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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2:35-59

by Mark Yang   04/23/2022  

Message


누가복음 제 2부 7 강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청지기

말씀/ 누가복음 12:35-59
요절/ 누가복음 12:42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
                     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 시대를 맡아 섬기는 영적 지도자들이 되어야 할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충성되고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어 때를 따라 양무리를 먹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주인에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쓰실만한 충성되고 지혜로운 청지기로서 성장해야 겠습니다.

. 깨어 있으라(35-40)

 35절을 보십시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이 말씀은 제자들이 어떤 자세로 예수님을 기다려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중동지방 사람들은 통으로 짠 긴옷을 입었기 때문에 일을 할 때는 반드시 옷을 걷어 올리고 허리에 띠를 띠어야 했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는 것은 깨어 긴장된 자세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엡6:14),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라고 말씀하십니다(벧전1:13). 신앙생활은 허리에 띠를 띠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깨어 영적인 투쟁을 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영적 긴장을 풀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사단의 시험에 들게 됩니다.

  등불을 켠다는 것은 어두움을 밝히는 빛된 생활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5:16절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불신자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친다면 이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가장 나쁜 일입니다. 불신자들은 우리의 말하는 것보다 실제 생활을 봅니다. 우리는 실생활에서 착한 행실을 통해 불신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것이 등불을 켜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치 어떤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하는가 말씀해 주셨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유대인들의 혼인잔치는 저녁 해 질 때부터 시작하여 밤이 늦도록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종들은 깨어 혼인 잔치 집에 간 주인을 밤늦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초저녁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차츰 밤이 깊어 갈수록 기다리기가 힘이 듭니다. 저는 어릴 때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서 자란 적이 있습니다. 그 때는 8-9시만 되면 호롱불을 끄고 잠을 자서 새벽 일찍 일어났습니다. 예수님 당시도 전깃불이 없었기 때문에 저녁 일찍 잠을 잤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11시, 12시, 1, 2시 까지 깨어 있는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종은 하루 종일 열심히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저녁이 되면 몹시 피곤하여 잠이 잘 올 것입니다. 그런데 쏟아지는 잠을 물리치고 깨어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졸음을 이기는 것처럼 힘든 일은 없습니다. 사람이 졸음이 올 때 눈꺼풀이 아래로 내리 누르는 힘은 3만 파운드나 된다고 합니다. 쏟아지는 잠을 이기고 깨어 있기 위해서는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피나는 투쟁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깨어 있을 때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리면 곧 나가서 열어 줄 수 있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와서 수종하리라.  주인이 집에 돌아왔을 때 불이 꺼져 있고 아무리 두드려도 문을 열어 주지 않고 종들의 코고는 소리만 들린다면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그러나 주인이 왔을 때 종이 등불을 켜고 즉시 나와 문을 열어 준다면 주인은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주인은 너무 감사하여 직접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와서 섬길 것입니다. 종이 주인의 섬김을 받는 것은 가장 영광스럽고 축복된 일입니다. 이는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깨어 빛된 생활을 한 성도들이 누릴 영적 축복입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주인이 혹 이경이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이경은 9-12시, 삼경은 12-3시 입니다. 이때는 한밤중이기 때문에 가장 깨어 있기 힘든 때입니다. 그런데 그 때까지도 깨어 있는 종들은 정말 복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왜 이렇게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까? 이는 언제 주인이 올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9, 40 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도적같이 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적은 자기가 올 때를 알려 주지 않고 방심할 때 갑자기 옵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예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지 않은 때에 갑자기 오실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점점 죄악의 밤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노아시대 사람들같이  영적인 것에는 무관심하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 여념이 없습니다. 소돔, 고모라 시대와 같이 음란이 극에 달해 있습니다. 죄악의 밤이 깊어가는 만큼 깨어 있기도 힘듭니다. 이는 세상의 유혹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유혹에 넘어가 영적인 잠을 잔다면 우리의 영혼이 파멸하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이 살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언제 오실런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오실지 내일 오실지, 금년에 오실지 내년에 오실지, 10년 후에 오실지 알 수 없습니다. 또한 내가 언제 주님께로 갈지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밤이 깊어가는 것을 볼 때 주님 오실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11-14절에서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어거스틴은 이 말씀을 읽고 깊은 영적인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 후 그는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영적으로 졸고 있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 가정에서 캠퍼스에서 직장에서 빛을 발하는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언제, 어느 때 오시더라도 부끄럼이 없는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특히 오늘날 캠퍼스는 참으로 어둡습니다. 빛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육신의 정욕과 방탕에 빠져 있습니다. 또한 자의식과 패배의식과 운명주의에 사로잡혀 중풍병자와 같이 드러누워 있습니다. 장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해 떨어지는 가을 낙엽을 밟으며 고독과 허무에 몸부림 치며 유리방황 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좌경 사상에 물들어 사회주의가 우리에게 참 자유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처럼 믿는 자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캠퍼스는 그 어느 때보다 복음의 빛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가 깨어 캠퍼스에 복음의 빛을 비추지 아니할 때 어두움의 세력이 캠퍼스를 삼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횃불로 캠퍼스를 밝힐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참으로 중대합니다.

