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제Ⅱ부 16 강
영생을 얻는 길
말씀/ 누가복음 18:15-43
요절/ 누가복음 18: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
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오늘 본문에서는 세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를 꾸짖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둘째는, 영생을 구하는 부자 청년에게 영생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셋째는, 소경 거지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밝히사 영적 세계를 보게 하시고 세상 보화를 팔아서 하늘 보화를 소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어린 아이와 하나님 나라(15-17)
15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부모들은 예수님께서 자기 어린 아이를 안아주고 축복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데리고 왔습니다. 아이들은 예수님께 서로 먼저 안아 달라고 떼를 쓰며 시끄럽게 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를 보고 꾸짖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 어린 아이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바리케이트를 치고 함부로 대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엄격한 가부장적 제도하에서 여자와 어린 아이들은 숫자에 치지 않을 정도로 무시했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시대의 영향으로 어린 아이들을 귀찮게 생각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을 멀리하고 쫓아내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가까이 하시고 영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지극히 사랑하사 그들을 품에 안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율법적이고 권위적임을 보셨습니다. 또 교만하여 배우는 마음이 없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시고 어린 아이에게서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예수님께로부터 사랑과 축복을 받고자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축복해 주실 것을 믿고 나아왔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조금의 의심이나 불신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순수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전적으로 예수님의 품에 안기고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자의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계속해서 어떤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가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받든다는 것은 영접한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단순하게 영접합니다. 그들은 복잡하게 따지거나 비판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면 눈망울을 반짝이며 그대로 영접합니다. 또 그들은 단순하게 믿고 순종합니다. 한번은 D.L Moody가 아이들과 함께 식사기도를 하면서 오늘 비가 오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이가 식사후 학교에 갈 때 우산을 들고 나갔습니다. Moody는 비도 오지 않는데 우산은 왜 들고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아버지가 식사 기도 때 비오기를 기도했지 않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어린 아이는 이처럼 아주 단순하게 믿고 순종합니다. 또 어린 아이들은 순수하고 진실됩니다. 그들에게는 이중적인 요소가 없습니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다고 말합니다. 또 겸손하게 배우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배우는 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조금의 자의식도 없이 귀찮을 정도로 열심히 묻고 배웁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몰라도 아는 척하고 잘 묻지 않습니다. 이처럼 어린 아이와 같이 단순하고 순수하고 진실되며 순종적이며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아이와 같이 영접하는 자의 것이지 의심하고 불순종하는 자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영향을 받아서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자기도 모르게 어른스러워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른스러워진다는 것은 결국 순수성과 진실성을 잃어버리고 세상물이 들어서 점점 못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어른스러움을 벗고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자란다는 것은 복잡한 데서 단순하게 되며, 거짓된 데서 진실되게 되며, 교만한 데서 겸손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과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어린 아이와 같으신 분이십니다.
Ⅱ. 부자 청년과 하나님 나라(18-30)
18절을 보십시오. 어떤 관원이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는 관원으로서 산헤드린 공회원중의 한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최연소자로 고시에 합격하여 사회적인 지위와 명성을 얻었습니다. 또 그는 젊은 나이에 많은 돈을 벌어서 재벌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키었다고 말한 것을 보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부와 권세와 신앙을 소유한 훌륭한 자였습니다. 그는 누가 보나 부족함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예수님께 나아와 영생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참 만족과 기쁨이 없었습니다. 영생에 대한 소망과 확신이 없었습니다. 왠지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그의 영혼은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은 빈 공간이 있어서 늘 공허했습니다. 그는 인생에 대한 고뇌로 잠 못이루는 밤이 많아졌습니다. 영생문제는 그에게 있어서 반드시 해결되어야할 심각한 인생문제였습니다.
