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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28-43a

by Mark Yang   04/22/2022  

Message


누가복음 제 25 강 

             변형되신 예수님

말씀/ 누가복음 9:28-43a
요절/ 누가복음 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신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하나님으로서의 본래의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영적인 눈을 떠서 영광스러운 주님을 보고 십자가의 도리를 마음으로부터 영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생각하면 부담스럽고 마음에 어두움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영광의 주님을 바라봄으로써 저희에게 맡겨 주신 사명의 십자가를 기쁨과 확신 가운데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 변형되신 예수님(28-36)

  28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이 말씀 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의 비밀을 가르쳐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버린바 되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만에 살아나신다는 것은 만세 전에 감추어진 심오한 비밀이었습니다(롬16:25,26). 예수님은 이를 제자들에게 비로소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근본문제인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였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자기 부부인과 자기 십자가는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인간적인 야심과 세상 욕심으로 인해 영적 눈이 가리워져서 이 복음의 비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으로 인해 그들의 심령은 어두워지고 반발심과 두려움과 슬픔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제자생활의 기쁨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고백했으나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지 못해 인상을 쓰며 다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의 마음에 복음 진리를 심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어떻게 심으셨습니까?

첫째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비밀을 말씀하신 후 8일 쯤 되어 수제자 그룹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이 산은 갈릴리 북방에 위치한 헬몬산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산에 올라가셨습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속을 떠나 맑은 공기를 마시며 머리를 식히기 위해 산에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도하시기 위해 산에 가셨습니다. 에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원대한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기도하고자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영적으로 막힌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고자 하셨습니다. 기도는 사람을 영적으로 가장 잘  도울 수 있는 무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 가신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조금만 힘들어도 집에 가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잠을 잡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의 투쟁을 하기 보다 백해 무익한 인간적인 갈등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난과 배척과 십자가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에 올라 가야만 하셨습니다. 또한 복음 역사를 계승해야 할 제자들은 3년 동안 훈련을 받았지만 아직도 인간적이어서 영적인 종으로 변화되기에는 요원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에 복음 진리를 심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하늘의 영광의 빛이 환하게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 용모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얼굴이 해같이 빛난다고 하였습니다(마17:2). 예수님이 산에 올라 오시기 전에는 어두움의 세력이 물러가고 영광의 빛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산에 올라오시기 전 예수님의 모습은 죄인들을 섬기시느라 상할 대로 상한 모습이었습니다. 제자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의 모습은 머리 둘 곳이 없이 가난하신 예수님,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되신 예수님, 병들고 귀신들린 자들의 아버지되신 예수님, 거지 대장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양무리를 돌보실 때 그 마음은 찢기고 상하셨으며 그 얼굴은 수심으로 가득차셨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의 모든 죄악과 슬픔과 운명을 담당하시느라 그 영광스러운 모습이 변하여 마치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일찌기 이사야 선지자가 묘사한대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사람들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사53:2)

