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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9:1-10

by Mark Yang   04/23/2022  

Message


누가복음 제 2부 17강

삭개오를 찾아 구원하신 예수님

말씀/ 누가복음 19:1-10
요절/ 누가복음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본문에는 잃은 삭개오를 찾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삭개오는 새리장이요 부자였으나 잃은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여리고를 지나가시다가 이런 그를 찾으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오늘 말씀에서 ‘잃은 자’의 의미가 무엇이며, 잃은 자를 찾으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배우고자 합니다.

I.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 (1-4)

예수님께서 인류 구원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행한 사역을 길게 다르고 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은 9:51-19:29절까지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잃은 자를 찾으시고 구원하시는 메시야의 손길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삭개오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리장이요 부자였습니다. 삭개오란 이름은 '순결' 또는 '정의'라는 뜻입니다. 그의 부모는 삭개오가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고 의로운 자가 될 수 있도록 고상한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과는 정반대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추하고 욕된 자요 부정부패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로부터 순결하고 의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많은 교훈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점점 성장함에 따라 현실에 눈을 돌리게 되자 험한 세상을 살아 나가려면 실제적으로 돈이 가장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돈을 벌기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된 이면에는 국민학교 때 납부금을 안낸다고 선생님에게 얻어 맞았거나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가난 때문에 한이 맺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악물고 공부하여 세리고시에 합격하였고 후에는 세리계에서는 정상인 세리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수입 좋은 여리고의 세무서장이 되었습니다. 

그가 세리장까지 된 것을 보면 얼마나 지독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 식민치하에서 도탄에 빠져 신음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가난하고 갖가지 병마와 귀신에 들려 고통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는 그 시대가 얼마나 살기 힘든 시대였는가를 말해줍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그런 힘든 상황에 도전하여 싸웠습니다. 그는 적자생존의 심한 경쟁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해 피눈물나는 투쟁을 했습니다. 그는 고통하는 백성들로부터 악착같이 긁어 모았습니다.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하고 무자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동족도 이웃도 친구도 없었습니다. 

