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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6:1-31

by Mark Yang   04/23/2022  

Message


누가복음 제 2부 12강

재물을 쓰는 지혜

말씀/ 누가복음 16:1-31
요절/ 누가복음 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본문에는 두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이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입니다. 첫째 비유가 장차 경영가가 되어야 할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면, 둘째 비유는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들에게 경고로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둘 다 재물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지혜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서적 물질관을 확립함으로 재물을 잘 다룰 수 있는 지혜로운 경영가가 되어야겠습니다.

I.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1-13)

1a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장차 예수님의 뒤를 이어 복음 역사를 섬겨야 할 자들입니다. 그들이 복음 역사를 섬기기 위해서는 목자요 학자요 경영가가 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지혜롭고 충성된 경영인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한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i)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 (1-9)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맡아 관리하는 관리인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맡은 특권이 있는 반면 잘 경영하여 주인에게 유익을 남겨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청지기는 유익은커녕 오히려 소유를 허비한다는 소문이 주인에게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가 주인의 재산을 허비한다는 것은 큰 죄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로부터 생명과 소유를 위임받은 청지기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사리사욕을 위해서 이를 허비한다면 주님께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 소문을 들은 주인은 노발대발하여 당장에 그를 해고시켜 버렸습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이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2) 직분을 빼앗기게 된 그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잘먹어서 살은 쪘으나 물살이라 땅을 팔 힘이 없었습니다. 또 빌어 먹자니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그는 먹고 살아 나갈 길이 묘연했습니다. 대개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면 주인의 재산을 빼돌려 잠적해 버리거나 인생을 자포자기 하고 폐인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때 앞으로 해고당한 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절망 가운데서 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한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집으로 영접하리라.”(4) 그리고 그는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청지기의 직권으로 빛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기름 백 말 빚진 자는 오십을 탕감해 주고 밀 백석을 빚진 자는 이십석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는 빚진 자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주인은 더 큰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이 청지를 칭찬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롭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라.” 이 세대의 아들들은 불신자들을 가리키고 빛의 아들들은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는 불신자들이 세상 살아 나가는데 있어서는 신자들보다 더 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란 신중하고 빈틈없는 용의주도함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장사하는 것을 보면 빈틈없이 계획하고 신중하게 행동합니다. 반면 신자들은 믿음으로 한다고 해서 주먹구구식으로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로부터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주인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한 것은 그의 사기성이 아니라 그의 용의주도한 지혜였습니다.

그러면 불의한 청지기는 어떤 점에서 지혜롭습니까?

첫째로, 그는 재물로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물질에 많은 관심을 갖고 사람을 사귀는 데는 무관심합니다. 특히 상황이 힘들수록 의지할 것은 돈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어떤 모양으로든 돈을 벌고자 합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당연히 돈에 관심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보다도 사람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현재 자기에게 있는 기회를 잘 활용하여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그는 재물보다 친구가 더 중요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비록 주인의 재산이지만 재물을 투자하여 친구를 사귄 것입니다.

