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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2:13-34

by Mark Yang   04/23/2022  

Message


누가복음 제 2부 6강

오직 그의 나라를 구하라

말씀/ 누가복음 12:13-34
요절/ 누가복음 12:31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오늘 본문에는 두가지 교훈이 나옵니다. 첫째는 재물에 대한 탐심을 물리치라는 것과 둘째는 생활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재물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하는 올바른 물질관과 염려 대신 해야 할 바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참으로 부요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 배워야겠습니다.

I.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13-21)

13절을 보십시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말했습니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재산의 상속은 장자에게는 소유의 두 몫을 주고 동생에게는 한 몫만 주게 되어 있습니다(신 21:17). 그런데 형이 동생의 몫까지 다 차지해 버린 모양입니다. 동생은 화가 나서 “형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며 대들었습니다. 그러나 형님은 권위로 이를 묵살해 버렸습니다. 물질 때문에 형과 동생은 서로 심하게 다투게 되고 형제 사이의 의도 깨어졌습니다. 오늘날도 물질 때문에 형제간에 싸우고 원수같이 지내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동생은 예수님께 나아와 문제를 아뢰고 순수하게 도움을 요청하기보다 일방적으로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누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로써 물질에 대한 탐욕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권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14). 그리고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셨습니다(15a). 예수님은 형제 사이에 일어난 다툼의 원인이 탐심에 있음을 보시고 근본문제를 해결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예수님은 어떤 종류의 탐심도 용납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탐심이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탐심, 먹는데 대한 탐심, 권세와 명예에 대한 탐심, 육신에 대한 탐심 등 갖가지 탐심이 있습니다. 이런 탐심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죄를 낳게 하는 근본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님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의 탐심을 물리치기 못할 때 도적질하게 되고 살인하게 되고 간음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마음의 탐심이 겉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온갖 탐심을 부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탐심이 죄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계명 중 마지막 계명은 탐심에 대한 계명입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모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출 20:17) 사도 바울은 율법이 탐심이 죄라고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로 알지 못하였으리라 말했습니다(롬 7:7). 우리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쳐야 할 절대적인 이유는 탐심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탐심은 우상 숭배와 동일한 죄로 취급 될 만큼 심각한 죄입니다(골 3:5). 사람이 탐심의 노예가 되면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을 숭배하게 됩니다(롬 1:23).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탐심을 부리게 됩니까? 15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생명은 행복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탐심이 부리는 이유는 많은 재물을 소유하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닌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 나가는데는 실제적으로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돈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돈이 없으면 입고 싶은 잠바도 살 수 없고 예쁜 브라우스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돈이 있으면 원하는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돈이 있고 없고에 따라 사람의 행불행이 좌우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악착 같이 돈을 벌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 많은 물질을 소유하면 행복할줄 생각하지만 정작 많은 소유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전혀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물질에 대한 탐심으로 더 많은 물질을 모으고자 인색해지고 이기적이 되어 버립니다. 또한 많은 물질로 죄를 짓고 타락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물질은 삶을 영위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사람에게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얼마나 많이 소유했느냐(to have)에 있지 않고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to be)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한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16-18절을 보십시오. 한 부자가 열심히 밭에 소출이 풍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를 어찌해야 될지 몰라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묘안을 생각해 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물건과 곡식을 쌓아 두리라.” 그는 즉시 큰 창고를 짓고 많은 곡식과 물건을 쌓아 두었습니다. 그는 재산 관리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그는 많은 재산을 보니 마음이 흡족하여 배를 두드리며 자기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영혼아 여러 해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9) 부자는 열심히 일하여 번 물질로 인생을 엔죠이하며 멋있게 살아 보고자 했습니다. 날마다 호텔에 가서 뷔페 음식을 먹고 샴페인이나 꼬냑을 마시며 골프를 치고, 여름에는 수상스키를 타고, 가을에는 한강 유람선을 타고 단풍놀이를 하며, 겨울에는 실내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며 멋있게 인생을 즐기고자 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멋있고 지혜로운 자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그리고 예수님은 비유의 결론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리라.”(21) 예수님은 이 부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어리석다는 말은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부자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서 물질을 어떻게 가치있게 쓸 것인가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열심히 일하여 곡식을 쌓아 두었으니 인생을 즐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날 밤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면 그가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습니까? 그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가 어떤 점에서 어리석은 자입니까?