또 그가 세리장이가 된 것을 보면 투쟁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분야든지 정상에 오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보다 2-3배의 투쟁이 필요합니다. 세리계는 악착같고 끈질기고 지독하기로 이름난 사람들도 가득차 있습니다. 그가 세리계의 우두머리가 되기까지 얼마나 무섭게 투쟁했는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는 키가 작습니다. 키가 작은 인간 조건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많은 무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키 작은 열등감으로 인해 늘 자신을 자학하며 운명주의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인간 조건을 뛰어 넘어 모든 경쟁자들을 하나 하나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세리장이 되어 모든 세리들 위에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집념의 사나이였습니다. 한번 물었다 하면 절대로 놓지 않는 불개미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해서 사회적인 지위를 얻고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집은 풀장이 있고 테니스 코트가 있는 큰 저택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직수입한 Royal Prince를 타고 출퇴근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런 그가 행복하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은 그 어떤 욕망보다 강합니다. 삭개오도 인간이기 때문에 이런 강한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앞에서는 허리를 굽히며 존경하는 척했지만 뒤에 가서는 “날 도적놈! 창기같은 놈! 민족의 배반자! 벼락 맞아 죽을 놈!” 등 갖가지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는 처음에 그 모든 욕들이 어떤 몹쓸 죄인에게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 지독한 욕들이 자기에게 하는 것인줄 알고 절망했습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어딜가나 환영받지 못했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은 가족의 일원으로서, 학교나 직장에서나 한 멤버로서 인정을 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동료들로부터 소외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동료들로부터 소외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동료들로부터 소외를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를 죄인 또는 민족의 배반자로 낙인을 찍고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또 로마인들도 결코 그를 로마 사람으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대인도 될 수 없었고 로마 사람도 될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을 인정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순수하고 진실되고 거룩한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순수와 진실과 거룩함을 잃고 더럽고 추하고 거짓된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런 자신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추한 자신을 바라보고 한없이 저주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는 존재 의미와 삶의 목적을 상실했기 때문에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악착같이 투쟁하여 삶의 터전인 사회적인 지위와 부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회적인 지위와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었습니다. 그가 세리장이 되고 부자가 되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투쟁할 때는 목표만 달성되면 안정된 삶의 터전 가운데서 인생을 앤죠이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습니다. 그가 목표를 달성한 순간부터 그는 심한 허탈감과 공허감으로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의 영혼은 허무의 심연으로 곤두박질하여 절망이라는 죽음의 병을 앓아야 했습니다. 그의 삶이 방향을 잃은 새와 같이 표류하기 시작했을 때 사단은 그를 자기 종으로 삼고 마음대로 조종했습니다. 그는 불안과 죄의식에 사로잡혀 밤마다 악몽을 꾸며 식은 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가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그가 어느 날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 가신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3a절을 보십시오.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그는 예수님을 보고자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온 영적 소원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을 영접하시고 그들과 함께 식사 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세리 출신도 있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몹쓸 죄인도 회개하고 나오기만 하면 용납하고 크신 사랑으로 품어주시고 모든 죄를 사해 주신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그는 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모든 죄를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고 싶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 가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예수님을 만나 보고자 결심을 했습니다. 이 예수님을 만나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외적 내적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그가 극복해야 할 장애물은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삭개오가 무리들 사이로 뚫고 들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조건 삭개오를 미워했기 때문에 그가 무리들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가만 놔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축구볼과 같이 이리 걷어차고 저리 걷어차서 죽사발을 만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무리 속으로 잘못 들어갔다가 그는 성난 무리들로 인해 짓밟히고 갈기 갈기 찢겨 죽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둘째로, 그가 극복해야 할 장애물은 키가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자 했으나 예수님은 자기보다 키 큰 사람들도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는 발돋움을 해도 다른 사람의 귀에 밖에 닿지 않아 허사였습니다. 세리 장부를 놓고 올라서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는 키 작은 운명주의로 또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찌하든지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으로 불탔습니다. 그는 길을 찾았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가 주위를 둘러 보았을 때 길가에 뽕나무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뽕나무에 올라 간다는 것은 힘든 일었습니다. 그에게는 자존심이 있었습니다. 또한 사회적인 지위를 가진 자로서 체면이 있었습니다. 그가 뽕나무에 올라갈 경우 이때까지 무리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아 왔는데 더욱 더 손가락질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키가 작고 배가 나오고 뚱뚱한 그가 뽕나무에 올라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영적 소원은 이 모든 장애물을 극복케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무엇이라 하든 어찌하든지 예수님응” 만나고자 했습니다. 몇 번이나 실패했으나 그는 젖먹던 힘까지 다 내어 뽕나무에 올라 갔습니다. 이런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마치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외로운 참새와 같았습니다. 아니 그는 마치 배 나온 원숭이와 같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데는 반드시 장애물이 있다는 것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영적 소원이 중요함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자 할 때 사람들이 큰 장애물이 됩니다. 사람들이 평소에는 나에게 큰 관심이 없다가 내가 예수님을 알기 위해 성경공부를 하거나 수양회에 가고자 하면 이상하게 나에게 깊은 관심을 가집니다. 또 내적 장애물로는 자의식이나 소심한 성격이나 대인 공포증과 같은 것입니다. 수양회에 가서 변화될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내적 외적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영적 소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나를 괴롭히는 죄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생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무기력한 생활을 벗어나 생명력이 넘치는 힘찬 인생을 살 수 있고 열매 맺는 사명인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영적 소원이 있을 때 어떤 장애물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II. 삭개오야, 내려오라 (5)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뽕나무에 새처럼 앉아 있는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시자마자 즉시 초청하셨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에 관해서 두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로, 삭개오를 아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지나치지 아니하시고 그를 주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 중에서 영적 소원을 가지고 간절히 찾는 삭개오 한 사람을 주목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자하신 눈과 애타게 진리를 찾는 삭개오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스파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눈에서 모든 것을 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전 존재를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깊은 영혼의 병을 앓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치료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부르듯이 “삭개오야!”하셨습니다. 이 한마디 말 속에는 한 영혼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관심과 애정과 이해와 사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너라.” 이는 죄인을 부르시는 자비로운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이는 잃은 자를 찾으시는 메시야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그의 집에 유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아는 정도로 그치지 않으시고 그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집에 유하고자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고 그를 멀리 했습니다. 아무도 그와 사무적인 관계 외에는 관계성을 맺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독했습니다. 그에게는 대화를 나눌 친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잘 아시고 그의 집에 유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집에 초청하고자 하셨으나 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유하심으로 그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와 함께 음식을 나누며 대화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사랑의 품에 안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실로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오, 삭개오는 냄새나고 추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유하심으로 그에게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에게서 성육신의 은혜를 봅니다. 예수님은 본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서 모든 영광과 존귀와 섬김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께서 인생들을 향한 그 크신 사랑 때문에 이 땅에 비천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섬기는 종이 되셔서 인생들을 겸손히 섬기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오늘날은 나와 함께 유하기를 원하십니다. 나와 함께 먹고 마시기를 원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20절을 보십시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은 나를 천국잔치에 초청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와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맺기를 원하십니다.

