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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8:1-14

by Mark Yang   04/23/2022  

Message


누가복음 제Ⅱ부 15 강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

말씀/ 누가복음18:1-14
요절/ 누가복음18: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
                   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누가복음은 기도에 대해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특히 11장과 18장은 기도의 장으로서 기도의 내용과 자세, 기도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두가지 비유로 낙망치 않고 끈질기게 기도해야 할 것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기도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Ⅰ. 끈질긴 기도(1-8)

  1절을 보십시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해야함을 말씀하셨습니다. “항상”이라는 말은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심령에 은혜가 있을 때나 낙심이 될 때나, 평안할 때나 환난의 때나 언제든지 기도해야 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나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항상 기도하지 않으면 신앙의 생명력을 상실하여 무기력하게 되고 또 분별력을 상실하여 자신도 모르게 사단의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므로 항상 해야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잘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론은 이론이고 실제는 실제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기 어려운 점이 무엇입니까? 이는 기도하다가 쉽게 응답이 되지 않으면 낙망하기 때문입니다. 낙망하게 되면 마음이 연약해지고 피곤한 생각이 들어 기도할 힘을 잃게 됩니다. 그때 사단이 여러 모야으로 회의와 불신을 심어 결국에는 기도를 포기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양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다가 양들이 쉽게 변화되지 않을 때 낙망하게 됩니다. 양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데 변화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을 때 아무리 기도해도 안된다는 이상한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기도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보이고 아무런 힘이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기도를 포기하고 맙니다. 어떤 분은 제자양성을 위해 기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합니다. 실패를 거듭하다보면 낙심하게 되고 그 정도가 지나치면 절망하다가 결국에는 자포자기해 버립니다. 그리고 나는 목자체질이 아닌 모양이다 하며 체질탓을 합니다.  또 어떤 분은 가정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는데 오히려 상황은 점점 악화될 때 낙심하고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낙망치 않고 줄기차게 기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계선교 역사에 쓰임 받기 위해 이방의 빛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지만 3년, 5년이 지나도 쉽게 응답이 되지 않을 때 낙심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모양이다 생각하고 기도를 포기하게 됩니다. 이처럼 낙망은 기도생활에 있어 큰 원수입니다. 우리가 낙망을 극복하지 못할 때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없고 승리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이 재판관은 로마 당국에 의해 임명된 이방인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당시 이방인 법관들은 돈을 탐하고 약자를 압제하였다고 합니다.이 재판관은 자기의 재판에 따라 사람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니 그 교만이 하늘에 치솟았습니다. 재판관은 자신이 하나님인 양 오만 무도하였습니다. 또 뇌물을 좋아하고 편벽되게 재판하였습니다. 이런 그에게 정의를 기대하고 긍휼을 기대한다는 것은 물고문을 하는 잔인한 자들에게(강포한 군인에게) 자비를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당시 과부는 고아와 함께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자의 대명사였습니다. 그 여자는 남편이 원수에게 억울하게 죽었던 것 같습니다. 남편의 죽음으로 그 여자는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과부의 마음에 한이 맺혔습니다. 과부는 남편을 잃은 슬픔과 원통함 때문에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슬피 울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받지 않으면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연약했습니다. 돈도 없고 아무 권세도 없었습니다. 과부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재판관에게 가서 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그러나 재판관은 여인이 가난한 과부임을  알고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이런 거지 같은 여자가 왔는가 당장에 쫓아내도록 하였습니다. 여인은 낙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마음에 맺힌 한을 풀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얼마 후 다시 재판관을 찾아가서 간청했습니다.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그러자 재판관은 화를 내면서 비서들을 불러 내어 쫓았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재판관의 출퇴근 길에 찾아가서 간청했습니다. 그래도 안들어 주자 재판관의 집을 찾아가서 밤마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하며 구슬프게 울었습니다. 여인은 이 원한을 풀어 주지 않으면 절대로 물러나지 안겠다는 자세로 끈질기게 간청했습니다. 과부의 원한은 하늘에 사무칠만큼 절실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낮에는 이 과부 때문에 사무를 볼 수 없었습니다. 퇴근 후 음식점에 가면 어느새 그림자처럼 따라왔기 때문에 음식점에 갈 수도 없었습니다. 집에 가면 집으로 찾아 왔기 때문에 집에서 편히 쉴 수도 없었습니다. 밤에는 구슬픈 여인의 울음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도 없었습니다. 꿈 속에서는 여인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나타나 간청하기 때문에 식은 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재판관은 견디다 못해 마침내 중대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그가 얼마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재판관이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고자 한 것은 과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였습니다. 재판관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세상에 아무 것도 두려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끈질긴 간청이 두려웠습니다. 재판관은 여인의 끈질긴 간구에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6-8a절을 보십시오.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관과 비교하여 택하신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재판관은 불의하지만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속마음을 보시고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재판관은 무정하고 무자비하지만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어찌 성도들의 밤낮 부르짖는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소원을 속히 들어줍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언제든지 우리의 소원을 속히 들어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을 재판관과 같이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조금 기도하다가 응답이 잘 안되면 불평섞인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문제에 무관심하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를 결코 멸시치 아니하십니다. 재판관은 무관심했지만 하나님은 우리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재판관은 자신의 괴로움을 참기 힘들어서 할 수 없이 했지만 하나님은 기쁨으로 속히 풀어주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한 것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였기 때문입니다(야고보4:2b,3).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요한1서 5:14,15절을 읽어보십시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이상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 원한에 맺힌 기도 제목을 가지고 끈질기게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과부에게는 풀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한맺힌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줄기차게 간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한맺힌 기도 제목이 있어야 줄기차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면 좋고 응답해 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식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5절에서 “늘 와서”는 “끝까지 와서”라는 뜻입니다. 여인의 자세는 간청이 응답될 때까지 끝까지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기 전에는 절대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끈질긴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각자 여러가지 많은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신실한 양을 얻는 것이 기도 제목입니다. 또 어떤 분은 복음 역사를 잘 섬길 수 있는 좋은 직장을 얻는 것이요, 어떤 분은 믿음의 가정을 이루는 것이 소원입니다. 어떤 분은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기도 제목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도 제목들이 응답되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절실합니까? 과부와 같이 원한에 맺힌 기도 제목입니까? 마음에 밎힌 절실한 기도 제목이 되지 못할 때 우리는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에게 많은 기도 제목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져야 할 절실한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태(6:9-13). 우리는 마땅히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공부를 하든지 직장에 다니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고전 10:31). 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사단의 통치가 물러가고 하나님께서 다스려 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다스리는 곳은 불의와 폭력이 난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곳은 사랑과 평화가 차고 넘칩니다. 이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확장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캠퍼스에 말씀을 전파하고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로마 식민통치 하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한맺힌 문제는 이스라엘나라 회복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때문에 가정과 직장과 처자식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으며 죽은 개 훈련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게서 그 크신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을 믿었습니다(눅24:21).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무기력하게 돌아가시자 그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자 그들의 꿈은 다시 살아 났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행1:6)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전1:7,8). 세계선교는 예수님의 한맺힌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복음서의 결론에는 예수님의 한맺힌 기도 제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28:19).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한21:15-17). 예수님의 한맺힌 기도 제목은 세상 만민이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의 고귀한 몸을 찢기우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습니다. 또 이를 위해서 열 두 제자를 양성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이런 한맺힌 기도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세계선교 명령을 좇아 로마에 가서 어찌하든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충만했습니다(롬1:15). 그는 이 한맺힌 기도 제목 때문에 이를 위해 끈질기게 기도할 수 있었고 마침내는 쇠고랑을 차고서라도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모라비안 선교회의 지도자였던 진젠돌프 백작은 “나에게는 단 한가지 열망 밖에는 없다. 그것은 예수님, 오직 그 분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 한 분을 전 세계에 전하는 것을 전 생애의 목표로 삼고 이를 위해 모든 것을 투자했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세계선교에 대한 한맺힌 기도 제목 때문에 50이 다 된 나이에 선교 일선에 나가셨고 이를 위해 전 생애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한맺힌 기도 제목이 있습니까?