첫째로, 그는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몰랐습니다. 그는 생명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원하는대로 쓰고자 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아무도 자기가 태어나야 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이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생명이 내 것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는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2:7절은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말해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이 된지라.”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오 우리는 생명의 청지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므로 또 언제든지 취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을 위하여 써야 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며 자기가 생명의 주인인양 마음대로 행합니다(시 14:1). 그러다가 갑자기 패망을 당하여 생명을 잃게 됩니다. 부자는 육신의 생명을 위해서는 열심히 준비했으나 영혼을 위해서는 전혀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둘째는, 그는 무엇을 위해 재물을 써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는 재물을 모으는데는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갔으나 재물을 쓰는 지혜가 없었습니다. 재물을 모으는 것보다 쓰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재물을 버는 연구는 많이 하지만 이를 어떻게 지혜롭게 쓸 것인가라는 별로 연구하지 않습니다. 부자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는 재물을 모아 자기를 위해서만 쓰고자 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는 부요했으나 하나님께는 인색했습니다. 그는 온통 자기 밖에 생각지 못했습니다. 본문에는 ‘내’라는 말이 6번 나옵니다. 영어에는 11번 나오고 원어에는 12번 나옵니다. 그는 ‘내 곡간’ ‘내 모든 곡식’이라고 함으로써 모든 것이 다 자기 것인양 생각했습니다. 그에게는 물질에 대한 청지기 사상이 없었습니다. 물질은 내가 벌고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내 것이 아닙니다. 무질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의 청지기일 뿐입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갑니다. 욥은 물질에 대한 분명한 청지기 사상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하루 아침에 재산을 다 잃었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아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사람이 물질에 탐심을 부리고 자기 것을 열심히 꾸리지만 죽을 때는 하나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카네기는 자기와 같은 거부도 죽을 때는 빈손으로 간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 관 밖으로 빈 손만 내놓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윤성현 목자 아버님이 시골에서 올라 오셔서 윤성현 목자에게 졸업하고 군대 가기 전까지 무엇을 하려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윤성현 목자는 서울에 남아서 목자생활하며 인턴훈련을 받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님은 참 좋다고 하시며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며 나도 이제 열심히 예수님을 믿어야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당한 사건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아버지 친구가 돼지 사육장을 멋있게 짓고 많은 돼지를 사서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 짐자전거를 모록 시내로 돼지 먹이를 구하러 가다가 봉고차와 부딪혀 식물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리고 꾸리지만 실상은 우리 인생이 언제 어떻게 될지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고 말했습니다. 얼마전 종로의 최사무엘 목자님 집에 불이 나서 완전히 잿덧미가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사기 그릇까지도 녹아서 못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사무엘 목자님은 두가지 사실을 깨달으셨다고 합니다. 첫째는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항상 깨어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에만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역사와 양들을 위해 쓰는 것만 남는다는 것입니다. 불타기 전날 옷이 작아서 양에게 주고자 세탁소에 맡겨 둔 것만이 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사이는 목자들 중에는 ‘주는 것만이 남는다’는 생각으로 양들에게 주는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쓴 것은 하나도 남지 않고 하나님 역사를 위해서, 양들을 위해서 쓴 것만이 남습니다. 자기와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 물질을 쓰는 자는 지혜로운 자 같지만 참으로 어리석은 자입니다. 이런 자는 많은 재물을 있을지라도 가난하게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 역사를 위해서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쓰는 자는 어리석은 자 같지만 가장 지혜로운 자요 가난한 자 같지만 가장 부요한 인생을 사는 자입니다.

