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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3:1-17

by Mark Yang   04/23/2022  

Message


누가복음 제 2부 8강

회개치 아니하면 망하리라

말씀/ 누가복음 13:1-17
요절/ 누가복음 13:3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9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불의의 사고를 기초로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그리고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6-9). 10-17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꼬부라진 여인을 고쳐 주십니다. 이를 본 회당장이 안식일에 고쳤다고 해서 분을 내자 예수님은 그가 외식을 회개하도록 책망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회개의 중요성과 회개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 배울 수 있습니다.

I. 회개를 촉구하신 예수님 (1-9)

1절을 보십시오.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님께 고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로마 식민치하에서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해 자주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은 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유대인들의 절기 때에 일어났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유월절 제사를 드릴 때 3000명이 제물처럼 학살당하기도 하고, 어떤 대는 2만명이 학살되어 성전 뜰이 시체로 가득찬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유대인 중에서도 갈릴리 사람들이 가장 반골 사상이 강했습니다. 이때도 어떤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데모를 하다가 빌라도가 보낸 로마 군인에 의해 무자비하게 살해되었고 빌라도는 그들의 피를 제물에 섞었습니다. 이 사건은 빌라도의 잔인함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그의 잔인함에 분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권세에 대항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민족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보고 운명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건을 예수님께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2절 말씀에서 볼 때 갈릴리 사람들이 비참하게 살해된 것은 특별히 다른 사람보다 죄가 많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왜 그들로 하여금 비참한 죽음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셨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모든 재앙은 죄의 결과요 하나님의 저주라는 생각이 뿌리박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재난을 당한 사람을 동정하기보다 정죄하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은 자기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인과응보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엇이라 대답하셨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 갈리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서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는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인간의 모든 불행이 근본적으로 죄 때문에 온 것은 사실입니다(창 3:7-14). 그러나 인간이 재난을 당하는 모든 원인이 반드시 죄 때문만은 아닙니다. 욥기는 인간이 당하는 불행이난 고난이 반드시 죄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신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의 시련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벧전 1:7). 예수님은 죽은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갈릴리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셨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아무 죄가 없는데도 그런 화를 당했다고 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 때문이다, 아니다 라는 신학적인 논쟁보다 이 사건을 기초로 회개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실로암 망대는 빌라도가 성전고에서 불법으로 인출한 자금으로 세웠습니다. 그래서 망대를 세우던 노동자들이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자 천 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기 때문에 그런 화를 당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의 사건은 인위적인 재난이며 뒤의 사건은 자연적인 재난입니다. 둘다 갑자기 당한 우발적인 사고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갑자기 이런 사고를 당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됩니다. 갑자기 암에 걸려 죽는다거나 교통 사고로 목숨을 잃습니다. 또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폭발하여 죽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저 사람은 무슨 죄를 많이 지었길래 저런 하를 당하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불행한 사건을 하나님께서 주신 경고로 받아들이고 회개할 기회를 삼아야 합니다.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은 나보다 죄가 더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은 죄인입니다.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불행한 사건을 통해 내 속에 있는 세상 욕심과 정욕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도 언제 그런 불의의 사고를 만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86년 아시아 게임 때 공항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 다수가 죽었습니다. 그 중에 한 연대생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연희 센타의 한 목자로부터 주일 예배에 나오라는 초청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공항에 갔다가 그런 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경고를 듣고도 회개치 않았습니다. 결국 A.D. 70년에 다망하고 말았습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는 회개를 촉구하시는 예수님의 준엄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이 경고의 말씀을 듣고도 계속 고집들 피우고 자행자지 한다면 갑자기 불의의 사고가 덮쳐 망하고 말 것입니다. 또 이 말씀 속에는 너희가 어떤 죄를 범했을지라도 만일 회개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회개를 통해 파멸에서 구원 얻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목자의 음성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회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첩경입니다. 회개를 통해 생명이 풍성한 인생을 살 수 있고, 회개를 통해서 땅의 것에 얽매인 인생에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거룩한 순례자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고 은폐할 대 죄의식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통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솔직히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진실되게 고백할 때 죄 사함의 은혜를 덧입게 되고 참자유와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진정한 회개란 무엇입니까?

