이는 그리스도가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고난 받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롱과 심문, 채찍과 멸시 등 많은 고난을 받고자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됩니다.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해 일시적으로나마 하나님께로부터도 버린 바 되셨습니다(막 15:34). 마침내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죽어도 곱게 죽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비참하게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버림과 죽음으로 예수님의 생애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후에는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통해서 영광에 이르는 길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길만이 진정으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런 고난의 길을 가셔야 하는 것은 인간의 죄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죄는 무서운 것이어서 그 대가로 죽음을 요구합니다(롬 6:23a). 인간은 범죄함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하다가 마침내는 피를 흘리며 죽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대신 고난을 받고 피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죽음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골 1:13,14). 이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크신 사랑 때문입니다.

III. 제자의 길 (23-27)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그리스도로서 겪을 수난에 대해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심하게 반발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이것이 생략되어 있고 제자의 길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한 사람도 예외없이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자기부인.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면 자기 인격이나 개성이나 자기 존재를 말살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심하게 반발합니다. 그러나 자기 부인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기 부인이란 자기 계획, 자기 꿈, 자기 욕심 등 자기를 중심한 것에서 예수님을 중심한 것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삶의 중심이 자기에서 예수님께로 방향전환을 하는 것입니다. 이 자기는 아담 안에서의 자기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자기입니다. 우리는 이 자기를 버리고 예수님을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이사야 55:7a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우리는 아무도 몰래 내면 깊숙이 꼬불쳐 놓고 있는 자기 꿈과 인간적인 야심이 있습니다. 이왕 목자가 될 바에야 몇 세기만에 나오는 위대한 목자가 되고 싶습니다. 선교사로 가더라도 한 나라의 지부장, 아니 적어도 한 지부를 책임 맡는 지부장으로 가고 싶습니다. 우리는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자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이러한 자기를 포기하지 않을 때 진정으로 위대하게 될 수 없습니다. 또 그 내면에는 평강이 없고 늘 갈등이 있게 됩니다. 자기 부인이란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크신 뜻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고 후사 문제가 해결되자 고상한 아버지로서 아기자기 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좋지 않게 생각하시고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고 책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고상한 아버지가 되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은 그가 열왕을 낳고 키우는 열국의 아비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기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살에 새기도록 할례를 요구하셨습니다. 할례에는 아픔이 따릅니다. 아브라함은 이에 즉시 순종하여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가 자기를 부인했을 때 그는 복의 근원, 열국의 아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부인에 있어서 우리에게 좋은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예수님은 할 수 있으면 십자가를 회피하고 싶었지만 자기를 부인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영원한 구우너의 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자기를 부인할 때 우리는 더 큰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영적 세계의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영적인 거목으로 자라날 수 있습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사명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우리에게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해야 하는 사명과 어린 양을 먹이는 사명이 있습니다(딤후 4:2; 요 21:15). 뿐만 아니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말씀을 가르치고 믿어 순종케 하는 세계 선교의 사명이 있습니다(마 28:19; 롬 1:5). 말씀 전파의 사명, 양치는 사명, 세계 선교의 사명은 신자이면 누구나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성냥개비만한 작은 십자가를 지고 어떤 사람은 장작개비만한 조금 큰 십자가를 지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크리스챤이면 반드시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일반 신자는 십자가를 지지 않고 편히 신앙생활하며 어떤 특정한 사명인만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는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기는 좋아하지만 십자가를 지는 것은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싫어합니다. 그러나 사명의 십자가는 결코 부담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안지고자 하니까 부담스럽지, 지고자 하면 가볍고 은혜가 있습니다. 사명의 십자가는 인생을 값지게 하고 풍성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사명의 십자가는 사람을 능력있게 하고 위대하게 합니다. 능력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많은 십자가를 지는 것을 의미하고,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전보다 더 많은 십자가를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할 수 있으면 십자가를 더 안지려고 합니다. 3학년 때까지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다가 4학년이 되면 십자가를 벗고 뒷짐지고자 합니다. 졸업하면 십자가도 동시에 졸업하고자 합니다. 이때 생명력을 상실하고 믿음이 퇴보하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연륜이 더할수록, 우리의 신앙이 자랄수록 더 많은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사명의 십자가는 큰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 십자가란 누가대신 져 줄 수 없고 자기만이 질 수 있는 십자가를 말합니다. 또 ‘날마다’라는 말씀은 꾸준히, 지속적으로 또 일생동안 지라는 것입니다. 또한 매일 음식을 먹듯이 매일 십자가를 짐으로써 십자가를 몸에 익히고 생활화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게 되면 심령에 기쁨이 있고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 말씀은 역설적이지만 진리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귀히 여깁니다. 사실 우리의 목숨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고귀합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한번 밖에 없는 고귀한 목숨을 어떻게 쓰는 것이 유익한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의 생애는 짧습니다. 우리 인생은 시행착오를 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잃지 않고자 자기를 꾸리는 것이 현명한 것 같지만 지내놓고 보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고 결국에는 자기마저 잃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기 위해 자기 꿈을 부인하고 젊음을 희생하고 자기의 모든 것을 잃는 자는 한 알의 썩는 밀알과 같이 결국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또한 주님께서 그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 때문에 인생을 결산해 보면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하리라.” 예수님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사는 자들은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부끄러워 합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께서 장차 영광 중에 심판주로서 임하실 때 부끄러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로부터 부끄러움을 받게 되면 끝장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7). 이는 세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생명의 구주가 되십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을 때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이 시대의 작은 예수가 되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음으로 생명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