. 충성되고 지혜로운 청지기(41-48)

  41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잠이 많은 베드로는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 부담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또한 지금 잘 하고 있는데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가 설마 나에게 하는 말씀은 아니겠지 하는 심정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4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여기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어떤 자가 되기를 원하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충성된 청지기: 우리말 성경에는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로 되어 있으나 헬라어 원어에는 충성이 지혜보다 먼저 나와 있습니다. 영어에서도  The faithful and wise manager 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장 먼저 충성된 청지기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청지기란 주인의 재산과 종들을 맡아 관리하는 자를 말합니다. 자녀의 교육까지 담당하는 청지기도 있습니다. 청지기는 종에서 발탁되는 경우도 있었고 자유인을 고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청지기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자격은 충성이었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재능이 많다 할찌라도 충성심이 없을 때 결코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충성이란 무엇입니까? 충성이란 변함 없이 지속적으로 꾸준히 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쁘거나 손해를 보거나 어떤 경우에도 한번 정한 것은 변하지 않고 맡은바 사명을 꾸준히 감당합니다. 또 충성에는 진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거짓되고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이 모르게 주인의 재산을 빼돌립니다. 그러나 충성된 자는 정직합니다. 주인이 보나 안보나 정직하게 행합니다. 무엇보다 충성된 자는 책임성이 강합니다. 맡은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책임성 있게 해냅니다. 핑게가 없습니다. 이렇게 충성된 자는 한마디로 신뢰할 만한 자입니다. 주인이 안심하고 재산과 종들을 맡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충성된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딤후 2:1절에서 충성된 자에게 부탁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고전 4:2절에서는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가 되려면 가장 먼저 충성심을 배워야 합니다. 충성심이 없는 자는 어딜 가나 환영 받지 못합니다. 이는 영적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자는 인생 파산을 당하고 맙니다. 저는 한 청년이 재능은 많지만 충성심이 없기 때문에 전혀 믿음이 자라지 않고 쓸모 없이 되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를 통해 충성심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충성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변함 없이 충성할 수 있고 진실할 수 있고 책임성이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눈초리를 의식하며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고자 애씁니다.

둘째, 지혜로운 청지기: 무슨 일을 하든 충성심과 함께 지혜가 필요합니다. 충성되지만 지혜가 없을 때 주인의 재산과 종들을 잘 관리할 수 없습니다. 물질과 종들을 잘 관리하여 주인에게 유익을 남기려면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혜가 없어서 양들을 잘 돕지 못하여 실족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사람도 잘 돕고 일도 잘 처리합니다. 지혜는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잠3:15-17).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잠언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하였습니다(잠9:10). 지혜는 꾀와 처세술과는 다릅니다. 참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데서 나옵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알 수 있게 되고 사람을 바로 도울 수 있습니다. 또한 지혜는 겸손히 배우는데서 생겨납니다. 교만한 자의 특징은 남에게 배우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쓸모 없는 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배우는 자는 처음에는 좀 부족하지만 점점 성장하여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무엇보다 지혜가 부족할 때 지혜의 근원되신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야고보1:5)고 하였습니다. 솔로몬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구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셨습니다.(왕상3:9-12)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 시대 양무리들을 맡아 때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는 충성되고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충성되고 지혜로운 청지기는 주인의 마음을 잘 알고 주인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이런 자는 주인에게 많은 유익을 남기고 주인에게 없어서는 안될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의 마음을 알고 자발적으로 헌신하기를 바라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충성되고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어 때를 따라 양들을 잘 먹일 때 주인으로부터 어떤 상급을 받게 됩니까? 43,44절을 보십시오. 주인이 이를 때에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습니다. 주인은 그를 깊이 신뢰하게 되어 더 많은 일을 맡기게 됩니다.