인간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영생을 갈망합니다. 파스칼은 사람이 영생을 갈망하는 것은 잃어버린 영생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하였습니다. 인생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사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사람이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사람이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고민합니다. 소크라테나 플라톤과 같은 고대 철학자들은 이런 인생문제로 많은 고뇌를 했습니다. 그들은 영혼불멸의 문제에 대해서 아주 깊은 사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고 사는 현실문제에 얽매여 벌레와 같이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왜 사는가 하는 문제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합니다.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는 제쳐놓고 부차적인 문제만 붙들고 씨름합니다. 그러나 영생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할 인생문제입니다. 이를 해결하지 못할 때 우리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는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참된 행복을 추구하는 구도자의 질문이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의 질문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분명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가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용납지 아니하셨을까요? 이는 그의 선에 대한 개념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를 바로 잡아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이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물은 것을 볼 때 그는 도덕적인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이면에는 자신도 선한 사람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는 사람이 행위로 선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개 남에게 폐끼치지 않고 양심대로 성실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자들이 이런 오류에 잘 빠집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 의가 강하고 자신을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선을 쌓으면 그 댓가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인식하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도덕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무리 선을 많이 행한다 할지라도 악을 행하는 것이 더 많기 때문에 선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는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성 자체가 전적으로 부패해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증거합니다(롬3:23). 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포합니다(롬3:10). 예수님은 인간은 결코 선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선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10계명 중 인간 사이에 관계되는 계명들만 언급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청년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21). 와! 얼마나 놀라운 대답입니까? 사람이 장성하여도 계명을 지키기가 어려운 일인데 어떻게 어릴 때부터 그 까다로운 계명을 다 지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유대인들은 6세때부터 율법을 암송하고 신앙교육을 받습니다. 이 청년은 6세 때부터 율법을 암송하고 이를 엄격하게 지켜온 것입니다. 대개 어릴 때는 딱지치기나 구슬치기를 하며 놀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놀고 싶은 마음을 부인하고 율법을 암송했습니다. 또 사춘기의 이유없는 반항심도 극복하고 청년기에 가장 심각한 정욕문제도 극복했습니다. 그는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 여자를 보되 돌을 보듯 하고자 힘썼습니다. 길을 갈 때에 자매님이 보이면 즉시로 눈을 감고 가다가 수없이 전봇대에 부딪혀 이마에는 영광스러운 상처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비상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에는 영생의 기쁨과 확신이 없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의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이 말씀은 얼핏 듣기에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무일푼의 알거지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가 계명의 근본 정신을 지켜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계명의 마디마디는 잘 지켰지만 그 근본정신은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십계명의 근본정신은 사랑입니다. 처음 4계명은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신6:5), 나머지 6계명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레19:18). 그는 신앙생활이란 남에게 폐안끼치고 착실하게 살아가는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란 소극적으로 죄 안짓고 예배출석 잘하고 중심을 지키는 정도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한 마디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고 헌신이 필요합니다. 부자 청년은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했으나 그의 신앙은 자기 중심적이어서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위해 희생할 줄 몰랐습니다. 이런 그에게 기쁨이 있을리가 만무합니다. 진정한 기쁨이란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둘째는, 세상보화에 대한 소망을 끊고 하늘 보화에 소망을 두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가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이 훌륭하지만 한가지 부족한 것은 재물에 소망을 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날에 성실히 일하여 많은 재물을 모았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재물에 소망을 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돈을 많이 벌면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쓰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돈을 많이 벌게 되자 점점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점점 재물을 사랑하게 되고 재물에 소망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는 영생을 갈구했지만 그의 소망은 땅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세상 보화에 대한 소망을 끊고 하늘 보화에 소망을 두도록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그의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하늘 보화가 네게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보화를 팔되 1”“““““ 텫”“““““똄”“}”““““““““““╨”““““““““蔋”“鯽”浣”짬짶”““沼”“““““““牻”““““““““璾”ぇĈ”ŝɾ” “““딣”“붅”““““““螺全鐸┤”“譆ビ”““듽理歊”鐸”“훉핹”鋸”““ビ”“이는 세상 보화는 우리의 진정한 보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 보화는 언젠가는 썩고 쇠하고 더러워지고 맙니다. 세상 보화는 불이나면 순식간에 다 타버리고 맙니다. 지난 2월 5일 Tiger 장막이 누전으로 인해 불이 나서 다 타버렸습니다. 옷도 타고 책도 타고 돈도 타버렸습니다. Tiger장막원들은 하루 아침에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 그들은 세상에 보화에 소망 둘 것이 못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게 되었습니다. 세상 보화는 영원하지 못합니다.
