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제 2 부 9 강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말씀/ 누가복음 13:18-35
요절/ 누가복음 13:24a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오늘 본문에는 세가지 내용이 나옵니다. 첫째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 어떠함을 말해줍니다(18-21). 둘째는, 좁은 문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22-30). 셋째는, 자기 갈 길을 가시는 예수님입니다(31-35). 이를 통해 사명인이 가져야 할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고 하셨습니다. 이시간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뜻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18-21)
예수님은 한 병든 영혼을 고쳐주신 후 회당에서 계속해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심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해하기 쉽게 두가지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성격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겨자씨 비유: 19절을 보십시오.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겨자씨는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입니다. 볼펜으로 점을 찍어 놓은 정도로 작습니다. 그런데 이 겨자씨를 밭에 심으면 3-8m나되는 큰 나무가 됩니다. 그러면 배고프고 피곤한 온갖 새들이 찾아와 그 가지에 깃들여 안식을 얻습니다. 새들은 작고 까만 겨자씨 먹기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점에서 겨자씨와 같습니까? 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작고 보잘것 없지만 그 속에는 엄청나게 큰 나무로 자라날 수 있는 강한 생명력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도 처음에는 작고 보잘것 없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후에는 온 세상을 지배할 만큼 엄청나게 크게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외형적인 성장을 의미합니다 . 성경에서 큰 나무는 큰 왕국을 상징합니다.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든다는 것은 수많은 나라와 백성들이 그리스도 왕국안에서 쉼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겔17:23, 31:5,6)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했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나라는 당시 천하를 호령하던 로마 제국과 비교해 볼 때 너무나 초라하고 미미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에수님께서 무력한 아기의 모습으로 말구유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자라나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마침내는 로마를 정복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온 세계를 정복함으로 세계 만민이 그 안에서 쉼을 얻게 되었습니다. 반면 로마는 크고 강하여 영원히 망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생명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망하여 지금은 역사의 허무함을 말해주는 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역사도 겨자씨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12명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대부분 배우지 못한 무식한 어부 출신들이었습니다. 또한 세상 욕심으로 가득차고 거칠고 감정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인간 기초가 부족하여 어느모로 보나 지도자가 되기에 합당치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들이 장차 인류의 스승이요 대 사도가 될 희망을 가지시고 제자양성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당시에는 마치 어린아이들의 병정놀이와 같이 보였습니다.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주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이 역사를 눈여겨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양성 역사는 점점 자라나 마침내 온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우리가운데 자라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며 큰 비젼을 갖게 되었습니다. U.B.F역사는 30년 전 광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이 역사는 겨자씨와 같이 작고 미미했습니다. 그러나 이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였기 때문에 놀라운 생명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역사는 1960년대에는 전국적으로 성장했고, 70년대에는 미국과 서독 ,80년대에는 캐나다와 멕시코, 알젠틴, 방글라데쉬, 필리핀, 불란서,아프리카로 뻗어나가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인도, 호주 ,일본과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 국가에까지 뻗어나갈 것입니다. 우리 모임도 처음에는 겨자씨와 같이 보잘것 없었습니다. 1976년 고대 개척을 시작할 때 고대생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고대 조상인 백다윗 선교사(현재 시카고 UIC책임목자)는 당시 공군 일등병이었고 서마리아선교사(현재 서독 koln선교사)는 재수생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들로부터 시작된 고대 개척역사는 점점 자라나 10년이 지난 지금에는 몰라볼 만큼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저희는 작년부터 세계선교를 위해 자신을 헌신할 수 있는 그린베레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그린베레 목자들이 겨자씨와 같이 미미하고 보잘것 없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10년,. 20년이 지나면 많은 사람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는 거목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1대1 역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 이는 겨자씨와 같이 보잘것 없지만 이를 통해 온 세계가 복음으로 정복될 것을 믿습니다.
둘째, 누룩비유: 20,21절을 보십시오.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누룩은 적은 것이라도 가루 서말을 전부 부풀게 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있습니다. 누룩의 역사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가운데 내면 깊숙히 침투하여 큰 영향력을 미칩니다.