  그러나 신실치 못한 종은 어떻게 합니까? 그는 주인이 더디 오리라 생각하고 먹고 마시는 방탕한 생활을 하며 노비를 마구 때립니다(45). 처음에는 혹시 주인이 오지 않을까 두려워 하다가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오지 않자 이제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자행자지하게 됩니다. 이런 자는 결국 어떻게 됩니까? 생각지 않은 날 주인이 갑자기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게 됩니다(46). 47,48절을 보십시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자는 적게 맞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으시고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되고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많이 받은 자는 특권을 자랑하기 보다 책임을 감당해야 됩니다. 또 적게 받은 자는 남과 비교하여 열등감에 빠질 것이 아니라 받은 만큼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럽게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학생들로서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들에 비해 많이 받은 자입니다. 또한 성경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힘써 맡은바 책임을 감당하지 않을 때 많이 맞을 것입니다.

. 진정한 평화 (49-59)

  4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고 하십니다. 불은 더러운 것을 태우고 정결케 합니다. 예수님이 오기 전에 세상은 죄악으로 더러워져 있었습니다.예수님은 성령의 불로 죄악을 태우시고 깨끗케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성한 성령의 역사를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세례를 받아야 하셨습니다. 세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죽으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반드시 십자가를 지셔야만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사망권세를 파하셔야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이루시기까지 심령이 답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 권세가 파하여 졌습니다. 그후 사도행전에서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불이 붙기 시작했습니다.(행2:3)

  51절을 보십시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은 분쟁케 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고 말합니다. 어느 정도로 분쟁케 하십니까? 52, 53절을 보십시오. 다섯 식구가 있는데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게 됩니다. 아비와 아들이 싸우고 어미와 딸이 싸우고 시어미와 며느리가 싸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왜 화평을 주시지 않고 분쟁케 하십니까? 이는 진정한 화평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인간 사이가 좋은 것을 화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화평이 아닙니다. 진정한 화평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할 때 생겨납니다(롬5:1). 한 사람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살게 되면 그 때부터 그 집에는 분쟁이 시작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어머니와 딸 사이에 갈등이 시작됩니다. 특히 조상을 숭배하는 집에서는 그 갈등이 더욱 뚜렷이 나타납니다. 이는 피할 수 없는 갈등입니다. 이는 단순히 인간 간의 갈등이 아니라 빛과 어두움의 싸움이요 하나님과 사단과의 싸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가정이 평화로와야 하는데 왜 더 시끄러워 지느냐고 말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가정에 풍파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또 남의 집 귀한 자식 데려다가 가정에 평지 풍파를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미안한 생각이 들어 분명하게 진리를 가르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분쟁을 통해서 가정 복음화가 이루어지고 진정한 평화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모든 식구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예수님께서 그 집의 왕이 되실 때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쟁이 일어날 때 어떤 모양으로든지 식구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54-59절은 시대를 분변하고 예수님과 화해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소나기가 올 것을 생각하고 빨래를 걷고 우산을 준비합니다. 또 남풍이 붊을 보면 심히 더울 것을 생각하고 선풍기를 준비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천지의 기상을 분변할 줄 알면서 그 시대는 분변하지 못했습니다(56). 사람들은 그 시대가 얼마나 악한 시대인가를 알고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대를 분변하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진리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고 있는 복음 역사를 보고도 스스로 옳은 것을 판단치 아니했습니다(57). 예수님은 그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56a). 그들이 죄를 회개치 않고 예수님을 영접지 아니할 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58,59).

결론: 주님께서는 이 시대 양무리를 맡아 때를 따라 말씀을 나누어 주는 충성되고 지혜로운 청지기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깨어 영적인 투쟁을 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쓰실 만한 충성되고 지혜로운 청지기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