반면 하늘 보화는 어떠합니까? 하늘 보화는 영원하고 가장 안전합니다. 불탈 염려도 없고 도적질해 갈 수도 없습니다. 하늘 보화는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참 보화입니다. 이 하늘 보화는 우리에게 참된 영혼의 만족과 기쁨을 줍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평안을 주고 영생을 줍니다. 그러면 이 하늘 보화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킵니까?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하늘 보화를약속하신 후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 자신이 바로 보화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 보화가 되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알기 전 세상 학문과 좋은 가문과 율법의 의와 정열적인 열심을 보화로 생각했습니다(빌3:4-6).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알고 난 후 그의 가치관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과거 보화로 여겼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빌3:8). 그는 보화되신 예수님을 얻고자 모든 것을 아낌 없이 투자했습니다(빌3:10,11). 그는 예수님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숨어있다고 고백했습니다(골2:3). 성 프란시스, 썬다싱, 슈바이쳐, 진젠돌프백작 등 하나님께서 귀히 쓰신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늘 보화를 얻기 위해 세상 보화를 판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늘 보화가 얼마나 귀한가를 알기 때문에 세상보화를 파는 것을 조금도 아까와 하거나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기쁨으로 확신있게 팔았습니다. 예수님은 마태13:44절에서 천국 보화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보물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얼른 흙으로 덮어 두고 집에 돌아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습니다. 이처럼 참 보화 되신 예수님을 발견한 사람은 세상보화에 대한 소망을 미련 없이 끊고 주와 복음을 위해 확신있게 투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영생을 얻는 길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그는 예수님의 말씀이 심히 부담스러워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영생을 얻고 싶었지만 재물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의 문제는 하늘 보화도 얻고 세상 보화도 놓고 싶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보화에 대한 미련은 그의 영적 눈을 감기게 하였고 심령을 완악하게 만들었습니다. 세상 보화에 대한 미련은 그의 영적 눈을 감기게 하였고 심령을 완악하게 만들었습니다. 원숭이를 잡으려면 원숭이가 좋아하는 바나나를 손이 겨우 들어갈만한 항아리에 넣어둡니다. 그러면 원숭이가 손을 넣어 바나나를 잡습니다. 그러나 구멍이 좁아서 바나나를 잡고서는 손이 빠지지를 않습니다. 바나나를 놓으면 손이 빠지는 데도 절대로 놓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잡히고 맙니다. 인간이 꼭 이와 같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을 손에 꼭 쥐고 죽어라고 놓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지혜로운 것 같으나 원숭이와 같이 어리석습니다.
24, 25절을 보십시오. 부자 청년이 재물 때문에 심히 근심하며 물러가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이 말씀은 한마디로 재물에 소망을 두는 자는 구원을 얻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 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한다고 하였습니다.(딤전6:9,10)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실망에찬 소리를 했습니다. 그들이 그동안 주님은 좇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것은 장차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구원을 얻을 수 없다면 평생 가난한 생활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운명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27). 이 말씀은 구원은 사람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으로 기가 죽어있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신이 나서 말했습니다.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이런 그의 말에는 우리는 부자 청년과 같지 않다는 자기의와 그동안 주님을 위해 많은 희생을 했으니 이를 보상해 달라는 요구가 포함되어 있읍니다. 예수님은 이러 그들의 희생을 크게 인정하시고 귀한 약속의 말씀을 주셨읍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입니다. 이는 인생 목적과 소망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모든 것을 투자한 자는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넘치도록 축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현세에서도 여러 배를 받고 내세의 영생도 보장해 주셨습니다. 어것은 얼마나 귀한 약속의 말씀입니까? 누구든지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산 사람은 자기의 소유를 버리는 아픔이 있지만 진정으로 축복된 인생을 살게 됩니다.
Ⅲ.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31-43)
31-3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무리들을 떠나 따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복음의 비밀입니다. 예수님은 이 복음의 비밀을 반복해서 제자들의 마음에 심고 있읍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인해 영적인 눈이 감기워졌기 때문입니다(34). 그들은 영적인 소경이었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 한 소경이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고 있었읍니다. 그는 소경에다 거지였습니다. 그의 인간 조건은 참으로 비참하였습니다. 그는 늘 슬픈 눈물을 흘리며 인생을 저주스럽게 살아갈 수 밖에 없었읍니다. 그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읍니다. 이런 그에게 희망의 빛이 비췄습니다. 그가 구걸을 하다가 예수님이 자기 앞을 지나 가신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읍니다. 이때 그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38). 그는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야이심을 믿고 주님께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의 외침은 절실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소경 거지가 왜 이렇게 떠드는가 “잠잠하라” 꾸짖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애닲은 간구를 무시하고 묵살해 버렸습니다. 그는 깊은 운명주의 빠져 신세 한탄을 하며 자포자기할 수 밖에 없었읍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말에 말려들어 낙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욱 심히 소리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39) 그는 믿음으로 장애물을 극복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운명을 극복하고 절망을 극복했습니다. 또한 사람들에 대한 감정도 극복했습니다. 그의 믿음의 간구는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바쁜 길 가운데서도 한 영혼의 절실한 울부짖는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가까이 불러 그의 소원을 물었읍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는냐?” 예수님께서 소경 거지에게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이는 그에게 믿음이 있는가 보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이때 소경거지는 무엇이라 대답했습니까? 그는 이 절호의 기회에 물질과 안정된 직장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분명히 대답했습니다. 그가 눈을 뜨고 나서 예수님을 좇은 것을 보면 이는 단순히 육신의 눈 뿐만 아니라 영적인 눈도 뜨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그의 간절한 영적 소원을 보시고 그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러자 그가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눈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인생들의 진정한 메시야가 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