이 누룩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내면적인 변화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복음이 한 사람의 마음속에 심겨지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서서히 점진적으로 역사하여 마침내는 그 사람의 전 인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킵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렇게 변화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Luke Tiger 들은 작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부풀지 않은 빵과 같이 딱딱하고 맛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약 1년 동안 1대1 말씀공부를 통해 이제는 부드럽고 맛잇는 빵과 같이 변화되었습니다. 부에는 New Life 팀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나이도 많고 세상에서 온갖 죄를 다 지은 분들로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말씀 공부를 통해 복음이 그 심령에 역사하자 놀랍게 변화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양들과 말씀공부를 하는데 오랫동안 변화가 없는 것 같아서 심령이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조급한 마음이 들어 빨리 변화되도록 양들의 목을 잡아뽑게 됩니다. 그러면 양들 마음에 자라고 있던 말씀의 씨는 죽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자라나서 언젠가는 반드시 그 사람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복음은 한 개인을 변화시킬 뿐만아니라 가정과 사회도 변혁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16:31). 이 말씀은 한 사람이 복음을 영접하면 언젠가는 그 가정이 복음화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 변화된 한 사람을 통하여 캠퍼스가 복음화되고 직장이 복음화되고 마침내는 사회 전체가 복음화됩니다. 때로 우리는 내 주위에는 온통 불신자들로 가득차 있어 외로움을 느끼며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또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데도 주위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세상은 점점 나빠질 때 절망적인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게 모르게 불신자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세상은 내가 전하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변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낙심치 않고 꾸준히 1대1 역사를 감당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누룩과 같이 한국과 전 세계에 퍼질 것입니다.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22-30)
2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각 성과 각 촌으로 다니시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 기다리고 잇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힘든 상황가운데서도 이번이 마지막 전도여행이라 생각하시고 더욱 더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이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그가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각 성 각 촌에서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기는 듣는데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적은 것을 보고 이에 문제의식을 느낀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너무 힘들어서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니라. 예수님은 구원을 얻는 자가 왜 적은가라는 신학적인 부제보다 구원에 대한 자세가 어떠해야 되는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신 것을 보면 구원의 문은 좁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힘쓰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여기서 힘쓴다는 말은 Strive, Make every effort로서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 ,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운다 는 뜻입니다. 마치 씨름장에서 씨름 선수들이 사력을 다해 싸우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딤후2:3-6절에서 신자들을 싸우는 군사 , 경기하는 운동선수, 수고하는 농부로 비유했습니다.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마귀의 세력과 싸우는 자입니다. 또 육상 선수와 같이 승리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힘써 달리는 자입니다. 또한 농부가 열매를 얻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하는 것과 같이 수고하는 자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이 쉬운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힘드냐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무런 십자가도 없이 쉽고 편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세상 재미도 즐기면서 여유있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 7:13,14).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로 가고자 합니다. 넓은 길은 외롭지 않고 인생을 즐기면서 편안히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반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합니다. 그래서 찾는 이가 적습니다. 이 길은 십자가의 길이요 고난의 길입니다. 구원의 문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넓게 열렸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롬10:9,10). 그런데 사람들은 믿고 구원 받으면 다된 줄로 생각하고 세상 욕심대로 살아갑니다. 이런 자들은 구원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빌2:13,14).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9:23,24).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복음 신앙입니다. 이 복음 신앙은 시대가 어떠하든 간에 변개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 꿈과 이상을 부인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자기가 깨지는 아픔이 있습니다. 또 안일과 싸우고 자기를 희생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여유있는 생활을 하지 못하고 사명의 십자가 때문에 바쁜 생활을 해야 하는 아픔이 이습니다. 그러나 자기 부인과 십자가 후에는 생명이 있고 부활이 있습니다.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아픔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영광스러운 아픔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 영광스러운 아픔을 기쁨으로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 이 아픔을 통해서 우리의 내면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조각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거센 탁류와 같습니다. 