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제Ⅱ부 14 강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말씀/ 누가복음 17:20-37
요절/ 누가복음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외형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마음 속에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재림하심으로 완성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한 분 한 분의 심령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20,21)
20a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물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것이요 현세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윗 시대와 같은 메시야 왕국이 건설될 것을 희망했습니다. 그들의 천국관은 정치적이요 민족적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한 것은 마음속의 의문도 풀고 또 예수님이 메시야인지 아닌지 시험해 보고자 한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그들의 심리가 어떠합니까? 그들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기적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은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사는 기본적인 신앙생활을 등한시 했습니다. 그리고 위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순식간에 모든 것이 해결되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20b,2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 같이 볼 수 있게 임하거나 또 어떤 지정된 장소에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인간의 마음 속에 이루어지는 내면적인 것입니다. 또 흥하고 망하는 세상 나라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영적인 것이요 영원한 것입니다(요18:36). 예수님은 복음역사를 시작하실 때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읍니다(막 1:15). 이를 볼 때 하나님 나라는 진실되게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의 마음에 임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스리실 때 인간은 무한한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사단이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면서부터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거스려 반발하게 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합니다. 이로 인해 인간의 내면은 음란과 탐욕, 교만과 반발심, 이기심과 시기심, 헛된 명예심으로 가득찬 죄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좋은 환경 가운데 살더라도 그 내면에 참된 행복이 없는 이유는 사단이 그 마음을 다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사단을 멸하려 오신 것입니다(히2:14).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세력을 파하시고 사단의 머리를 박살내셨습니다(딤후1:10). 이로써 일생동안 사단에게 매여 죽기를 무서워 하는 인생들에게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히2:15). 우리가 진실되게 마음에 숨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으로서 우리의 마음을 사랑과 평화, 공평과 정의로 다스려 주십니다(사9:6,7). 그때 우리의 내면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내면에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외적인 것에 관심을 갖기보다 내면에 숨은 죄를 회개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면에 정욕과 욕심을 회개하고 십자가를 지고자 힘쓰기 보다 성령의 은사와 같은 외적인 것에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특히 방언이나 병고치는 은사에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그리고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과 같은 묵시록을 공부하고 열심히 숫자 계산을 합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성령의 은사가 필요하고 또 말세를 사는 지혜를 덧입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외적인 것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내적으로 숨은 죄와 욕심을 회개하기에 힘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심리를 살펴보면 자기를 부인하고 사명이 십자가를 지기를 부담스러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외적인 것보다도 내면적인 생활의 개혁에 힘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고자 힘써야 됩니다. 그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하는 모든 사단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사랑과 평화로 다스려 주십니다.
Ⅱ. 번개같이 임하실 예수님(22-25)
예수님은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미혹받기 쉬운 것을 아시고 이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여기서 “때”는 환란의 때를 말합니다. 제자들은 장차 많은 환란과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때 그들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날을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보지 못하게 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환란의 때에 거짓 선지자들와 거짓 메시야가 많이 출현하여 보라 여기있다 저기있다 하며 사람들을 미혹하게 됩니다. 환란의 때가 되면 사람들은 불안하고 두려워집니다. 세상 되어가는 것을 볼 때 금시라도 세상이 끝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잠을 편히 잘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자기를 구원해 줄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을 잡고자 애쓰게 됩니다. 이때 거짓 메시야가 나타나 확신있게 외칩니다. “보라 여기있다. 내가 메시야다. 나를 좇으라” 또 다른 곳에서 “보라 저기 있다”고 외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가 혹시 메시야가 아닌가 호기심을 갖고 좇게 됩니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말려들어 사단의 밥이 되어 버립니다. 오늘날 전도관의 박태선이나 통일교의 문선명, 애천교의 정명석은 자신들을 재림주라고 주장합니다. 박태선은 자기가 천지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으로 그 나이는 1조억살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자칭 재림주는 30명이 넘습니다. 많은 대학생들이나 교수들 조차 이런 이단 종파에 넘어가 문선명이나 정명석을 재림주로 믿는 것을 보면 어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단이 역사하기 때문에 미혹의 영이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합리적이고 현실적이어서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호기심를 가지고 접근하다가는 자신도 모르게 말려들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1서 4:1절에서 영을 다 믿지 말고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여 보라고 하였습니다. 이단 종파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중 어느 하나를 인정치 않습니다. 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사도들이 신앙고백인 사도신경도 인정치 않습니다. 또 성경을 100%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치 않고 나름대로의 경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통일교는 “원리강론”, 전도관은 “오묘원리”, 몰몬교는 “몰몬경”, 여호와의 증인은 “새 세계 성경번역”을 경전으로 사용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때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야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오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재림하십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예수님은 이단 종파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자기들만 알게 몰래 오시지 않습니다. 지구 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번개와 같이 임하십니다. 번개는 1초에 30만km를 움직이는데 이는 지구를 7.5바퀴 돌 수 있는 속도입니다. 번개가 한 번 치면 1초도 못되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동시적으로 볼 수 있게 임하는 우주적인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오실 때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게 됩니다. 그 날에는 그를 찌른 자들도 보게 되고 믿는 자들을 조롱하고 핍박하던 자들도 보게 될 것입니다.(계1:7)
2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찌니라.” 예수님은 재림이 있기 전에 먼저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십자가의 고난이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통해 복음이 완성되고 이 복음이 만국에 전파된 후에야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게 됩니다.(막13:10)
Ⅲ. 인자의 때에 일어날 일들(26-37)
예수님은 계속해서 인자의 때에 일어날 일들을 말씀해 주심으로 제자들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노아시대 사람들은 노아의 방주를 통해 홍수심판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도 심판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100년 동안 지어졌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방주를 왜 짓는가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도 심판의 메시지에 귀를 귀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날에도 방주를 만드는 노아가 분명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은 얼마나 살기 좋은가 생각하며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며 멋있게 인생을 즐겼습니다. 그들은 한 번만 결혼하지 않고 여러번 결혼했습니다. 그들은 육체가 되어 육의 일만 추구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홍수가 나서 순식간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물에 빠져 물을 많이 먹고 마시고 죽으면서도 마실 것을 찾았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의 새대 사람들도 육신의 쾌락과 물질에 대한 탐심으로 죄악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들은 Homo Sex로 깊이 병들어 있었고 폭력이 난무했습니다(창14:4-9). 롯의 사위들은 심판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듣고도 이를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순식간에 저희를 멸하였습니다(29).
