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제 2부 3 강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말씀/ 누가복음 11:1-13
요절/ 누가복음 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말씀, 기도, 찬송은 신앙생활의 삼위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기도는 영적 성장에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를 배우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없으며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은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자 누가는 여러 곳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3:21,5:16,6:12,9:18,28,22:44,23:34). 이는 예수님의 인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이를 가리켜 주기도문 이라고 합니다. 주기도문은 지난 20세기 동안 100개 이상의 언어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암송되어져 왔습니다. 주기도문에는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할 내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5-13절은 기도의 자세에 관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I. 기도의 내용(1-4)
1a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도를 사랑하시고 기도에 힘쓰셨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받으실 때나 열 두 제자를 택하실 때나 제자들이 신앙 고백을 하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3:21,6:12,9:18). 또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으며 십자가 상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22;44,23:34). 예수님은 이렇게 중요한 사건 때만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습관을 좇아 기도하셨습니다(22:39). 한마디로 예수님의 생애는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기도로 인류 구속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기도는 예수님의 복음 사역의 원동력이었습니다.
1b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아마 그는 요한의 제자들과 경쟁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종일 일하시지만 조금도 피곤한 기색없이 능력있게 일하시는 모습을 보아왔습니다. 반면 자신들은 잠을 충분히 자고 일도 별로 하지 않았는데도 쉽게 피곤하고 틈만 있으며 졸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그 비결을 알고 싶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기도가 모든 능력과 지혜의 원천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기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그들의 관심은 주로 먹고 쉬고 잠자는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혹시 초청 건수가 없는가에 신경을 썼습니다. 또 서로 누가 크냐 하는데 지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소원은 저차원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기도가 비현실적이고 어리석게 보였고 시간 낭비같이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신앙고백을 한 후로 그들의 영적 눈이 떠져서 기도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배우고자 하는 영적 소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시는 예수님에게서 영광과 위엄과 거룩하심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본받아 기도하고자 하였으나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기도문은 크게 하나님을 위한 기도와 우리를 위한 기도로 나누어집니다. 처음 세 부분은 하나님을 위한 기도요 나머지 세 부분은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첫째, 아버지여: 이는 호격입니다. 마태복음 6:9절에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육신의 아버지와 구별됩니다. 아버지여 이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기본적으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임을 말해 줍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인간들이 감히 가까이 할 수 없는 거룩하신 분으로만 생각됩니다. 또 높은 보좌에 앉으셔서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요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자애로운 아버지가 되십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보호해 주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줍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의지의 대상이요 신뢰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에 대해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무능력한 아버지, 무관심한 아버지, 잔인한 아버지, 율법적인 아버지를 기억하고 하나님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이요 우리의 죄를 위해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고자 하시고, 또 공급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과거 우리는 사단의 자식이었으나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피로 구속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롬8:14,15). 우리가 기도할 때 아버지여! 라고 부르면 세상에서 피곤하고 지친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심령에 참 평안과 안식과 새로운 힘과 용기를 덧입게 됩니다. 이 얼마나 큰 영적 축복입니까? 이제 우리는 기도할 때 아버지여 라고 부름으로써 이러한 영적 축복을 누려야겠습니다.
둘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것은 첫번째 기도제목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거룩이란 구별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피조물과 구별됩니다. 또한 죄와 구별된 순결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가까이 할 수 없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계시록 4:8절에서 천사들은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찬송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또한 계시록 4:11절에서는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라고 찬송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서 피조물로부터 마땅히 영광과 존귀와 섬김과 찬송을 받으셔야만 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였습니다(롬1:21). 하나님을 적금통장보다도 못하게 여깁니다. 그 결과 인간들은 금수와 버러지를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되고 욕심과 정욕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롬1:23-27). 이런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인생들로부터 영광과 존귀와 찬송을 받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를 통하여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수가 있습니까? 이는 실생활 가운데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아시안 게임에서 많은 운동선수들이 금메달을 딴 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학생으로서 공부를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환경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건강이 좋을 때나 몸이 아플 때나 순탄한 신앙생활을 할 때나 핍박을 받을 때나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환경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건강이 좋을 때나 몸이 아플 때나 순탄한 신앙생활을 할 때나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축복을 주실 때는 감사하다가 핍박을 받거나 일이 잘 안될 때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으 돌리지 못하게 됩니다. 욥은 사단의 시기로 하루 아침에 수많은 재산과 사랑하는 자식들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때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라 (욥기1:20,21). 요셉은 아버지 집에 있을 때나 노예로 팔려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나 감옥에 있을 때나 총리가 되었을 때나 그 어디서나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주어고 자기는 목적어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하려면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 불신자들과 구별된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니라 (레11:4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육체의 쾌락을 위해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순결한 생활을 하며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좆아 살 때 가능합니다(시119:9-11). 우리가 죄악된 세상에서 이렇게 세상사람들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셋째,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 믿는 자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성경은 실락원과 복락원의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를 상실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지리적인 위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나라이 임하옵시며 는 하나님께서 다스려 주옵소서 라는 뜻입니다. 세상은 타락 이후 사단이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사단이 다스리는 곳에는 두려움과 불안 ,분열과 싸움 ,살인과 음란 등의 갖가지 죄악과 허무,절망, 운명과 같은 사망권세가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에는 사랑과 평화 은혜와 생명, 공의가 차고 넘칩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실 때 행복이 차고 넘치게 됩니다. 사람들이 괴로운 인생을 사는 이유는 사단의 다스림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전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는 인종과 문화와 성격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와 사단의 지배를 받는 사단의 자녀인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또 세상에는 150개국 이상의 나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에 크게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로 나누어집니다. 세상은 선과 악, 정의와 불의, 빛과 어두움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와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사단에게 빼앗긴 영역을 되찾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군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한국과 전 세계에 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10절에서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는 말씀이 있으나 누가복음에서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 의미가 같기 때문입니다.
