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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0:25-42

by Mark Yang   04/22/2022  

Message


누가복음 제 부 2 강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 누가복음 10:25-42
요절/ 누가복음 10: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이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
                     이 하라. 

  오늘 말씀은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이웃이 누구이며 또 이웃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되는 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I.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25-28)

  25절을 보십시오. 어느날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이리까?  이는 인간이 물을 수 있는 질문 중에서 가장 심각하고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인생을 진지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마음 속에 이런 질문을 갖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영생을 갈구합니다. 영생이란 단순히 오래 사는 양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무 의미없이 오래 사는 것은 비참한 일입니다. 영생이란 반드시 행복을 내포한 질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뜻입니다. 율법사는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성서학자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까? 그는 율법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에는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는 고뇌하고 갈등하다가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질문은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영생을 갈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성경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고 무리들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율법에 대한 지식은 그를 교만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26절을 보십시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었느냐?  예수님은 율법에 그 해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인생들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율법사는 죽시 거침없이 대답하였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7). 그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대답했습니다. 율법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누어 집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100% 전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소홀히 하거나 적당히 하기 쉽습니다. 또 생활의 한부분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생활의 전부요 그 어떤 것보다도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또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관심을 쓰듯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가장 관심을 많이 써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이 나의 삶의 중심이 되시고 인생의 목적이 되시고 기쁨이 되시고 소망이 되시고 나의 전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 자신을 귀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합니다. 배고프면 먹고 추우면 옷을 입습니다. 이와 같이 상대방도 존경하고 아끼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의 대답이 옳음을 인정하시고 계속해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의 문제는 성경을 잘 모르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문제는 행함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마치 많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하지 않아 비대증에 걸린 자와 같았습니다. 그는 성경선생으로서 열심히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행하도록 무거운 율법을 지웠으나 자신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눅11:46). 그는 말씀을 가르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행함이 없는 그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었습니다(약2:26). 그가 말씀을 지식적으로만 알고 행하지 않았을 때 그의 마음 속에는 아무런 기쁨이나 소망이나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의 심령은 딱딱하고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이를 행하라 는 투쟁방향을 주셨습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우리가 정말 진실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양들을 사랑할 때 우리의 마음 속에는 사랑의 샘이 생겨 기쁨과 소망과 생명력이 차고 넘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만 사랑하고 자기만을 위해 살 때 행복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그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또 어떻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는 내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후 이를 행할 내적인 힘을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를 행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우리가 이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자 투쟁하게 되면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비참한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비로소 죄인으로서의 자아발견을 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덧입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덧입을 수 있게 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율법대로 살고자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 때 그는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고 있는 자아를 발견하고 절망 중에 부르짖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7:24). 그러다가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보았습니다. 결국 그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늪에서 구원함을 받게 되었습니다(롬7:25,8:1,2). 그 이후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양들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위대한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말씀대로 살고자 투쟁하는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에 겸손합니다. 또 상대방의 연약함도 잘 이해하고 품고 섬기기 때문에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머리로만 공부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투쟁하지 않는 자는 성경지식만 늘어나 바리새인과 같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자는 심령에 전혀 기쁨과 은혜가 없습니다. 또 이런 자는 늘어난 성경지식으로 인해 교만해져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기를 잘합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영생의 길입니다.

II. 진정한 이웃(29-37)

  29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율법사는 예수님께로부터 분명한 투쟁방향을 잡았지만 이를 영접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정당화 시키기 위해 화제를 돌려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하며 물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자신을 합리화하고 죄의식으로부터 도피하였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씀공부를 하지만 실천해야 할 때 행하기가 부담스럽기 때문에 신학적인 논쟁으로 화제를 돌려 버립니다. 말씀 앞에 진실되게 자신을 내놓고 투쟁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객관화 시켜 버리고 자신은 그 문제에서 회피해 버립니다. 이런 자들은 신앙과 생활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성경공부를 많이 하지만 변화도 없고 성장도 없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가 알아듣기 쉽게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는 약 27Km가 됩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62m이고 여리고는 바다의 수면보다 250m나 낮은 곳입니다. 그래서 경사가 가파르고 바위가 많고 계곡이 깊어서 강도들이 숨어 있기에 적당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뿐만 아니라 최근까지도 강도가 많이 출몰하였다고 합니다. 강도들은 그 사람의 옷을 벗기고 반항을 했는지 무자비하게 때려 거의 죽게 된 것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이 사람은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길바닥에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그냥 버려두면 죽을 수 밖에 없는 급박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였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여리고는 제사장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과의 왕래가 빈번하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제사장 직무를 마치고 집으로 내려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는 내려 가다가 강도 만난 자의 신음소리와 피투성이가 된 비참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제사장으로서 마땅히 그를 도와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레19:18)는 말씀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의 양심은 그 사람을 도와 주어야 한다고 말했으나 그는 양심의 소리를 묵살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는 죽은 사람을 만지면 7일 동안 부정하다(민19:11)는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또 제사장으로서 바쁜 스케줄 때문에 그를 돌볼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변명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어가고 있는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레위인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일을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도 마땅히 강도 만난 자를 돌보아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위에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자 못본 체 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누가 오다가 돕겠지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반면 한 사마리아인은 어떠했습니까? 33-35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았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가장 멸시하는 자였습니다. 그도 강도 만난 자를 보고 얼마든지 지나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그 사람을 도와 주는데 시간과 물질이 얼마나 들 것인가 계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사람을 보자마자 불쌍히 여겼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그로 하여금 계산하는 마음과 내면의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게 했습니다. 그는 즉시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어 주었습니다. 기름은 고통을 덜어주는 진통제로 사용되었고 포도주는 소독역활을 했습니다. 그는 응급치료를 한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밤새도록 간호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데나리온 둘을 주막 주인에게 주며 이 사람을 돌보아 주도록 간청했습니다. 부비가 더 들면 돌아올 때에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바쁜 여행길 가운데서 희생적으로 그 사람을 돌봐 주었습니다. 또 끝까지 책임성 있게 그 사람을 돌봐 주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선한 일을 하였습니다.