죽은 고기는 배를 뒤집고 물결을 좇아 기분 좋게 떠내려 갑니다. 이는 그 고기는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고기는 탁류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절대로 떠내려 가지 않습니다. 이는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있는 신자는 절대로 세상 조류와 타협하지 않습니다. 어떤 핍박과 조롱 가운데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시대의 죄악과 싸웁니다. 이런 자는 생명력이 충만합니다.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힙써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길이요 구원의 길입니다.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지 앟으면 어떻게 됩니까? 25절을 보십시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구원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닫힐 때가 옵니다. 일단 문이 닫히면 다시 열리지 않습니다. 그때는 모든 것이 끝장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실 날을 뜻합니다. 또 개인적으로는 죽음이 임할 때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죽게되면 그 사람에게는 문이 닫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의 문은 개인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언제 닫힐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을 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지금은 은혜를 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고후6:2). 그런데 사람들은 젊어서는 원하는 것을 하다가 늙어서 예수님을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죄에 빠지면 헤어 나오고 싶어도 헤어나올 수 없게 됩니다. 또 늙으면 생각이나 삶의 스타일이 굳어 버립니다. 우리는 젊어서 인생 기초를 쌓아야 되는 것입니다. 진젠돌프와 같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어떤 사람은 30살까지는 자기를 위해서 살고 그 후에는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어디 자기 뜻대로 됩니까?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현재 예수님을 믿고, 현재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도무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어떻게 항의했습니까?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26). 그들은 겉으로 볼 때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말씀을 듣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냉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예수님은 그들을 행악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입으로는 주여주여 하면서 실제 생활은 욕심과 졍욕대로 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형식적인 신앙생활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자들이 하나님나라 잔치에 참예할 수 있습니까? 28,29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속하리니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믿음으로 산 자들입니다. 동서남북 각 나라에서 믿음으로 산 자들만이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홰개하고 믿음으로 구원의 문으로 들어온 이방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먼저 복음을 영접할 기회가 주어졌으나 이를 배척했습니다. 결국 구원의 축복이 이방인들에게로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다고 경고 하셨습니다(30). 유대인들의 문제는 율법에 기초한 자기의 가 문제였습니다(롬3:10). 이는 근본적으로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신앙 경력을 자랑하고 무엇이나 된 것처럼 생각하고 겸손히 투쟁하지 않는다면 나중되고 말 것입니다.
. 자기 갈 길을 가시는 에수님(31-35)
31절을 보십시오. 곧 그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헤롯은 예수님의 복음사역이 왕성할수록 의인 세례요한을 목베어 죽인 죄의식에 시달렸습니다(눅9:7). 그래서 그는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이 자기의 관할 지역인 갈릴리를 떠나주기를 바랐습니다. 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대한 시기심 때문에 그곳을 떠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은 헤롯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쫓아내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계략을 다 아셨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 예수님은 주로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하시고 정치지도자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꼭 한군데 여기에서 헤롯을 여우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헤롯의 교활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헤롯은 비굴하고 거만하고 야비한 폭군이었습니다. 정권을 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간교한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헤롯이 죽이고자 하는 목숨의 위협에도 불구하시고 오늘과 내일 사명을 감당하시다가 제 삼일에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인류 구속역사를 완성하실 것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시고 가야할 길을 가시는 예수님께로부터 사명인의 자세를 배웁니다. 우리가 사명인의 길을 가고자 할 때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가정의 핍박이 있고 세상 사람들의 조롱이 있습니다. 또 달콤한 유혹이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사명에 대한 분명한 자세가 있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우리도 어떤 상황에서도 요동치 않고 달려가야 할 사명인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34,35절은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탄식입니다. 예수님은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아래 모으려 함같이 몇번이나 예루살렘을 사랑의 품으로 모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거절했습니다.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렸습니다. 결국 AD70년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회개치 않는 완악한 예루살렘을 인하여 슬퍼하셨습니다.
결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좋은 것이 많고 유혹이 많아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좁은 문은 좁고 협착합니다. 많은 고난이 따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생명의 길이요 구원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