노아의 홍수 심판과 소돔 고모라의 불심판은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큰 경고를 줍니다. 노아시대와 롯의 시대 사람들은 육의 일에만 관심을 갖고 영의 일에는 무관심했습니다. 그들은 현세에만 소망을 두고 육신의 쾌락을 좇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았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그러하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에도 노아시대와 롯의 시대와 같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살펴볼 때 그 시대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잘먹고 잘 마실 수 있을까 연구합니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재미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는 장사를 하면 절대 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날이 갈수록 향락사업이 번창합니다. 사람들의 대화내용을 보면 음란한 이야기나 취직과 결혼 이야기, 스포츠, 부동산투기, 증권투자 등 주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파는 이야기 뿐입니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 사명, 비젼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미친놈 취급을 하거나 현실을 모르는 철없는 아이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합니다(딤후3:1-14). 그러다가 갑자기 멸망이 임하게 됩니다. 이때 세상에 소망을 두고 정욕과 욕심을 좇아 자행자지한 자들은 무서운 불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주와 복음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고 진실되게 믿음으로 산 자들은 구원을 받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눅13:29)
그러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합니까? 31절을 보십시오. “그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 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이 말씀은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멸망을 생각하고 경고로 주신 말씀입니다. 멸망은 갑자기 임하기 때문에 세간을 가지러 갈 여유가 없습니다. 그때는 물질보다도 목숨을 구원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물질에 얽매여 물질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다가 결국 귀중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예수님은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32). 롯의 처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소돔 백성과 함께 멸망하지 않고 구원의 은혜를 덧입었습니다. 천사는 그들이 소돔성에서 나올 때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롯의 처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롯의 처는 일부러 뒤를 돌아보고자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소유에 대한 강한 애착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롯의 처는 급히 나오느라 곗돈해서 사둔 물방울 다이아와 아름다운 브라우스, 오리털 파카, 여우털 목도리를 못 가지고 나온 것이 너무나 억울하여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머리가 돌아갔습니다. 이는 평소 그의 가치관이 어떠했는가를 말해줍니다. 롯의 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지극히 세상적이고 인간적이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두기 보다 세상 재물에 소망을 두고 열심히 꾸렸습니다.
롯의 처를 생각할 때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 가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세상에 온 것 같이 언젠가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놓고 가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 물질이나 세상 명예나 권세에 얽매여 산다면 구원의 은혜가 임해도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 물건을 쓰되 세상 것에 얽매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7:29-31절에서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 진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은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다 지나감이니라.” 이 말씀은 세상 것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지식을 얻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 됩니다. 또 때가 되면 장가도 가야 하고 시집도 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물건도 사야 되고 집도 사야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 얽매여서는 안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오실 때 모든 것을 가볍게 털어버리고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두고 물질을 희생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저는 3년 전에 멕시코에서 교통사고를 만나 일찍 하나님 나라로 갈 뻔 했습니다. 그때 저는 언제든지 하나님 나라로 갈 준비를 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주와 복음을 위해서 아낌없이 드리는 연습을 더욱 힘써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할 때 저의 심령에 참 자유와 기쁨과 하나님 나라의소망이 충만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세상에 대한 욕심과 미련 때문에 뒤를 돌아 보다가 실족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들은 주와 복음을 위해서 살다가 모든 것을 잃지나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 잡히게 되면 움츠러 들게 되고 세상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33절을 보십시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구원하리라.” 막8:35절에서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자기 목숨을 얻는 길은 주와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34,35절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일어날 일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밤에 두 남자가 같은 장막에서 한 자리에 누워 자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게 됩니다. 또 두 여자가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게 됩니다. 이 말씀은 구원은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개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같은 집에 살며 같은 직장에 다니더라도 데려감을 당하는 사람이 있고 버려둠을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주와 복음을 위해 산 자요 다른 한 사람은 자기를 위해 산 자입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둔 자요 다른 한 사람은 세상에 소망을 둔 자입니다. 한 사람은 진리의 말씀을 좇아 산 자요 다른 한 사람은 정욕과 욕심을 좇아 산 자입니다.
37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주여, 어디오니이까?”하며 물었습니다. 이는 주님의 심판이 어떤 곳에 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인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죽은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반드시 모여 드는 것과 같이 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 같이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것이나 현세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와 믿음을 통해 우리 마음에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던 사단이 물러가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게 됩니다. 사단이 우리 마음을 다스릴 때 우리의 마음은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어둡고 부정적이고 운명적인 생각이 나를 사로 잡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우리의 마음에 불신과 회의를 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릴 때 생명과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 하늘 나라의 기쁨과 희망이 차고 넘치게 됩니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밝고 힘찬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삽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