첫째로, 자기와 세상을 향한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을 떠난 데서 왔습니다. 사람이 생각과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치 않고 하나님없이 살게 되면 그 순간부터 뿌리에서 잘려진 꽃과 같이 생명력을 상실하고 운명적이 됩니다. 살마들은 하나님 없이는 이세상에서 얼마든지 잘 살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인간의 한계에 부딪히게 되면 절망하고 좌절하고 결국 운명주의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깊은 허무에 빠져 육신의 쾌락에 몸을 맡기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을 버리고 그 마음이 자기와 세상으로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란 이렇게 자기와 세상으로 향한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고 자기 명예심을 구하는데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진정한 회개란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과학문명의 이기로 인하여 풍요롭고 편리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좀더 편한 삶을 추구합니다. 사람들의 소망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캠퍼스 지성인들에게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열심히 공부하여 보수가 많은 직장에 취직하여 멋진 배우자를 얻어 인생을 즐기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룬 후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절망을 안고 삽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또 직장에 다니면서도 문득문득 어두운 그림자를 보며 절망합니다. 인간은 세상에서 참된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것을 하늘에 떠다니는 한 조각 구름처럼 잠시 있다가 곧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은 슬프고 운명적이 됩니다. 우리가 슬픔과 운명주의를 극복하려면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두던 것에서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어떤 경우에나 절망하지 않고 밝고 희망찬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한 비유를 통해 우리가 반드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었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심은지 삼년이 지나야 열매를 맺습니다. 과원지기는 삼년 동안 온 정성을 다해 무화과 나무를 가꾸었습니다. 주인은 열매를 맺을 만한 때는 와서 열매는 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주인은 참고 그 이듬해 다시 왔으나 역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주인은 또 1년을 더 참았으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3년을 와서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을 수 없었습니다. 주인은 그 무화과 나무가 열매를 맺을 소망이 없음을 보시고 과원지기에게 찍어버리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과원지기는 주인에게 간청하였습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더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이 비유에서 주인은 하나님이요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백성 또는 모든 인간을, 과원지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 비유에서 진정한 회개는 열매 맺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시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그들을 먹이시고 돌봐주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것은 그들로부터 열매를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대한 열매는 무엇입니까?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택한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좇아 진리의 말씀대로 사는 구별된 삶이었습니다. 또한 세계 만민을 품고 섬기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는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세계선교의 사명을 버리고 자기 민족만 생각하는 유다이즘에 빠졌습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마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큰 지를 범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찍어 버리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을 참 이스라엘로 삼으셨습니다(벧전 2:9).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조각되고(8:29; 갈 5:22), 또 우리를 통해서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요 15:16).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매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지 못할 때 어떻게 하십니까? 7절을 보십시오. “이 무화과 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였으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겠느냐” 열매 맺을 수 있는 모든 환경을 만들어 주시고 또 3년이나 기다렸지만 열매를 매지 못할 때 찍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입니다. 그러나 과원지기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도록 간청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간청을 들으시고 인간에 대한 심판을 유예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 인간은 집행유예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에 마땅히 찍어 버리움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만 예수님의 은헤로 그 집행이 유예되었고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에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은혜를 남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생명과 인생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여 마음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는 맺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인내와 소망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을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크신 사랑과 풍성하신 긍휼로서 열매 맺지 못하는 인생들에게 소망을 두시고 오래 참으십니다. 다시 한번 우리의 마음 밭을 두로 파고 말씀의 거름을 주는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을 파서 갈아 엎을 때 마음 속에 감추어 있던 온갖 더러운 죄악들이 빛가운데 드러나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심정은 괴롭고 비참합니다. 자신이 그런 사람인 것에 놀라고 당황하여 멀리 도망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괴롭히고자 함이 아니라 열매 맺지 못하는 요소를 다 갈아 엎음으로써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낙심치 않고 우리가 좋은 열매 맺을 소망을 갖고 계십니다. 현재 비록 내가 너무 죄가 많고 간사하고 잘 넘어질지라도 예수님께서 나에게 두신 소망 때문에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또한 양들이 계속 약속을 어기고 힘든 소리만 한다 할지라도 예수님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며 돌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절망을 모릅니다. 예수님은 소망의 그리스도이십니다.