둘째로, 그는 장래를 대비했습니다. 그는 분에 보이는 당장의 유익보다도 해고 당한 후를 생각하고 용의주도하게 장래를 준비했습니다. 미련한 사람은 장래를 생각지 않고 그때 그때 현실의 유익을 좇아 행동합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내일이 없고 오늘 뿐입니다. 그들은 내일 일은 알 수 없으니 오늘 먹고 마시며 인생을 즐기고자 합니다. 미련한 자는 육신 생활에 대해서는 많은 신경을 쓰지만 영적인 생활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만 충실하고 사후 세계를 위해서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습니다. 세상 명예와 물질을 얻기 위해 영생을 포기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재앙이 오면 엎드러져 패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현재보다 장래를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중시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한창 일할 수 있는 젊은 때 10년, 20년 후를 생각하고 인생 기초를 쌓습니다. 더 나아가 사후 세계를 생각하고 자신의 전 인생을 주와 복음을 위해 투자합니다. 이런 자는 어리석은 것 같으나 참으로 지혜로운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여기서 불의의 재물은 세상 재물(the worldly wealth)를 가리킵니다. 불의의 재물이라고 한 것은 재물 자체가 불의하다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사람을 불의하게 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재물은 사람의 마음을 부요하게 하고 교만하게 합니다. 재물은 사람을 인색하게 하고 이기적이 되게 합니다. 또한 재물은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 나라보다 썩어질 세상에 두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딤전 6:10). 그러면 세상 재물은 필요없는 것입니까? 어떤 분은 물질에 대한 혐오감을 가진 나머지 물질을 경시하고 무관심 한 것을 보았습니다. 물질은 인간생활에 필요한 것이므로 우리는 이를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느 올바른 물질관을 가져야 합니다. 물질을 잘 쓰면 유익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제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친구는 복수로서 복음의 동역자들, 도움이 필요한 모든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는 재물을 사람을 얻는데 쓰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돈을 벌어서 쓰는 것을 보면 지혜로운 자인가 어리석은 자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벌어서 먹고 마시는데 다 써버립니다. 사람이 먹고 살만해지면 쾌락을 추구합니다. 또 여행을 하거나 스포츠나 예술이나 고상한 취미활동을 위해 물질을 씁니다. 대부분 자기와 자기 가족을 위해 씁니다. 물질을 가치있는 일을 위해 쓰는 사람은 드뭅니다. 사람들은 돈을 버는 연구는 많이 하지만 돈을 쓰는 연구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을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인 훨씬 더 어렵습니다. 돈을 올바로 쓰지 않을 때 이로 인해 화를 입게 됩니다. 물질은 친구를 사귀는데 쓰는 것이 가장 가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영원한 친구되신 예수님을 얻는데 물질을 투자해야 합니다. 이는 가장 값진 투자입니다.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한 인간을 연구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물질을 투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줍니다. 우리가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여 예수님을 친구 삼을 때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한 처소로 인도해 주십니다.

또한 우리는 재물을 복음역사를 위해 써야 합니다. 복음역사는 사람을 살리는 역사입니다. 세상에 많은 일이 있지만 사람을 살리는 일처럼 귀하고 가치있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복음역사를 위해서 아낌없이 물질을 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사람을 잃더라고 물질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물질을 잃더라도 사람을 얻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친구는 눈에 보이는 물질보다도 더 귀한 무형의 재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 성공적으로 해내려면 먼저 사람을 사귐으로 동역자를 얻어야 합니다. 특히 복음역사는 혼자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더 복음의 동역자를 얻는데 힘을 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역사를 시작하실 때 제일 먼저 12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은 복음의 동역자로 삼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예수님을 본받아 가는 곳마다 복음의 동역자를 얻는데 힘썼습니다. 그는 아무쪼록 그리스도 안에서 몇몇 사람을 얻기 위해 여려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습니다(고전 9:19-22) 사람을 얻는 것은 성공의 지름길입니다.

또 우리는 재물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써야 합니다. 세상에는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헐벗고 굶주린 자들이 많습니다. 사도 요한은 “만일 누가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이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요일 3:17)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구제 사업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가운데 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부자들은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구제 사업에 힘써야 합니다. 이것은 장래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는 것이요,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입니다(딤전 6:17-19).