  그러나 예수님은 본래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권세와 영광과 존귀로 옷 입으신 영화로우신 분이십니다. 또한 지극히 순결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그 본래의 모습대로 변형되신 것입니다.  변형되신 예수님의 모습은 장차 죽음의 권세를 파하시고 부활하실 영광스러운 부활의 모습입니다. 변형되신 예수님의 모습은 부활 승천하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세상을 그 뜻대로 다스리실 주의 주요 왕의 왕의 모습입니다. 사도 요한은 로마 제국의 핍박으로 인해 밧모섬으로 귀향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그에게는 로마 제국에 대한 원한이 새겨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영광의 주님이 새겨졌습니다. 그는 환상 중에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그 머리는 털의 희기가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으며 그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계1;13-16). 발에 끌리는 옷은 대제사장이나 왕의 예복으로서 존귀와 위엄을 나타내며, 가슴의 금 띠는 권세와 정의의 표시입니다.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은 것은 그리스도의 성결과 영원성을 나타내며, 눈의 불꽃은 사람의 심중을 꿰뚫어 보시는 그리스도의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발은 원수들은 초개와 같이 밟아 부숴뜨리는 심판을 의미하고, 많은 물소리와 같은 음성은 불가항력인 권위를 나타냅니다. 오른손에 있는 일곱별은 우주적 교회를 상징하고, 입에서 나오는 좌우에 날선 검은 말씀으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권세를 나타냅니다. 또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이 환하게 빛났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영광과 권세와 존귀와 위엄으로 가득차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 죽은 자와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왜 이렇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신 것입니까? 이는 그들 마음에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새김으로 복음 진리를 심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신자들 가운데는 주와 복음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는데 어딘지 모르게 슬프고 어둡고 그 얼굴에 우수의 그림자가 깃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의 눈은 동정의 눈빛을 하고 말도 슬픈 어조가 담긴 말을 하고 찬송가도 슬프게 부릅니다. 이런 자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운명 문제와 슬픔문제가 해결안된 채 어둡고 운명적인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이 다 그런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이는 그 마음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모습만 새겨져 있고,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주, 승리의 주, 영광의 주가 새겨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영광의 주님이 새겨질 때 어둡고 슬프고 운명적이고 패배적인 요소가 물러가고 밝고 긍정적이고 희망찬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30,31절을 보십시오,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구약에는 사무엘과 이사야 같은 위대한 선지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모세와 엘리야만 나타났을까요?

첫째로, 예수님의 죽으심은 구약의 완성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구약성경을 가리켜 율법과 선지자라고 합니다(롬3:21). 모세는 율법의 대표요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율법의 완성이요 선자자들이 예언한 예언의 성취가 되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많은 고난을 통해서 구속 역사를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의 공통점은 모두 고난의 종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 분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구속역사를 섬기느라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모세는 노예백성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고 그들의 노예근성을 감당하느라 끝없는 고생을 하였습니다. 한번은 그들을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어 하나님께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구하옵나니 네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민11:12,15). 모세는 이렇게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원한맺힌 유령이 되어 나타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영광 중에 나타났습니다.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 시대에 살았습니다. 당시는 요사스러운 이세벨로 인해 거의 모든 백성이 사신 하나님을 버리고 농경신인 바알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백성들을 우상숭배의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동역자도 없이 홀로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에게 도전하여 싸우느라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한번은 너무 괴로워서  주여, 이제 족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왕상19:4)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만성피로가 쌓인 힘들고 지친 모습으로 나타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영광 중에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양무리를 품고 구속역사를 섬기느라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광과 존귀로 옷입히셨습니다, 그들의 고난은 짧았으나 영광은 영원하였습니다. 그들이 영광 중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에 영원한 영광을 상급으로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 줍니다. 우리도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을 때 그들과 같이 영광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희망을 줍니다. 이를 볼 때 주님을 위해 고난을 많이 받으면 받을 수록 영광도 큽니다.

  그러나 모세와 엘리야가 받은 고난은 우리 주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짊어 지시고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허물로 인화여 찔리시고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내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무서운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찔리시고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내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무서운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구속역사의 절정이었습니다. 이로써 오랫동안 온 인류가 갈망해 온 인류 구속사업이 완성되었습니다.