II. 염려하지 말라 (22-34)

제 1부에서는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부요치 못한 자들에게 주신 교훈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 2부에서는 하나님께 부요한 자들에게 생기기 쉬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은 자들로서 하나님께 부요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결핍에서 오는 실제적인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의 일을 하다가 항상 간단하게 살아야 되지 않는가 하는 염려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현재는 먹고 살지만 장래는 혹시 굶어 죽는 것이 아닌가? 내 한 몸이면 괜찮지만 가장으로서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할 것을 생각하면 근심의 먹구름이 심령에 몰려왔습니다. 염려가 생기면 심령이 어둡고 기쁨이 사라집니다. 갑자기 얼굴이 연탄 장사와 같이 새까맣게 되고 spirit이 사라지고 무기력해집니다. ‘염려’의 원뜻은 분열이라는 뜻입니다. 염려는 하게 되면 마음에 분열이 생겨 마음을 바쳐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기 때문입니다(23).

예수님은 까마귀와 백합화를 예를 들어 제자들의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까마귀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아니합니다.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먹이시고 기르십니다. 하찮은 새도 이렇게 귀히 여기시는데 그들은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합니까? 또 실제로 염려한다고 해서 조금도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염려함으로 키가 커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열심히 염려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염려해도 키는 커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염려하면 몸이 졸아들어 키가 더 작아집니다.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능히 해결 못하면서 어찌 다른 것을 염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26)?

27절을 보십시오. 백합화는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합니다. 솔로몬의 영광은 인간 최고의 영화를 상징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아름다운 의복을 만들어 입는다 해도 백합화의 청순함과 그윽한 향기와 아름다운 색깔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입히시는데 하물며 제자들이야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우리는 아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실제 문제에 부딪히면 염려가 생깁니다. 염려해도 소용없는 줄 잘 알면서도 염려가 생기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염려가 왜 생기는 것이며 우리가 이를 어떻게 물리칠 수 있습니까? 28b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염려는 불신에서 생기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염려는 대개 현재보다는 장래의 일에 대해 많이 합니다. 현재에 먹고 살면서도 장래에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염려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결혼하는 것을 보면 나는 언제 누구하고 할 것인가 염려합니다. 지금은 아이들이 작아서 괜찮지만 크면 어떻게 공부시킬 것인가? 지금은 젊어서 괜찮지만 늙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노후 대책까지 염려합니다. 어떤 자매님은 결혼하기도 전에 염려의 공장장의 되어서 기발한 염려를 만들어 내어 염려합니다. 우리는 실제 생활에서 믿음으로 염려를 극복하는 벌을 배워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다.”(빌 4:6)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염려가 생길 때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하나님께서 어찌 그 아들과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롬 8:32)?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어떻게 먹이시고 백합화를 어떻게 입히시는가 생각하며 보라고 하셨습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consider 즉 심사숙고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불신에 빠져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현실문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생각해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비참한 나를 돌아보시고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현재도 먹이시고 입히시고 인도하시고 장래에도 돌봐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하나님을 생각하면 나를 괴롭히는 모든 염려와 근심 걱정이 눈녹듯이 사라지고 대신에 감사와 은혜와 평강이 차고 넘치게 됩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도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것은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땅히 구해야 할 바가 무엇입니까? 31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절에서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으나 여기서는 ‘오직’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인생의 소망과 목적을 하나님 나라에만 두고 힘써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먹고 사는 문제에만 얽매일 때 평생 버러지와 같이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할 때 인생다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넘치도록 축복해 주십니다. 이는 신실하신 우리 주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때까지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사는 자들을 한번도 실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대다수가 물질 중심으로 살고 믿음으로 사는 자는 소수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 문제에 부딪힐 때 두려워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그의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땅에서 적극적으로 해야할 일은 우리의 소유를 팔아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구제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시간을 팔고 물질을 팔고 청춘을 팔아서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구제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늘에 보물을 쌓는 가장 안전한 투자입니다(33).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34). 물질을 쓰는 것은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선한 사업에 쓰며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자는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는 것이요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딤전 6:18).

우리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되지 않도록 모든 탐심을 물리쳐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우리의 소유를 팔아 생명을 구원하는 하나님 나라의 일에 힘써야 겠습니다. 이때 우리는 진정으로 풍성하고 생명이 넘치는 윤택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