  한 사마리아인은 제사장과 레위인과는 달리 평신도였습니다. 또 유대인이 멸시하는 자였고 바쁜 여행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강도 만난 자를 희생적으로 돌봐 줄 수 있었던 근본 동기가 무엇입니까? 이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속성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입니다. 사마리아인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죽어가고 있는 자를 살렸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인종, 국경, 민족감정을 뛰어 넘어 시간과 물질을 희생해 가면서 그를 섬길 수 있게 했습니다. 의무적으로 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도울 수 있으나 한계가 있습니다. 또 조금 희생해 놓고 손해의식이 생깁니다. 그러나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희생적으로 또 책임성 있게 섬길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요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셨다면 한 사람도 살아있을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사단에게 얻어맞아 죽어가고 있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파멸에서 구원하시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요3:16)

  예수님은 인생들을 도우실 때도 근본적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한번은 전도여행을 하고 돌아온 사도들과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양들은 이것조차 허락하지 않고 도보로 달려와 예수님보다 먼저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이 얼마나 부담스럽고 화나는 일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스케줄도 변경하시고 피곤과 배고픔도 무릅쓰시고 밤늦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막6:34).  예수님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인생들의 모든 죄짐을 당해 주시고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눅23:34).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사람을 살립니다.

  36,3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율법사에게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상의 비유에서 볼 때 우리의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의 이웃은 옆집에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 자가 바로 나의 이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이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특히 캠퍼스에는 강도 만난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오늘날 캠퍼스에는 각종 이단들이 활개를 치며 수많은 영혼들을 파멸로 이끌고 있습니다. 또 사회주의 세력이 순진한 영혼들을 탈취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단은 정욕과 운명주의와 허무와 같은 죄의 세력으로 젊은이들을 두들겨서 죽어가고 있는 영혼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이들은 누가 돌봐주지 않으면 죄와 사망권세 가운데서 멸망하고 맙니다. 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응급환자들입니다. 이러한 응급환자들은 세계 도처에 있습니다.  누가 이들의 이웃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우리는 강도들에게 얻어맞아 죽어가고 있는 영혼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말씀의 기름과 기도의 포도주와 희생적인 사랑으로 돌봐 주어야 하겠습니다. 그 때 소망없이 죽어가고 있는 자들이 살아나게 됩니다. 이 때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에는 기쁨과 은혜와 감사가 충만하였을 것입니다.

III. 마르다와 마리아(38-42)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님께서 한 촌에 들어 가셨습니다. 거기에는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부모 없는 이들을 사랑하사 이들의 부모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이 집에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심방은 이들에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각각 예수님을 어떻게 영접했습니까? 마르다는 부엌에 가서 열심히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반면 마리아는 주의 발 아래 앉아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둘 다 손님을 접대하는데 꼭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마르다는 사랑하는 예수님을 위해 맛있는 것을 많이 준비하고 싶었습니다. 또 언제나 식욕이 왕성한 제자들을 위해서도 많은 양의 음식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에게는 일손이 너무 부족하였습니다. 그는 이로 인해 마음이 분주해졌습니다. 그런데 이 바쁜 때 마리아는 얌체 같이 앉아 주의 말씀만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화가 났습니다. 마음에 불평이 생겼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가 입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많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 생기기 쉬운 문제는 자기 의와 불평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41,4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마르다를 책망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게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마르다는 주님을 위해 열심히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감사와 기쁨으로 하지 못하고 인상을 쓰며 불평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음식 대접을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몇가지 혹 한 가지 만이라도 감사와 정성을 다해 대접하면 그것으로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주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자 하다가 감사하는 마음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했으나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지 못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가를 깨닫고 주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다 마리아와 같이 말씀을 공부하고 싶고 마르다와 같이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같은 마음으로 마르다와 같이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결론: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사단에게 얻어맞아 멸망해 가고 있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희생적인 사랑으로 돌봐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섬김과 사랑으로 살아 났습니다. 우리도 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죄로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돌봐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