   별세 란 헬라어로  출애굽 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시킨 것과 같이 예수님은 그의 죽으심으로 인생들을 죄와 사탄의 권세로부터 탈출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게 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출애굽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기도에 동참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곤하여 졸았습니다. 베드로는 침을 흘리며 아예 코를 골며 잤습니다. 그들이 마음으로부터 십자가의 도리를 영접지 않았을 때 정신적으로 피곤하여 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기도 시간만 되면 이상하게 잠이 왔습니다. 이는 그들이 아직 영적으로 변화되지 못한 육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졸다가 갑자기 환한 광채로 인해 아주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변형되신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과 또 함께 선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습니다. 이를 본 베드로는 황홀지경에 빠졌습니다. 그는 이분들과 영광 중에 영원토록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멋진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그는 자기를 위하여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 말속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저자 누가는 그가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고 코멘트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 세계 속에 숨어 있던 속 생각이 튀어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영적상태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동안 예수님을 좇기 위해 숱한 고생을 했습니다. 훈련 받느라 또 문제 많은 양들을 감당하느라 굶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고생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로 가고 싶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거꾸로 매달려 살아도 세상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명의 십자가 없이 쉽고 영광스러운 인생을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베드로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고난을 싫어하는 인간의 본성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변형되시고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시는 영적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생각을 하며 졸다가 자신도 모르게 헛소리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었습니다. 그리고 구름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35b). 구름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상징합니다(출16:10,19:9, 24:15,16,33:9,40:34,35). 하나님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인치신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그 음성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말씀은 세미하게 음성을 듣지만 내가 싫어하는 말씀은 귀를 막고 거부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취사선택해서 들을 때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내가 주님께 원하는 것보다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겸허한 마음으로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특히 십자가에 관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몸에 좋은 약은 언제나 쓴 것 같이 우리의 영적 건강에 좋은 말씀은 언제나 십자가에 관한 말씀입니다. 십자가는 부담스럽지만 십자가 안에 생명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십자가 안에 능력이 있고 영광이 있습니다. 십자가 안에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소리가 그치자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은 사라지고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그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세상욕심 때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변형되신  사건을 통하여 영적인 눈이 조금 떠졌습니다. 그들은 이 영광스러운 경험을 마음 속 깊이 묻어 두었습니다. 변화산상에서의 이 사건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서 주님의 남은 고난에 기쁨으로 동참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벧후1:16b,17)

. 귀신 들린 아들을 고치신 예수님(37-43a)

  3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튿날 산 밑으로 내려오자 문제 많은 양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이 내려오시자 반가이 맞이했습니다. 이때 무리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소리질러 간청했습니다.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그 아들의 문제는 귀신들린 것이었습니다. 귀신이 그를 사로잡으면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눈이 뒤집어지고 경련을 일으키면서 입에서는 거품을 흘렸습니다. 이렇게 심하게 발작을 하게 한 후에야 겨우 떠나갔습니다. 이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를 보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아이는 외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한 존재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기쁨이요 희망이요 자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대학교에 들어가더니 갑자기 귀신이 들려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고 거품을 흘리며 뒹굴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과 슬픔을 맛보았습니다. 그는 절망 중에 예수님께 나아왔으나 예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턴 목자들에게 고쳐달라 하였으나 그들은 큰 소리만 치고 능히 하지 못하였습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모습은 그 시대 형편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시대는 마치 귀신들린 아이가 소리를 지르며 경련을 일으키고 거품을 흘리며 뒹구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 시대는 한마디로 악령이 날뛰는 시대였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문제도 표면적으로 볼 때 정치 문제요 경제 문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 귀신들이 젊은 캠퍼스 지성인들을 붙잡고 소리지르게 하고 거품을 흘리며 발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이의 아버지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무엇이라 대답하셨습니까? 41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실패한 원인이 무엇이며, 예수님이 가장 슬퍼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과거 전도여행 때는 능력있게 복음역사를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경험이 생기자 그들은 매너리즘에 빠져 기도도 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귀신을 쫓아내고자 했습니다. 특히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 제자만 사랑하시고 자기들은 미운 오리새끼와 같이 취급하신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불신했습니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신의 경험과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그들은 교만해졌습니다. 그들에게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사 3년 동안 소망을 두고 키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가지 사건을 통하여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믿음으로 문제 많은 양들을 능히 섬길 수 있는 자립적인 목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랫 동안의 연단에도 불구하고 양 하나의 문제도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무능했습니다. 이는 이들에게 근본적으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보시고 심히 슬퍼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능력을 낳습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합니다(막9:23). 믿음은 모든 인간 문제와 시대 문제를 해결합니다. 믿음은 모든 한계를 극복하고 새 역사를 창조케 합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가 아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올 때 귀신이 거꾸러뜨리며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심으로 아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그 아비에게 도로 주시자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랐습니다.(43a)

결론적으로, 우리는 변화산상에 올라가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슴을 우리의 마음에 새겨야 겠습니다. 그리하여 산 밑에서 기쁨으로 사명의 십자가를 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