II. 꼬부라진 여인을 고쳐주신 예수님 (10-17)

10,1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에 그 곳에 한 병든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무려 18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조금도 펴지 못했습니다. 이 병은 기형성 척추염으로 척추뼈가 굳은 덩어리로 뭉쳐져 꼬부라진 병이었습니다. 이 여인의 고통이 어떠했겠습니까? 여인인 허리를 펴려고 노력할 때마다 눈동자가 불쑥 튀어나왔을 것입니다. 등이 꼬부라졌기 때문에 사람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고 땅만 쳐다봐야 했습니다. 잠을 잘 때도 편히 잘 수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18년 동안 한번도 안식을 얻지 못했습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외모는 중요합니다. 눈이 조금 작거나 얼굴에 종기만 나도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모임에도 잘 나오려 하지 않습니다. 이가 좀 고르지 않아도 환하게 웃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립니다. 그런데 허리가 꼬부라졌으니 어떠했겠습니까? 그는 절망하여 몇 번이나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인생은 위축되었으며 벌레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떳떳함이나 자신감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인간의 존엄성이나 아름다움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몸 뿐만아니라 마음도 꼬부라지고 성격도 꼬부라졌습니다. 그녀가 사람 앞에 서거나 모임에 나오면 자의식으로 인하여 더 꼬부라졌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된 것은 귀신 때문이었습니다. 귀신은 이 여인을 강하게 사로잡고 누르고 있었습니다. 귀신은 이 여인을 자기의 포로로 잡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또 만물을 정복자요 지배자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본래 인간은 위엄이 있고 당당했습니다. 존엄성과 아름다움을 가졌습니다. 인간은 본래 허리를 쭉 펴고 위를 보며 살도록 지어졌습니다. 인간은 위축되고 꼬부라진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인간의 죄를 틈타서 이 여인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누가 이 여인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누가 그 육신과 마음의 고통을 치료해 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이 여인의 고부라진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녀의 고통과 탄식을 아셨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은 한 영혼을 고치고자 하시는 열정으로 불타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 가르치는 것도 중단하시고 여인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회당안이 술렁거렸습니다. 그녀는 두려웠지만 믿음으로 나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그리고 안수하시자 여인의 꼬부라진 것이 곧 펴졌습니다. 얼마나 시원했겠습니까? 얼마나 기쁘고 감사 했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이 꼬부라진 여인을 펴게 했습니다. 그녀의 자존심과 아름다움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여인은 허리를 곧게 펴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야!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찬송가 410) 여인의 심령에는 찬양과 기쁨이 흘러 넘쳤습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기분이 안좋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회당장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을 보고 분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무리에게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고 말했습니다. 꼬부라진 여인이 허리를 펴고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회당장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분이나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는 권위주의와 형식주의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형식주의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통해 역사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형식에 매여서 그 속에 역사하는 성령의 역사, 생명의 역사,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하고 비판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가리켜 위선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으로 인해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그들은 어떤 점에서 위선자들입니까? 그들은 한 병든 영혼에 대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한 꼬부라진 영혼을 어찌하든지 구원하고자 하는 열정이 없었습니다. 회당장은 하나님의 종이요 양들의 목자였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병든 양에 대한 상한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어찌하든지 고쳐주고자 노력해야 했습니다. 자신들이 할 수 없으면 예수님께 부탁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탁은커녕 오히려 예수님께 대해 화를 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이라도 자신들의 소나 나귀를 풀어내어 끌고 가서 물을 먹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꼬부라진 여인보다 소나 나귀가 더 소중했습니다. 왜냐하면 소나 나귀는 쓸모가 있었지만 그 여자는 쓸모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위선을 회개해야 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예수님은 한 병든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어찌하든지 고쳐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혼을 구원코자 하시는 열정에 불타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양이라고 해서 무가치한 존재로 여지기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꼬부라진 여인도 아브라함의 딸이요 하나님 나라의 공주로 여기셨습니다.

오늘날도 사단의 권세에 사로잡혀 꼬부라진 인생을 사는 자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죄의식과 열등의식으로 꼬부라진 인생을 삽니다. 어떤 분은 가난한 가정과 파괴된 가정으로 인한 운명주의 때문에 꼬부라진 인생을 삽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꼬부라진 것을 펴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는 귀신이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고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되게 세상 욕심과 정욕을 회개하고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께서 그 크신 능력으로 꼬부라진 것을 펴 주십니다. 이때 우리는 능력있는 인생, 당당하고 떳떳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얽매임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