III. 삭개오의 회개 (6-8)

예수님의 초청의 말씀에 대한 삭개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삭개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너무 기뻐 재빨리 내려 왔습니다. 내려 오다가 바지가 터졌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잘 아시고 품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했습니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의 이슬이 맺혔다고 조용히 뺨을 타고 흘러 내렸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 견딜 수 없었습니다. 춤을 추고 싶었습니다. 그는 춤을 추는 듯한 발걸음으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인도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세리장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호기심이 가득한 눈살을 찌푸리며 수군거렸습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7)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겉모양만 보고 삭개오를 영접하시는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가 갚겠나이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삶의 스타일과 사고 방법도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에 깊이 감동되어 마음으로부터 회개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의 삶 전체를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는 8절 말씀에서 두 가지 점에서 완전히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의 가치관이 변화되었습니다. 그가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거기에다 토색한 것을 사배나 갚겠다는 결단은 과거에는 꿈에서조차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과거 그는 물질의 노예였습니다. 이때까지 그는 물질을 사랑하고 물질을 모으기 위해 고통하는 백성들을 탈취했습니다. 물질이 그에게 전부였습니다. 그는 물질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도 죄의식으로 과로와 해야 했습니다. 그의 가치관은 삐뚜러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인간-만물,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그는 물지를 하나님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하였을 때 그의 가치관은 달라졌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예수님이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인생의 의미요 목적이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물질의 탐심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물질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는 것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에 예수님의 사랑이 임하자 이웃에 대한 사랑이 생긴 것입니다. 그는 이제 물질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고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자기 중심적인데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과거 그는 생각하거나 말을 하거나 먹거나 마시거나 무엇을 하든지 항상 자기만을 생각했습니다. 그의 생각은 자기에서 시작해서 자기로 끝났습니다. 그는 자기와 자기 가족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조금도 생각할 줄 몰랐습니다. 사람들을 모두 경쟁의 대상자로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변화되었을 때 가장 먼저 가난한 사람과 자기로 인해 해를 당한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제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 속에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예수님 안에서 회복된 것입니다.

IV. 아브라함의 자손 (9,10)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회개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오늘’이라는 말씀은 구원의 현재성을 말해 줍니다. 그가 회개한 그 순간부터 정죄와 심판이 사라지고 구원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부터 그의 마음 속에 끊임없이 역사하던 죄의식과 불안 허무와 절망, 심판에 대한 두려움 등 모든 삶의 고통이 사라졌습니다. 대신에 하늘 나라의 기쁨과 사랑과 평화가 그 심정을 가득 채웠습니다.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는 것은 뿐만 아니라 그의 식구 모두에게 구원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과거 그는 그의 집의 불행의 근원이었으나 이제 그는 집안의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과거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서 제외되었으나 이제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롬 4:11,12,16). 과거 그는 사단의 똘만이였으나 이제 그는 하늘나라의 황태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소망 없다고 정죄하고 버렸으나 예수님은 그에게 소망을 두시고 그를 살려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마땅히 심판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으나 예수님은 그가 회개했을 때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회개했을 때 너무 기뻤습니다. 이 기쁨은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기뻐하는 아버지의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10절에서 자신이 왜 이토록 기뻐하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 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잃어버린 자’라는 말씀에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교육을 받고 박사학위를 받은 자들이나 높은 권세를 가진 자들을 보면 잃은 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서적으로 볼 때 어떤 사람이든 간에 하나님을 떠난 자는 다 잃은 자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잃었습니다. 자아를 잃었습니다. 본래적인 사명을 잃었습니다.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은 인간은 모든 것을 잃고 가인과 같이 유리방황하게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바로 이런 자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안정된 직업과 사회적인 지위와 부를 소유하였지만 예수님께서 보실 때 잃은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찾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도 삭개오와 같은 자들을 볼 때 부러워하기보다 그 영혼을 불쌍히 여겨야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을 알 수 있도록 말씀을 가르쳐 주어야겠습니다.

오늘날 젊은 지성인들 가운데는 삭개오와 같은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볼 때는 너무나 이기적이어서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은 허무와 절망으로 인해 울부짖으려 메시야를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목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