  저에게는 세계선교에 대한 한맺힌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그동안 하나님께서 힘주시는 대로 많은 애를 써 왔습니다. 세계선교를 위해 주님께서 쓰실만한 영적 그린베레들을 양성하고자 하는 기도 제목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을  공부하면서 이것이 하늘에 사무칠만큼 한맺힌 기도 제목이 되지 못하고 뜨뜨미지근한 정도임을 깨닫고 애통하며 회개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종을 불쌍히 여기사 세계선교에 대한 불타는 열망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한맺힌 기도 제목이 있을 때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나 낙심치 않고 끈질기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둘째,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8b을 보십시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 말씀은 주님 오실 그날까지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말세가 되면 거짓 선지자와 거짓 메시야가 많이 나타나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하기 때문에 신자들은 믿음의 중심을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막13:22). 믿음이 약하여지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경우에나 믿음의 중심을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다가 낙심하고 기도를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틈만 있으면 우리의 마음에 회의와 불신을 심습니다. 기도가 시간낭비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사단의 속삭임을 물리치고 믿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받으시고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믿음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태산을 바다에 던지는 새 역사를 창조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기도할 때 불가능이 없습니다.

Ⅱ. 겸손한 기도(9-14)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두번째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제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로 기도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데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엄격이 율법을 지키는 경건한 사람이요 세리는 악명높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함께 성전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먼저 바리리새인이 따로 서서 아름답고 유창한 말로 멋있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이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그는 참으로 이상한 김사기도를 하였습니다. 그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한 일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의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죄인임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들으시도록 기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듣도록 기도했습니다. 그의 자세는 오만했습니다. 그의 기도의 주어는 “자기”였습니다. 교만한 자는 모든 말에 자기가 주어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다고 말합니다. 내가 아니면 아무 일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하나님 자리에 들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챕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자의 기도를 받으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기도를 받으십니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이 주어고 자기는 목적어입니다. 요셉과 같이 “하나님이 나로”““ “하나님이 나를”““ 모든 말의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힘과 능력과 지혜를 주셔서 모든 일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는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감히 쳐다 볼 수도 없는 비천한 죄인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가슴을 치며 죄를 통회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마땅히 심판을 받아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자임을 알고 하나님께 다만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였습니다. 그에게는 자기 의가 없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볼 때 의롭고 경건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 교만하였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었습니다. 반면 세리는 사람들이 보기에 악명 높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고 자기의 죄를 고백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자의 기도를 멸시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의 기도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의 기도를 받으십니다.

결론: 우리는 과부와 같이 원한에 맺힌 기도 제목을 가지고 낙망치 않고 끈질기게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겸손한 자세로 기도해야 겠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기뻐 받으시고 속히 응답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