넷째,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넷째부터는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당시는 플라톤의 영향으로 영혼은 선하지만 물질은 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이 기독교에 침투하여 영지주의가 생겨났습니다. 사람들은 물질을 경시하고 육체를 학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육체도 중시하고 실제적인 삶을 위해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
이 기도에서 우리는 두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왜 주용할 양식이나 달용할 양식이나 년용할 양식을 구하도록 하지 않으시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을까요? 이는 욕심을 부인하고 날마다 하나님을 겸손히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먹을 것이 많고 배가 부르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신명기는 이를 염려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가서 잘 먹고 잘 살면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지 말라고 반복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내가 직장에 다니고 내가 일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먹이시고 키우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햇빛과 비를 주시지 않는다면 어찌 농사를 지을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얻을 건강과 지혜와 능력을 주시지 않는다면 어찌 얻을 수 있겠습니까(신8:17,18a).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으며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롬11:36)
둘째는, 우리 라는 사상입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지 않고 우리에게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이기주의를 배격하고 공동체 의식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형제 자매입니다. 그러므로 다 같이 나누어 먹어야 됩니다.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이기주의 사상이 나라를 망치고 국제사회를 망치고 있습니다. 선진국에서는 너무 잘 먹어서 비대증에 걸려 갖가지 병마에 시달립니다. 또 후진국에서는 못 먹어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있는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과 나누어 먹는다면 이 땅에는 굶주린 자들이 없을 것입니다.
다섯째,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자를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 육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양식이 필요하듯이 영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죄 사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분리시켜 결국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게 합니다. 죄는 또 인간과 인간 사이도 파괴시킵니다. 죄는 암과 같아서 인간을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다 못쓰게 만듭니다. 또 죄는 문둥병과 같아서 인간을 추하고 더럽게 만듭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읍니까? 이는 우리의 비상한 노력이나 선행과 같은 행위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죄는 헬라어로 빚 이라는 의미와 동일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엄청난 빚을 졌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로 탕감해 주셔야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죄 사함을 간구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가장 큰 문제는 서로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마음의 상처를 주고 나에게 죄를 범한 자에게는 앙심을 품고 복수의 칼을 갑니다. 그러나 복수는 복수를 불러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어떤 분은 이복 동생과 이복 형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복수심을 품고 공부하다가 영적 눈이 어두워져서 신앙 생활조차 멀리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용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에서 형제의 죄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한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떤 임금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불쌍히 여겨 그 엄청난 빚을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친구의 목을 잡고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었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몇 조원과 같이 상상할 수 없는 거액의 돈이요, 백 데나리온은 150만원 정도 되는 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것은 일만 달란트이지만 형제가 나에게 빚진 것은 백 데나리온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마18:35)
여섯째,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 세상은 악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 (벧전5:8)고 하였습니다. 사단의 시험은 유혹입니다. 사단은 정욕과 물질욕과 명예욕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 유혹은 부드럽고 강하기 때문에 우리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단의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막14:38a). 우리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승리의 삶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II . 기도의 자세(5-1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의 내용을 가르쳐 주신 후에 계속해서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5-8절은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친구가 여행 중에 배고프고 지친 모습으로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마침 먹을 것이 다 떨어져서 그를 먹일 양식이 없었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미안하다고 하고 돌려 보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찌하든지 그를 먹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밤중에 다른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이미 문을 닫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는 염치불구하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벗이여 떡 세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그러나 그 친구는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는 몇번 문을 두드리다가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치 않고 계속해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안에서 잠을 잘 수 없도록 끈질기게 두드렸습니다. 배고픈 친구를 먹이고자 하는 목자의 심정은 그로 하여금 체면과 자존심을 넘어서서 끈질기게 간구하게 하였습니다. 그 친구는 마침내 견딜 수 없어서 일어나 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찌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강청한다는 것은 포기치 않고 끈질기게 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기초로 적극적인 자세로 기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이는 적극적이고 끈질긴 자세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주님께서는 반드시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10). 야고보 선생님은 우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며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고 하였습니다.(야고보서 4:2b,3)
11-13절을 보십시오. 아비된 자가 자식이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줄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악할찌라도 자식에게 만큼은 좋은 것을 줄줄 압니다. 하물며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자녀된 우리에게 가장 좋은 성령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고 하였습니다(8:32).
그러면 성령이 왜 가장 좋은 선물이 됩니까? 성령은 보혜사로서 우리의 카운슬러가 되십니다(요14:16). 우리에게 힘이 필요할 때 힘을 주시고 위로가 필요할 때 위로를 주십니다. 또 성령은 필요한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요14:26,16:13).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며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갈5:22,23).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롬8:26,27).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을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