우리가 재물을 예수님과 복음 역사와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쓸 때 우리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하나님 나라에 쌓아 두는 것입니다(마 6:20). 우리가 재물로 친구를 사귈 때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우리를 영접하게 됩니다. ‘없어질 때’는 재물이 필요없을 때 곧 죽을 때를 말합니다. 죽을 땐느 아무리 거부라도 한 푼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는 날 동안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고(딤전 6:7.,8), 소유를 드려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ii) 청지기의 충성 (10-13)
불의한 청지기는 지혜는 있으나 근본적으로 충성심이 없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충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이 말씀은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충성의 본질은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극히 작은 것은 시시하다고 해서 무시하고 큰 일만 하려 합니다. 작은 일을 못하면 나는 작은 일을 할 사람이 아니고 큰 일을 할 사람이니 큰 일을 맡겨주면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불의한 자는 역시 큰 일을 맡겨도 불의합니다. 이런 자는 책임감이없고 그 마음이 충성되지 못합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고 사람 앞에서 살기 때문에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충성된 자는 사람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하나님 앞에서 충성합니다. 이런 자는 책임감이 강하여 무슨 일을 맡겨도 틀림없이 제 시간에 일을 해냅니다. 심부름 하나 하더라도 마음을 써서 책임성 있게 감당합니다. 창세기의 요셉은 아버지 심부름 하나 하더라도 마음을 써서 책임성 있게 감당했습니다(창 37:12-27). 또 그는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 보디발 집에서도 충성심을 인정받아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도 변함없이 충성하여 전옥 다음가는 위치에 올랐습니다. 그는 이 충성심으로 애굽의 총리 직분도 능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충성된 자를 귀히 쓰십니다.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충성심이 없는 자는 결코 쓰임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큰 일을 맡을 수 있는 자가 되려면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큰 목자가 되는 비결도 양 한 사람을 잘 섬기는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고 하십니다. 이는 세상 재물을 바르게 쓰는 충성심이 없는 자가 어찌 참된 하나님의 역사, 더 나아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12절 말씀은 현세에서 자기 재물을 선한 사업에 잘 사용치 못한다면 어찌 장차 하나님께로부터 자기 재물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에게 있는 물질은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과 물질을 잠시 맡겼다가 때가 되면 다 가져 가십니다. 그래서 충성심이 인정되면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긴 종과 같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 재물에 충성하다 보면 여기에 마음을 빼앗기고 이것을 섬기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13절에서 재물을 섬김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주인은 하인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하인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재물이라는 말은 ‘맘몬’으로 재물의 신을 의미합니다. 맘몬이라는 신도 절대적인 순종과 사랑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려고 하면 분열현상이 일어나서 미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재물은 수단에 불과하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섬길 분은 하나님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섬길 때 세상의 모든 것에서 자유함을 얻고 세상 재물을 올바로 쓸 수 있는 지혜를 덧입을 수 있습니다.

II.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14-31)

14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하나님보다도 돈을 더 사랑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들의 영적 눈을 감기게 하였고 여러 가지 시험과 올무에 빠지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15) 그들의 문제는 사람들 앞에 높임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중인격자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들이 율법보다도 근본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영접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을 말합니다. 구약은 요한의 때까지입니다. 그 후부터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됩니다. 과거 구약 시대에서는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하여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오직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열렸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왕성한 생명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은 필요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라도 폐할 수 없습니다(17). 이는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효능은 세상 끝날까지 존재합니다. 18절은 율법의 효능에 대한 실례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이용하여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 주고 함부로 이혼했습니다. 심지어는 아내가 국을 짜게 만드는 것도 이혼조건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혼하는 것은 간음하는 것으로 율법을 어긴 죄임을 지적하셨습니다(18).

예수님은 계속해서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한 부자가 있어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며 인생을 즐겼습니다. 그는 최고급 옷을 사고 날마다 뷔페 음식을 차려놓고 먹고 마시는데 많은 물질을 썼습니다. 반면 나사로는 거지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배불리려 했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부자는 그에게 무관심했습니다. 그러자 개들이 와서 “오 불쌍한 나사로!”하며 위로하며 헌데를 핥아 주었습니다. ‘나사로’라는 뜻은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뜻으로 이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받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때가 되자 둘 다 죽었습니다. 부자는 성대하게 장사를 치루어졌으나 나사로는 아무렇게나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는 음부에 떨어졌습니다. 부자는 음부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 가운데서 무서운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나사로와 부자의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졌습니다. 부자는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보니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습니다. 그는 안면이 있는 터라 아브라함에게 간청하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그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지옥의 고통이 얼마나 큰 가를 말해줍니다. 부자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는 살았을 때 재물을 자기만을 위해 썼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무관심했습니다. 또 그는 육신의 쾌락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의 인생철학은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였습니다. 그는 사후세계를 전혀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히 9:27). 우리가 인생을 함부로 살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부자의 간청을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을 두 가지로 말해 주었습니다. 첫째로, 부자는 살았을 때 좋은 것으로 받았기 때문에 여기서 그는 고민을 받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위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고난받는 생활을 하는 자는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가서 위를 받게 됩니다. 둘째는, 천국과 지옥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26). 이는 저 세상에서는 다시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부자는 이제 물 한 방울 얻을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나사로를 살아있는 형제들에게 보내어 그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증거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씀 증거면 충분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말씀의 종들의 증거를 받지 않는 데 죽은 나사로의 증거를 받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31).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살펴볼 때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는가 하는 큰 교훈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물질을 자기와 육신의 쾌락을 위해 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청지기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소유를 선한 사업을 위해 써야 합니다. 이것이 장래 자기를 위해 터를 쌓는 것이요 참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